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od Orange - Angel's Pulse
현대 음악 산업에서 믹스테이프라는 단어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무위키의 힘을 빌리자면 믹스테이프는 이미 한 번 쓰인 유명 래퍼의 비트에다 랩을 새로 얹어 그것들을 모아서 만든 앨범이 될 수 있고, 어떤 가수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전에 자기 홍보를 위해 만드는 앨범이 될 수도 있으며, 놀듯이 가볍게 만든 앨범이 되는 경우도 있다 ― 경력 있는 아티스트에겐 세 번째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MZ 세대의 예술가 다운 예술가들이 위시하는 Blood Orange의 첫 믹스테이프는 가볍지만 동시에 무겁고, 가득하지만 넘치진 않으며, 답습하지만 창의적이다.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보듯 일상 속의 데브 하인스가 보여주는 자유롭고 감각적인 트레이닝 셋업인 것이다.
데브는 다작의 아티스트로 종종 발매 예정에 없거나 혹은 지인에게만 공유하는 믹스테이프를 제작하곤 한다. 물론 만드는 족족 발매해버리는 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앨범들은 여전히 어느 것 하나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한마디로 본작은 극성팬이 데브의 컴퓨터를 해킹하지 않는 한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이며, 그것을 발매하기로 결정한 도화선의 바로 뒤에 놓인 앨범이다. 일종의 배려였던 발매 간격의 전례를 뒤집고 『Negro Swan』이 발매되고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본작을 발매한 사실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심경의 변화가 있음을 시사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올해 서른여덟이다. 이 얼마나 공감 가는 이유인지, 『Negro Swan』과 뚜렷한 차별점을 갖는 앨범이 아님에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본작이 좀 더 특별하게 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2022년에 이 글을 쓰게 되어 가능한 비유일 텐데, 나는 본작 『Angel's Pulse』가 올해 발매된 FKA twigs의 믹스테이프 『Caprisongs』와 꽤나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믹스테이프라는 구색은 유지하고 전작과는 달리 면면에서 무게감을 덜어냈지만 본연한 매력과 감각은 숨겨지지가 않는다. 본작은 사이키델릭한 기타 리프와 몽환적인 신시사이저를 배경으로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매끄럽게 흘러간다. 느릿하고 몽환적인 기타 리프에 차분한 중저음을 선보이는 Porches의 랩과 달빛 같은 섬세한 피아노 선율이 매력적인 「Berlin」은 적막한 베를린의 밤을 묘사한 데브의 「Nights」로 단연 앨범의 백미가 될 것이다. 특기할 것은 본작 속 힙합의 역할이다. 사운드 클라우드와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래퍼 Benny Revival이 피처링한 「Seven Hours Part 1」은 데브의 안목을 향한 믿음을 굳히고, 멤피스의 래퍼 Three 6 Mafia를 본인의 스탠더드 튠 위에 절묘하게 섞어 Andre 3000의 「Solo (Reprise)」를 연상시키는 「Gold Teeth」는 답습하지만 창의적인 앨범이라는 주장을 방증한다. 전작과 동일한 테마의 중복으로 루즈해질 수 있는 본작의 흐름에 과감하고 개성 있는 힙합 넘버들이 긴장감을 부여하는 목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Angel's Pulse』는 북적이던 작업 환경의 전작과 달리 스튜디오에 홀로 고립되어 작업하는 시간이 많았으며, 그 환경은 마치 전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가가 각국의 지폐 한 장을 가지고 돌아오듯 LA에서 뉴욕, 피렌체와 베를린, 그리고 두바이로 퍼져있다. 에이펙스 트윈을 떠올리게 하는 앰비언트와 댄스홀 리듬의 「Baby Florence」가 이탈리아 생활의 가시적인 영향력일지 즐거운 상상도 해봄 직하다만, 이런 이유 때문일까 본작은 유기적인 관계로 묶인 하나의 앨범이라기보단 'atmospheric' 테마로 묶인 플레이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각양각색의 사운드와 다채로운 레퍼런스,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결집한 『Freetown Sound』와는 달리 『Negro Swan』과 같은 일관된 분위기의 나열에서 오는 평탄한 흐름에 가깝다. 사운드부터 모양새까지 전작의 에필로그격 앨범이라는 데브의 설명이 와닿는 부분이다. '화려한 듯 보이는 현대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고서 집에 가는 길'이라는 묘사가 『Angel's Pulse』를 대변하는 최고의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본작은 넓은 의미로 특별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작업실을 금세 북새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원활한 인간관계와 안부를 묻는 주변 예술가들의 문자 한 통은 ― 먼저 손을 내민 「Take It Back」의 Arca처럼 ― 작품이 나오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발상과 영감을 불어넣은 듯하다. 본래 대다수의 믹스테이프는 그 선례들에서 드러난 부정적인 정의가 긍정적인 부분을 가려버리는 반면, 본작은 포맷의 긍정적인 면이 빛을 본 몇 안 되는 작품이다. 자기 복제를 반복하며 들어야 하는 이유조차 제공하지 못한 채 혼란을 주는 몰개성 한 음악 같은 게 아니라 형식의 자유를 위시한 'Blood Orange의 믹스테입'이고, 이 사실은 스튜디오 앨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이 되어 감상의 충분한 이유를 만들었다. 다작에서 파생되는 혼란을 해소하는 역할은 이제 발매의 텀에서 앨범이 갖는 뚜렷한 개성으로 이관한 셈이다. 그의 행보가 개인적인 경험과 나이에 의한 열정의 침체기인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독특한 음색과 정제된 드럼 비트, 여러 시대와 장르의 향수가 교차하는 대담한 스케일, 이 모든 것들을 섬세히 엮어내는 예술가의 음악을 갈구하는 것은 진보와 혁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유난히 질리지 않는 앨범들이 있는데, 대부분 재즈쪽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색소폰이나 트럼펫의 멜로디가 쉬이 붙질 않잖아요. 그런데 되려 이런 이유가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게 하는거죠. 들어도 들어도 낯설고 생소하달까요. 그렇게 계속 듣다 보면 정작 이유도 모른 채 자연스레 그 아티스트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재즈쪽에서 벗어나면 전 블러드 오렌지가 그런 아티스트라고 생각해요. 처음 들을 땐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목소리다' 라는 판단에 몇번이고 내려놓았건만, 어느새 글을 써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게 됐네요. R&B를 들으며 유일하게 오션 생각을 안하게 되는 아티스트이기도 하고요. 빨리 다음 신보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 쓰시네요 쉽게 읽힙니다!!
퇴고하느라 시간 좀 걸렸는데 기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쉬이 붙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는 대목에 공감이 가네요
그런 음악들이 종종 있죠. 결국 보관함에서 오래 살아남은 음악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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