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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스티비, 그리고 신시사이저들

TomBoy2023.06.18 20:08조회 수 1088추천수 15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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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한 평가만큼 사후 책임에서 자유로운 의견은 없는 것 같다. 예리한 평론가의 설득력 있는 분석이나 위트 있는 팬이 만들어낸 밈도 있을 테지만, 대다수의 평론가와 팬들은 하나의 앨범 하나의 곡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칠 때가 많다. 저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문화 풍토부터가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기에, 상대방의 견해를 반박하거나 또는 그 반박에 응수하기 위해서 정신분석 같은 고전 심리학과 변증법 같은 논리철학이 동원되는 것이 이 바닥이기도 하다. 나는 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 이 방면에서 가장 화끈하게 불쏘시개 노릇을 한 것이 '디스코와 힙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디스코와 힙합뿐만이 아니라 "블랙"뮤직 자체가 다른 물질에 비해 인화성이 높은 것 같다. 블랙뮤직의 카테고리 내에서도 비교적 합당한 평가를 받고 분쟁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되는 '소울' 음악 역시 적지 않은 부침을 겪었다. 미국의 음악평론가 넬슨 조지는 모타운 소울의 위상이 절정에 달하고 디스코와 컨템퍼러리 시장이 부상하던 시기를 "리듬 앤드 블루스의 쇠퇴기"라고 명명했다. 반면 듀크 대학의 마크 앤서니 닐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시기의 소울 음악을 "악화일로의 시대에 진정한 흑인의 목소리"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책임 없는 평가가 난무하고 격한 분쟁이 오간다지만 이 같은 간극은 어디서부터 초래되는 걸까. 정말 재미있는 점은 둘 모두 스티비 원더의 1976년작 <Songs In The Key of Life>를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Songs In The Key of Life>를 조명한 많은 글들은 이 앨범을 단순히 명반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당시의 정세나 미국 흑인의 삶과 문화를 포함한 특정 맥락을 통해 앨범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터게이트 스캔들, 리처드 닉슨, 베트남 전쟁, 흑인 민권 운동, 공정주거법 같은 고유명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뒤를 따른다. 이런 의견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닌 것이 이 앨범은 어느 정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제작됐고,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를 겸한 스티비부터가 이런저런 사회 이슈들 때문에 이른 나이에 은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의식적인 예술가였다. 하지만 펑크와 힙합에 '저항'이라는 표식을 달아준 과거의 비평 풍조가 예증하듯, 음악을 먼저 음악으로 보지 않으면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기대 간에 부조화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음악에 관한 글에서 모든 정치사회적 관점을 제거하자는 것이 나의 요점은 아니다. 그런데 Love's in Need of Love Today나 Isn't She Lovely 같은 천상의 잼들을 좌파와 우파, 흑인과 백인 같은 200살 먹은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일은 솔직히 말해 이제는 너무 촌스럽다.

 

<Songs In The Key of Life>의 어떤 부분이 특별하기에 수많은 팬, 평론가 또 창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오랜 팬으로서 나는 '전자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를 영향력의 진원지로 꼽고 싶다. 스티비는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무그'를 일렉 기타가 자리한 반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비틀스가 <Let It Be> 세션에 사용한 '펜더 로즈', 카펜터스와 퀸의 '월리처', 당시 교회의 제일 인기 있는 구매품이었던 '해먼드 B3', <Midnight Love>와 <Thriller>를 빚어낸 롤랜드의 주피터 8, 스티비의 상징과도 같았던 TONTO와 GX-1 그리고 셀 수 없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들까지. 그는 70년대 초 스튜디오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기계 장치들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파악한 선구자 중 한 명이었으며 동시에 탁월하고 유려한 연주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시사이저는 스티비 음악의 본질과도 같았다. 그의 폭넓은 음악성이 소울과 록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듯, 그의 사운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Pastime Paradise를 작업하는 동안 스튜디오 곳곳에 배치된 마이크 밑에서 울려대던 악기는 오케스트라의 현악기기 아니라, 187개의 건반과 메모리 뱅크가 탑재된 야마하의 GX-1이었다. 이후 80년대에는 드럼 머신과 샘플러가 등장하며 신스팝 혁명이 시작됐고 크라프트베르크와 장 미셸 자르가 새 시대의 아이돌이 됐다. 하지만 나는 Giorgio by Moroder의 제목이 Stevie by Wonder가 됐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피치포크는 '스티비 원더와 그의 드림 머신'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그의 공로를 기념했다. "스티비의 머릿속에 있던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시사이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Produced, Arranged & Composed by Stevie Wonder. 이런 전능함을 드러내는 문구는 늘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이 다재다능함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한 명의 뮤지션이 앨범을 제작하면서 얼마나 많은 역할을 얼마나 높은 비중으로 수행했는가에 따라서 앨범에 대한 평가가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대중음악사에서 이런 다재다능함의ㅡ시각 장애라는 치명적 결손이 오히려 플러스 요소가 되어ㅡ심벌과도 같은 인물이 스티비 원더일 텐데, 사실 <Songs In The Key of Life>에는 130여 명 가량의 세션 연주자들이 참여했다. 이 앨범을 어느 시대 어떤 장르의 작품들과 비교해 봐도 유독 풍성하고 다채롭게 느껴지는 것은 저 어마어마한 수의 세션들 덕분일 것이다. 스티비 또한 젊고 열의가 넘치는 연주자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스티브의 천재성 역시 세월의 흐름과 망각된 협력자들에 따라 보정된 추억인 걸까. 130여 명 중 하나였던 드러머 레이먼드 파운드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새벽 1시, 스튜디오에는 스티비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되는대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다음은 신스와 베이스 파트를 작업하고, 3시 반에 드럼 칠 시간이 되자 '내가 연주해도 돼요?'라고 물었더니, '아니, 내가 할게.'라고 대답했어요. 드럼이 끝나자 녹음된 모든 보컬을 조율했습니다. 날이 밝으니 Love’s in Need of Love Today가 완성돼 있더군요." Sir Duke와 As에서 기타를 연주한 마이클 셈벨로가 원더러브에 합류하게 된 일화 역시 어느 사연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모타운의 홍보 담당자가 백인을 고용한 것 때문에 스티비를 닦달하자, 그는 마이클에게 "네 사인이 뭐야?"라고 물었다. 국적을 묻는 줄 알았던 마이클은 "이탈리아 사람이에요."라고 답한다. 스티비는 돌아서서 스튜디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헤이, 이 친구는 백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이야. 이제부터 밴드 멤버고. 그리고 나는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람."

 

가끔은 내가 아티스트를 바라보는 방식이 그들의 진짜 인생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가수는 강산이 변하도록 차기작을 내놓지 않고,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멤버들과 원수보다 못한 관계로 지낸다. 어떤 뮤지션은 오랫동안 좋은 커리어를 유지하다가도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조악한 음악을 선보이고, 반대로 매번 조악하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걸작을 내놓는 대기만성형이 있다. 이런 점에서 60년대 리틀 스티비의 경력은 모타운 주크박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우리가 알던 스티비 원더가 된 걸까. 정말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황금기에 창작의 신을 영접한다지만, 71년부터 76년까지의 스티비가 보여준 유례없는 창조성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의 편집자 로버트 다이머리는 아인슈타인의 Miracle Year를 패러디해 이 기간을 Wonder Years라고 명명했다.) 이런 창조성이 만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타운과 베리 고디로부터 파이널 컷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 온 새로운 계약 조건이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70년대 초반은 신시사이저를 위시한 온갖 전자 장비의 출현과 소울과 훵크, 글램과 펑크,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등 대중음악이 기술적, 정신적으로 요동하던 시기였다.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하기도 했지만, 스티비 또한 완벽하게 알맞은 때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했던 것이다.

 

<Songs In The Key of Life>처럼 이미 역사의 영역에 있는 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정말 많이 다뤄졌기에 나의 감상이 동어반복으로 여겨지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자이자 애호가인 내가 그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앨범을 소울이니 펑크니 단지 몇 가지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어째서 부당한 처사인지, I Wish 같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펑크 튠에 얼마나 많은 기술력이 집약돼 있는지, Black Man에 흔히 알려진 인종차별 외에 어떤 내러티브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이 앨범이 골든 에라 알앤비나 컨템포러리를 포함한 후대의 음악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룬 문단이 앞서 말한 이유로 누락됐다. 그럼에도 <Songs In The Key of Life>는 그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과 영감을 건드린다. 나는 신시사이저만큼 스티비를 잘 묘사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스나 피아노를 어떻게 연주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느냐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이해한 몇 안 되는 선각자였다. 신시사이저가 여러 파형의 소리를 합성하거나 내장된 원음에 변조를 가해 기존에 없던 사운드를 조각해 내듯이, 스티비 원더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그의 말처럼 이 앨범은 흑인음악이 아니라 그냥 "음악"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가 되짚어 보는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저는 스티비의 이 앨범이

이제까지 녹음된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득력 있게 풀어보고자 했으나

그러자면 양이 너무 방대하고 중언부언이 될 것 같은 마음이 드네요.

 

아무튼

오랜 시간 저를 감탄하게 하고

삶의 여독을 치유해 준 스티비 옹과 그의 작품들에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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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5
  • 6.18 20:14
  • TomBoy글쓴이
    1 6.19 20:07
    @Pushedash

    감사합니다!

  • 6.18 21:06

    최고의 음악임을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듣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모두 명반임에 공감합니다

  • TomBoy글쓴이
    6.19 20:09
    @DJSam

    맞아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걸작입니다!

  • 2 6.18 21:39

    원더 이어의 팬이라면 절대 포인터 시스터즈의 75,77년도 앨범을 듣지마!

  • 1 6.18 21:41

    특히 스티비 특유의 꿀에 절인듯한 팝 멜로디의 정점인 Bring Your Sweet Stuff Home To Me, Sleeping Alone 두 곡을 절대 듣지마!

  • TomBoy글쓴이
    6.19 20:07
    @tameimpala

    ㅋㅋㅋ 반어법의 달인이시네요

  • 6.19 00:50

    다크 모드라서 좋은 글이 돈다처럼 되었네요

  • TomBoy글쓴이
    6.19 20:12
    @도리개

    언제나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 6.19 10:04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매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TomBoy글쓴이
    6.19 20:12
    @새우맛알앤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6.19 17:53
  • TomBoy글쓴이
    6.19 20:12
    @MarshallMathers

    감사합니다!

  • 6.20 14:27

    TomBoy 님의 평론은 언제나 볼 때 마다 어떤 용기를 갖게 되네요. 진지하게 어디 잡지나 월간지로라도 계속 보고 싶군요.

  • TomBoy글쓴이
    6.20 20:36
    @으아격사

    과찬이십니다. 항상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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