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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jan Stevens - Javelin을 듣고

TomBoy2023.10.15 20:54조회 수 1177추천수 10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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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10년 전, 비욘세가 자기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했던 작품을 어떤 예고도 없이 아이튠즈에 업로드한 이후로 대중음악 생태계는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제 앨범을 홍보하고 발매하는 방식에도 경제 원리 못지않게 개인성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로서 싱어송라이터 수프얀 스티븐스가 있다. 그는 아홉 번째 정규 앨범 <Javelin> 발매를 앞두고, 자가면역질환인 길랑-바레 증후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걷지 못하게 된 이후부터 사용하고 있는 특수 개조 변기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이 사진이야말로 수프얀식 무브먼트의 본보기이자 그에 관한 고정관념과 오해가 충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수프얀의 탐미주의와 가사의 현학성에서 한 명의 고상한 모더니즘 예술가를 떠올릴 것이다. 한데 소셜미디어나 인터뷰처럼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된 발언대 앞에서 그는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미국인 그 자체였다. 솔직히 말하면 <Javelin>에서 어떤 번뜩임, 그러니까 <Illinois>의 풍성하고 조화로운 편곡 스타일이나 <Carrie & Lowell>의 절제미와 담백함 같은 것이 느껴지진 않는다. 대신 이 앨범은 들을수록 감상이 짙어지는 작품으로서, '수프얀 감성(하프 연주 같은 핑거 피킹, 속삭임에 가까운 팔세토, 감질나게 가미된 전자음)'에 대한 당신의 감정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가능성이 높다. 수프얀 스티븐스는 언제나 직설적이고 기발하며 위트 넘치는 미국인이었고, 취약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인간의 능력을 오랫동안 탐구해온 예술가였다. <Javelin>은 바로 그 둘에 관한 이야기다.

 

<Carrie & Lowell>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이 앨범은 수프얀 포크의 정점으로 여겨지고, 어머니를 잃은 후 찾아온 슬픔과 희미한 추억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이다. '정점'과 '회고록'. 이런 접근은 확실히 앨범의 핵심 정서와도 맞닿아 있고 무엇보다 편리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너무 강렬하고 유용한 나머지, 앨범을 이해하는 단 하나의 단서처럼 간주될 때가 많다. 사실 수프얀 포크는 <Illinois>에서도 꽃을 피웠으며 앨범의 난해한 가사를 모두 가족사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글에서 구태여 <Carrie & Lowell>을 언급하는 것은 정점과 회고록이라는 표상이 '집대성'과 '커밍아웃'으로 뒤바뀐 채 <Javelin>에서도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접근이 편리함을 줄 수는 있으나, 한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프얀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그가 얼마나 많은 장르를 시도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혼합했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다양성과 실험성을 용해하고 마는 수프얀 감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집대성이라는 표현에 그가 보일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또한 <Carrie & Lowell>이 캐리와 로웰만을 위한 앨범이 아니었듯이, <Javelin>을 들으며 굳이 에번스 리처드슨과 수프얀의 성 정체성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당신이 <Blonde>를 들으면서 프랭크 오션이 아니라 자신의 추억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은 수프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랑의 미스터리일 뿐이다.

 

천재가 으레 그렇듯 수프얀은 자신의 일을 손쉬워 보이게 한다. 그는 클래식, 글리치, 앰비언트, 아트 팝, 뉴에이지 등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장르 탐험가였으며, 기타와 피아노를 치며 우리를 무장 해체시킬 때는 전능한 면모를 과시했다. <Javelin>에서 그는 목가적인 이미지와 신앙, 사랑, 그리움 등의 주제를 결합해 친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물망을 엮는다. 거기에 수프얀의 감미로운 선율과 한나 코헨을 비롯한 동료들의 백 보컬이 더해져 근사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빚어낸다. "안녕, 에버그린. 내가 널 사랑하는 거 알지.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모든 것들은 결국 불타 없어지는 법이야." 앨범은 고전 문학 첫 소절에 어울릴 법한 전언으로 문을 연다. 간결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다가 감정의 격변을 형상화하기 위한 편곡, 즉 웅장하고 왜곡된 드롭과 앰비언트 그리고 플루트 등이 합쳐져 말 그대로 청자를 압도한다. 수프얀이 어쿠스틱 기타와 그랜드 피아노, 전자 음향을 셰이커에 넣고 기막힌 비율의 칵테일을 제조해 주길 바란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늘 그 칵테일이 수프얀 음악의 최종 장이라고 생각해왔는데, <Javelin>에 와서 그 바람을 어느 정도 이뤄준 듯하다. 이처럼 활동 기간이 오래된 가수들은 항상 명반을 선보여야지만 좋은 평가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팬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수프얀의 디스코그래피에는 그의 끝없는 창작열과 사운드라는 영역을 탐험하고 재정의하려는 욕망이 흐르는 것 같다. 특히 우리가 알던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망원경 화각을 자신에게로 돌렸을 때 그 욕망은 한층 더 선명해진다. 고즈넉하게 기타를 반주하든 신스 레이어를 펼쳐놓든 혹은 그 둘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든, 수프얀은 포크 가수라는 멸종 위기종이 21세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을 계속해서 제시했다. So You Are Tired나 Will Anybody Ever Love Me?처럼 어쿠스틱 기타와 그랜드 피아노, 귓가를 아른거리는 보컬과 여성 코러스, 플루트와 신시사이저가 경쾌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루는 데서, <Javelin>은 확실히 <Illinois>를 연상시킨다. 한편 Genuflecting Ghost는 수프얀 포크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상 깊은 핑거 피킹과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막바지 트랜스 파트는 수프얀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색적인 편곡이다. 또한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임에도 매번 자신의 믿음을 신중하고 아리송한 방식으로 다뤄왔는데, 이 앨범은 가스펠 음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종교 색채가 짙다. 제목부터가 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Everything That Rises의 경건한 합주와 성스러운 코러스 사이로 "주여, 저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세요."라는 기도가 울려 퍼진다. 수프얀이 소문으로 무성하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직접 언급했다는 사실보다, 성가대가 당장 연습해도 좋을만한 찬송가를 썼다는 게 놀랍다.

 

8분 30초의 대곡 Shit Talk에서는 브라이스 데스너의 기타 연주와 수프얀의 보컬 퍼포먼스가 뒤섞여 푹 끓인 스튜처럼 깊은 맛을 낸다.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후반부 오케스트라와 아련한 잔향을 드리우는 앰비언트에서는 거의 수학에 가까운 수프얀의 형식미가 돋보인다. 이 곡에서는 "나는 언제나 널 사랑할 거야."라는 굳은 맹세와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라는 괜한 푸념이 시종 충돌하는데, 이는 흔한 내적 모순이라기보다는 감정의 격변 한가운데 놓인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절박한 호소와 분노, 냉소와 수용,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이 한데 어우러진, 글자 그대로 Shit Talk인 것이다. 그 후 수프얀은 반세기 전 녹음된 닐 영의 클래식 포크 넘버 There's a World를 커버하며 앨범을 마무리 짓는다. "그곳에는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있지. 그 누구도 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어." 이 곡의 노랫말은 <Javelin>에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메타포이면서, 마치 닐 영이 50년 뒤를 내다본 것처럼 수프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There's a World는 닐 영의 꿈결 같은 악센트에 익숙한 팬들마저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원작의 묘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각색이다. 그 지독한 수프얀 감성이 싱어송라이터의 아버지마저 자기 색으로 물들인 것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최고의 작품을 빚어내는 예술가는 없다. 그렇다고 상실감과 애수를 다루는 예술가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수프얀은 <Javelin>을 통해 연인이자 친구였던 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강점을 살린 뮤직 테라피를 제공하며, 가장 실망스러웠던 순간에도 그랬던 것처럼 한 명의 예술가로서 타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수프얀은 딜런이 'Empire Burlesque'를, 영이 'Harvest Moon'을 발매했던 연차가 됐다.) 섬세하면서 다중적인 시구,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완벽한 균형 감각, 인디 포크에서 일렉트로니카로 다시 관현악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데서 채워지는 음악적 허기 등, 어쩌면 이 앨범을 집대성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Illinois>는 음악이자 인문학이라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수프얀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앨범이지만 가장 먼저 체감했던 것은 그의 장난기와 익살이었다. <Carrie & Lowell>은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무거워질 수 있는 작품이지만 들을수록 연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처럼 수프얀의 음악에는 아이러니한 양면성이 내재돼 있었는데, <Javelin>에는 그런 트릭이 없다. 여기서 그가 떠나간 사랑을 상록수에 비유하며 추도하든, 자신을 인도해달라며 찬송가를 부르든, 닐 영의 노랫말을 빌려와 자기 생각을 설파하든, 그리고 소셜 미디어에 변기 사진을 올리든 간에, 거기에 읽어내야만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는 수프얀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거나 열의에 찬 전도사가 됐다는 사실보다, 변함없이 최고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는 게 기쁘다.

 

 

 

 

 

---

 

"예술가, 과학자, 셰프, 교사, 엔지니어 등,

상당수의 창조자들은 일단 대가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여생 동안 하나의 형식에 머물거나 그 범위 내에서 노는 데 만족할 뿐,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장인의 면모가 엿보이고 큰 기쁨을 주지만,

그들은 더 이상 위대한 창의력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 않는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대가를 정의한 글을 읽고

곧바로 수프얀이 떠올랐습니다.

그 역시 십수 년 전에 대가의 반열에 도달했고

그 후 일정한 텀을 두면서 자기가 하던 음악을 되풀이했으니까요.

 

그런데 Javelin을 듣고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올리버가 정의했던 또 다른 유형의 예술가에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음악은 감정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예술이면서

전적으로 추상적인 성격을 띠므로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힘이 전혀 없지만,

가슴을 저미는 부드러움과 통렬함,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어떤 음악가들은 이런 것들을 능수능란하게 뒤섞어,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또 음악의 이유를 찾도록 우리를 구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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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10.15 20:58

    좋은 감상평 읽고갑니다

  • 10.15 21:03

    Tomboy님 리뷰만을 기다렸습니다 즐겁게 읽을게요!

  • 10.15 21:16

    곡을 끝내는 방식이 너무나 인상적인 앨범

  • 10.15 21:20
  • 10.15 21:40

    본의 아니게 앨범을 이른 새벽에 듣게 됐는데, 그 탓이었는지 정말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올해의 청각적 경험 중 SCARING THE HOES와는 다른 방향으로 단연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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