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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ule - softscars를 듣고

TomBoy2023.11.26 18:08조회 수 932추천수 15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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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2

 

 

 

 

 

때로는 음악보다 비주얼이 먼저 다가올 때가 있다. 비요크, FKA twigs, 아르카, 그라임스의 커버 아트를 떠올려보라. 이들의 장르적 직계손이라 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 율은 포스트 휴머니즘과 사이보그 콘셉트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증오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각자 시대에 제일 독창성이 강했던 음악가들이 어쩌다가 거울 속 자신을 혐오하게 된 걸까. "세상 모든 남자는 디카프리오와 자신 사이에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는다."라는 크리스 록의 우스갯소리처럼 '자기애'야말로 예술의 참된 원동력 아니던가. 율이라는 닉네임을 처음으로 세상에 각인시켰던 <Serotonin II>부터 작년 겨울을 뜨겁게 달궜던 <Glitch Princess>까지, 그녀는 앰비언트 발라드와 격렬한 전자 드럼 그리고 어떤 효과음보다 콘셉트에 충실한 보컬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만의 글리치 세계를 축조했다. 그런데 새 앨범 <softscars>에서는 그런 미묘한 글리치 터치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다. 오히려 앨범에서는 비요크나 아르카가 아니라 에이브릴 라빈, 스매싱 펌킨스, 마이 케미컬 로맨스 같은 그녀의 어릴 적 우상들의 흔적이 넘실대는데, 이는 꼭 아직 인간이었을 때 경험과 사이보그로서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소감을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거나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좀 더 완숙해졌다고 표현해도 좋을 테지만 이 앨범에 한해서는 감정을 우선시하고 싶다. <softscars>는 마치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비디오게임 사운드, 투박한 전자 드럼, 불협화음 속에 녹아든 달콤하면서 경박한 비음, 그리고 미래적이고 범상치 않은 콘셉트까지, 이 글리치 프린세스에게 가장 큰 반향을 끼친 인물은 아마도 그라임스일 것이다. (Pretty Bones로 유명세를 얻기 전부터 그라임스는 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둘의 미학은 한때 서브컬처였던 인터넷 플랫폼과ㅡ사운드클라우드와 텀블러ㅡ그곳의 분위기에 기반할 때가 많다. 네온 색 머리와 크리스털 캐슬의 음악을 즐겨 듣는 시펑크족에서 알렉산더 왕과 헬스 고스를 거쳐 이 모든 것을 한 움큼씩 뒤섞은 위치 하우스까지 다다르면, 이 세계의 비욘세라고 할 수 있는 그라임스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라임스의 영감의 샘터가 애니메이션이라면, 신체 이형증, 논 바이너리, 자기학대에 관한 암시 등 율의 세계는 흡사 크로넨버그가 리메이크한 블레이드 러너를 보는 기분이다. "사회 구조로 정체성을 규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와 열정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이상향이라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발언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 천진함의 부재가 나의 결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시샘이 나기도 했다. 이 방면의 기념비 같은 걸작 <Art Angels>의 발매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 <softscars>는 거의 동일한 데시벨로 그때의 감흥을 일깨운다.

 

전작부터 합을 맞춰 온 킨 레온이 메인 프로듀서를 맡은 이 프로젝트는 얼터너티브 록과 슈게이즈, 에너지 넘치는 신스 팝과 피아노 왈츠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 구조물이다. 항상 나는 예술, 특히 음악에서는 나무보다 숲을 보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율 같은 아웃사이더의 음악을 접할 때마다 그런 견해를 곱씹어 보게 된다. 현기증이 날 듯한 기타 이펙트와 율의 멜랑꼴리한 음색이 돋보이는 dazies와 software update는 당장 <Siamese Dream>에 수록된다고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90년대 얼터너티브의 전형 같은 곡이다. 그러나 이 전형이 sulky baby 같은 미래풍 포스트 팝이나 이와이 슌지를 커버한 피아노 연주에 둘러싸이면, 이제 아련한 향수가 된 밀레니얼의 풍경과 공상과학 디스토피아가 합쳐져 율 버전의 이모Emo 청사진이 펼쳐진다. 단순히 음악으로 보자면 <softscars>는 우리가 성장기에 들었을 법한 음악에 대한 향수와 힙스터가 된 뒤 경험한 독창성을 결합해 문화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는 시기를 기록한 일기다. 오프닝 x w x의 이모 펑크와 절규에서는 분노와 좌절감이 들끓고 드림 팝 넘버 sulky baby에서는 감미로운 보컬과 슈게이즈 기타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dazies의 디스토션과 노이즈나 cyber meat의 신스 브레이크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사이보그 페르소나를 결합하듯이 얼터너티브 록과 글리치를 결합해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두 시기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라임스에서 라빈으로 말크머스에서 Kid A로 왜곡된 전자음악에서 제프 버클리의 기타 발라드로, 율의 프로덕션은 한 곡 안에서도 우리의 감정을 누차 변화시킨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직접 연주한 현악기와 피치에 맞춰 맥동하는 비트만으로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inferno가 눈여겨볼 만하고, 뒤이어 이어지는 bloodbunny에서는 튜닝된 톤, 신스 멜로디, 로파이 드럼이 그럴싸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빚어낸다. 율의 오랜 팬들은 이런 시퀀스에서 <Serotonin II>부터 전해지는 익숙함을 느낄 테지만 <softscars>에는 훨씬 더 물리적인 존재감이 있다. 결국 이 사이보그 오디세이를 관류하는 것은 음악과 인터넷 문화에 대한 그녀의 깊은 헌신일지도 모른다. 글리치와 얼터너티브, 서브컬처의 서브컬처들, 그리고 현실과 공상에서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는 로봇 공학까지, 율의 앵글은 매우 실제적인 문화의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물과 유기체 사이 경계는 계속해서 모호해지고 있으며, 그녀는 이 모호함을 최대한 활용하여 미지의 존재 방식과 가능성 있는 사운드를 깊이 파고들면서도, 그 밑바탕에 깔린 감정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EDM과 록처럼 오래되고 친근한 감성에 기반을 둔다.

 

율은 언제나 육체를 가진 존재의 복잡한 정서와 추악함을 다뤄왔지만, <softscars>에서는 디지털화된 신체 또한 녹, 악성코드, 오작동 등에 의해 결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확실히 그녀는 글리치 스탠이라기보다는 공상과학 스탠에 가까워 보인다)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변적이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분열된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 엔트로피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려 할 때마다 발생하는 상처를 묘사하는 것 등, 존재가 인간과 사이보그를 넘나들며 물리 영역을 넘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그녀는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모색의 발로가 그동안 외면했던 과거의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뭔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노스탤지어와 미래주의가 시종 맞부딪치는 앨범이 aphex twin flame이라는 제목의 기타 발라드로 끝나는 것만큼 인터넷스러운 풍경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앨범을 들으며 기계처럼 작동하면서도 자유로운, 제한적이지만 무한한, 사이보그지만 자아를 가진 주인공의 이름이 궁금했다. 미스터 앤더슨이 매트릭에서는 네오가 되듯이, 싱가포르 태생의 나타샤 역시 떨쳐내고 싶은 과거에 안녕을 고하기 위해 파이널 판타지 캐릭터의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율이 과거 나타샤의 취향에 의지해 <softscars>를 만들어낸 것처럼, 어쩌면 과거야말로 율이 표현하고자 했던 부드러운 상처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사랑할 테지만, 영원히 아물지 않는.

 

 

 

 

 

---

 

한 해를 되돌아볼 시기가 되면

머릿속에서 수많은 앨범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올해는 율의 앨범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라임스의 'Art Angels'를

Butterfly나 Blonde만큼 감명 깊게 들었는데,

그때의 감흥을 율의 신보가 일깨워주네요.

 

 

이제 추워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춥네요.

꽁꽁 여미고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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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
  • 11.26 18:18

    잘읽을게여

  • TomBoy글쓴이
    11.26 21:42
    @BrentFires

    감사합니다!

  • 11.26 18:22
  • TomBoy글쓴이
    11.26 21:41
    @JW256

    👍

  • 11.26 18:28

    전... 여전히 이런 장르완... 맞지 않아요...

    그라임즈랑 비슷하다는 평에 Art Angels의 감흥을 되새겨보며 호다닥 달려갔더니만 생각보다 훨씬 충공깽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후반부는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TomBoy글쓴이
    11.26 21:44
    @온암

    힙선대원군..

    Art Angels가 확실히 이 계통의 다크 판타지이긴 해요

  • 11.26 18:28

    스크랩 해놓고 낼 출근해서 읽어야징

  • TomBoy글쓴이
    1 11.26 21:44
    @DannyB

    감사합니다!

  • 11.26 19:33

    갠적으로 뮤비 비주얼도 너무 괜찮았던 것 같아요!!!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ㅎㅎ

  • TomBoy글쓴이
    1 11.26 21:45
    @ㅅㅈㄱㅈㄱㅈ

    감사합니다! 앨범 녹음하는 것처럼 공들여서 뮤비 찍는다고 하더라고요

  • 11.26 20:23

    와 진짜 글 잘 쓰시네요....잘 읽었습니다..!

  • TomBoy글쓴이
    1 11.26 21:45
    @FrankSea

    감사합니다!

  • 11.26 21:10

    글 엄청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첫 곡이 빡세서 쭉 그런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고 뒤로는 꽤 취향이였어서 좋게 들은 앨범이였읍니다ㅋㅋㅋ

  • TomBoy글쓴이
    11.26 21:46
    @듄모기귀요미

    감사합니다! 첫 곡 들으면 이게 뭐지 싶은 느낌이 들긴 해요 ㅋㅋ

  • 11.26 21:11
  • TomBoy글쓴이
    11.26 21:47
    @midicountry

    🙏

  • 11.26 21:49

    제가 이런 스타일이나 장르를 그리 선호하지 않다 보니 여러모로 그냥 저냥 괜찮은 정도밖에 모르겠네요...

    그래도 연말 결산에서 한 번 쯤은 언급해줘야 할 만한 좋은 앨범이긴 한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11.26 23:22

    아마 연말 결산할때 개인적으론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일듯합니다

    cyber meat, aphex twin flame으로 이 앨범을 마무리하는게 참 좋았습니다

  • 11.27 00:42

  • 11.27 16:30

    크캐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런 류의 음악까지 듣게 됐는데 율 이번 앨범은 정말 맘에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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