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4
유신론과 무신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영혼과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여성의 인생에서 결혼과 모성이 어떤 의미인지, 가족의 유대와 해체, 그리고 Fingertips에서의 그 절절한 고백록까지, 라나가 다루는 주제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됐어도 썩 괜찮은 글을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그녀는 가수가 됐다. 2011년 SNL 공연 이후 라나의 라이브 실력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시점부터 나는 그녀의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장르 음악의 오랜 팬이자 그 음악들을 얕게나마 분석해 보려는 입장에서 1장의 앨범에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민해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Norman Fucking Rockwell!>만큼 나를 고민하게 만든 앨범은 없었는데, SNL에서 Video Games을 부르던 가수와 "Goddamn, man-child"라고 나른하게 읊조리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데서 나는 섬뜩한 괴리를 느낀다. 솔직히 말해서 'NFR!'은 라나가 10년 동안 애써 유지해온 특유의 고전적 콘셉트와 잭 안토노프의 전성기 그리고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행운의 여신이 우연찮게 교차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러니 비평과 팬들을 불문하고 모두가 NFR!을 라나의 토템처럼 여기는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창작의 요체인 라나와 잭마저 NFR!을 자신들의 부적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제 두 영혼의 파트너는 작별을 고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NFR!에게라도 작별을 고해야 한다. 제2의 'Homogenic', 제2의 'Miseducation', 제2의 'Blonde'가 없듯이, 앞으로 라나의 커리어에서 제2의 NFR!은 없을 것이다.
<Did you know that there's a tunnel under Ocean Blvd>는 라나의 어떤 앨범보다 러닝타임이 길고, 그 의도를 쉽사리 헤아릴 수 없을 듯한 고백으로 가득하며, 가족과 평판에 대한 사색이 주를 이룬다. 앨범 위에서 그녀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유산'과 '죽음'이라는 숙명론적 현상을 되돌아보며 말년의 레오나르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청승맞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앨범이 그녀의 9번째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라나는 자신의 우상인 빌리 홀리데이와 니나 시몬처럼 1년이 멀다 하고 앨범을 발표한다. 들려주고 싶은 노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많을까. <Ocean Blvd>는 새드 걸 라나의 가장 침울한 앨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앨범을 가득 메운 이 불안과 고독감에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리지 그랜트만큼이나 현실 감각이 결여돼 있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며 세계에서 가장 열렬한 팬덤을 보유한 가수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번민하는 모습에서, 에르메스 핸드백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오늘 밤에 어울리는 가방이 없다며 하소연하는 카일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라나 델 레이 풍의 비극 포르노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이 감성이 독과점으로 배급되기 때문이다. 래퍼들과의 염문설을 뿌리며 관능적인 로맨스를 노래하든, 토머스 핀천이나 노먼 록웰이 되어 미국인들의 삶을 묘사하든, 자신의 본모습과 다른 기믹에 심취하든, 자전적 에세이와 방대한 양의 레퍼런스를 버무려 천의무봉의 상황극을 써 내려가든, "오션 블러바드 아래의 터널처럼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애원하든, 당신의 머릿속에서 어떤 "라나 델 레이 풍"이 솟아오르든 간에, 이 모든 것을 오로지 라나라는 채널에서만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고전파 작곡가 브람스는 "자신의 내밀한 구석을 있는 그대로 구체화하는 것이 인생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아무래도 라나가 브람스의 격언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Ocean Blvd>에서는 한 소절에 하나씩 리지 그랜트의 개인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하지만 가사의 대부분이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반주의 대부분 또한 NFR!의 성공 공식(그랜드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중첩되는 교향악 편곡)을 그대로 뒤따르고 있어 어딘가 단조롭다는 인상이 강하다. 조니 미첼 타입의 피아노 발라드에서 역동적인 트랩 비트와 드론 베이스로 절묘하게 분기되는 A&W가 유일한 예외라 할만하다. 라나는 이 변주 위에서 어린 시절 잃어버린 순수함에 대한 시니컬한 애도, 문란하고 교감이 부재한 일회성 만남, 그리고 사회의 시선과 자기 자신의 불일치 등을 늘어놓으며, 37년간 지켜봐왔을 '여성성'에 대한 갖은 오해를 7분이라는 시간 속에 압축한다. 안토노프가 자신과 라나가 이제껏 만들어온 것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겉치레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A&W는 Video Games, Venice Bitch와 함께 라나 델 레이를 표상하는 하모니가 될 것이다.
<Ocean Blvd>에는 대다수의 뮤지션들이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무분별하고 자극적인 가사들이 즐비하다. 만약 강간을 당했다면 그 사실로 인해 오해를 받거나 더 큰 비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는 구절은 그간의 라나보다 좀 더 알싸하지만, 어쨌든 성폭력 이슈 뒤에 도사린 부조리한 모순을 또렷하게 반영한 것이다. 반면 Fingertips에서 "언젠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내 정신은 육아에 적합하지 않다는데."라며 여동생에게 토로하는 장면은 Seigfried에서 "이사하고 정착해서 2명의 아이를 낳고 수영을 즐길지도 몰라."라는 오션의 쓸쓸한 바람을 연상시킨다. 오션이 가진 성 정체성이 저 평범한 전망에 복잡한 서사를 부여하듯, 그동안 라나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구축한 심상ㅡ프랭크 시나트라와 노먼 록웰에서부터 Venice Bitch와 A&W에 이르는ㅡ이 이 절절한 고해성사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기 검열이 없는 대신 허구를 말하는 라나 혹은 필터링 기능을 갖춘 대신 현실 세계의 명암과 희비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라나. 당신이 바라는 '라나 델 레이 풍'은 어느 쪽인가?
라나처럼 자신의 예술관과 진정성에 대해 거증 책임을 짊어진 뮤지션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그럼에도 그녀는 코트니 러브, 릴 킴, 에미넴, 그리고 할리퀸 등 전 세대 그 누구의 방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안티 히로인이 됐다. <Ocean Blvd>의 클로징에서는 트립 합과 요란한 하이 햇 위에서 리듬을 타며 섹스 어필을 하던 NFR! 이전의 라나가 등장한다. Taco Truck x VB에서는 NFR!의 Venice Bitch를 그대로 샘플링했는데 라나와 잭이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카드(부적)를 마지못해 내려놓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카드, 그러니까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키워드를 자신이 원하는 구간에 절묘하게 삽입해 예술적 밈을 만들어내는 솜씨야말로 라나의 트레이드마크라 할만하다. "너의 바보 같은 남자친구가 '크립토여 영원하라!라고 외쳐.", "안녕, 네 아이패드에 있는 여자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야."처럼 운율감 외에는 어떤 쓰임새도 없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되뇌는 구절들. "다들 내 음악에 아이러니가 있대. 비극적이네. 거기에는 교훈 하나 없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나 델 레이 풍은 약간의 유머 감각을 곁들인 버전이다. 바로 이런 불필요한, 그래서 어쩌면 허비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는 가사를 기꺼이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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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는데 처음에는 실망스럽더군요.
어떤 앨범은 한 번 더 들을 때마다 감상이 미묘하게 변하는데
이 앨범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인듯합니다.
음악을 판단하는 많은 관점이 있을 겁니다.
저는 대중음악에서 가사는 역할이 미미하고
유난스럽긴 하지만 작곡과 편곡이 거의 모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가사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테죠.
종종 어떤 뮤지션의 가사는
그 본래의 가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중 하나가 라나 델 레이입니다.
라나의 음악에 오랜 기간 낙제점을 매겨온 저로서도
현재 그녀가 세계 최고의 작사가(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앨범에 묘사된 사건들을 모두 겪었다면
그녀는 절대로 가수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실제 경험이라고 받아들이잖아요.
이 얼마나 대단한 재주입니까.
ㅎㅎ
개인적으로 NFR! 다음 가는 라나 앨범이라는 감상을 받았습니다
저도 NFR!-COTCC-BB로 이어지는 포크/피아노 락 프로덕션이 이제는 살짝 진부하다고 느끼는 참이었는데 본작에서는 다소 소극적이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줘서 좋았다고 느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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