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본 리뷰는 음악적 분석 보다는 제 단순 감상평 위주로 작성된 글이라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들이 산재함을 밝힙니다. 제 표현력의 한계로 인해 다소 모호하다고 느껴지는 문장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좌를 항해 발 뻗는 순간.
사실 그 동안의 페기의 음악들은, 적어도 나에겐, 마치 뜬구름 잡는 행위처럼 보였다. 그의 과격하고 실험적인 프로듀싱은 마음에 들었으나, 그것이 때로는 나에게 난해한 것으로 다가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음악적 요지, 그러니까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감정 따위가 무엇인지 사실 잘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앨범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는, 틀린 생각이었다. 그는 더욱 진화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기존의 사운드에서 더욱 듣기 쉽게 정제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팬들이 사랑하던 실험적인 사운드는 원형을 잃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들이 나를 향해 소리지르며 호소한다기 보다는 설득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처럼 곳곳에 산발적으로 빛나는 전자음들이 좋았고, 불안정한 음정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도 좋았으며, 가끔은 분노를 과감히 표출하는 그의 격정적인 랩도 좋았고, 컬트적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가사도 좋았다. 나는 이 앨범을 통해, 그의 이른바 '폭력의 미학' 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과격함 뒤에 서려있는 여린 서정성, 그 포인트가 좋다.
우리가 불완전한 것에 아이러니하게도 끌리는 이유.
그의 음악은 조잡하다. 솔직히 rym 순위가 높지만 않았더라도 이 글에서 볼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고민한다. 밴드캠프에 숨어있는 뛰어난 아마추어 음악가들 대신, 아마추어 아티스트가 과연 하이프를 받아야 마땅한 것인가.
이 의미없는 담론을 계속해봐도 어쨌든 대답은 늘 yes이다. 그는 하이프를 받아 마땅하고, 형식을 깨부수는 데에만 급급하여 정작 청취자에게 초월적인 경험을 선사해준다는 어떤 음악적 본질을 뒷전에 놓쳐버리는, 그런 아티스트들 보다 파란노을이 더 낫다.
그렇다. 앞서 말했듯, 그의 음악은 호날두이다. 믹싱도 보컬도 완전 개같이 날로먹는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품어왔던 아련한 과거의 정경, 혹은 슈게이징에 대한 향수. 파란노을은 시대착오적인 꿈들을 기가막히게 불러온다. 발냄새를 맡고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던 짱구 아빠처럼, 우리도 이 구린 음악을 듣고 불완전했고, 아직은 미숙했던, 그리고 상처도 많이 받은 지난날의 청춘을 바라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한 결핍에 빠져 누군가를 사랑하듯,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조악한 앨범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보다.
지식을 갈구하던 젊은 철학자와 늙은 현자의 만남.
이 앨범은 들을때마다 나에게 신비로운 감정을 안겨다준다. 마치 우주위를 유유히 유영하는 듯한.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주인공이 된 듯한 감정이다. 큐브릭이 스크린속 담아낸 아득히 경이로운 우주의 심연속, 무수한 별빛들의 향연을 지켜보는 것 같다. 그런 경험은 이미 인간의 이해나 논리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미니멀한 전자음 베이스 위에 여러 악기들이 부유했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다 무브먼트 9에서 정점을 찍고 천천히 소멸한다. 별이 창조됐다 소멸하는 일련의 과정처럼, 앨범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와 동시에 앨범을 다 들으면 왜인지 항상 경건한 마음이 든다. 앨범 전체적으로 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사람의 인생을 관조하는 일은 뜻밖의 정열과 깨달음을 준다. 그것이 아무리 역사책에 오르지도 못할 평범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예를들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거나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던가 그런일들 말이다. 이 장장 60분에 걸친 명상적이고 반복적인 음악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현대 사회 속에서 별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테마를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하루키의 허무함의 정서를 담아내어.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때, 마치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느날 택배가 와서 열어보았더니, 바닷가 근처 마을에서 거주중인 삼촌이 직접 잡은 회가 들어있었다 - 라는 류의. 2021년, 그것도 일본에서 이렇게 독특한 아트 록 음반을 듣게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재즈 피아노 사운드와 혼합된, 아름다운 기타 소리의 잔재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노래부르는 보컬은 금방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은 봄의 잔향처럼 너무나 덧없게 느껴져 그 존재만으로도 쓸쓸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스트록스의 음악이 공허한 분노라는 감정에 집중을 더 기울였다면, 이들의 음악은 서정성에 더욱 집중을 가한 모양이다.
음악을 가만히 듣다보면 재작년,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하루키의 소설과 쓸쓸히 보낸 겨울방학이 생각난다.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태엽 감는 새. 간결하면서도 초현실적인 문체로 청춘의 허무주의를 하나의 메타포로 엮어낸 그의 소설들을 읽으며 바라보던, 눈이 내리던 밤의 겨울 풍경. 그들의 노래는 새삼, 기억 한켠에서 잊혀져가던 기억들이 다시 방문을 두드려 선물로 찾아오는 기분이다.
지난 여름 우리가 보았던 정경.
이 앨범이 기어코 내 마음에 들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어딘가 조잡하고 난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으나 이 요상하고 가벼운 농담 같이 느껴졌던 청취경험은 어느새 내 기억의 단편이 되어 남아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21년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나는 이 앨범의 가치를 가만히 재고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실없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전작들의 가중된 분위기와 다르게 이번 앨범은 뭐랄까 상당히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탐미적인 영상의 미를 추구하는 웨스 앤더슨 처럼 보기에는 아름답기는 하나, 그 깊이가 부족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내려본 나의 결론은 이렇다. 교훈이나 철학따위가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는가 라고. 그의 음악은, 신기한 일이지만, 적어도 나의 추억의 일부분이 되어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가 향유했던, 그리고 동경했던 힙합관을 다시 재구성하는 앨범, 그리고 청자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시선을 함께 공유하고자하는 열망이 가득한 즐거운 앨범. 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그 뒷면에 바치는 대서사시.
링구아 이그노타의 음악들은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에 영향을 받아 불안정하고 쉽게 깨질듯한 유리처럼 연약하다. 거의 절규하다시피 노래부르는 창법은 기괴하면서도 그녀의 감정을 가감없이 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놀랍다. 또한 온갖 은유들로 점칠된 그녀의 가사와 중간 중간 삽입된 보이스 트랙들은 이러한 신비로운, 초월적인 감정들을 뒷받침해준다.
종교가 주는 달콤함이란 얼마나 몽롱한 것인가. 문뜩 신은 죽었다라고 온 대지에 선언한 니체가 생각난다. 그는 초인의 됨됨이를 주장하며 영겁회귀로의 삶을 꾀하였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넘어선, 광인의 경지에 이르러 음악을 통해 인간의 내재된 불안을 다시끔 환기시키고, 종교의 부조리함에 대해 꼬집으며, 선과 악이라는 사사로운 허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녀의 사상들을 전파시킨다.
그녀의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끝없는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클래시컬한 오르골 소리와 파괴적인 인더스트리얼 노이즈의 부조화, 공간감있게 공명하는 성가대의 목소리. 비록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신분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왜곡된 찬송가는 야릇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다카노 라리즈의 영향력은 여전히 일본 인디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있다. 보리스부터 게로게리게게게,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여성 아티스트 시즈카까지. 그들의 과격한 무브먼트는 많은 아티스트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또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이다.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노이즈의 폭풍속에 둘러쌓인채, 아름다운 사이키델릭 기타 사운드와 함께 울려퍼지는 보컬의 감미로운 멜로디는 내게 있어 어떤 신비로운 감정을 상기시킨다. 내게는 푸른새벽의 노래를 처음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아무런 설명도 없는 노래를 재생시키고는, 자살에 대한 적나라한 언급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면서도 (당시 초등학생때라 마음이 많이 여렸다) 그 음악적 내용물에 감탄하게되는. 마치 반값세일하는 LP판 무더기에서 보물을 찾은 느낌.
그녀의 결코 좋지 않았던 끝이 이런 쓸데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수도 간혹 눈에 띄고, 의도하지 않은 즉흥성이 강한,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조잡한 라이브 음원이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미 그녀의 꿈과 망상들의 파편에 미혹되어 이런 자잘한 것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기 시작했다.
+ 블로그도 개설했습니다. 영화 리뷰, 책 리뷰 간간히 올리고 있습니다. 부족한 리뷰지만 언제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m.blog.naver.com/hellouniversity0




+ 제가 전에 받았던 리뷰 신청이 사실 수행평과와 내신 준비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겨울방학이라 시간이 남을 것 같아 이번에는 꼭 적어보도록 할테니 리뷰 신청 있으면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파란노을은 가슴을 뭉개는 듯한 느낌 때문에 앨범으로는 도저히 못듣겠더라고요 ㅋㅋㅋ
Promises 정말 좋더라고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합니다. 사운드의 변곡점들이 마치 롤러코스터 처럼 느껴져 재밌었어요
수프얀 Beginner’s mind 신청해봐요
글 너무 잘 읽고 갑니당
헤응.... 노력해볼게요
헤응 감사해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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