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부착된 라벨은 탈착이 어렵다. "그는 좋은 성대를 타고난 흑인이니까 우리에게 멋진 노래를 들려줄 거야." 이런 라벨이 나타나자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가 MTV에 등장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디 안젤로와 맥스웰이, 그 뒤에는 프랭크 오션과 위켄드가 그들에게 붙은 라벨을 교체했다. 이들은 당대의 실력파이자 선구자였고 동료 뮤지션들과 음악팬들을 일깨웠다. 여기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모제스 섬니 역시 새로운 라벨인 것일까. 이 라벨에는 이런 문구들이 쓰여 있다. '기상천외한 팔세토', '고전적인 기타 주법', '음산한 분위기의 신스', 그리고 '고립감'. <græ>의 인트로인 Insula에서 여성 내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고립(isolation)은 섬(island)을 뜻하는 인슐라(insula)로부터 유래했다."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구절은 섬니의 철학적인 인터뷰와 합을 맞추며 앨범의 비전에 대해 슬며시 힌트를 건넨다. "우리가 지도상에서 섬이라고 가리키던 곳들은 이제 더 이상 섬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세상이 섬으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그의 음악을 고독함과 우울함의 레시피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현대 대중문화에서 보기 드문 깊이의 음악적 경험이고, 아마도 최고의 경험일 것이다.
더블 앨범, 20개의 수록곡, 1시간가량의 러닝타임 등 <græ>는 크고, 너르고, 광활하다. 이 경우 크다는 표현은 수량보다 음악에 더 적절해 보이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앨범은 대담하고 실험적인 송가들로 그득하다. 앨범의 단출한 짜임새는 전작인 <Aromanticism>을 떠오르게 하지만 악기 구성은 더 치밀해졌고, 마치 독백처럼 생각되던 그의 노래는 <græ>에 와서 일종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곡은 무그 신스와 베이스, 일렉 기타, 바이올린, 드럼의 타격 음이 층을 이뤄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음을 연상시키는 Conveyor다. 섬니는 이 곡에서 자신이 겪었던 미국의 사립학교 시스템을 미국 자본주의의 요람으로 풍자하며 한층 더 날카로워진 관찰력과 공상을 선보인다. "노동자들이여, 식민지에 합류하라!" 정확히 <Aromanticism>이 그랬듯이, 현장감 있고 대화하는 듯한 형식의 스킷들은 앨범을 바라보는 신선한 창을 제공한다. 특히 유별난 배우 에즈라 밀러와 유별난 작가 타이에 셀라시가 유별난 싱어송라이터의 앨범 위에서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also also also and and and는 그 자체로 유별나고 흥미롭다.
섬니가 데뷔 앨범을 통해 도전한 것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라면 새 앨범에서는 우리의 관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græ, 제목에 정답이 있다. 검은색도 아니고 흰 색도 아니고, 흐릿하고 불확실하며,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는 상태. 섬니는 음악을 통해서 사고의 재정립을 요구한다. 총천연색 뮤직비디오, 단색의 의복, 아트 록과 일렉트로닉 솔, 그리고 하나의 경이로운 목소리 등 정력과 남성미를 의미하는 Virile 위에서 섬니는 남성성이라는 신화를 조롱한다. "점수 받기엔 글렀어. 남성성은 무력해지거든." 다른 수록곡 또한 피차일반이다. Cut Me는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멜로디를 가진 곡이지만 섬니는 이 감미로운 알앤비의 내면에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탐구한다. ("나에게 좋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필요한 듯해.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걸까.") Part 1의 아웃트로인 Polly의 기타 선율은 희망을 암시하지만, 이것은 마치 애정결핍이 초래한 자기 학대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나의 몸이 두 개로 나누어진다면, 나를 더 사랑해줄 거야?") 이처럼 섬니의 재간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한 줌의 티끌로 만들어버린다.
<græ>는 언뜻 보기에도 대칭이 맞지 않는다. Part 2는 이전 파트에 비해 곡수도 적고 러닝타임도 짧으며 심지어 당찬 웅변가마저 자취를 감춰버렸다. 음악을 통해 개인사를 노출하지 않는 이 싱어송라이터의 관행을 떠올려봤을 때, 사랑하는 강아지를 잃어버린 기억으로 막을 여는 Part 2는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이 장은ㅡPart 2에는 제목에 나Me라는 단어가 사용된 곡이 4곡이나 있다ㅡ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셈이다. Part 2의 미니멀한 사운드는 정도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이 메마른 단순함이 어떻게 이토록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Me in 20 Years에서는 허공을 메우는 신시사이저의 잔향과 섬니의 애처로운 팔세토가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데, 이를 모제스 섬니 버전의 White Ferrari라고 일컬어도 무방할 듯하다. 조지 벤슨의 건조한 재즈 기타를 연상시키는 Keeps Me Alive의 연출은 소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것은 <Mid-City Island> 이래로 모제스 섬니 음악의 정수와 마찬가지였다. Lucky Me의 신비로운 스트링은 전형적인 제임스 블레이크의 잼(이 곡을 블레이크가 부른다고 상상해보라)이자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이지만, 스트링 선율만큼이나 미스터리한 목소리에 의해 대번에 회색빛으로 희석된다.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의 앨범을 두 갈래로 가르고 그 가운데서 성스럽고 저항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모습은 분명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græ>는 정지한 하나의 피사체가 아니라 힘차게 회전하는 두 개의 소용돌이다. 소용돌이의 단면을 본 적이 있는가. 애당초 단면이란 것이 있기는 한가. 이것은 순수예술이 될 수도 없고 대중음악이 될 수도 없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앨범도 아니고 콘텐츠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원하던 것도 아니고 원치 않던 것도 아니다. 앨범에서 명시했듯이, 둘 다 아니다(Neither/Nor). 그야말로 완전한 회색이다. <græ>는 모호하고, 파괴적이고, 재정립하고, 맞서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무정형의 실체다. 7분여 간의 사이키델릭 알앤비 Bless Me/before you go로 앨범은 막을 내린다. "떠나기 전에 나를 축복해줘." 이 클로징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답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세레나데다. 그리고 이것은, 사진처럼 뚜렷하게 인화할 수는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마음으로 지각할 수 있는 이야기의 완벽한 귀결이다.
길게 말해 뭐하겠습니까.
올해 최고의 앨범입니다.
리뷰글은 개추
앨범 좋았어여
모제 섬니 앨범 좋았음요 ㄹㅇ 저 빵댕이가 가장 인상깊음
Part 2는 아직 안들어봤는데 시간내서 들어보긴 해야겠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안그래도 지난번에 말씀하셔서 파트1 들어봤는데 진짜 좋더라구요.. 요즘 여유가 안나서 새로나온 음악들 잘 못찾아듣고 있는데 이번 주말엔 꼭 들어봐야겠슴다ㅋㅋ
진짜 아름다운 앨범
정말 좋더라구요 멋진 글 잘봤습니다
모세스섬니 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꾸준히 잘하는 것 같아요 넘 행복..
섬니는 이제 장인의 길로 접어든것 같습니다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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