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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ule [softscars] 리뷰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2023.12.14 21:05조회 수 1162추천수 16댓글 17

율(Yeule)의 [softscars]는 본인의 실존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음악을 가져와 가상 영역의 그림자를 걷는 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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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이보그, 심장과 엔진, 가상과 현실 사이에 위치한 것은 깊다란 자해흔이자 고통 서린 외마디의 비명이다. “x w x", 대상이 부재한 절규의 펑크 오프닝이 바로 그것이다. 이전 작품[Glitch Princess]의 매서운 글리치 사운드는 확연히 줄거나 아예 사라진 채로 격렬한 기타 연주와 비명이 가득한 도입부는 이전 율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를 놀라게 하긴 충분했다. 처음으로 놀란 점은 그녀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의 모습을 벗어났다는 것이며, 그다음은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향하여 바라봤던 것이 그녀가 듣고 자랐던 과거의 록 혹은 과거 그 자체라는 점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몰입할수록 그녀와 함께 그녀의 전시장으로 전이되는 것이며, 매개체는 율에게 현존하는 상처이자 과거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한차례의 폭풍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과거의 향수가 담긴 슈게이징 드림 팝 “sulky baby”를 마주하게 된다. 다만 “sulky baby”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다. 본인의 유년기를 주제 삼았으나 울상 짓는 것이 유년기의 자신인지, 현실 속에 고뇌하는 자신인지 모르겠다는 점으로 보아 그녀가 마주한 고난은 극복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사고로는 후자라고 생각하지만서도 전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상처에 무뎌진다 한들 흉터가 남기도 하며, 흉터를 바라볼 때야 상처로서 회상되기도 하기에, 그렇기에 앨범과 동명의 트랙 “soft scars”가 존재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서 건져 올린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상에야 모를 테지만, 율이 노래하는 “soft scars”가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인디 록의 경계선상에 자리 잡은 것도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밖에 없던 환경과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 믿는다. 그것도 과거에서 떼어와 현재 시점의 관점에서도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마구 뒤섞은 모양새로.

본 앨범을 감상하는 중이라면 율의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이 들곤 한다. "Creep"을 오마주하여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드러내놓은 "4ui12"의 묘한 애증의 갈구가 그 예시이며, 어쿠스틱 악기 속 전자악기의 도입이 눈부신 발라드 트랙 "ghosts"에서 흔들리는 피사체로 등장하는 율의 모습 또한 그 예시이다. 전자는 "i want to, for you"를 짧은 숫자와 영어로 대치하여 인터넷 세상을 통해서라도 애정을 갈구하고, 후자는 어딘가에 도사리는 본인의 유령을 혹자가 인식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파편화된 율의 모습이 적나라하다 싶으면서도 애절한 감상이 귀에 익는데, 그 역시도 노이즈가 잔뜩 낀 모습이라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도 함께 느껴진다.

끝내 화수분 같은 갈증은 멈출 새가 없어 이윽고 자기혐오로 가득한 노래 "dazies"로 흘러 들어간다. 스크리밍과 노이즈, 기타, 보컬 그리고 롤백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역량과 갈증을 함께 털어놓은 본 트랙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천천히 썩어가는 데이지다. 비유조차 난감할 정도로 진솔하지만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썩어가는 과정조차 음악 내에 투영된 것처럼 투명하다는 점이다. 고조되는 분위기와 스크림, 곡의 후반부에 가서는 천천히 내뱉는 단어들의 조각까지 모두 의도된 치밀함이라고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다. 혹은 본인을 드러내놓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기계음으로 시작한 데이지의 종말이 어쿠스틱 기타로 마무리되어,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동기를 송두리째 가져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차례의 격동기가 지나고 나면 이와이 슌지의 “fish in the pool”을 흥얼거리는 율의 모습이 마치 필름 카메라의 사진처럼 흐릿하게 지나간다. 흥얼거리는 율의 모습이 예상되며 즐겁게 들밭을 뛰어노는 14살의 아이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찰나의 우아한 선율과 사진 조각들은 이윽고 “software update”로 대체된다. 치명적인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채로 부르는 록 발라드는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조차 담담하게 전해질 뿐이다. 어쩌면 개인의 고통을 무감정한 사람처럼 서술한다는 점이 오히려 타인의 감정을 촉발하는 또 다른 기폭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트랙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망가진 자신을 드러내놓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담담한 보컬 뒤의 오토튠 코러스가 함께 어울리며 공명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사실 사람을 업데이트하여 생각하는 로봇으로 만드는 것은 공상적인 영역이라고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우울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라고도 생각도 든다. 앨범의 분기점으로도 느껴지는 “inferno”는 이전 트랙 “software update”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으나 견지한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전작들의 글리치 팝이 떠오르는 트랙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보다도 무감정한 로봇같은 모습이다. 과거는 잊었으며 이미 썩어버린 꽃밭을 장착한 채로 영겁의 불밭을 뛰어다니는 우스꽝스러운 AI의 모습만이 아른거린다. 끊임없이 달려가면서 변화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뭇 이질감이 들면서도 애처롭게만 느껴진다. 인간에서 썩어가는 데이지로 AI와 그리고 피흘리는 토끼 “bloody bunny”로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변신은 “aphex twin flame”이라는 제2의 이름이다. 그녀가 동경하거나 부러워했던 음악가들은 항상 인터넷 속에서 존재했다. 과거의 Nirvana를 시작으로, Radiohead, Smash Pumpkins, Avril Lavigne, David Bowie, Grimes 그리고 Aphex Twin까지. 그녀의 자아는 인터넷으로 볼 수 있던 수많은 가수들을 통해 의탁하고 있었으며, 최후에는 사이버펑크 속 세상의 또다른 aphex twin flame으로 산화하고 마는 것이다.


앞서 나는 본 앨범을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이라 말한 바가 있지만, 일기장의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추정되는 곳은 0과 1의 인터넷 세상일 수도 있으며, 과거의 행적이 도사린 기억 혹은 고뇌를 필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율은 본인의 필체로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컴퓨터로 애써 옮기려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전작의 [Glitch Princess]가 디스포리아적인 사이버 세계를 표류하는 것이라면, 본작은 과거의 일기장을 사이버 세계로 가져온 형태기 때문이다. 물론 전작만큼이나 불안한 정서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추악한 감정을 털어놓기는 하나, 달라진 음악의 색감처럼 털어놓는 방식 역시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이전의 글리치 팝, 그러니까 그녀는 이전에도 설명하기 힘든 포스트 팝 장르를 들고 왔었다. 하지만 [softscars]를 전작과 비하자면 앨범의 밑바탕이 드림 팝 기조와 노이즈 사운드를 깔아둔 채이며, 두드러지는 어쿠스틱 기타 선율과 저음의 남성 코러스 그리고 율의 보컬에 변주를 주는 글리치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확연히 달라진 배경의 너머를 바라본다면 율의 음악 전체에는 과거의 향수가 짙게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Radiohead와 Avril Lavigne, Smash Pumkins, Nirvana와 같은 밴드들 말이다. 율의 청사진에는 그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고 건축 자재는 율의 사진첩이자 그녀 자신이다. 본인의 건축 자재로 쌓올린 사이버네틱한 세상은 청취자로 하여금 그녀의 세상을 인식하며 세상 속의 그녀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녀에게 괴로움을 털어내는 법도 일종의 학습 장치인 것으로 느껴진다. 언젠가 힘든 것을 공유할 줄 아는 사람은 힘들다고 말할 줄 알지만, 감정의 공유도 해결책도 모두 실패하거나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속으로 숨기고 썩이다가 자신을 연료로 태우며 이윽고 재가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녀의 경우엔 타오르는 풀밭을 걸어 다니는 사이보그에 가까운 듯하다.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사라지고는 하지만, 그녀는 그조차도 음악으로 승화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괴로운 상처. 그것이 자해흔, 기억장치, 수갑, 병원, 약물, 사랑, 무엇이 되었든 간에 화려한 드림 팝 슈게이징으로 함축해 표현할 뿐이다. 노이즈가 잔뜩 낀 비틀린 보컬의 색감이 아름다운 이유도 그녀가 선택한 방향의 사이버틱한 상상력의 산물을 인간적 감성과 직관에 연결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softscars]는 2023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금 등장한 싱가포르의 한 소녀가 시대적 관성에 따른 작품이다. 역설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게 담긴 작품이지만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작품이라고 느끼게 되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녀가 그린 세상은 어둡고 컴컴하나 밝은 빛도 존재하는 곳이며, 수없이 많은 정보량이 지나가는 인터넷의 풍파에도 과거의 잊을 수 없는 부드러운 상처가 어울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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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7
  • 1 12.14 21:15

    율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개추를 박아버렸어요

  • 12.14 21:15

    개인적으로 올해의 최애 앨범이자 최애 트랙이 포함된 작품입니다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2.15 09:26
    @IZONE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4 21:17

    오 오랜만에 오셨네요 ㄷㄷ

    좋은 리뷰 항상 감사합니다^^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2.15 09:26
    @Hipoo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4 21:21

    올리자마자 바로 인기글까지 ㄷㄷ 저도 개추 드립니다

    바로 스크랩 해두고 천천히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당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 12.15 09:26
    @Pushedash

    ㅎㅎ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4 21:30

    음악 속에서 감정을 찾을 수 없는 제 매마른 심장은 이걸 들어도 이게 뭔 음악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글을 읽으면서 드는 참 안타까운 생각이네요 ㅠㅠ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2.15 09:26
    @온암

    아무래도 취향의 영역이 아닐지…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4 21:49

    인상적인 앨범이었네요 이런 앨범들 평소엔 자주 안듣는데 또 나름의 매력이 있더라구요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2.15 09:26
    @CloudGANG

    장르음악 같은데 그러지 않은 느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2.14 22:23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 12.15 09:27
    @FrankSea
  • 처음 들은 뒤로 푹 빠져서 배경화면도 커버로 바꾸고 아주 그냥 미쳐버림...ㅎㅎㅎ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2.16 12:24
    @안맞는브라자를입는다

    확실히 비주얼도 남다르르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사 해석을 하고 이 글을 보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 title: Illmatic앞날 Hustler 글쓴이
    1 1.15 16:10
    @나머지는나머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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