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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리케이 (Jerry.K)

Melo2016.06.30 19:30추천수 19댓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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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리케이 (Jerry.K)

<HIPHOPLE INTERVIEW REPAIR PROJECT>는 힙합엘이(HiphopLE)가 초창기 조금은 부실하게 인터뷰했던 베테랑 래퍼들을 다시 인터뷰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아티스트에 관한 정보를 모아둠과 동시에 흐름에 따라 한국힙합과 씬의 이야기도 동시에 아카이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지난해에는 VMC의 수장 딥플로우(Deepflow)에 관해 낱낱이 파헤쳐 봤다. 그로부터 딱 1년 만에 돌아온 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타자는 소울 컴퍼니(Soul Company)부터 데이즈 얼라이브(Daze Alive)까지, 10년 넘게 이 씬에서 활동하며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래퍼 제리케이(Jerry.K)다. 그는 본의 아니게 씬에서 어떤 특정한 영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으며,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로서 뚝심 있게 한 발 한 발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는 강단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서 개인사와 음악적인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사안에 관한 의견까지 모조리 듣고 왔다. 만약 제리케이에게 관심이 있다면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찬찬히 이 인터뷰를 읽어보길 바란다.


*본 인터뷰는 6시간 분량의 인터뷰로 일반 인터뷰보다도 내용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인터뷰이의 커리어 순대로 챕터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점 참고하셔서 여러 날에 걸쳐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또한, 아래 목차 역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01. Intro
02. 듀스가 상업적이라는 쌍문동의 아이
03. [The Bangerz], [一喝 (일갈)]
04. 군대
05. 로퀜스, [마왕]
06. 현대카드 프리미엄 마케팅팀 김진일 사원
07. 해체, 그리고 인디펜던트
08. [True Self]
09. [Dope Dyed], 데이즈 얼라이브
10. [현실, 적]
11. 결혼, [감정노동]
12. 디스전, 못다 한 이야기
13. Outro





- Intro -


LE: 우선 간단하게 힙합엘이 회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J: 안녕하세요, 제리케이입니다. (인터뷰가 길 것 같아) 두렵네요. (웃음)





LE: 두 번째 질문부터 이런 이야기를 드리기가 그렇긴 한데, 인터뷰하는 이번 주에 <쇼미더머니 5>가 시작하잖아요. 방송 시작과 함께 뭔가를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저는 없어요. 금요일 방송이죠? 다음날 던말릭(Don Malik)과 션만(Syunman)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라… (웃음) 그 정도? 저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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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인터뷰가 나갈 때는 공연이 끝난 지 좀 됐겠지만, 간단하게 공연 이야기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흥미로운 콜라보잖아요.

NPR에서 하는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 류의 공연을 해보고 싶었어요. 국내에서 하는 라이브 콘텐츠 있잖아요. 온스테이지(ONSTAGE)나 그런 것들… 거기에는 관객이 없는데, 관객과 함께 코앞에서 호흡하는 걸 하고 싶고, 그걸 보여주고 싶다고 던말릭이 먼저 얘기했어요. 그래서 제가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다 보니까 이런 걸 판을 키워서 시리즈 물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만들게 된 게 <미니스팟 라이브(MINISPOT LIVE)>죠. 첫 번째가 던말릭과 션만의 순서이자 던말릭의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이 된 거죠. 제가 두 사람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루틴을 짠 걸 들어봤는데, 진짜 재미있어요. 션만 씨가 워낙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분이시다 보니 디제잉하다가 패드도 치시고, 그러다 기타도 치시더라고요. 굉장히 다채로운 공연이 될 것 같고, 국내에서 보기 힘든 공연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쨌든 비디오 콘텐츠로 남으니까.





LE: 그렇게 방송과는 무관하게 맡고 있는 레이블을 운영 중이신데, 그래도 늘 <쇼미더머니>에 관한 목소리는 계속 내셨잖아요.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은 래퍼 개개인의 과거 맥락을 안 끌어와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브랜딩이 많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마음으로 시청하실지 궁금해요.

예전 시즌도 챙겨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저번 시즌 결승이었나? 우연히 VMC 작업실에 제가 있었고, VMC 멤버들이 다 보고 있길래 같이 본 적은 있어요. 그거 말고는… 제가 그걸 본 적이… 있구나. <언프리티 랩스타>를 와이프는 되게 좋아해요. <쇼미더머니>를 <위기의 주부들> 보는 느낌으로 보거든요. 공연 위주로 나오면 재미없어하고, 그 전에 갈등을 좋아해요. (웃음) 그래서 와이프가 볼 때 한 번 같이 본 적 있는데, 보고 제가 너무 순식간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이 아팠던 적이 있어요. 진짜로 몸살이 났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안 보고, 페이스북에서 가끔 넘기다가 올라오는 건 가끔 봐요. 글쎄요. 이번에도 비슷하겠죠. 이번에도 고통받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LE: 싫은 게 있으면 무관심을 주는 게 답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계속 얘기할 거리가 있다면 하실 생각이신 거죠?

그건 정말 모르겠어요. 사실 [감정노동]의 표지처럼 정말 그 모든 감정을 하얗게 불태웠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더 할지 저도 모르겠어요. 때가 되어봐야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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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쇼미더머니> 얘기는 뒤에도 많으니까 천천히 해보도록 하고요. 얼마 전에 있었던 [감정노동] 콘서트도 되게 특별한 형식으로 하셨잖아요. 영화 <위로공단> 상영회가 함께 진행됐었는데, 특별한 포맷의 공연이니 어땠는지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앨범을 내고 메인이 되어서 한 공연은 총 세 번이었어요. 세 번째가 <EBS 스페이스 공감>이었고, 하나는 마인드프리즘(MindPrism)과 함께 했던 거였어요. 또 하나는 <위로공단>과 함께 했던 거였고요. 앞에 건 집단심리치유 프로그램을 가지고 공연을 했던 거고, <위로공단> 상영회를 함께한 <NO MORE ____ 2> 같은 경우에는 같이 영화를 보고 제 공연을 보는 거였어요. 저는 되게 좋았어요. 그 동안 안 했던 거였고, 그리고 그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많이 왔었고요. 특히 마인드프리즘과 함께 했던 공연은 정말 힙합에 아예 관심이 없던 분들도 많이 왔거든요. 마인드프리즘을 통해서요. 그래서 그런 분들 앞에서 제 곡이 설득력을 가지는 순간을 느끼는 게 굉장히 좋았어요. <NO MORE ____ 2>도 그 다큐멘터리 (영화)가 “콜센터”라는 곡의 배경을 크게 보여주는 거라고 볼 수 있거든요. 두 작품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또 해보고 싶고, 남들이 안 한 포맷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죠.





LE: 층위 같은 경우에는 성공회대학교의 어느 교수님이 따님과 함께 제리케이 씨의 공연을 보러온 적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쨌든 그런 기존 한국힙합 씬의 층위에 해당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오셨다는 거겠죠?

(그런 분들보다는) [감정노동]이라고 불리는 일을 실제로 하고 계시는 분들께서 많이 오셨기 때문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 CD를 굉장히 많이 사가셨거든요. 그걸로 딱 드러나더라고요. 원래 제 음악을 많이 듣던 분들이 아니라는 게요. 근데 와서 서로 교감하고, (제 음악이) 설득력을 얻고, 그게 구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니까 시장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시장이 보인 느낌? 그동안 제 음악이 모든 대중에게 열려있긴 하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가서 닿는 건 아니잖아요. 근데 정말 ‘닿지 않던 곳에 닿았구나, 그리고 그게 필요했던 곳이었구나.’라는 느낌을 받으니 보람차죠.





LE: 공연을 하게 되면 아내분도 항상 오시나요?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어요.





LE: 결혼 생활에 관한 질문은 또 드리겠지만, 아내분이 계실 때와 안 계실 때에 따라 공연 태도를 비롯해서 뭔가 달라지는 부분이 있나요? 좀 더 신경 쓰게 된다거나…

사랑 노래가 레퍼토리에 있으면 신경을 쓰게 되죠. 쳐다보고 랩 하게 되고. 되게 행복하죠. 근데 그 외에는… 어쨌든 와서 제 음악을 좋아해 주고, 신나서 즐기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힘이 되죠.





LE: 그렇군요. 결혼 생활이 여러모로 삶에 변화를 불러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변화의 측면에서 결혼을 하고 적응기가 좀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혼자서 되게 오래 살았어요. 자취를 2007년부터 했으니까… 7, 8년을 혼자서 마음대로 살면서 정말 작업하고 싶을 때 하고, 놀고 싶을 때 놀다가 이제 다른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적응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작업하고 싶을 때 작업하는 방에 콕 박혀있기가 미안하고. 그 전에 (아내가) 여자친구이던 시절에는 데이트를 할 때 같이 있는 거잖아요. 제가 이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포맷인데, 같이 집에 있으면 비워도 상관이 없기도 하잖아요. 그게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었죠. 그런 류의 제 작업을 언제 하고, 시간 관리하는 등등의 것들이 적응하기 힘들었고, 그 외에는 그냥 별다른 건 없는 것 같아요. 원래 하던 거 하는 거니까.





LE: 뒤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이 남자에게 제약이 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결혼하면 지옥 가는 것같이 얘기한다거나 말이죠. 결혼을 원하면서도 결혼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 같은 게 존재하는데,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냥 이혼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왜 (같이) 살아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그게 불행하면 서로 고치려고 노력하거나, 나와서는 그래도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보호를 해주는 쪽이 맞는 거죠. (밖에) 나와서 ‘결혼하고 나니까 너무…’ 이렇게 얘기하면 ‘그럴 거면 왜 결혼했어.’라고 생각해요. 저는 결혼한 게 너무 좋고 행복하거든요.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되는 건데…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진짜 이해가 전혀 안 되어요.





LE: 그런 게 프레임으로 많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뒤에 질문에도 있겠지만, 그것도 맨박스(Man Box) 같은 거죠.





- 듀스가 상업적이라는 쌍문동의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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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벌써부터 스팀을 조금씩 받으시는 것 같은데, (웃음) 조금 가라앉혀주시고요. 간단하게 몇 가지 근황 얘기를 엮어서 여쭤봤습니다. 이제부터 옛날이야기를 좀 할게요. 지겨울 수도 있고, 본인도 재미없을 수 있는 질문일 수도 있겠네요. 힙합 음악을 처음 들었던 시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 중•고등학교 때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중학교 때 조PD가 PC 통신에 등장하고, 지누션(Jinusean) 같은 팀이 메이저에 등장하고 (그랬었어요). 힙합 음악을 접한 게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아요. 저는 ‘국힙’으로 시작한 거죠. (웃음) 그래서 외국 음악은 처음에는 아예 들을 생각도 못 했었어요. 들을 게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어요. 조PD, 지누션의 랩 같은 거 다 외워서 따라 하고 그러면서 시작했죠.





LE: 그 전까지는 어떤 아이였나요?

그 전까지는, 제가 형이 있어요. 학년으로는 한 학년 차이가 나는 형이 있는데, 형의 영향을 어릴 때부터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형 친구들하고 같이 놀고, 형이 뭘 하면 따라 하고. 형이 뭐하다가 혼나면 난 안 하고. (웃음) 그래서 좀 조숙한? 느낌의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게 어떤 데서 드러나냐면, 형에게도 형보다 나이가 많은 친한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처음 선물을 해줬던 음반이 넥스트(N.EX.T) 1집이었어요. 초딩한테… (웃음) 그리고 이승환 앨범. 처음 제 돈으로 샀던 테이프가 이승환 2집이었던 것 같고… 그때가 초딩 때였으니까 한참 서태지(와 아이들)가 날리고 듀스(DEUX)가 날리고 이럴 때였는데, 반에서 학급문고 이런 거 만들면서 설문조사를 하잖아요. (거기에) ‘듀스는 너무 상업적이야.’ 이런 소리를 하고 있던 초딩이었어요.





LE: Too Mainstream?

너무 메인스트림. 넌 그럼 누구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난 신해철이지.’라고 답했었어요. 미친 사람이죠. (웃음) 신해철과 넥스트의 빅 팬이었던 그런 아이였어요.





LE: 랩을 좀 따라서 불러보고 그러셨다고 하셨는데, 제대로 랩 메이킹을 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제대로라고 붙일 수 있는 시기는 정말 잘 모르겠어요. 처음 써보기 시작한 건 중3 때(였어요.) 그때 가사를 끄적거려보고 고등학교 때도 같은 반에 힙합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 얘기하면서 가사를 써보고 그렇게 시작했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메익센스(Makesense)와 같은 반이 되면서 그 친구와 노래방 메이트가 되었죠. (웃음) 노래방에서 같이 랩을 해보니까 잘 맞길래 ‘우리도 팀을 해보자.’ 하게 됐죠. 본격적인 작사는 그러면서 시작했죠.





LE: 자연스럽게 메익센스 씨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데, 메익센스 씨와 같은 반 친구라고 하셨는데 누가 먼저, 어떻게 접근(?)했나요?

보통 (학교 다닐 때) 같이 노는 친구들이 생기잖아요. 남자 고등학생 사이에서. 그 그룹에서 시험 끝나면 노래방 가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는 사실 놀 게 별로 없었으니까 노래방이 1순위의 엔터테인먼트였어요. 노래방 가서 랩 하는 걸 좋아했었고. 제가 잘하니까. (웃음) 해보니까 너무 잘해서… 그 당시에 씨비매스(CB Mass)나 이런 사람들은 여럿이잖아요. 솔로가 별로 없었어요. (메익센스랑은) 주고받는 합이 굉장히 잘 맞았었어요. 처음 해봤는데, 얘도 다 외우고 있는 거야. 너무 신기하잖아요. (웃음) 그렇게 시작되었죠. 제가 아마 먼저 얘기했던 것 같아요. 사실 무슨 개념이 있어서 뭘 한 건 아니고 (단순히) 팀을 해보자고 했던 거였어요. 메익센스의 닉네임도 제가 지었거든요. 처음에는 막산(Maxan)이라고 짓고, 팀 이름도 같이 정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LE: 이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리케이라는 이름에 관해서도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러 인터뷰에서 나왔지만, 형하고 국민학교 때였나… 동네 영어학원에 갔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너네 영어 이름을 정하렴.”이라고 했는데, “너넨 형제니까 너는 톰, 넌 제리 해”(라고 하는 거예요). (전원 탄성) 그래서 제가 제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요. K가 붙은 건 어떻게 된 거냐면, 중학교 때 스타크래프트가 전국을 휩쓸면서 저도 잘하지는 못했지만 했었어요. 그때 피시방에 가서 배틀넷 아이디를 만들 때, (붙이게 됐어요.) 제리…케이? 이렇게 입력하면서 시작됐죠.





LE: 보통 닉네임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바꿔보려고 되게 여러 번 고민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LE: 랩 가사를 쓰면서 본인 이름을 말할 때 라임을 쓰기 좋지 않나요?

그렇죠. 그래도 제가 느끼기에는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이라는 게 너무 드러나 있어서… 저는 의미 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는 늘 아쉽긴 하죠.





LE: 메익센스 씨 이야기를 좀 했는데, 뭔가 서로 힙합 음악을 들려주며 상생(?)하는 관계였나요? 서로 어떤 영향을 준다든가…

그냥 비슷했던 것 같아요. 둘 다 ‘국힙’ 좋아하고, 나오는 음반들도 같이 사서 듣고. 갑자기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제가 혜화 쪽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LE: 유서 깊은 곳 아닌가요?

졸업생 중에 김수환 추기경이 계셔서 엄청 유서 깊죠. (웃음) 그때 항상 수업 듣고 끝나면 혜화역 앞에 있는 SKC 매장으로 갔어요. 음반 파는 곳이었는데, 거기 가서 CD 사고 그랬었어요. 어느 날 한 번 메익센스가 데프콘(Defconn) CD를 샀었어요. 옛날에 나온 첫 EP를 샀는데, 알바생이 갑자기 싸인을 해주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알바생이 데프콘이었던 거예요. (웃음) 그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네요. 거기서 CD 사고, 드렁큰 타이거(Drunken Tiger) 새 앨범 나온다 그러면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물어보고.





LE: 단골이 된 거군요. 데프콘 씨 최근의 행보는 어떻게 보시나요?

좋은 예능인?





LE: 그렇게 랩, 힙합을 좋아하시면서도 그 전부터 학업에 있어서는 출중한 편이셨던 건가요? (웃음)

어릴 때부터… 제가 국민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올백을 맞았어요. 저도 그게 미스터리이긴 한데… (전원 탄성) 이 반응이 나온다니까. 반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우와’ 하니까 그때부터 약간 눈치? 기대감에 대한 반영?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 뒤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수업시간에 자고 이러면 큰일 나는 줄 아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그랬죠.





LE: 보통 서울대에 가는 분들은 학창 시절에 하위권이었다가 치고 올라오는 케이스는 많이 없고 쭉 공부를 잘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항상 공부를 잘하셨던 편이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그랬던 것 같아요.





LE: 상위권 자체가 디폴트(기본값)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재수 없잖아요. (웃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LE: 열심히 하는 게 디폴트다.

그렇죠. 저는 수업시간에 딴짓을 안 하는 게 굉장히 마음속에 강했어요. 준법정신처럼 새겨 있었고… 저는 그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LE: 요즘은 입시가 워낙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공부를 하셨었나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는 수업시간에 정말 열심히 하고, 시험 기간이 되면 시험 준비를 조금 일찍 시작하고, 그런 식으로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남들은 “너 놀 거 다 놀고.”라고 말하는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나… 그때부터 입시 모드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정말 온 종일 공부만 했던 것 같아요. 그때만큼만 살면 지금 뭘 해도 할 수 있어요. (웃음) 고시도 패스할 수 있어요. 그때는 진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LE: 제리케이 씨 음악을 듣다 보면 강박이라는 코드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요. 여러 측면에서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하는 데에 있어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강박 같은 게 기본적으로 작용을 많이 하셨던 편인 건가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랬던 것 같아요.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있었던 것 같고… 어떤 규칙, 제 안에 세워진 여러 규칙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어기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어요. 시스템에 순응적인 거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그런 류의 강박과 이걸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불안감이 같이 작용했었어요. 그게 동시에 학업에 적용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LE: 그 와중에 랩에 관심이 생기고, 그쪽으로 뭔가를 하려고 했던 건, 어떻게 보면 일탈적인 행위잖아요. 특히, 부모님의 입장에서나 사회적 시선에서는 말이죠. 혹 본인의 가치관과 충돌하지는 않았나요?

그렇게 충돌이 많이 있지는 않았는데 부모님 같은 경우에는 걱정을 많이 하셨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음악을 열심히 듣고, <아우성 랩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그때 그게 거의 국내 유일의 랩 컨테스트였는데… (웃음) 거기에서 서울 예선을 통과해서 전국대회 본선에 나갔거든요. 그때 엄마께서 보러 오시고 그랬거든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되게 깜짝 놀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얘가 그냥 조용한 애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웃음) 막 (랩을) 하니까. 그래서 걱정을 좀 하셨는데, 그때 “대학 가서 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일종의 거래죠. 대학을 가면 니 맘대로 하라는. 그래서 순응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취미를 가지고 있는 채로 음악 감상을 하고. 대학 갈 때까지는 미뤘다고 볼 수 있죠. 지금도 아쉬운 건 제가 대학 갈 때쯤 되어서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이 없어졌거든요. 그때 공연을 못 본 게 되게 아쉬워요.





LE: 어머님 이야기를 잠깐 해주셨는데, 가끔 SNS에서 형분이나 부모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가끔 꺼내실 때가 있어요. 가족이 본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거든요. 커리어를 이어오면서 다양한 일이 있었으니까 더욱이 궁금하기도 해요. 응원을 해주신다든가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해서요.

어릴 때를 생각하면 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제일 많이 끼친 사람은 저희 형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형이 하는 행동을 많이 따라 했기 때문에… 어릴 때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측면은 부모님께서 다 만들어주셨겠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형의 영향을 받은 게 커요. 그걸 만들어준 사람이라 생각해요. 부모님은 제가 지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분(들이에요). 어릴 때부터 규칙에 대한 순응, 준법, 정의, 이런 것들에 관한 가정 교육을 많이 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 자율까지 더해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니 인생은 니가 사는 거다.’라고. 부모님에 관한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얘기해주시고. 저는 오히려 저 스스로 부모님이 싫어하실까 봐 억눌렀던 것들은 있는데,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던 건 없어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만들어주셨어요. 그러니 이런 삶의 흐름을 이어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LE: 최근의 활동이라든가, 회사를 나온 뒤의 커리어라든가, 새로 나온 음악이라든가 얘기를 이래저래 해주실 것 같기도 한데요.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어요. 왜냐하면, 저희 어머니께서는 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늘 보고 계십니다. 검색도 하시고요. 거기에 더해서 최근에는 장인어른까지… 그래서 제가 몸을 조심하게 되는데. (웃음) 회사 나올 때가 아무래도 제일 큰 사건이었으니까 그때를 기점으로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많이 놀라시면서도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였고, 아버지께서는 처음에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그랬는데 뭐 어떡해요. 제 인생 제가 사는 거로 교육을 해놓고 오셨으니. 허클베리피(Huckleberry P)의 “불효막심”이라는 곡에서도 가사로 썼었는데, 그렇게 몇 년을 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전화를 하셔서는 지금은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정도까지는 올 수 있었어요. 그런 류의 피드백을 그래도 심심치 않게 주고받는 편이긴 해요.





LE: 양면적인 게 있을 것 같아요. 부모님, 장인어른 분의 성향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이를 테면 ‘네가 너무 너의 의견을 강경하게 개진해서 위협, 피해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실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그런 것도 있죠.





LE: 반대로 본인과 정치적인 성향이 달라서 힘들었던 적은 없나요?

장인어른 같은 경우에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하시고, 저에게는 별말씀을 안 하세요. 그냥 와이프 통해서 ‘그렇다더라.’라는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편이고,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가끔 걱정하시죠. 너무 그러는 거 아니냐고 하실 때가 있는데, 결론은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에요. 시끄러운 일이 있을 때는 스트레스 너무 받는 거 아니냐고 걱정도 많이 해주시고요. 그럴 때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멋대로 살다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게 하는 게 있긴 있으니까. 그래도 어쩌겠어요.





LE: 가족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는 제리케이 씨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좀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 거에 안 휘말리고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근데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알아서 할 수 있는 범위니까요.





LE: 이따 더 얘기하게 될 것 같긴 한데, 디스전이 있었을 때도 따로 피드백이 있었나요?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걔 좀 이상한 애다.”라고 해주셨고, 장인어른은 그냥 “요새 좀 시끄럽더라.” 그 정도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에게 직접 얘기해주시는 건 아니고, 와이프가 (전해줬어요). 와이프도 저한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죠. 당연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골치 아프지 않기를 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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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어쩌다 가족 얘기를 이리저리 길게 하게 됐네요. 다시 <아우성 랩 페스티벌>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그때 사진이 되게 유명하잖아요. 키비(Kebee) 씨와 더콰이엇(The Quiett) 씨가 각각 교복이랑 엄청 큰 옷을 입고 랩 하는 사진.

그건 <아우성 랩 페스티벌>이 아니에요. 무슨 KBS에서 했던 ‘힙합 대격돌’? 그런 류의 프로였어요.





LE: 아, 잘못 알고 있었네요. 그때 그 두 분과 함께 페스티벌에 참여하거나 그랬던 건 아니군요.

네 아니었어요. 아마 제가 참여하기 전년도에 아마 더콰이엇이 우승했나 그랬을 거예요. (아니면) 그 전전 연도인가 그랬어요. 아무튼, 제가 참여했을 때, 저는 제가 수상권에 있다 생각했거든요. (웃음) 저는 정말 너드(Nerd)가 올라와서 랩만 잘 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고 그냥 랩만 좋아하는 애였으니까. 근데 그 당시 상을 탔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흑락회와 지마스타(G-Masta)라고… (지마스타) 그 사람은 진짜 이상한 사람인데, (웃음) 그 당시에도 대회 하기 전에 어떻게 하다 같이 밥을 먹게 됐었어요. 그 페스티벌이 해괴하게도 주제가 있는 페스티벌이었어요. 건전한 성에 관한 랩으로 컨테스트를 하는 거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해괴하죠. 근데 그런 대회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랩을 써놓고 대회 전에 밥을 먹으면서 “이거 끝나면 여자들 만나러 간다.” 그런 얘기를 하고. 나중에 이 사람이 데뷔하고 나서 카사노바 컨셉을 하고 나왔거든요. ‘내 수첩에 여자가 몇 명’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이상한 사람이다 생각했죠. (웃음) 그런 기억이 나네요.





LE: <아우성 랩 페스티벌>에도 참여하셨고, 또 밀림닷컴(Millim) 컴필레이션 앨범도 참여하셨었잖아요. “성역”이라는 곡으로 제리케이가 씬에 등장했다고 인터넷에 나와 있기도 한데, 앨범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그 당시에는 밀림이 지금의 SNS, 사운드클라우드 역할을 하던 때였어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곡을 올리는 곳이었으니까. 그때 밀림 측에서 앨범을 만든다고 연락이 왔고, 곡을 하나 실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보냈어요. 정말 그게 끝이에요. 근데 실었던 그 노래가 <아우성 랩 페스티벌> 때 불렀던 노래에요.





LE: 어떤 내용이었나요?

그냥 하나마나한 소리였죠. 뒤에 책이 꽂혀 있고, 전문가가 나와서 뭐라 말하면 ‘뻔한 말씀 감사합니다.’ 류의 그런 얘기였어요. 청소년이 생각할 수 있는 건전한 성에 관한 이야기? ‘아무말’이라고 할 수 있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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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02학번이시니까 “성역”이 공개된 2001년에는 고등학교 3학년이셨던 거잖아요. 이때부터 레코딩을 하셨던 건가요?

이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가 고등학교 때 혼자서 홈페이지를 만들었었어요. 당시에는 각자 자기 홈페이지 만드는 게 유행이었으니까. 그걸 만들어놓은 사람은 얼리어답터 같은 느낌. 그래서 저는 그때 집에서 혼자 케이크워크(Cakewalk)로… 케이크워크 아시나요? (웃음) 마스터 키보드 없이 마우스로만 곡을 만들어서 마우스로 피아노 찍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서 제 홈페이지에 올리고 그랬어요. 제가 만든 곡을 친구들에게 팔고… 믹스테입이죠. 그건 힙합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곡들을 따라 만든 그런 거였는데… 그런 걸 보고 제가 그때 살던 동네 쌍문동에서 레코딩 스튜디오를 하시는 분께 메일이 왔었어요. 녹음을 한 번 해보라고. 그래서 “성역”이라는 곡을 그 때 거기 가서 녹음했던 거예요. 그분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LE: 제리케이라는 이름으로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었고요. 그분이 웹 서핑을 하다가 제 홈페이지 혹은 밀림에서 (저를) 발견하고 연락 주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처음 스튜디오를 구경하면서 녹음했죠.





LE: 그 파일은 본인도 가지고 계신가요?

없을걸요. 근데 [ex] CD는 있어요.





LE: 근데 이 곡이 제리케이의 첫 출현이기는 하지만, 본인은 이 곡을 데뷔곡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이후 커리어를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긴 한데, 어쨌든 따로 이유가 있나요?

음… 지금 (여기 계신 에디터 분들) 글 쓰시잖아요. (전원 웃음) 네… 그런 거예요. (보통) 그 시점을 이야기하는 각자의 기준이 있지 않나요? (웃음)





LE: 효과적으로 얘기해주시네요. 혹시 후회하거나 그런 건 아니신 거죠?

그냥 수준 미달이죠. 그 당시에 다음(Daum) 포털에도 밀림 비슷한 게 있었어요. 사람들이 곡을 올리고, 피드백을 받는 그런 걸 했었는데… 그 당시 (거기에) 올렸던 곡도 많고, 밀림에 올린 곡도 많아요. 로퀜스(Loquence) 이름으로 올렸던 것도 많이 있고. 근데 별로라서… (웃음)





- [The Bangerz], [一喝 (일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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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커리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일단 2004년에 소울 컴퍼니(Soul Company) 컴필레이션 앨범 [The Bangerz]가 나온단 말이에요. “성역”을 내놓은 시기는 2001년이고요. 그사이에는 다른 학생들처럼 공부에 매진했던 건가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공부만 했고, 대학교 들어가서는 제가 들어가자마자 CC가 되어서… 연애하느라 바빴죠.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제가 단과대 밴드에 지원했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성당을 되게 열심히 다녔는데, 성당 학생회에서 성당 내 밴드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드럼도 어깨너머로 보고 칠 줄 알게 되고, 기타는 어릴 때 조금 배운 적 있고 해서 비는 포지션에 들어가서 연주도 하고, 공연도 하고 그랬거든요. 대학교 1학년 때 드럼으로 밴드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었어요. 정말 개념 없이 들어갔던 거죠. 제가 좋아하는 밴드 음악이 많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들어가 보니 같이 합격한 친구들은 일본 록 음악에 심취한 친구들인 거예요. 그래서 몇 번 합주를 해보다가 그 당시 프리챌(Freechal) 커뮤니티에… 프리챌 아시나요?





LE: 네. 그럼요.

커뮤니티에 탈퇴하겠다는 글을 쓰고 탈퇴를 했죠. 그때가 관심이 힙합으로 확 넘어왔을 때에요. (록 음악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다른 분들이 라르크 앙 시엘(L’arc~En~Ciel) 들을 때 저는 우탱클랜(Wu-Tang Clan)을 듣고 있었어요. 탈퇴하면서 욕을 많이 먹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어요. 근데 힙합 동아리에 들어갈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동아리에서) 나와서 학교에서 수업 듣고, 연애하면서 주말에 하자센터에 가기 시작했죠. 수능 끝나고 대학 들어갈 때쯤부터 가기 시작했었는데…





LE: 그때 소울 컴퍼니 멤버분들을 만나게 된 건가요?

MC 메타(MC Meta) 형을 통해서 그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게 2002년부터죠.





LE: 하자센터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고등학교 친구 중에 펭도(Pengdo)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저에게 외국 힙합을 많이 알려주고 그러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슬로워크(Slowalk)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그 친구가 하자센터에 다녔어요. 그리고 친구들을 소개해줘서 알게 되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MC 메타 형이 하는 수업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게 된 거죠.





LE: 그 전에 서울대 얘기를 조금 이어가 보면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문 중에 서울대에는 괴짜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실제로 학교에 다닐 때는 어땠나요? 1, 2학년 때 학교생활을 많이 하셨을 테니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서울대에는 괴짜들이 많다.’는 문장보다는 ‘서울대도 그냥 사람 사는 데다.’인 거 같아요. 똑같아요. 입시라는 시스템에 순응을 잘했던, 혹은 퍼포먼스가 좋았던 친구들이 모인 사람 사는 집단이라 괴짜도 있고, 정말 평범한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 망나니도 있고 그냥 그랬던 것 같아요. 별다르지 않았어요.





LE: 외부에서 의미 부여를 하는 거네요.

‘서울대인데 희한한 짓을 한다’. 이게 괴짜로 보이기 되게 쉬운 포인트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도 ‘서울대인데 회사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음악을 한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이게 서울대라는 타이틀을 떼면, 조금 특이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로 바라볼 사안은 아닌데.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나 싶어요.





LE: 그 당시 학교 다니시면서 일탈 씨나 버벌진트(Verbal Jint) 씨를 알게 되신 건가요?

버벌진트 형 같은 경우에는 그때는 전혀 몰랐고요. 일탈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더라… 수업에서 알게 되었나… 기억이 잘 안 나요. 일탈은 서울대 힙합 동아리였긴 한데, 기억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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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버벌진트 씨 같은 경우에는 “좀 이기적으로 살아”, “Grind 2”로 서로 피처링을 주고받으셨잖아요. 작년에 나온 버벌진트 씨 앨범에 제리케이가 참여한 걸 보고 오랫동안 커넥션이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어요. 서울대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부분인가요?

커넥션 자체가 거의 없었고요. 저는 대학 때는 전혀, 이런 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었어요. (작업은) 몇 번 트위터 같은 걸로 연락을 주고 받다가 버벌진트 형한테 먼저 연락이 왔어요. 2014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Grind 2”를 작업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피처링을 했으니까 저도 하나 해주세요.’라고 해서 “좀 이기적으로 살아”를 받았죠. 근데 [Go Hard Part 1 : 양가치] 자체가 미뤄지면서 제 것이 먼저 나온 거죠. 친분은 그 전에는 없었어요.





LE: 학교생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볼게요. 워낙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던지시고, 사회적인 분위기에 문제를 제기하시니까 한국 대학의 시스템 같은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셨나요? 사실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면 알만한 게, 학내에 어떤 권력이 작동하는 때가 종종 있잖아요. 그게 어떨 때는 부조리할 때도 있고 말이죠.

아니에요. 저는 그냥… 뭐랄까, 별 개념 없었어요. 정말 별 개념 없었고, 과 행사가 있으면 선배들 따라가고… 그 정도였지,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수업 열심히 듣고 (그랬었어요.) 1학년 때는 학부로 들어가서 과가 정해지기 전이니까 학점을 잘 받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수업 열심히 듣고, 과제 열심히 하고, 연애하고 그랬죠.





LE: 그랬다가 어떤 터닝포인트 같은 게 있었나요? 지금처럼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나 에피소드가 있으셨나 싶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一喝 (일갈)] 앨범에 다른 사람들이 안 쓰는 이야기를 썼다뿐이지, 반항적인 거나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곡은 없잖아요. 그게 [마왕]으로 가면서 확 드러나게 되었는데, 잘 모르겠어요. 뭔가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고… [마왕]을 발표할 때도 사실 저는 별 개념이 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마왕]에 썼던 가사를 되짚어보면 물론 잘 쓴 부분도 있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무색무취한 것도 많아요.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도 토를 달 게 없는. 환경보호 당연히 해야 하는 거잖아요. 요새 애들이 너무 교육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도 당연한 얘기잖아요. 최근에 트위터에서 ‘어른들이 허락한 비판’이라는 표현을 봤는데, 그 수준인 거예요. 깨어 있는 척 할 수 있는 그 부분까지만 했던 거라서, 지금의 제가 볼 때는 별 개념이 없었던 거 같아요. 2008년에 그 앨범이 나왔고, 그때는 이명박 정권 때였는데… 광우병 사태 이전인지, 이후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처음 광장에 나갔던 시기가 그 시기였어요. 그렇게 맞물리기는 했죠. 그때 “우민정책” 같은 것도 내고 그랬으니까. 그때쯤 그랬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개념 없이 ‘아무말’을 했던 거고. 지금과는 되게 많이 다르죠. 그 사이 모멘텀을 꼽으라면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이기는 해요. <나꼼수>를 통해서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심도 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죠. 지금은 <나꼼수>를 비판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처음 관심을 가지게 해준 건 <나꼼수>라는 거죠. 그 지점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LE: 이번에도 어쩌다 (웃음) <나꼼수> 이야기까지 하게 됐네요. 일단 다시 이야기를 순서대로 이어가 보면, 하자센터에서 꽤 많은 소울 컴퍼니의 멤버 분들을 만나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일단 멤버들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처음 봤을 때 MC 메타 형이 있었고, 키비랑 더콰이엇이 있었고, 칼날이랑 화나도 있었어요. 그리고 소울 컴퍼니 첫 프로젝트를 같이 하다가 막판에 실력 미달로 잘리게 된 몇 명도 있었고. (웃음) 거기에 저와 메익센스도 같이 갔었죠.





LE: 실력 미달로 잘랐다고 하는 걸 보면 전문적인 레이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기본적인 선은 있었다는 거네요?

그 역할을 더콰이엇이 처음에 했던 거죠. 끝까지 어떻게 해보려다가, ‘이건 안 되겠다.’ 생각한 거죠. 몇 명 있었어요. 아, 첫인상은… 사실 기억나는 사람은 화나 밖에 없는데. 화나가 지금은 살이 많이 빠지고 샤프한 느낌이 생겼잖아요. 그 당시에는 그냥 더벅머리가 아니라 스포츠인데 더벅머리인 거 있죠. 직모가 삐죽삐죽하게 난 그냥 막 자란… (웃음) (화나는 그때) 그냥 앉아 있다가만 가고 그랬는데, 더콰이엇이 화나 고등학교 선배였어요. 그래서 더콰이엇한테만 “어, 선배…” 이렇게 말하고 (대화가) 끝나는. 대화의 길이가 0에 수렴하는 그런 친구였던 기억이 있어요. 다른 친구들은 첫인상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LE: 그중에서 키비 씨가 CEO 혹은 레이블을 이끌어갈 리더로서 진취적인 태도가 보였던 건가요?

그게 왜 그랬냐면, 아까 말씀하셨던 사진 있잖아요. 그 당시에, 그 나잇대에서 랩 대장. (웃음) 랩 제일 잘하는 애 하면 키비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콰이엇이 비트를 만들 줄 알았고. 워낙 둘이 잘했으니까 그 둘을 중심으로 가게 되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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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The Bangerz]를 제작할 때 어땠는지가 궁금해요. 하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MC 메타 씨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워낙 많은 멤버가 참여했고, 많은 곡이 실려있잖아요.

그 당시에 하자센터에 모이는 방별로 ‘○○방’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문화가 있었어요. 저희가 모이는 방은 힙합방이었어요. 그래서 이름이 ‘Bangerz’가 된 거예요. 뱅어(Banger) 이거 아니고. (들어보면) 뱅어랑 전혀 상관없는 음악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뱅어에요. 힙합방이라서 ‘Bangerz’가 된 거고… 이렇게 제가 밝히네요… 당시 힙합방 멤버들이 각자 자기 음악을 하고 싶은 욕구가 움트기 시작했고, 모임이 끝나면 다같이 더콰이엇의 집에 가서 정말 작은 더콰이엇 방에서 녹음도 해보고 그랬었어요. 그러다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누가 처음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키비나 더콰이엇이 했었을 거예요. 그 둘은 그 당시에 신의의지 컴필레이션 앨범인 [People & Places]에 참여를 했었고, 그것 때문에 인지도가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뭔가 해보자고 하게 됐죠. 하자센터 안에 저희가 쓸 수 있는 수준의 스튜디오도 있었고요. 스튜디오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컴퓨터와 가녹음할 수 있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모여서 같이 들어보고, 가사도 쓰고, 그러다가 “아에이오우 어?”는 하자센터 내의 정식 레코딩룸에서 녹음했었어요. 그때 MC 메타 형이 와서 훅을 불러주셨었죠. 나머지는 하자센터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 안에서 잘 안 되었었어요. 그래서 각자 집에서 작업해서 더콰이엇 집에 가서 녹음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했던 거로 기억해요.





LE: 그럼 거의 더콰이엇 씨 집에서 많은 게 이루어졌다고 봐야겠네요.

더콰이엇이 비트를 만들고, 모두 더콰이엇 집에 가서 녹음하고, 그런 식으로 작업했죠.





LE: 당시에는 음반 배급이나 유통, 제작 등등이 다 인디펜던트적으로 진행하셨을 것 같은데요.

[People & Places]도 그랬는데, 그런 규모의 작은 시장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때는 배급사를 통하지 않았어요. 직접 CD를 들고 가서 홍대, 신촌, 압구정에 있던 음반사에 입고했었어요. 향뮤직, 퍼플레코드(Purple Record), 미화당 이런 데죠. 첫 배송 같은 경우에는 CD가 나오기 전에 저희가 이메일로 주문을 받았었어요. 그래서 소울 컴퍼니 멤버들이 다 같이 플래닛 블랙(Planet Black) 집에 가서 포장하고, 같이 우체국에 들고 가서 부치고 그랬었죠.





LE: [The Bangerz]가 나왔을 때를 한국힙합 씬에 새로운 제네레이션이 도래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어떤 테크닉적인 부분이나 혹은 공감이나 스토리 텔링 영역, 이런 측면에서 이전에 있었던 래퍼들과는 다른 한 단계 높은 스킬을 많이 보여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 그때 본인들도 ‘우리가 그래도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보다는 좀 잘하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조금 했었나요?

[The Bangerz]를 만들었을 때요? 





LE: 그렇죠. [The Bangerz]를 만들 때나 아니면 우리끼리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아예 진짜 뭔가 당장 데뷔해도 랩이 좀 괜찮은 거 같다는 생각을 하셨나 싶어서요.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 했었고, 더콰이엇은 했을 수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최적화 같은 경우, 그러니까 칼날과 화나죠. 그 둘 같은 경우에는 한국어 라임의 구조를 극단으로 추구하는 애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의 프라이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거 같은 게 첫 공연, 그러니까 발매 기념 공연을 했던 날이 폭우가 오는 날이었는데…





LE: 어떤 곡 가사에도 나오지 않나요?

네. 아마 나왔던 거 같아요. 근데 그날 유료관객이 백 명을 넘어서 그 당시 엄청 성공적이었어요. 그래서 다들 약간 정신 못 차리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프라이드가 높진 않았었던 거죠. 예상외의 성공이라고 다들 생각했죠.





LE: 그날 혹시 공연장은 기억나시나요?

그 당시에는 공연을 8시 이후에 하고, 끝난 다음에 파티를 했었어요. 윁(WET)이라는 데서 했었는데, 지금은 무슨 삼겹살집으로 바뀌었다고… (전원 웃음) 지금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홍대 어딘가에서 했었어요.





LE: 비가 많이 왔음에도 백 명이면 대관료 제하고도 좀 남았거나 비슷했겠네요.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되게 기뻐했었던 기억이 나요.





LE: 아까 칼날 씨랑 화나 씨는 한국말 라임에 대한 집착이 연구 같은 게 있었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지금도 가끔 제리케이 씨가 “아에이오우 어?!”에서 다 ‘ㅏ’로 맞춘 라이밍이 회자되곤 하잖아요. 이런 것처럼 본인도 라임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 혹은 집착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MC 메타 형이 한국어 사용을 강조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런 분의 영향을 받은 학습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고, 특히 “아에이오우 어?!”같은 경우엔 컨셉 자체가 그랬고, 그 부분을 그런 식으로 해보려고 밤새워서 가사를 썼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래서 녹음하는 날 다른 친구들도 “이거 지금 4마디를 ‘ㅏ’로만 간 거냐?” 이러면서 되게 깜짝 놀라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MC 메타 형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한글 사용에 대한 일종의 신념 비슷한 게 있긴 있었죠. 무슨 곡이었더라… "Next Big Things"였나? '함부로 영단어만 쓰던 과정' 이런 가사도 나오거든요.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거죠.





LE: 이번에 [감정노동]에도 “아에이오우 어?!”의 라인이 아주 짧게 한 마디인가 들어가지 않나요?

네. “No More Heroes”에 “자만과 착각만 따라가다가 타락한 가짜가 된 거잖아. 나의 마음의 모든 star가”가 나오죠.





LE: 이어서 얘기를 좀 해보면 지금도 가사에 영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잖아요. 그게 쓸 수 있는 건데 안 쓰는 건지, 아니면 어설플까 봐 그냥 한국어로 쓰는 건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한동안은 막 섞어서 썼던 적이 있어요. [True Self]랑 [Dope Dyed]를 들어보면 막 섞어서 썼었던 적이 있는데… 원래는 안 쓰다가 그때 쓰게 된 건, ‘그냥 써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들 쓰니까 이거를 섞어서 쓰면, 어떻게 보면 풍부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랬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도 않고 이걸 섞어서 쓰는 게 딜리버리에도 안 좋고 그냥 멋 내는 용도로 쓰는 건가?’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잘 안 쓰게 된 거죠.





LE: 다른 래퍼들이 쓰는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영혼용이라는 의제가 지금도 떠오르기도 하잖아요.

그냥 뭐 지 마음이죠. (전원 웃음) 지 마음인데, 근데 제가 힙합엘이에서 <Do The Right Rap> 컴피티션을 했을 때, 올라온 걸 다 들었거든요. 근데 들으면서 진짜 많이 느꼈어요. ‘아, 이게 앞세대가 랩을 이런 식으로 해놨더니 뒷세대가 이런 식으로 따라 하는구나.’ 정말 의미 없이, 하지만 멋있기 위해서 그냥 붙여놓은 영어들이 너무 많이 있으니까 거슬리더라고요. 잘 쓰면 아무 상관 없는데, 이상하게 쓰는 거는 지금도 듣기 싫죠.





LE: 저희도 그때 <Do The Right Rap> 다 들었었는데, 그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다 듣는 게) 고생이죠. 쉬운 일 아니죠. (전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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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The Bangerz]에 이어 얘기해볼 법한 게 그해 여름에 [一喝 (일갈)] 앨범이 나와요. 온라인 앨범으로 나왔었고, CD는 나중에 찍으셨는데 따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입대를 앞둔 상황이었고, 그 당시에는 온라인 음원 사이트가 없었어서 다들 CD 발매를 했는데, 그 전에 라임어택(RHYME-A-)이 [Story At Night]을 무료 공개를 하고 (군대에) 갔었어요. 그게 되게 인상 깊었고, 어떤 효과가 크다고 생각해서 저도 온라인으로 무료 공개를 했었던 거죠.





LE: [一喝 (일갈)]이 나오면서 그 당시에 소울 컴퍼니에서 제리케이 씨가 두 번째 타자로 나오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The Bangerz] 나오고 그다음이 저였어요.





LE: 레이블에서 개인 솔로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발표하는 계획에 있어서 첫 번째, 두 번째 타자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소울 컴퍼니의 핵심 멤버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아, 그때는 [The Bangerz] 앨범을 만드는 제작비의 절반 정도를 제가 부담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제가 과외를 했기 때문에. 제가 돈을 제일 잘 벌었거든요. (전원 웃음) 그런 게 있었고, 그 당시에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소울 컴퍼니의 대표를 키비가 맡을 거냐 제리케이가 맡을 거냐는 논의가 좀 있었어요. 근데 제가 입대를 하고 음악적으로나 여러 가지를 봤을 때, 키비가 맡는 게 맞다고 하면서 키비가 하게 된 거고요. 어쨌든 그 정도로 중심에 있었던 사람인 건 맞는 거 같아요.





LE: 그런데 [一喝 (일갈)] 같은 경우는 나름대로 첫 앨범이니까 개인 커리어에서 뭔가가 남을만한 의미가 있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一喝 (일갈)]이 조금 어설픈 부분도 있겠지만, 제리케이 씨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어떤 기억이었다고 회상해볼 법할 것 같기도 한데요.

제가 [一喝 (일갈)]을 군대 가기 전에 무료 공개를 하고 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정도로 의미가 큰데, 왜냐하면, 그게 없었으면 제가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 비빌 언덕이 없었을 거 같아요. 그게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제가 휴가 나와서 [Official Bootleg Vol. 2]에 참여를 했을 때도 사람들이 기억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같이 음악을 하는 친구 중에도 [一喝 (일갈)]의 팬이었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고, 그걸 통해서 알게 된 친구들도 많이 있어요. 여러 가지로 봤을 때 저한테 되게 중요한 앨범이었죠. 물론, 완성도 측면에서는 부끄러운 부분도 많고, 이해도가 되게 낮았다고 생각되는 측면도 많죠. 그런 반면,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라이밍이나 가사의 스펙트럼이나 이런 측면에서는 그래도 괜찮았던 측면들이 있는 거 같아요.





LE: 그 안에서도 제일 주목할만한 트랙이 아마도 “발전을 논하는가” 같은데요. 조PD와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씬에 대한 본인의 고뇌가 담겨있다고 보이는데요. 단순히 지목한 대상에 대한 디스라고 보기보다는 비판적인 의식을 표출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렇죠. 그때 제가 그 가사에 언급했던 사람들의 당시 모습이 별로 멋이 없다고 느꼈고요. 계속 힙합이 커지고 시장이 커지고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얘기는 계속 나오는데, 그게 정말 발전인 건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거죠. 성장과 발전은 다른 거니까.





LE: 그런 맥락은 시대가 지나고, <쇼미더머니>가 있는 지금도 계속해서 똑같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저도 얘기하다 보니까 비슷한 거 같아요. 그냥 제가 봤을 때 '저건 별론데?'라고 생각되는…





LE: 판이 커지고 영향력이 커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알맹이가 진짜 있는가에 대한 고민인 거잖아요.

그렇죠.





LE: 근데 그때 [一喝 (일갈)]이나 “발전을 논하는가”를 듣고서 피드백을 주던 팬들과 현재 제리케이 씨가 발표하는 음악들에 피드백을 주는 팬들이 차이가 있나요? 그때의 팬들이 주는 피드백은 어땠고, 지금은 어떻고 이런 거 말이죠.

머릿속에 바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거 보니까 비교가 쉽지 않은 것 같네요.





LE: 그러니까 단적으로 비교하긴 좀 어렵다?

그 당시에 피드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힙합플레이야(Hiphopplaya, 이하 힙플)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 정도였기 때문에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LE: 그러면 개인적인 피드백 말고도 어쨌든 커뮤니티는 계속 존재해왔잖아요. 매체가 어디냐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공론장으로서 게시판이 하는 역할이 그때와 지금,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과격해졌죠. 지금이 훨씬 과격해진 건 확실한 거 같아요. 그때도 과격한 소리 하는 사람이 많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뭔가 인터넷 초창기이고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사람들이 약간 잘 모르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잘 모름에서 오는 뜻하지 않은 예절 같은 게 있었죠.





LE: 현실 공간과 온라인 공간이 아직 합치되어있는 그런…

네, 그렇죠. 그런 느낌이 좀 더 강했던 거 같아요. 그때도 당연히 익명성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원 웃음) 그래도 지금이 훨씬 과격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예전부터 힙플 게시판을 보면서 많이 느꼈던 것 하나는, 게시판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에요. 당연히 더 강렬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로그인이라는 절차를 거쳐 가면서 글을 남기죠. (전원 웃음) 불편한 절차를 거쳐 가면서 답글을 남기게 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이 빡쳐야 되니까. 덜 빡치는 사람들 혹은 그냥 별생각이 없거나 긍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게시판으로만 보면 침묵하고 있는 모습 때문에 나선효과 같은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게시판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힙합엘이까지 온 거죠. (전원 웃음)





LE: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 올라오고 있을 거예요. (웃음) 게시판 관련해서 온라인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보면, JJK 씨가 “Reset The Game”이라는 노래에서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한국힙합 씬이 온라인이나 PC 통신이 아닌, 길거리부터 시작됐으면 어땠을까. 그냥 내 생각 한번 가정해봤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런 부분에서 좀 회의적이신지 궁금해요. 그러니까 한국힙합 씬이 게시판과 함께 역사가 이어져 오다 보니까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되셨다든가.

그냥 되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한국에서 길거리에서 시작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오히려 훨씬 낮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그럴 만했으니까 인터넷 공간에서 시작됐다고 생각을 하고, 힙합이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문화가 아니니까. 그래서 저는 그냥 너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재고할 수 없는 것 같아요.





LE: 혹시 한국힙합 씬을 같이 영유하는 뮤지션이든, 종사자든, 팬들이든, 누구든 간에 개인적으로 본인이 바라시는 부분이나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까요?

<쇼미더머니> 밖에도 세상이 있다. 그게 제일 세죠. 지금은.





LE: 씬에 대한 얘기는 아마 조금 더 뒤에 가면 있을 것 같아요.

계속 뒤에 나온다고… 뒤에 자꾸 뭐가 많네요. (전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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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一喝 (일갈)]의 노래 중에 “빗나간 탄환”이라든가, 보너스 트랙으로 추가된 “맹종”을 들어보면 당시에 열풍이었던, 특히나 웰빙 문화를 많이 비판하셨더라고요. 반신욕을 거의 증오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전원 웃음) 가사에 정말 많이 나오는데, 밴드웨건 효과(Band Wagon Effect)를 비판하시려고 했던 건가요? 그때는 그런 대중들이 우스워 보이셨던 거겠죠?

제가 아까 말씀드렸었잖아요. 초딩이 “듀스는 너무 상업적이야.”라고 말하던 멘탈의 소유자였으니까요. 이게 비하의 표현으로 말하면 중2병스러운 거고, 그건 신해철에게서 온 거죠. 어쨌든 그런 생각을 계속 갖고 살았고, 뒤따라가는 주체적이지 못함에 대한 어떤 비판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코드니까. 그런 일환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왜 반신욕을 싫어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원 웃음)





LE: 그런 곡이 사실 생활 세계에 있는 대중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거잖아요. 지금에 와서 ‘아, 이거는 이렇게 풀지 말고 다른 식으로 풀어낼 걸 그랬나?’ 아니면 ‘뭐, 이걸 굳이 이렇게까지 얘기했지?’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그냥 그 음악적인 완성도에 대한 부끄러움이 우선이고요. 지금도 저 자신은 화법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밖에서 볼 땐 저는 여전히 직설적인 사람이잖아요. 직설화법이라고 불리는 그런 가사의 진행 방식을 쓰고 있는 사람이니까. 근데 저는 오히려 그런 디테일하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짚어내는 데에 예전부터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저한테는 그게 장점이지 않았나 싶어요. 조금 더 시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풀어내지 않는 게 제 방식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방금 말씀하신 측면에서의 그런 건 별로 없어요.





LE: 화법에 관한 얘기 잠깐 해주셨는데, 디테일을 하나하나 따지면 화법이 되게 많이 달라지셨잖아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본인의 화법이 커리어 별로 어떻게 바뀌어왔다고 판단하시나요?

예전에 [Crucial Moment]나 [마왕] 같은 경우에는 어떤 서사로서 존재하는 게 있고, 그게 강점이긴 했지만, 그래도 라임을 맞추는 재미에 훨씬 빠져있었던 거 같아요.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어떤 독특함들을 즐겼던 것 같고요. 그렇다고 본다면, [True Self], [현실, 적]으로 오면서는 그런 것보다는 전체적인 주제 의식과 담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 이런 데에 좀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넘어오는 그 흐름의 기저에는, 무슨 곡이었더라… 다이나믹 듀오의 “Trust Me”였나? “가사책 안 보고 감상할 때까지”라는 개코형의 표현이 있거든요. 그게 저한테 좌우명 같은 거였어요. 딜리버리,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끔 하는 것. 그런 흐름을 따라서 쭉 왔던 거죠. 근데 그렇게 해오다 보니까, 제리케이가 하는 가사는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음악적이지 않다, 예술적이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 자신도 예전에 (제 음악이) 논설문에 가깝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고요. 그런 고민을 하면서 이번 앨범에 오면서는 전체 이야기를 어떤 키워드로 집중을 시킨다든지, 줄줄이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근데 지금도 데이즈 얼라이브 내에서는 “제리케이 형의 가사는 친절도가 100이야.”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죠. (웃음) 던말릭의 가사는 친절도가 한 20 정도 되고, 슬릭(Sleeq)의 가사는 40 정도 된다고 서로 얘기하죠. 다음 앨범을 만들 때는 조금 덜 친절하게 해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도 해주고요.





LE: [현실, 적]에 있는 노래들이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해커스와 시크릿” 같은 경우엔 연상기법을 많이 사용하셨던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했죠. “대출러브” 같은 경우도 키워드로 다른 사건들을 끌어오는 방식으로 하려고 했었죠.





- 군대  -

LE: 네, 그 얘기도 역시 뒤에 있습니다. (전원 웃음) [一喝 (일갈)] 얘기 조금 해봤는데, 이제는 시기상으로 당연히 군대 얘기가 나와야겠죠. [一喝 (일갈)]이 나오고 나서 군대에 갔다 오셔서 앨범이 재발매된 2006년 10월 즈음에 제대하신 건가요?

2004년 8월에 가서 2006년 8월에 전역했죠. 딱 2년 다녀왔어요.





LE: 보직이 어떻게 됐나요?

일단 제가 정훈병을 하고 싶었어요. 좀 편할 거 같아서. (웃음) 근데 지원했다 떨어졌어요. 그 전에는 카투사에 지원했다 떨어지기도 했죠. 그래서 그냥 논산으로 입대하게 됐고, 가서 특기가 나왔는데 전차병이 나왔어요. 그래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로 배치를 받았죠. 근데 자대에서는 “너는 서울대니까 머지않아 사단에서 행정병으로 빼갈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대하는 날까지 절 빼가지 않았죠. (전원 웃음) 중간에 몇 주 PPT 만들고 하긴 했는데, 그거 빼고는 저는 늘 탱크에서 살았습니다. (웃음) 탱크에 총 네 명이 들어가요. 간부(전차장)랑 조종수랑 탄약수, 포수 이렇게 들어가는데, 포수는 밖에서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제가 포수였어요. 정말 거기는 에어컨도 없고, (탱크) 자체가 쇳덩이니까 훈련 같은 거 나가면 진짜 너무 더워서 실신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훈련 나가면 재미있었죠. 게임을 하는 것처럼 (웃음) 포를 딱 쏘면 시원하게 딱 나가고, 막 10대가 한꺼번에 쏘면 엄청 멋있거든요.





LE: [一喝 (일갈)]의 사실상 마지막 트랙인 “영장을 받아 든”을 들어보면, 어떤 특별한 시각이 있기보다 정말 입대를 앞둔 20대 초반 남자의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여러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어요. 입대 전에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던 건 아닌가 싶은데요. 아니면 [一喝 (일갈)]을 내야 하는 거에 집중을 많이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요.

앨범을 내는 건 내는 거였고, 가는 건 또 가야 하는 거기 때문에… (웃음) 당연히 가기 싫었죠. 근데 방법도 없고, 가야 하고 하니까 받아들였죠. 어떡하겠어요.





LE: 다른 분이라면 이런 질문을 안 했을 텐데, 제리케이 씨니까 이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군대 내에서의 부조리는 지난 10년여간의 많은 사건으로 인해 이미 외부 세계로 빈번히 알려졌잖아요. ‘까라면 까’ 식의 사고방식에 단순히 복종하기에는 개인적으로 여러 생각이 많이 드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근데 제가 입대했을 때, 전군에 걸쳐서 불합리한 부분을 많이 고쳐나가는 중이었던 것 같아요. 폭력도 금지하고. 특히, 저희 부대는 일과가 빡센 부대다 보니까 내무 생활을 편하게 해줬어요. 계급에 상관없이 편하게 쉬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저는 당연히 부조리함이 어느 정도는 있긴 했지만, 순응하고 적응을 잘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일 잘하는 병사같이.





LE: 말씀을 들어보면, 시스템에 대한 순응을 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잖아요. (웃음)

그렇죠. 전혀 안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 저는 일생을 순응하며 살다가, 회사를 뛰쳐나오면서 처음으로 거부한 거예요. 그 전에는 반항이라고 해봐야 고등학교 때 랩 대회 나간 거, 집에선 반대하는 데 소울 컴퍼니 앨범 낸다고 휴학한 거, 이 정도밖에 없어요. 저는 정말 체제 순응적으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에요. 물론, 그런 결과로 학업에서는 좋은 성적을 얻은 부분도 있겠죠. 저는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도 학벌이 대표하는 부분이 이 사람이 머리가 좋은지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시스템에 순응적인지를 평가하는 지표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거든요. 제가 굉장히 그런 사람이었어요. ‘반항해 봤자야.’라고 옛날에는 생각했었죠.





LE: 군 생활을 하며 테크닉적으로나 가사를 쓰는 데에서나 어떤 변화 같은 게 전역 이후에 느껴졌나요? 어떤 뮤지션 분은 군대에 다녀와서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나아진 면도 있다고 얘기하시기도 하셨던 것 같아서요.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듣기에 그렇게 느끼는 분들도 있고요.

저는 랩에 대한 감을 다시 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물론, 군대에 있으면서도 가사를 쓰곤 했죠. 보초를 서면서 머릿속으로 막 라임을 써보기도 하고.





LE: 제이지(JAY Z) 인데요? (웃음)

제이지는 머리에서 바로 나와서 하는데, 저는 수첩에 적어서… (전원 웃음) 조그만 라임 노트가 있었거든요. 거기다가 가사를 적은 후에 정리하고 하면서 감을 조금 유지했어요. 그래도 제대하고 나서 전반적인 감이 많이 떨어지긴 했죠. 그 당시에 다른 소울 컴퍼니 멤버들도 군대에 다 다녀왔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모두 군대에서 겪었던 내용으로 가사를 쓰고 싶어 했죠.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얘기인데, (웃음) 그런 식으로 주제나 스타일에서 감을 잘 못 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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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입대 전후로 마음 안에서 크게 변화가 있었어요. 군대 가기 전에는 제대하면 음악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어요. 가사 쓰고 이런 거야 그냥 재미있어서 한 정도였고. 그러다 2005년에 휴가를 나왔는데, 당시에 더콰이엇이 다이나믹 듀오 콘서트에 같이 참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콘서트에 저를 초대해서 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근데 사람이 꽉 채워진 공연장에서 더콰이엇이 공연하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약간 바뀌더라고요. ‘그래도 시작했으면 저 정도는 해보고 그만둬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제대하고서도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저의 마음이 바뀐 전환점이었어요.





LE: 왜 원래는 전역 이후에 음악을 못하겠다고 생각하셨나요?

현실적인 이유였죠. 취업도 해야 하고 하니까.





LE: 군대를 갔다 오니 레이블이나 씬이 어떻게 바뀌어 있었던가요? 사실 한국힙합 씬이 좀 더 붐업되던 시기는 그 이후라 크게 변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한데요.

그렇죠. 우선, 소울 컴퍼니가 그 사이 엄청 잘 나가는 레이블이 되어 있었죠. 키비나 더콰이엇, 화나 앨범이 다 흥하고 잘 됐죠. 게다가 저랑 다른 친구들이 다 군대에 거의 동시에 갔다가 다 같이 전역해서 힘을 확 모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도 했죠.





- 로퀜스, [마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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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후에도 얘기하겠지만, 제리케이 씨의 커리어를 보면 군대, 회사 생활과 같은 특정한 이벤트가 있지 않은 이상 곳곳이 여러 작품으로 빽빽해요. 은근한 다작 왕이시죠. (웃음) 그 또 다른 예시라고 할 만한 앨범이 바로 로퀜스의 [Crucial Moment]죠. 첫 트랙 인트로에서 메익센스 씨가 외치듯 2007년 소울 컴퍼니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었고, 제대한 시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게 나온 앨범이었어요. 우선, 작업하게 된 계기나 작업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전역하자마자 솔로 곡을 써보고 했는데, 진짜 감이 없어서 구렸어요. 그런 (구린) 곡들을 만들다가 본격적으로 앨범 얘기를 시작한 건 제가 복학을 하고 나서였을 거예요. 2007년 5월에 앨범이 나왔는데, 제가 복학하는 시점 조금 전부터 작업했다고 하더라도 엄청 빡세게 진행을 한 거죠. 그때 제가 노원구에 집이 있었고, 학교가 서울대니까 왔다 갔다 하는 데만 약 3시간이 걸렸어요. 그래서 가는 차와 오는 차에서 과제 다하고, 그리고 메익센스네 집에 가서 작업하고 집에 오고, 그 패턴을 두 달간 반복했죠. 메익센스는 솔직히 집에 있다가 저 올 때쯤 일어나서 편하게 했는데. (전원 웃음) 사실 저는 그때 제 시간 관리 능력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나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웃음) 하면서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제가 회사에 다니면서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밑바탕이 되었죠.





LE: 사실 이 앨범은 제리케이 씨의 커리어 일부분이면서도 앨범의 결이 가장 이질적이기도 해요. 제리케이 개인의 이야기든, 그 개인의 시야에서 확장된 사회적인 이야기든 간에 그런 소위 ‘와 닿는’ 이야기가 중심이진 않거든요. 그보다는 하드코어한 프로덕션과 꽤 호러블하고 거친 표현들이 주를 이뤄요. 일단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음악의 궁극적인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 아닌가요?

그래서 되게 스트레스도 많았어요. 둘의 공통분모를 담아내야 하잖아요. 근데 저랑 메익센스는 정말 다른 사람이거든요.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고등학교 때 노래방 메이트였다든가, 그리고 센 음악을 좋아했다는 거밖에는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많았죠. 앨범 사이에 들어가는 부분을 최대한 맞춰서 만들다 보니까. 그래서 제가 솔로 앨범에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던 거 같아요.





LE: 팀으로서 앨범 한 번은 내야 한다는 생각에 내신 감도 있었다고 봐야 할까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다만 로퀜스 앨범 색깔이 소울 컴퍼니에서도 결이 다르다 보니까, 전부 다 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죠.





LE: 그 당시에 씬의 리스너들에게 기대감이 높았던 앨범이었던 거 같아요. 앨범도 잘 팔리고, 공연도 잘되고 했었죠.

아마 그랬죠. 그때 저희랑 딥플로우 앨범이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같이 조인트 쇼케이스를 했었어요. 당시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빅딜VS솔컴’ 구도를 스스로 허물면서 콜라보 곡도 공개하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LE: 그래도 앨범은 재미있는 구석이 많아요. 메익센스 씨와 서로 주고받는 랩 퍼포먼스도 그렇고, 이그니토(Ignito), 셀마(Celma), DC, JJK, 도끼(Dok2), 있다, 매드 클라운(Mad Clown), 최적화까지 적재적소에 배치된 게스트도 그렇고요. 확실히 어떤 특정한 무드를 잘 풍기고, 이미지를 잘 구현해낸다는 느낌을 주는데요. CD를 완판하면서 흥행 면에서도 좋았고요. 앨범 전반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해요.

사실 잡다하죠. (웃음) 그냥 얘네가 그때 하고 싶었던 게 많기는 했는데, 그걸 추려내느라 고생했을 거 같다는 그런 느낌이에요.





LE: 게스트 중에서는 JJK 씨가 눈에 띄는데요. 그 당시에 JJK 씨는 씬에 많은 교류가 있던 래퍼는 아니었잖아요. 그 당시에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저랑 메익센스는 JJK의 랩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 곡에 어울릴 것 같아서 피처링 제의를 했고, 그래서 녹음을 하러 왔죠. 근데 녹음을 한 번에 끝내서 우리가 “말도 안 돼.”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너무 깜짝 놀랐어요.





LE: 이때는 아니었지만 최근 커리어를 보았을 때 JJK 씨와 제리케이 씨가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다른 건 차치하고 두 분 다 ‘독고다이’랄까요. 최근 들어 생각하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조금 있지 않나 싶어요.

근데 JJK가 최근에 “난 힙합이 뭔지도 모르겠고, 나는 힙합이 아니다.” 라고 선언을 했거든요. 게다가 <쇼미더머니>에 대해서도 대놓고 싫어한다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그래서 크게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래도 제가 그 친구가 하는 인터넷 방송 <UH!TV>에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면서 씬에 계속 관심을 끊지 않는다는 정도가 공통점인 거 같아요.





LE: 두 분 다 유부남이기도 하셔서 최근 들어서 더 대화를 많이 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유부남이라는 공통점 같은 부분은 어떤가요?

사실 저는 애가 없고, 그 친구는 아이가 있잖아요. 그 차이가 엄청나요. 그런 측면에서 공통점은 잘 못 느껴요. 그저 저랑 제 와이프가 결이의 엄청난 팬이라는 것 말고는. (웃음)





LE: 로퀜스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볼게요. 로퀜스는 이후에 세 장의 싱글 앨범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어요. 메익센스 씨가 활동을 활발하게 하시지 않기도 했고, 제리케이 씨가 노선 자체가 달라지기도 했죠. 아쉬움 같은 건 없으신가요?

팀으로써 제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었죠. [마왕]을 작업하고, 그 이후에 [True Self]를 하면서 훨씬 더 그랬죠. 제가 메익센스랑 인간으로서 공통점이 많이 없다 보니까, 팀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더라고요. 근데 그 친구를 음악 세계에 끌어들인 사람이 저였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의 책임감이 있었죠. 지금은 서로의 삶이 많이 달라져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상태에요.





LE: 2007년이 로퀜스로 활동했던 해였다면 2008년은 솔로 아티스트로 첫 정규 앨범을 발표했던 해였어요. 바로 [마왕]인데요. 우선, 잘 모르실 분들을 위해, 또 잊고 계셨을 분들을 위해 이 앨범의 제목이 왜 마왕이었고, 또 그에서 발현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다시 짚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정한 건, “마왕”이라는 곡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마왕”이라는 곡을 쓸 수 있었던 거는 1번 트랙에 “Intro: The Erlking”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건 슈베르트(Schubert)의 곡 “마왕”에서 따온 거였어요. 슈베르트의 곡 가사 중에 있는 “아빠 마왕이 날 따라와요, 당신이 한 짓을 다 아나 봐요”라는 가사를 제가 대학교 음악 수업에서 접했어요. 배워서 잘 써먹은 경우죠. (웃음) 그 구절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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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예전부터 앨범 전체의 서사를 기획하고 앨범을 만들기보다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쳤을 때 그걸 담아내는 타입이에요. 그렇게 작업해서 만들어진 곡들을 모으다 보니까, ‘인간다운 삶을 막아서는 무언가’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같더라고요. 그 존재를 마왕이라고 칭하고 설정하게 된 거죠. 사실, 마왕이라는 앨범 타이틀을 정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마왕이라는 타이틀은 신해철의 거였고, 신해철은 저의 히어로였기 때문에. 그때 더콰이엇이랑도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마왕이 가장 강렬하고 대표성이 있는 것 같다는 최종 의견이 나왔죠.





LE: 계속해서 신해철 씨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신해철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망했을 때의 심정이라든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궁금한데요.

어릴 때 제가 봤던 신해철이라는 사람의 음악은 그냥 진짜 멋있었어요. 그게 진짜 멋이라고 생각했죠.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그런 모습들이 멋있게 보였어요. 자연스럽게 제 안에도 그런 성향이 조금씩 쌓여갔죠. 그렇다 보니 [一喝 (일갈)]에서부터 [마왕], 그 이후에 앨범에서도 남들이 안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의문을 제기하려 하는 등의 성향을 보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원천에 신해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신해철 씨가 죽었을 때, 저는 제 윗세대가 느끼는 상실감을 느꼈어요. 당시에 제 윗세대는 정말 한 시대가 저문 것 같다는 표현을 많이 했었는데, 저한테는 정말 그랬거든요. 어느 시점부터는 제가 신해철의 음악을 듣지도 않았고, 그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제가 살아가는 코어의 성질에 신해철이 있기 때문에 상실감이 컸고 슬픔도 컸죠. ‘이 사람이 나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구나.’를 느낀 거죠. 제가 힙합 음악을 한 이후에는 신해철의 활동에 대해서 별로 팔로우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LE: 그럼 힙합 쪽에서 지금 삶에 모티브를 준 사람이 있을까요?

힙합 쪽이면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가 있을 거 같아요. 루페 피아스코가 저에게는 이런 이미지에요. 자기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도 상업적인 성공도 챙겨갈 줄 아는 아티스트. 물론, 그게 자의든 타의든지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지금은 ‘No Role Models’ 주의이지만. (웃음)





LE: 이때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사회 곳곳의 문제들에 관해 본인의 시각을 늘어놓으시잖아요. 그사이에 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그 의식을 랩 안에 꾸준히 담아내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사명감 같은 거는 전혀 없어요. 그냥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이 가는 거밖에 없어요. 힙합에서의 랩이라는 게 삶에서 느껴지는 걸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회적인 발언을 해야겠고, 해야 해.’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내가 하고 싶다.’ 쪽에 더 가까워요. 관심 있으니까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관심이 있음에도 다른 계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답답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죠.





LE: 뒤에서도 이에 관한 얘기가 계속 나오겠지만, 대중들이 “제리케이는 정치적이다.” 등의 말로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하잖아요. 근데 사실 정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그런 부분이 정체성으로 인식될 만한 것도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은 정치적이고 또 사회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그래서 본인을 ‘사회적 메시지를 자주 던지는 래퍼’, ‘컨셔스 래퍼’ 등의 수식어로 표현하는 데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기대와는 달리, 얘기할 게 별로 없어요. (웃음) 컨셔스 래퍼라는 게 사실 분류하기 나름이잖아요. 사람들의 분류 기준에 따라서 제가 하는 랩을 의식 있다고 해주면 ‘그런가 보다.’ 해요. 제가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같은 앨범도 냈으니까, 오히려 저를 그런 곡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제리케이 달달한 노래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도 있어요. 그냥 분류 기준 정도라고 생각해요.





LE: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같은 앨범만으로 본인의 음악성을 알고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어쩔 수 없죠. (웃음) 사실 그것보다는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와 [연애담 2]를 통틀어서 음악적인 완성도에 아쉬운 측면이 많죠. 제가 좀 더 잘했어야 하는데… 그래야 ‘이거 내가 낸 앨범이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죠.





LE: 누군가는 제리케이가 하는 영역이 블루오션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웃음)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뮤지션으로서의 저의 모습도 있고, 데이즈 얼라이브를 운영하고, 제 앨범을 마케팅해야 하는 모습도 있어요. 저는 온전히 아티스트로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살 타입도 아니에요. 논리적이거나 사무적인 일이 조금 있어야 일상생활이 유지가 되는 타입이거든요. 그런 쪽에서의 자아로 생각했을 때는, 제가 가진 색깔이 유일무이하고, 그렇기 때문에 파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거를 저보다 세련되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제가 가진 영역에서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아무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아날로그 소년도 있고, 루드 페이퍼(Rude Paper)가 그런 쪽으로 손을 대고 있기도 하고. 근데 제가 그냥 유난히 하나 봐요. (웃음)





LE: 그런 이미지만 유달리 세다 보니까 외롭거나 고독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나요? 자존감이 강해야만 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이거를 해야겠다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제 마음과 머리에서 나오는 게 이런 이야기이기 때문에, 외로움 같은 건 없어요. 대신, 제가 어떤 음악을 내거나 발언을 했을 때, 앞뒤 없이 그냥 ‘저건 정치다.’라고 딱지를 붙이거나 할 때는 조금 짜증 나긴 하죠. 




LE: 지금까지 해오신 스타일의 음악을 함으로써 얻는 부분과 잃는 부분이 있을까요?

얻는 건 그냥 계속 이런 측면에서 유일무이하고,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용감하고 뚝심 있는 이미지를 가져가는 거? 마케팅 측면에서는 이런 부분이 저란 사람의 가장 큰 무기거든요. 잃는 거라면 아까 말했듯 뭘 해도 정치라고 욕을 먹게 되고,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죠. 어떤 의견을 내고 그 의견을 강하게 낼수록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 존재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불호가 많아지게 되는 거죠. 사실 엔터테이너의 입장에서는 이런 부분이 하면 안 되는 부분일 수도 있어요. 적을 만들고 다니는 거니깐. 그런데 어떡해요. 저는 이런 이야기 하고 싶은데. 감수하고 사는 거죠.





LE: 얻는 거라고 하면, 한국힙합 씬의 층위가 대체로 고정된 편이잖아요. 예전보다는 연령적인 층위가 넓어지긴 했지만요. 그런 측면에서 계속해서 다른 시장, 층위를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실 것 같아요. 아까 얘기해주셨던 공연들에서 기존의 힙합 팬이 아닌 분들이 오셨던 것처럼요.

최근에 그런 걸 절감했던 거 중 하나는, 제가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아를 발현하고, 그것과 관련된 곡을 낼 때마다, “힙합이 정말 싫어졌는데 당신 때문에 다시 듣게 됐다.” 혹은 “진짜 한국 힙합 못 들어주는 건지 알았는데, 제리케이 노래를 듣고 보니 들을 수 있겠다.” 이런 피드백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제가 정말 힙합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전원 웃음)





LE: 다시 돌아와서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볼게요. [마왕]에 수록된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진 가장 대표적인 곡들을 꼽으라면, 정치권을 풍자한 “베짱이”, 교육 제도와 그에 순응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아이들이 미쳐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왕” 등이 있어요. 이때 제리케이 씨가 고수하던 뉘앙스가 대단히 강한 편이라 계몽적이라는 인상까지 들어요. 이때 곡을 풀어냈던 방식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요? 좀 더 젊었던 제리케이의 패기를 볼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지금보다는 서툴고 투박한 면도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전반적으로 투박하긴 해요. 음악적으로 제일 아쉬운 트랙은 “You Did It Again”이었어요. 얘가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지루하게 만든 곡이었죠. 제가 [마왕]을 내고 나서 가장 많았던 부정적인 피드백이 지루하다는 거였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은 많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거를 묘사하다가 지치는 느낌이었어요.





LE: 최근 들어서야 페미니즘에 관한 이슈가 부각되지만, 사실 제리케이 씨는 이때부터 이미 어렴풋이 페미니즘 담론의 곁다리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을 던졌다고 생각되는 게 “떠나보내는 사람을 위한”과 “You Did It Again”이 있기 때문인데요. 두 곡 모두 아주 직접적이지도 않고, 또 페미니즘의 결과는 다른 결을 보유한 트랙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에 대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도 마찬가지고, 마왕이 말하려고 했던 기조도 마찬가지고, 누구나 인간다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기저가 깔렸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LE: 특히나, “떠나보내는 사람을 위한”은 시각 자체가 더욱 돋보였던 거 같아요. 

그때는 그냥 ‘다 그럴 만하니까 그러겠지.’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단순하게. (웃음) 그렇기 때문에 아까부터 제가 말하는 거예요. [마왕] 앨범을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말’이라고. 지금처럼 많이 알아보고 생각해보고 썼다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래서 이번 <EBS 스페이스 공감> 공연에서도 “옛날부터 팬인데, 옛날 노래 좀 해주세요.” 라고 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럼 저는 “이번 앨범이 훨씬 좋아서”라고 말해요. (웃음) 





LE: 그래도 인식적인 측면에서 계속 많이 발전하신 것 같아요. 페미니즘 의제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시고 공부도 하시는 거 같아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죠. 슬릭이 추천해 준 여성혐오에 관한 책도 읽어봤고, 깨달은 부분도 많죠. 그런데 최근에 트위터에서도 본 건데 여성 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조심하며 사는 거고, 이왕이면 조금이나마 더 인지하며 조심하며 살 뿐이라고 쓰인 글을 봤었어요.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더 조심하고 예민하게 사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힙합의 중요한 코어에는 떳떳함이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LE: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그런 게 많이 느껴지나요? 그때는 그런 생각 없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재들과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된다든가…

정말 그래요. 그 당시 저에게서 뮤지션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공적인 자아도 그렇고, 사적인 측면에서도 생각해보면 그냥 한남이에요. (전원 웃음) ‘깨시한남’이라고나 할까? 그냥 그런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한 번씩 생각날 때가 있는데, 아찔해요. 지금 기준으로 볼 때는 ‘내가 진짜 미친놈이었구나, 몹쓸 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날 때가 있는데, 아마 몇 년이 지나 지금의 저를 바라보면 그런 측면이 다시 보일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더 예민하게 사려고 하는 거죠.





LE: 문득 드는 생각인데, 왠지 많은 분이 제리케이 씨를 되게 이성적인 사람으로 볼 것 같은데요. 말씀하시는 거로 유추해보면, 되게 감정적인 부분도 많으신 것 같아요. 스스로 보기에 감정적인 측면이 동력으로 작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죠. 저는 제가 그렇게 이성적이라고 생각을 잘 안 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티스트로서의 저와 실무를 하는 저가 공존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 두 가지의 균형을 잘 잡으며 살아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을 때도 있어요.





LE: “Stay Strong” 같은 트랙을 보면, 감정적인 것을 동력 삼아 착안해낸 아이디어, 메시지를 되게 정갈하게 논리적으로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네. 그거는 아까 말했던 딜리버리에 대한 추구에서 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LE: [마왕] 이야기를 여담으로 조금 더 해보자면, 말릭 비(Malik B.)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말릭 비가 “손가락질”이란 트랙에 참여하게 되는데, 사실 말릭 비의 가사가 그 노래와 크게 관련이 없잖아요.

네, 없어요. (전원 웃음) 그때는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고 포장해보려고 애썼는데, 사실 없죠. 





LE: 그 과정이나 왜 그런 주제와 맞지 않는 벌스를 넣게 되었는지 궁금하거든요.

그게…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외국 래퍼 중에 누군가와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비트가 랍티미스트(Loptimist)의 비트였고, 그때 랍티미스트가 외국 아티스트들과 많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많이 알아봤어요. 그때 연락이 닿았던 사람 중에 범피 너클스(Bumpy Knuckles)도 있었어요. 거의 될 뻔했는데, 안 됐어요. 그래서 몇 명을 알아보다가, 최종적으로 오케이된 게 말릭 비였죠. 그런데 “말릭 비와 함께할 거다.”라고 말했을 때, 소울 컴퍼니 내에선 ‘굳이 페이를 줘가면서 그 사람이랑 할 필요가 있겠냐’라는 반응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더 루츠(The Roots)에 빠져있었으니까, (거기서 오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했죠. 근데 이 사람이 녹음을 해서 보내줘야 하잖아요. 마스터링하는 날까지 안 오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제겐 솔로 버전이 따로 있어요. 솔로 버전으로 마스터링을 했죠. 곡 수가 많으니까 마스터링 기간이 길어져서 이틀로 나눠서 했는데, 첫째 날 마스터링을 하는 도중에 메일이 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실은 거죠. 검토할 새도 없이. 왜냐하면, (빨리) 넘겨야 했고, 무엇보다 제게는 너무 의미 있는 작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일정에 쫓겨서 하다 보니 일어날 수 있는 에러였던 거죠. 





LE: 그러면 그걸 빼고 리믹스로 공개한다든지 하는 식의 플랜B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그때는 그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그때가 2008년이니까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가 될락 말락 하던 시기예요. 뭔가를 추후로 공개한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LE: 지금 같은 개념이 아니었던 거죠.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솔로 버전으로 가고, 추후에 리믹스로 해서 싱글을 따로 하면 돼요. 그런데 당시에 그게 아니었던 거죠. 





LE: 말릭 비와는 그렇게 되었는데… (전원 웃음)

그렇게 됐죠. (웃음)





LE: 결이 좀 다를 수 있는데, 대니 디(Danny Dee)의 경우에는 아이새이야 라샤드(Isaiah Rashad)의 작업물에 참여한 프로듀서잖아요. 대니 디 같은 외국 프로듀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유는 말릭 비 때와는 다른 이유여서였겠죠?

제가 구현하고 싶었던 사운드가 있었고, 좋아하던 사운드가 있었는데, 대니 디가 그런 쪽이었어요. 말릭 비의 경우에는 애초에 시작이 ‘외국 래퍼 피처링뽕’ 같은 거였죠. 랍티미스트가 그걸 워낙 잘했고, 너무 멋있어 보였으니까.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말릭 비가 더 루츠의 멤버라는 게 결정적이었던 거고요. 앨범을 내고 나서 여름방학 때 제가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갔었거든요. 한 달 정도. 그때 말릭 비를 만나기로 했었어요. 제가 필라델피아에 가서요. 그런데 그때 전화가 안 됐고, 그래서 못 만났어요. 만났어야 했는데 너무 아쉬워요. 그때 필라델피아의 썩은 호텔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보냈던 시간이 기억이 나네요. (전원 웃음)





LE: 그때는 그때고, 그 이후의 커리어를 보면요. 국내든, 국외든 그런 유명한 기성 아티스트를 찾기보다는 신인 아티스트들과 작업하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이번 앨범에 참여한 디스이즈매너(This Is Manner) 씨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이제는 아예 피처링 기용에서 기준 자체가 많이 달라진 거겠죠? 

전혀 다르죠. 지금은 최대한 완성도에 맞는 누군가를 찾으려고 노력해요. 굳이 신인이 아니더라도요. 디스이즈매너 같은 경우에는 그 곡에 들어갈 보컬을 찾기 위해서 정말 노력을 많이 하던 차에 디스이즈매너를 발견했던 거예요. ‘아, 이 사람을 쓰는 건 도박일 수도 있겠다. 아주 좋거나 아주 구리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굉장히 잘 맞아 들어간 거죠. 만약 받았는데 구렸으면 안 썼을 거예요. 그 자체로도 되게 멋있는 뮤지션이지만, 곡에 안 맞았더라면 안 썼겠죠. 마스터링 전날에 하는, 그런 것처럼 하지는 않았겠죠. (웃음)





LE: 이번 앨범에서 우효(OOHYO) 씨도 그렇고, 홍효진 씨도 그렇고, 영역을 굳이 힙합에 한정하지 않고 넓게 보시는 것 같아요.

저는 남들이 다 쓰는 피처링 또 쓰는 거 안 좋아해요. 이번 앨범에서 나플라(Nafla)나 루피(Loopy) 같은 경우에는 제가 먼저 작업했는데, 늦게 나온 거고요. 딥플로우 같은 경우에는 그런 벌스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딥플로우 밖에 없다고 봤어요. 저는 새로운 그림을 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대니 디, 디스이즈매너 같은 사람들도 찾아서 하는 거고요. 스위프 디(Swift D) 같은 경우도 그렇다고 볼 수 있죠.





- 현대카드 프리미엄 마케팅팀 김진일 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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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마왕] 이후에 현대카드 입사 얘기를 안 할 수 없겠죠. 입사하기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이력서도 많이 돌리셨다고 알고 있어요.

앨범을 내고 나서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한 달 동안 미국에 배낭여행을 다녀왔어요. 다녀오고 나서 방학이 끝나고 대기업 공채 시즌이 시작됐죠. 정확히는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그걸 준비하는 시즌이 시작된 거죠. 제가 취업 스터디를 시작한 거예요. 제리케이가! (전원 웃음) 그것도 스터디를 두 개나 했어요. 취업 스터디해보셨나요? 그게 뭐하는 건지는 아시죠?





LE: 그냥 뭐, 취업에 관해서 공부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취업에 관해서 뭘 공부하겠어요. (전원 웃음)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모의로 면접을 하고, 자기소개하는 거 피드백해주고, 자소서 써온 거 첨삭해주는 거예요.





LE: 그리고 연애도 하고.

그 안에서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죠. 그때 저는 학교에서 스터디를 하나 구하고, 밖에서 하나 구해서 스터디 두 개를 나갔어요.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면, 저와 비슷한 학번을 가진 사람들은 스펙을 많이 준비했었어요. 어학연수는 기본 옵션이고, 자격증, 인턴 같은 걸 다 준비해놨어요. 토익은 따야 하니까 저도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 따놨는데, 그 외에는 스펙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거예요. 딱 하나 있는 게 소울 컴퍼니에서 경영을 한 거죠. 이거를 어떻게 포장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그냥 ‘랩을 했다.’가 아니라 ‘음악을 하면서 경영을 했다. 내가 소울 컴퍼니의 언론홍보 팀장이었다.’라는 식으로 포장했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지금 제가 인사팀에서 그런 걸 보면 “뭐야? 뭘 했다는 거야?”라고 할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취업하기까지의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원서를 한 40군데 정도의 기업에 넣었는데, 최종면접까지 간 데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예요. 최종면접이라 하면 자소서, 서류를 통과하고, 인•적성 검사를 통과하고, 1차•2차 면접을 가는 거죠. 공채시즌 초반에 LG전자가 나와서 넣었어요. 삼성은 안 넣었어요. 삼성은 싫어했기 때문에. (전원 웃음)





LE: 대기업은 가도, 삼성은 아니다.

삼성은 아닌 거죠. (웃음) 삼성에서 보는 SSAT, 그 관련 책은 아예 사볼 생각도 안 하고. 아무튼, LG전자가 있었는데, 그게 초반이었죠. 거기는 서류 통과자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인•적성 검사를 보게 해요. 인터넷으로 질문이 나오면 답을 하는 식으로 해요. 그건 대부분 통과한대요. 그런데 그때 제가 약간 피곤했고, 있는 그대로, 진실된 저로서 답변한 거예요. 그랬더니 떨어졌어요. 별로 안 떨어지는 건데. (전원 웃음) 그래서 그 뒤에 약간 각성을 하고, 면접 볼 때 가면을 쓰고 들어가서 면접을 봤죠. 그럼에도 저는 스펙이나 이런 것을 봤을 때, 메리트가 없죠. 솔직히 음악 하다 온 놈을 누가 회사에 데려다가 쓰고 싶겠어요. 그런데 현대카드는 좀 희한한 회사였던 것 같아요. 희한한 사람을 많이 뽑고.





LE: 그 당시에 내한공연을 많이 주최하지 않았나요?

<슈퍼콘서트>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어요. 그리고 마케팅적으로 튀는 행보를 자주 보여주는 데였죠. 그리고 현대카드에서 면접을 볼 때 제가 컨디션이 좋았어요. 그런 날이 있어요. 과장 비롯해서 실무진이 와서 토론을 시키고 하는데, 제가 어떤 키워드에 관해 잘 말해서 그 사람들이 “어, 괜찮네.”라고 했었어요. 최종 면접, 임원 면접을 봤을 때도, 그중 저를 좋아해 주신 분이 한 분 계셔서 “너 좀 특이한데, 그래도 일 잘할 것 같다.”라고 하셔서 뽑히게 된 거죠. 40군데에서 뽑힌 곳이 그곳 한 곳이었어요. 그 피 말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체중 7kg이 빠지고요.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렸었어요.





LE: 그게 2008년인가요?

2008년 말, 2학기.





LE: 그 당시에 취업 시장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나요?

지금보다야 나았겠죠. 지금보다 나쁠 수가 있나요? 그럴 수 없죠. 그래도 그 당시에 대기업들은 채용을 했었고,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많은 회사에 지원할 수 있었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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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현대카드에서의 소속 팀이나 맡으신 업무는 어떤 거였나요?

그것도 굉장히 아이러니해요. 제가 [마왕]에서 보여준 모습은 비판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느낌이잖아요. 제가 현대카드에 입사해서 신입사원 연수를 가서 한 달 정도를 합숙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부서별로 가서 체험도 해요. 그 후에 부서 배치 발표가 나는데, 제가 “김진일, 프리미엄 마케팅팀”이라는 거예요. 사실, 프리미엄 마케팅팀이 다른 친구들에겐 선호의 대상이었어요. 왜냐하면, 밖에서 현대카드를 봤을 때, 가장 재미있어하는 게 광고와 문화행사들, 프리미엄 카드였거든요. 부자들 대상으로 한 카드예요. 블랙 연회비가 당시에 100만 원이었고, 퍼플이 30만 원, 레드가 10만 원이었으니까. 그 팀에 저를 배치한 거예요. (전원 웃음) ‘이 회사 미친 거 아닌가? 나란 사람을 너무 모른다.’라는 생각을 했죠. 제가 배치됐던 업무가 퍼플이었어요. 블랙은 총 1만 장 리미티드이고, 입회할 수 있는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워요. VVIP, 회장급. 그 바로 아래가 퍼플인데, 제가 여기에 배치됐었어요. 들어가서 제일 먼저 했던 프로젝트가 연회비 30만 원짜리 퍼플 상품을 60만 원짜리 상품으로 만드는, 두 배로 업그레이드하는 프로젝트에 저를 넣은 거예요! (전원 웃음) 거기다가 제가 들어갔을 때 제 사수 역할을 해주셨던 분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퇴사를 했어요. 미치겠는 거예요. 너무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정서를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에서 어느새 책임자가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도 어떻게 1년을 퍼플 일을 하면서 지내고, 1년이 지났을 때쯤 팀을 옮겼어요. 그때 소셜미디어 관련된 팀에 가게 되었는데, 제가 그때부터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었어서 가고 싶었던 부서였죠. 그런데 거기서 제가 실제로 맡았던 일은 현대카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기획 일이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그때 칸예 웨스트(Kanye West)와 루페 피아스코가 내한했을 때, 도끼와 더콰이엇의 공연이 있어서 그 친구들의 운전사로 갔었어요. 공짜 표를 얻는 셈 치고 제가 운전해서 가서 공연 보고, 서울로 와서 애들 여의도에 내려주고, 다시 현대카드로 가서 다시 일하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힘들었죠.





LE: 그럼 현대카드에 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원으로 퇴사하신 건가요?

네. 다른 대기업도 비슷할 텐데, 사원에서 3, 4년 정도 해야 대리 진급 자격이 주어지잖아요. 저는 2년 반 정도 일하고 나왔으니까 사원이었어요.





LE: 예전 가사를 보면요. 로퀜스의 곡 중에 “월하독주”의 가사 기억하시나요? 음악한다고 그래 해라 좀 그러다 말겠지 / 부모님 말씀 뒤에 예전 그녀가 말했지 / 어차피 너도 언젠가는 취업할 거잖아”라는 취업에 관한 부정적인 가사가 있었는데, 취업을 하시면서 모순적이게 되었어요. 페이크 MC(Fake MC) 아닌가요…? (웃음)

그게 왜 페이크… (전원 웃음) 그게 뭐였냐면요. 그건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로퀜스를 작업할 때는 그 작업만 집중해서 했었고, 로퀜스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왕]에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음악,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랩을 하고서는 못 벌어 먹고 살겠구나.‘하는 생각을 그때 했었어요. [마왕] 앨범을 작업하면서요. ’이거로는 안 되겠다. 돈은 다른 거로 벌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음악을 해야겠다. 그렇게 투잡을 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로퀜스 때 엄청난 시간 관리 능력을 보여준 적이 있거든. 나는 할 수 있다. 한국힙합 씬에서 아무도 못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자신만만했었어요. 그래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 초반에 그렇게 하려고 되게 노력을 했었죠. 남는 시간이 있으면 소울 컴퍼니 사무실에 가고요. 당시에 저는 고문의 역할로, 가서 애들한테 쓴소리하고, “일 제대로 안 할래?” 같은 소리 하고 그랬었어요. 근데 그게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정신을 양쪽으로 나눠서 쓴다는 게 생각보다 정말 힘들고, 그걸 해낸다고 한들 음악만 하는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던 거죠.





LE: 방송국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PD는 집에 들어가는 날이 한 달에 손을 꼽는다더라.”라는 얘기가 이리저리 돌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아닌 경우도 많겠지만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야근이 많았을 것 같기도 해서 회사 생활하시면서 전반적인 스케줄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시즌에 따라서 달랐던 거 같은데, 프로젝트가 한창 바쁠 때는 정말 밤 12시 넘어서까지 일을 하고, 잠깐 자고 나와서 아침부터 일하고 그랬었어요. 그런 시즌이 지나고 나면 칼퇴근을 하는 날도 있었고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야근을 많이 했었던 거 같아요. 이게 진짜 너무 웃기는데, 그 현대카드가 당시에 7시인가, 8시인가가 되면 전 건물에 불이 다 꺼졌었어요. 그게 야근을 안 시키겠다는 그런 장치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야근을 하게끔 만들어요. 일이 너무 많거든. (웃음) 딱 불이 꺼지면 그 부서에 있는 막내가 관제실 같은 데에다 전화해요. 그러고 “5층 불 켜주세요.”라고 말해요. (전원 웃음) 뭐하는 거야!





LE: 겉으로는 “우리는 야근 안 시키는 좋은 데다.”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군요.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예요. 심지어 여름엔 그 시간이 되면 에어컨도 꺼요. 미쳐버리죠.





LE: 땀도 많이 흘리시는데…

더워 죽겠는데… (전원 웃음) 현대카드가 포장을 정말 잘하는 회사인 거죠. 겉에서 보기에는 (야근하거나) 그렇지 않은… 그리고 기업 문화 쪽으로도 자유로운 분위기, 빠른 의사 결정 이런 걸로 PR을 잘해놨었거든요. 근데 이게 실례가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겪어본 바로는 되게 힘들었어요.





LE: 그 이야기들이 녹아있는 게 아마 “신입 블루스”인가요?

그렇죠. 정말 자전적인 가사죠. (웃음)





LE: 그럼 현대카드에서 음악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아예 할 수가 없었겠네요.

회사에 다니면서는 그랬죠. 평소에 새로 나오는 신보들을 찾아서 듣곤 하는데, (커리어에서) 구멍이 뚫려 있는 지점들이 있어요. 그게 군대 갔을 때랑 현대카드를 다니던 시점이에요. 그때는 정말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때 뭐가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퇴사를 결심할 때쯤에 ‘아 제이콜(J.Cole)이랑 드레이크(Drake)가 이제 인기가 있구나!’를 알게 되었고 그랬었거든요. 그런 걸 찾아 듣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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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그런데도 예전에 에미넴(Eminem) 내한 공연을 했을 때는 식전행사로 무대에서 공연 같은 걸 하셨다는 정보가 인터넷에 있더라고요.

아, 그건… 퇴사하고 나서였어요.





LE: 아, 퇴사하신 후였군요. 생각해보니 시기가 그렇네요.

퇴사하고 나서 현대카드에 그 공연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힙합 공연이기도 하고, 현대카드 출신이기도 하니까 와서 공연하라고 하신 거죠.





LE: 페이는 주셨나요?

페이는 잘 주셨어요. (전원 웃음)





LE: 말씀을 들으니 회사에 다니시면서 신보 확인 같은 게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후부터 계산해보면 (제리케이 씨가) 씬 안에 있던 기간이 4, 5년 혹은 5, 6년이 돼가시잖아요. 사실 제리케이 씨가 퇴사하고 나서 갓 나온 음악 중에는 대개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모티브가 되어서 나온 노래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 생활이) 스토리 텔링적인 측면에서 모티브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은데요. 근데 이제는 회사에서 퇴사한 지가 어느 정도 지났으니 그런 모티브들을 지금은 못 얻는다든가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저는 삶에 드라마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걸 그때그때 삶의 궤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녹여내면 되는 거로 생각해요. 이번 앨범 같은 경우에는 그 궤적의 중심에 <쇼미더머니>가 있었던 거고, 다음 앨범에서는 또 뭔가가 있지 않을까요?





LE: 항상 보면 제리케이 씨는 그렇지 않지만, 요즘 젊은 랩퍼들이 특히나 그런 거 같은데요. 너무 힙합 안에서의 이야기만 한다고 할까요? ‘힙합을 위한 힙합’이라고 해야겠죠? 그런 게 너무 심하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씬 전체적으로 소재 고갈이 오는 거 같아요.

그렇죠. 저도 그런 걸 많이 보는 편이에요. 그런데 예를 들면, 일리네어 레코즈같은 경우에는 정말 그 안에 완전히 빠져서 사는 친구들이잖아요. 그러니 그런 음악들이 더 리얼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 제 삶이 그랬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더 리얼해질 수 있는 거죠. 근데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친구들이 저 같은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좀 미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나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온 친구들은 그 평범함 쪽에서 뭔가 다른 거를 찾아서 끌어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LE: 젊은 친구들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좀 더 강하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뭔가 관찰력을 키우면 좋을 거 같다든지…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 너까지 뭐 하러 하냐’ 이런 생각이 많이 들 때도 있어요. 저는 뭐라도 하나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가령 랩의 플로우나 뱉는 느낌이 정말 다르다든지, 정말 다른 이야기를 쓴다든지 아니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표현이 다르다든지… 뭔가 하나가 다르면 눈에 띄거든요. 왜냐하면, 똑같은 거 하는 애들이 정말 많아서 뭐 하나만 다르면 확실하게 눈에 띄어요. 그래서 뭔가를 해내고 싶으면 그런 차별점 같은 걸 스스로 찾으려는 노력해 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 거 같아요.





LE: 그 점에서 레이블 멤버 슬릭 씨나 던말릭 씨가 어떤 독특한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던말릭 같은 경우는 그 표현법을 아무도 못 소화해내요. 아무도 걔처럼 못해요. 두세 번씩 꽈서 말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속으로 담긴 의미가 동시에 이해가 될 수 있는 가사를 쓰는 거? 그러니깐 같은 나잇대나 같은 세대 (래퍼들의) 랩을 같이 놓고 들어보면, 그 깊이의 차이가 되게 느껴져요. 던말릭은 정말 훌륭한 리리시스트이고, 그래서 전 던말릭의 랩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슬릭 같은 경우에는 슬릭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위치? 씬에 희귀한 여성이고, 예전에 제리케이의 팬이라 공연을 찾아오던 아이에서 래퍼가 되는 그 서사, 그리고 그것들을 가사에 잘 녹여내면서도 훌륭한 스피팅을 보여주는 게 진짜 ‘One And Only’라고 생각해요.





LE: 잠시 또 데이즈 얼라이브 얘기를 하게 됐는데, 회사 이야기를 좀 더 이어 나가 볼게요. 그래도 회사에서 2년 반 정도 버티셨잖아요.

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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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버티면서 어떤 생각을 제일 많이 하셨는지 궁금해요. 또, 그 전까지는 순응하는 삶을 살다가 이때 사직서를 내시면서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거부를 처음 하셨다고 하니깐 그만큼 고민이 정말 많이 심화되었을 거 같거든요.

그게 역시 기대와는 다르게… (전원 웃음) 고민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그 이후에 제가 직관의 힘을 믿게 되었는데… 제가 회사에 다닌 지 1년 하고도 9개월쯤 정도 되었을 때, 결심했거든요. 그때가 어떤 상황이었냐면, 제가 있던 팀이 분리되려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가 하는 일은 소셜미디어 팀으로 분리되고, 원래 있던 팀은 남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요. 어느 날 팀장이 절 부르더니 “네가 지금 소셜미디어 팀에 해당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너는 지금 이 팀에 잔류하게 될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 되게 어안이 벙벙했었죠. 저는 나름대로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하고 있었는데, '나는 정말 부품이구나. 그냥 여기에서 빼서 여기에다 끼면 되는 그런 존재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때 약간 일종의 심리적인 충격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다음 날 휴가를 냈어요.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뒹굴뒹굴하면서 그냥 쉬고 있다가 퇴사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정말 직관적으로. 고민의 시간이 길지 않았어요.





LE: 쌓인 시간이 길었던 거죠?

정말 오랫동안 쌓여 있던 게 그 사건을 통해서 확 터진 거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직관 밑에 숨어 있는 게 어마어마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직관의 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진짜 정말 부품으로 살았던 거 같고, 이 삶은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이다’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고, (그 덕에) 고민의 시간이 길지 않은 채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죠. 오히려 진정한 고민은 이걸 어떻게, 어느 시점에 말할 것인가가 고민이었죠. 왜냐하면… 연초에 성과급이 나오니깐… (모두 웃음) 성과급은 받고 나와야지. 당장 제가 뭘 해 먹고 살지도 모르는데, 매달 꽂히던 월급이 끊기잖아요. 성과급이 그 당시에 되게 컸거든요. 그거라도 받고 나가야지. 그리고 퇴직금까지 딱 챙겨 먹고 나가야 그래도 한동안은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LE: 기초 자본이라고 해야겠죠?

있어야죠. 그 계산을 하고 어느 시점에 말할 것인지, 집에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 이런 고민이 컸던 거고, 그리고 나서는 실행 단계였던 거죠. 그래서 퇴사는 결심했지만, 밖으로는 밝히지 않았고, 성과급 시즌까지는 괜찮은 놈으로 보여야 하는 그 기간이 진짜 힘들었어요. (전원 웃음)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는 더는 일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까지는 적어도 평점이 B는 나와야 하는 거예요.





LE: 아, 평점이라는 게 있나요?

그럼요. 매년 사원들을 평가하죠.





LE: 인사고과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그 평점에 따라서 성과급이 달라지거든요. 개판 쳐서 C를 받으면 성과급 몇 백만 원이 날아가는 거예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가 진짜 힘들었어요. 매일 엄청 두꺼운 가면을 쓰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또 하나 힘들었던 시즌은 성과급을 받고 나서 “저는 이제 퇴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의 그 시간. 받자마자 나간다고 말하면은 너무 양아치 같잖아. (전원 웃음) 그러니깐 한 달 정도는 버텼어야 됐어요. 그런데 그 버티는 사이에 막 새로운 일이 막 들어오는데 전 나갈 거라서 이 일을 맡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또 말할 수는 없어. (전원 웃음) 정말 미칠 거 같았던 시간이었죠.





LE: 그럼 새로 맡은 일까지 마무리한 다음에 나가신 건가요?

아뇨. 그 일을 최대한 미뤘죠. 최대한. (웃음) 미루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저 퇴사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었어요.





LE: 2년 4개월 지나는 동안, 아까 말씀하셨던 사수 분처럼 본인보다 먼저 나간 사람도 보시고 하셨을 거 같은데요 대기업에 취직은 했지만 (버티지 못해서)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거 같은데, 어떤가요?

다른 회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되게 많았어요. 인력관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어요. 인력관리라 하면 사람들한테 적절한 롤과 권한을 부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권한을 부여해야 이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고,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데, 그걸 정말 못했어요. 그냥 롤만 계속 주고 권한은 안주니 결국에는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없고, 성취감도 없는 거죠.





LE: 그래서 한 가지 궁금한 점 중의 하나가 지금 사회에서 어딘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한입 모아 그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버티라고. 그런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그냥 버티는 삶을 사는 게 그냥 그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고, 본인은 주체적인 삶을 사는 선택을 하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제가 “신입 블루스”라는 곡에도 써놨지만, 진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말단 직원은 권한이 없으니까 어떤 백업을 계속해야 하고, 자기가 생각했을 때 ‘이건 아닌 거 같은데…’하는 일들도 맞는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거대한 조직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직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죠.





LE: 톱니바퀴처럼.

네. 그러니 (조직에서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그만큼의 권한을 가질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권한을 가지는 위치에 올라가는 건 자신이 어떤 커리어 패스를 쌓아가느냐에 따라 달린 거죠. 참고 버티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더는 못하겠다.’라는 생각을 한 거고, 그런 타입인 거고, 돌아갈 곳도 있었고요. 소울 컴퍼니라는 돌아갈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퇴사하는 게) 가능했다고 봐요. 가끔 “사직서”를 듣고 회사를 관뒀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SNS로도 전해져 와요. 어떤 지방 공연에 섰을 때, 어떤 분은 저한테 직접 와서 “사직서”를 듣고 2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관뒀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책임감이 진짜 엄청 들어요. 저는 확실히 돌아갈 곳이 있었어요. 그리고 확신이 있었어요. 그 확신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과는 상관 없이 그 당시에는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사직서”라는 곡만을 듣고 ‘혹시 내가 이 사람들의 인생을 망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LE: 생계든 뭐든 간에 그렇게 버티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감정이 많이 드세요? 위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거 같고,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 같고 한데요.

안타까움은 사실 되게 오만한 감정인 거 같아요. 그들이 고민한 끝에 계속해서 내리는 선택일 거 아니에요.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를 간다는 것 자체가 일어날 때 ‘아, 회사 가기 싫다… 하지만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선택하는 거잖아요. 가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진짜 그만하고 싶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퇴근할 때까지 일하고 들어 오는 게 그들이 하는 매일매일의 선택인 거예요. 그 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도 제가 너무 잘 알고 있고요. 아예 없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선택의 어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걸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실패자를 받아들여 주는 사회가 아니잖아요. 실패하면 그냥 끝인 사회에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깐 그런 삶을 사는 분들을 보면서 [True Self] 같은 앨범에서 “네 꿈이 뭐야?”라고 직접적으로 물으면서 결국 회사원이 될 걸 왜 그랬느냐고 이야기했던 게 지금은 되게 오만하게 느껴지는 거죠. (이제)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고, 다만 그 선택을 주체적으로 내렸길 바란다.’까지인 거죠.





LE: 궁극적으로 국가 혹은 시스템 탓을 해야 한다는 거로 귀결될 수 있을까요?

결국, 지금 같은 그런 삶을 살게 한 건 누구 탓이겠어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시스템의 탓인 거죠. 화를 낸다면 시스템에 화를 내는 게 맞는 거죠. 괜히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 때리지 말고.





LE: 이건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경향이 정권에 따라 급속도로 가속화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들어 와서…

제가 그런 쪽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의 사고의 폭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이명박 정부 이후이기 때문에 그 전 정권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이 잘 안 서요. 그런데 객관적 지표들로 보았을 때는 확실하죠. 두 정부가 이어져 오면서 훨씬 더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건 전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과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안 그랬을 것인가? 이거에 대해서는 답을 못 내리겠어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죠. 안철수 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훨씬 더 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거에 대해서는 답을 못 내리겠어요.





LE: 그게 정권의 문제인지, 시대적인 흐름인지 어떤 영향 때문에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하지만 정권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똑같은 시대 흐름에서도 정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의 정권은 확실히 국민 개개인의 삶에는 거의 신경을 안 쓰고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요. 사회적인 현실을 쭉 돌아봤을 때 그게 맞는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LE: 어쩌다가 사회, 정부 이런 이야기까지 길게 하게 되었는데… 회사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보자면, 지금 이런 본인의 독특한 위치라고 할까요? 회사에 다니다가 나와서 음악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음악. 이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레어템이죠.





LE: “사직서”를 낼 때쯤에 음악인으로 이런 이미지나 이런 서사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측을 하셨었나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던 거 같아요.





LE: 그냥 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거네요.

그 당시에 회사를 관둬야겠다 생각을 결심하고 나서 조금씩 가사를 다시 열심히 쓰기 시작할 때였으니깐. 그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곡이었죠. 그건 정말 그냥 번개송처럼 써놨던 건데, 타이밍이 잘 맞았기 때문에 발표하게 됐던 거였죠. 다시 말해서 그런 느낌의 서사를 제가 가지겠다 말겠다 그런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것뿐이죠. 아까 전부터 그건 계속 이어지는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때그때 한다는 거.





- 해체, 그리고 인디펜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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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때가 퇴사 후에 소울 컴퍼니가 해체되는 해였잖아요. 다시 돌아오니까 여러모로 예전이랑 상황이 많이 다르고, 해체 얘기가 돌고 하니까 당혹스러웠을 것 같기도 한데 어땠나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소울 컴퍼니에서 직함을 이사로 달고 들어왔었거든요. 그렇게 된 건 소울 컴퍼니 측에서도 저 같은 인력을 원했기 때문이었어요. 실무를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제가 와서 파악해본 바로는, 회사 재정상태가 썩 좋지 않았고 그걸 해결하는 역할을 제가 해야 했었어요. 그걸 나름 성공적으로 해냈고요. 근데 그렇게 하는 와중에 제가 실무적으로 소울 컴퍼니에 접근해서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음악적인 측면에서 신경을 거의 못 쓴 거예요. 그래서 그 간극에서 그동안 쌓여왔던 각자의 차이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해체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됐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된 거죠. 그래서 부산 소울 컴퍼니 쇼를 가서 공연을 잘하고, 다음날 낮에 모든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해체를 결정하게 됐죠. 창립 멤버들 몇 명은 펑펑 울었었어요. 정말 펑펑 울었고, 저도 되게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제가 돌아온 언덕이 없어진다는 것보다, 저를 비롯한 소울 컴퍼니 창립멤버들에게 있어서 소울 컴퍼니는 20대의 다른 이름이거든요. 20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20대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함께해온 둥지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게 없어지는 느낌이 너무 컸고, 당혹스러움이라기보다는 상실감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LE: 화나 씨나 DJ 웨건(DJ Wegun) 씨 같은 경우에는 과거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들은 넥스트 스텝을 고려하고 있을 때, 제리케이 씨가 소울 컴퍼니를 잘 마무리를 잘하려는 데에 많이 주력하고, 그런 점은 인정한다고 얘기를 하셨더라고요. 실질적으로 레이블의 마지막을 꾸리는 데에 어떤 부분에서 많이 일조하였고,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요.

일단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좋지 않았던 재정 상황을 박원순 스타일로… (웃음) 빚을 없애려고 했죠. 제가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래도 어쨌든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요. 소울 컴퍼니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가 굉장히 큰데, 그게 해체하려면 멋있게 해야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돼서 베스트 앨범을 만들고, 마지막 콘서트를 악스(AX Hall, 현 예스24 Live Hall)에서 열고 그런 과정 전반을 제가 주도해서 해나갔었어요. 근데 그때 진짜 힘들었던 건, 다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거였어요. 어느 회사랑 계약할 건지 고민하기도 하고, 소울 컴퍼니를 해체하기 전에 이미 스탠다트(Standart) 설립을 알리기도 하고… 그러는 데서 저는 진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었고, '왜 나만 왜 이 마무리를 잘하려고 하는 거지? 왜 다들 관심이 없는 거지?' 싶었어요. 마지막 콘서트는 그래도 마지막이고, 합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연습하자고 모이자고 하면 잘 안 모이고요. 어떻게 보면 되게 사소한 일들이죠. 사실 그 밖의 큰일들은 그냥 처리하면 되는 거니까. 공연기획 자체는 민트페이퍼(Mintpaper)의 에이제이(A Jay) 형이 많이 도와주셨고, 앨범 만드는 거야 그동안 수없이 해왔던 일들이니까 어렵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게 너무 어려웠었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되게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죠.





LE: 그때 그렇게 힘들었어도, 그렇게 일을 했던 것들이 본인에게 자산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네. 아까도 떳떳함에 관해서 얘기했었는데, 저는 그 과정에 있어서 정말 떳떳해요. 제가 소울 컴퍼니의 시작과 끝에서 코어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와도 다르게 나 혼자는, 적어도 나는 끝까지 그것에 충실했다는 것에 있어서 정말 저는 떳떳하거든요. 그런 자신감의 원천 같은 게 됐다고 볼 수 있죠.





LE: 여러 가지 얘기를 더 할 수 있겠지만, 그냥 다 떼어놓고 간단하게 얘기해서 본인이 기억하는 소울 컴퍼니는 어떤 곳이었다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리케이에게 소울 컴퍼니란?

아까 말씀 드렸 것처럼 20대. 저에겐 20대였어요. 제가 있을 곳이기도 했고, 돌아갈 곳이기도 했고, 나아갈 곳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The Bangerz]를 만드는 순간에는 나아갈 곳이었고, 제대하는 순간과 퇴사하는 순간에는 돌아갈 곳이었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제가 몸담고 있던 곳이었어요. 소울 컴퍼니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고, 소울 컴퍼니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힙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측면도 있고요. 그래서 저한테는 20대이자 너무나 중요한 것?, 달리 비유할만한 게 생각이 잘 안 나네요.





LE: 그런 정리와 함께 거의 맞물려서 발표하신 게 [우성인자]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해체하기 전에 나왔었죠.





LE: 근데 이게 그간 회사 다니면서 응축했던 에너지가 한꺼번에 발산됐다고 얘기를 하면 좋을까요? 작업하면서 의도했던 그림이라든가 그런 게 있었나요?

당시가 그래도 믹스테입이 나오던 시즌이었잖아요. 저에게는 'Warm Up'이 되게 필요했고, 다시 돌아와서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발표하는 공식적인 결과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에너지를 정말 많이 쏟아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이거 만들 당시에 제가 형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살던 집에 에어컨이 없었어요. 근데 한여름에 작업하느라, 진짜 너무 죽을 것같이 더운 와중에 땀 뻘뻘 흘리면서 창문을 열어놓고, 한밤중에 랩을 막… (전원 웃음) 그렇게 하니까 민원이 밑에 집에서 막 오고, 심지어 경찰도 한 번 온 적 있어요. 누가 경찰에 신고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찰이 와서 너무 시끄럽다고 하니까 좀 조용히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게 [우성인자]를 만들던 시즌이었어요. 그렇게 만들었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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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근데 [우성인자]도 그렇고, 이후에도 앨범이 많이 나왔는데, 래퍼로서 작업물을 꾸준히 많이 내는 것이 어떤 미덕 혹은 의무라고 생각하시는 경향도 있으신가요?

그렇진 않은데 어쨌든 믹스테입도 일종의 앨범이라고 본다면, 앨범 단위의 결과물이 그 아티스트의 색깔, 아티스트가 하고자 하는 음악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싱글 몇 개로는 절대 못 보여주는 거죠. 물론, 그걸로 긴 수명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지만, 전 그래도 앨범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프린스(Prince)가 죽기 전에 어떤 시상식에서, 아마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였던 거 같은데, 올해의 앨범을 발표하러 나와서 " 책과 흑인들의 삶처럼 앨범도 여전히 중요하다. (Albums still matter. Like books and black lives, albums still matter.)"라고 말했었거든요. 전 그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고, 앨범을 통해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5년 걸려서 진짜 마스터피스를 하나 빵! 내는 경우도 있겠죠.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그렇지가 않은 사람이에요. 저는 앨범을 만들 때 그때그때 감정에 굉장히 충실한 사람이고, 이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의미가 산화해버리는 걸 제가 느껴서… 시의성이 늘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됐을 때 빨리빨리 모아서 어느 정도의 완성도가 채워지면 내는 그런 타입의 사람인 거죠. 그렇게 꾸준히 괜찮은 결과물을 냄으로써 신뢰를 확보하는 타입이라고 저 스스로는 생각해요. 제가 “축지법”이나 이런 노래에서도 얘기하는 게, <쇼미더머니>에 나와서 반짝하고 그 뒤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너의 정체성을 작품으로 보여주지 않는 거야?’라는 불만이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거죠. 그들이 언젠가 뭔가 엄청난 마스터피스를 들고나오면 당연히 인정하겠죠.





LE: [우성인자] 믹스테입에서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랩 테크닉을 맘껏 뽐내기도 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많이 던지기도 하시는 데요. 그중에서도 <나꼼수> CM 송이 수록된 게 가장 눈에 띄어요. 그 당시에 <나꼼수>에서 음악가들을 모집하는 그런 게 있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나꼼수>가 가진 일종의 파워였죠. 많은 사람의 자원을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으니까. 그래서 저도 처음 시작할 땐 몰랐는데, 형이 언젠가 알려줘서 들어봤는데 재미있고, 정주행을 시작해서 듣다 보니까 중간에 CM송을 모집한다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나도 해보지, 뭐.’ 해서 만들어서 보냈는데, 그게 방송에 나온 거예요. 그랬던 걸 그냥 실은 거죠.





LE: 따로 <나꼼수> 제작진이나 출연진이랑 커넥트가 있는 건 없었나요?

그 당시에는 없었고요. 그 이후에 거기에 계시던 김용민 씨가 나와서 국민 TV라는 걸 만드시고, 그 국민 TV에서 운영되는 한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제가 맡아서 가기도 했었어요. 게스트로 참여했던 적도 있고요. 그러면서 김용민 씨랑 인사하게 되면서 김용민 씨의 목소리가 들어간 프로그램일부를 따와서 [현실, 적]의 스킷으로 넣게 되고 그랬죠. 근데 그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메일로 보내고 끝이었죠.





LE: 근데 사실 <나꼼수>를 비롯한 진보 계열의 사람들도 젠더 문제라든가 이런 측면에 있어서 문제시될만한 것들이 많다고 최근 들어 야기되고 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그 당시 <나꼼수>가 어땠다고 생각하시나요?

<나꼼수>가 저 개인에게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젊은 층의 정치에 대한 관심에 불을 붙인 거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그 사람들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게 됐는지와는 별개로 두더라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를 떠나서 일단 그 관심에 불을 붙였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꼼수>를 위시한 그 이후에 나왔던 비슷한 부류의 팟캐스트들은 전부 ‘진보 종편’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진보 쪽의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자극적이고 웃기게 풀어내는, 그게 어느 쪽은 완전 너무 뻥만 치고 있기도 하고 어느 쪽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도 하고… 그 차이는 좀 있을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때 나온 거는 결국은 다 ‘진보 종편’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젠더 이슈에 있어서는 진짜 욕 많이 먹어야죠. 정말 아재들이 모여서 낄낄대는 느낌에 가까우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공과 과가 되게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LE: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진보 계열의 인사들이 정치적인 성향은 굉장히 진보적이면서 세대나 젠더적인 측면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꼰대적인 측면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잖아요.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치 성향과 라이프스타일이 괴리된다고나 할까요?

한국사회가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사회에서 진보인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민주화운동 세대와 그 이후의 말 하자면 후배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데, 거기에서 신경 쓰는 의제가 있었던 거죠. 그 의제에 관해 투쟁함으로써 얻어낸 것들이 굉장히 소중한 것들이고 가치가 있는데, 거기에서 신경 쓰지 않았던 의제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게 지금에 와서 주목받기 시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좀 더 일찍 그런 쪽까지 폭넓게 신경 썼어야 하는 게 당연히 맞는데, 그러지 못한 건 우리 선배 세대의 실책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LE: 그런 측면에서 한국에는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한국의 정치 문화가 어떤 것 같나요?

보수와 진보는 있다고 생각하고요. 근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혹은 미디어에서 명명하는 진보와 보수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미디어가 명명하는 진보의 차이는 정말 크고, 보수는 더 크죠. 미디어를 통해서 왜곡된 상을 우리는 보고 있는 거죠. 근데 저는 뭐, SNS를 워낙 많이 하는 사람이고, 그걸 통해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거든요. 실제로 그런 의제들에 민감하고, 깨어있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LE: 제리케이 씨 본인의 정치 성향에 관해 얘기를 해보면요. 어떤 그래프가 있다고 쳤을 때, 중도다, 극이다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진보든, 보수든 간에요. 어떤 쪽에 속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고요. 더불어서 어떤 사람들은 보수의 진보를 이렇게 비유하더라고요. 발전소라고 쳤을 때, 보수가 제어봉의 역할을 하면 진보는 에너지의 역할을 한다고.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사회가 잘 굴러가려면 보수와 진보가 각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도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와, 이거 진짜 약간 <썰전> 같네요. (전원 웃음) 저는 이번 총선을 떠올려보면,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투표 있잖아요. 고민을 진짜 많이 했어요. 저는 정의당원이었는데… 정의당이 중식이 밴드 사건을 위시한 젠더 이슈에 대응을 정말 너무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많이 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저는 정의당보다 좀 더 진보적인 스탠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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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를테면, 녹색당?

녹색당이나 노동당이 진보적인 위치에 있긴 한데, 그렇다고 꼭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비전이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건 아니고요. 어쨌든 그런 정책의 측면으로 가서 디테일하게 보면 정말 결이 정말 다르니까요. 디테일하게 보면 정말 많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래프로 놓고 보자고 하면,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정의당보다는 좀 더 진보적인 쪽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총선이 끝나고 정의당에 탈당계를 냈거든요. “좀 더 성숙해져서 만납시다.” 이렇게 써서요. 그런 상황에 있고… 그리고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아지려면요. 지금 한국 사회는 너무 못났어요. 너무 못생겼어요. (웃음) 사람들이 못생겼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시스템과 의식 구조가 너무 못 생겼어요. 잘생기게 바꿔야 해요. 변화가 정말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선 좀 더 진보적인 스탠스의 사람 혹은 정치세력이 정의당보다 훨씬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힘을 더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하셨던 제어봉과 에너지의 관계는, 일반론에서는 당연히 그게 맞아요. 근데 한국 사회에서는 현재의 보수가 제어봉을 역할을 하기에는 제어봉이 너무 낡았어요. 이게 계속 제어하다가는 터질 거예요. 분명히 터질 거예요. 에너지가 세서가 아니라 에너지도 지금 세지 않은데 제어봉 자체도 너무 낡았기 때문에 이건 터질 거예요. 그러니까 제어봉 역할을 할 거면 보수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정말 많이 차려야 할 거예요.





LE: 어쩌다가 정치 얘기를 꽤 길게 해봤는데요. 다시 돌아와서 커리어 이야기를 더 이어가 보겠습니다. 2012년 얘기를 해보면, 이때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인디펜던트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가 제대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앨범도 나오고, 그 전에 연속적으로 수록곡들이 싱글로 발표되기도 했고요. 근데 사실 제리케이라는 래퍼가 가진 이미지를 고려하면, 사랑, 연애라는 키워드가 잘 붙지는 않는 편인데요. 그럼에도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이라는 앨범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그건 그냥 그때 만들어놨던 노래 중에 사랑과 관련된 노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당시에 제가 연애를 하면서 하고 있던 생각들도 담겨 있고, 주변 친구들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하게 됐던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해요. 그런 생각들이 모여서 가사를 쓰다 보니까 그런 류의 곡들이 몇 개가 나왔고, ‘그럼 얘네만 모아서 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제 다른 앨범에 넣기에는 색깔이 너무 다를 것 같았어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의 색깔과 안 묻는 키워드들이다 보니까 오히려 얘네들만 모아서 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을 내게 됐죠.





LE: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다 그래”라든가, “둘만 아는 말투” 이런 노래 같은 경우에는 정규 앨범에 들어갔었잖아요. 그 이유도 따로 있을까요?

두 곡 다 뺄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트랙이에요. 앨범 전체 흐름에 있어서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어요. 근데 결국 넣게 된 건 그냥 아까워서였던 것 같아요. (웃음) 그리고 앨범 전체 흐름, 서사에 맞게 트랙을 배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고, 그걸로 설득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넣었던 것 같아요.





LE: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얘기를 좀 더 자세하게 해보면, 어떤 것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가 타이포그라피 방식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인데요. 확실히 제리케이 씨가 복귀를 알리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요. 본인이 모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셨었는데,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들을 만들면서) 정말 영상하는 분들을 존경하게 됐어요. (전원 웃음)




LE: 그때 처음 해보셨던 건가요?

맨 처음에 했던 건 “마왕 Part. 2”였던 걸로 기억나요. 사실상 처음 만들어본 거였어요. (타이포그라피 방식을) 어떻게 알게 됐냐면, 그 방식이 재미있어 보여서 검색을 해봤더니 튜토리얼 영상을 통해서였어요. 그냥 거기 나오는 대로 따라서 한 거였거든요. 거기서 제 마음대로 조금씩 바꿔가면서 했던 건데… 이게 정말… 글자 하나하나의 타이밍 하나하나를 지정해줘야 하는 게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앨범 같은 경우에는 커버 아트워크도 제가 했었어요. 모든 걸 제가 하면서 저 혼자 하는 재미?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LE: 딥플로우 씨 인터뷰할 때도 이 질문을 드렸었는데요. 각 분야에서 주변에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두 분 다 어떻게 보면 지금 씬 안에서 DIY(Do It Yourself)가 가능한 몇 안되는 뮤지션이잖아요. 제리케이 씨도 역시 프로듀싱도 하고, 여러 부분이 가능하시니까요. 그런 것들을 커리어를 이어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건지, 아니면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로서 그런 걸 좀 할 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건지가 궁금해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튜토리얼 보고도 배우고, 그렇게 해서 몇 번 해봤더니 쓸모가 있어졌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데이즈 얼라이브를 하면서 커버 아트워크 같은 건 제가 못하지만, 간단한 공연 포스터 같은 건 그냥 제가 만들어요. 그것도 맡기면 다 비용이잖아요. 제가 조금 더 (노력)함으로써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고, 비용도 세이브할 수 있으니까 굉장히 경제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티스트들하고 피드백 과정도 빠르고요. 내부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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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 당시 아직도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쇼케이스였던 <Love Talk Show>인데요. 크랙(CRACK)에서 했던 공연이었는데, 토크를 곁들인 구성이 흥미로웠었어요. 일반 관객들이랑 소통하는 측면도 있었고요. 좌석을 깔아놔서 수익적인 측면은 조금 부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선한 포맷이니까 그런 식으로 또 시도해볼 법 하기도 하거든요. 근데 그 이후로는 그런 토크 형식의 공연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죠. 토크 형식으로 하는 게, 그것도 어떻게 보면 DIY를 한 거잖아요. 진행도 제가 하고. 근데 커버 아트워크도 그렇고, 비디오도 그렇고, 공연도 그렇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한계가 분명해요. 그걸 전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토크 쇼 형식으로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직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토크 쇼 형식으로 할 만한 알맞은 콘텐츠를 못 찾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앨범의 영문 제목이 ‘Love Talk’이기도 하고, 약간 할 얘기가 많고, 어떤 얘기를 해도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주제잖아요. 그때는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토크 쇼 형식은 아니지만) <미니스팟 라이브>이나 <NO MORE ____ 2> 같은 색다른 걸 자꾸 하려 하고 있죠. 그리고 아까 좌석 깔아놓은 것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좌석은 연령이 조금 있는 관객층을 받기 위한 수단이에요. 저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탠딩으로 두 시간 넘게 서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좌석을 깔면 누구든 와서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게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좀 그렇긴 하지만, 그걸 통해서 정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새로운 시장을 열 기회가 마련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좌석제)로 했던 거고, 전 그래서 좌석이 있는 공연을 되게 좋아해요. 저도 앉아서 할 수 있고요. (웃음)





LE: 마케팅, 콘텐츠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예전에 저희 대표님인 히맨(Heman) 씨가 한 이야기가 기억나요. [True Self]가 나올 때쯤인가요? 대표님이 개인적으로 당시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로서 마케팅을 제일 잘하는 아티스트를 꼽으라면 제리케이 씨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블로그를 열어서 머천다이즈를 판매한다든가, 이벤트를 한다든가 등등 뭔가를 하는 게 단순히 음악만 만드는 게 아니라 포스트 프로덕션 류의 것을 잘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그런 걸 많이 신경 쓰시고, 평소에도 구체화하려고 하시는 편인가요?

[True Self]같은 경우에는 제가 회사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온 앨범이었잖아요. 제가 회사에서 했던 게 결국 다 마케팅이니까. 그 영향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던 것 같고, 지금은 오히려 그런 쪽의 감이 예전보다 없어서 뭘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했던 여러 시도가 의미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되게 짜치고 힘만 들어가고 그런 것들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갈고 닦아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때 했던 거 중에 지금까지도 자산이 되는 것 중 하나는 가사를 다 영어로 해석해서 올렸던 게 이후로도 여러모로 많이 쓰이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어떤 대학교에서 한국힙합을 가지고 강의하시는 분이 제 거 해석된 버전으로 강의하시기도 하고요. 힙합엘이도 그런 쪽에서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멋쩍은 전원 웃음)





LE: 이제는 직접 하시기보다 여러 측면에서 흑인음악 에이전시 스톤쉽(STONESHIP)과 함께 하고 계시잖아요. 협력 관계라고 해야 할까요?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실제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스톤쉽이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지 궁금한데요. 샤라웃을 해주셔도 좋고요.

스톤쉽이 해주는 가장 큰 부분은 유통 쪽이에요. 지금의 음원 시장에서는 유통사의 파워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게 매출을 좌우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해요. 그런 측면에서 스톤쉽이 많이 도움을 주죠. 스톤쉽은 많은 아티스트를 데리고 있고, 그게 곧 협상력이 되기 때문에… 그 외에도 공연 기획이라든지, 실제로 투입되어야 하는 실무 파트 같은 부분에서 도움이 진짜 많이 돼요.





LE: 앞으로도 계속 스톤쉽과 함께 가실 예정이신가요?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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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개인적으로는 흑인음악 에이전시로서의 스톤쉽이 가지는 비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스톤쉽만큼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시장을 열어나가고, 서포트해주는 그런 회사는 없는 것 같아요. 에이전시라는 개념도 사실 많지 않잖아요. 근데 저는 처음부터 이런 회사가 필요했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100이라고 치면, 어떤 레이블에 소속되면 100이 아닌 그중 일부만 가지고 해야 하는 느낌이거든요. 그런 게 아닌 뭔가 같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회사가 필요했는데, 스톤쉽은 그런 곳이기 때문에… 대표를 맡고 있는 똘배라는 친구가 아티스트를 보는 안목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고요. 더 잘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LE: 서로 도움을 주는 상생 관계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네, 그렇죠.





LE: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얘기를 조금 마무리해보면, 되게 단순한 질문인데요. 앨범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픽션인지, 실화인지가 궁금하고, 또 섞여 있다면 어느 쪽의 농도가 더 높은지 궁금해요.

반반일 거예요 아마.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당시에 그런 질문을 되게 많이 받았었어요. 전부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건 맞고, 그 위에 살이 붙은 거죠.





- [True Se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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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True Self] 이야기로 조금 넘어가 보려고 하는데요. [감정노동]이 나오기 전에 힙합엘이 국내 뉴스 미니 인터뷰를 통해서 그런 얘기를 해주셨었잖아요. “[True Self]가 개인적인 앨범이고, [현실, 적]이 사회적인 앨범이라면 [감정노동]은 그 중간의 앨범이다.”라고요. 그 말이 실제로도 맞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행이네요. 제가 잘하고 있어서. (웃음)





LE: 일단 그 당시에 앨범 제목부터가 ‘True Self’이고, 커버 아트워크 역시 자아를 강조하는 느낌으로 디자인됐었는데요. 그렇게 [True Self]를 통해 개인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소울 컴퍼니가 없어지고, 약간 광야에 홀로 선…





LE: 야인?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제리케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면서 뛰쳐나온 것도 결국은 ‘True Self’를 찾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돌아왔던 집단이 사라지고 온전히 홀로 선 입장에서도 더더욱 (그래야 했죠.) 그래서 너무 당연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LE: 앞서 [True Self]의 수록곡 “Dreamer” 얘기를 잠깐 해주셨던 것 같은데요. 이 트랙이 세 번째 벌스에 다다르기까지 끝까지 스토리 텔링이 이어지잖아요. 그게 개인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였잖아요.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다룬 것 자체가 흥미로운데, 뭔가 애초에 구상하고 있었을 때부터 구조가 탄탄했을 것 같아요.

역시 질문의 기대와 달리… (전원 웃음) 그렇게 탄탄하지는… 저는 그렇게 치밀하게 짜놓고… 아, 그랬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근데 어쨌든 1절에서는 이런 사람의 이야기, 2절에서는 이런 이야기, 3절에서는 그걸 정리하는 이야기 (정도의 구상은 있었죠.) 저는 늘 가사를 쓸 때, 전체 가사가 꼭 가사가 아니더라도 텍스트로서 존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곡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죠. 그리고 저는 마지막에 가서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면서 완결되는 구조를 좋아하고요. 그 당시에 자아와 꿈,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곡 안에 표현한)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노래가 자연스럽게 그 정도로 나왔던 것 같아요.





LE: 그럼에도 “어차피 회사원이 될 걸 왜 몰랐을까” 같은 가사는 지금 와서 보면 좀 오만이다 싶은 거군요.

그렇죠. 그 당시 저는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했을 때는… 꿈을 잃지 말라고 얘기하는 게 되게 사치스럽게 느껴지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삶이요. 그런 측면에서 좀 오만하게 느껴지는 거죠.





LE: “다 내꺼(The Winner)”, “We All Made Us” 같은 트랙의 경우에는 어떻게 보면 되게 일반적인 래퍼로서의 스웩이 담긴 곡인데요. 그것도 역시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곡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때 저에게 있어서 가장 당면해 있던 과제이자 목표는 ‘뮤지션으로서 살아남기’였어요. 그건 탄탄한 제가 제대로 서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그걸로 생계유지를 하고 있어야 하고요. 그런 데서 나오는 욕심 같은 걸 (가사로) 썼던 거죠.





LE: 그런 개개 곡들이 전, 중반부에 나오고, “소각로 (Interlude)”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구성적인 측면에서 뒷부분에 그런 트랙들을 배치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사실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웃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Dreamer” 같은 가사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있듯이 앨범 전체도 전 늘 그렇게 생각해왔거든요. 그래서 뭔가 앞에서 센 것들이 팡팡팡 터지고, 뒤에 가서는 그런 것들이 해소되면서 결말이 지어지는 구성을 전체적으로 만들어서 서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이번 앨범 [감정노동]은 좀 특이하죠.





LE: [감정노동]은 오히려 결말 쪽에서 분위기가 치솟는다고 봐야 할까요?

제가 애초에 [감정노동]의 트랙리스트를 짰을 때는 예전 앨범과 비슷한 구조였었어요. 근데 스톤쉽과 같이 얘기하면서 이 구조가 너무 클리셰스럽다 싶어서 구조를 바꾼 게 지금의 형태에요. 그래서 이번 앨범이 기존에 제가 발표했던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과 달라서 재미있는 측면이 있죠.





LE: 어떤 방식의 구성을 좀 더 선호한다 이런 건 따로 없고 양쪽 모두에서 만족감을 느끼시는 편인가요?

네. 제가 짠 서사이고, 이걸 사람들이 들었을 때 흥미를 느낄 서사라고도 생각해요. 그래서 전 둘 다 좋은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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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공교롭게도 [True Self]가 나온 시기가 <쇼미더머니>가 시작한 시기와 맞닿아 있기도 하잖아요. 물론, 당시 <쇼미더머니 1>이 많은 파장을 몰고 오진 않았었지만, 사실은 갓 씬에 복귀한 래퍼로서 되게 탐이 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라고도 생각이 되는데요. 마인드에 따라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미더머니>와는 별개로 개인의 커리어를 더 많이 챙기셨단 말이에요. <쇼미더머니> 초반 시즌에는 어떻게 보셨는지도 궁금하고, 또 오히려 개인 커리어를 신경 쓴 이유도 궁금한데요.

<쇼미더머니> 제작진에서 화나를 참가자로 섭외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잖아요. <쇼미더머니>가 시작하고, 그런 컨셉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전 ‘아, 별론데.’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화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화로 전해 듣고 팔로알토(Paloalto)와 함께 엄청나게 공분했었죠. 엄청 빡쳤었죠. 그래서 보이콧 선언을 하고, 사과하라고 그랬었죠. 그랬기 때문에 <쇼미더머니>는 애초에 제 선택지가 아니었죠. 그런 식의 애티튜드로 씬의 외부에서 접근하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전혀 유혹되는 콘텐츠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시작하기 전, 초반에 엠넷 제작진 쪽에서 저랑 팔로알토랑 김봉현 씨였나? 같이 만나서 한 번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했었어요. 뭐, 얘기는 할 수 있는 거고, 쓴소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쪽에서 그걸 영상으로 촬영해서 콘텐츠로 쓰고 싶다고 해서 꺼지라 그랬거든요.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니까. 그게 너무 뻔히 보이잖아요. 처음부터 싫었죠. 그래서 그냥 <쇼미더머니> 안 나가고 그에 관련된 시끄러운 것들을 보면서 나중에는 처음에 난리 쳤던 게 오히려 <쇼미더머니>를 도와준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쇼미더머니>를 비판할 때마다 늘 그래요. 제가 결국 <쇼미더머니>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되게 자조에 빠지게 돼요.





LE: 지난 시즌에는 팔로알토 씨가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셨었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팔로알토는 워낙 예전부터 제가 알고 지냈고, 같이 음악을 하던 친구니까 좀 속상했어요. 속상하다는 표현이 제일 맞는 것 같아요. 물론, 팔로알토가 거기 나가서 네임밸류가 굉장히 높아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진 건 좋은데, 그래도 저는 <쇼미더머니> 없이도 뭔가를 해내는 성공 사례로서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를 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VMC를 보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되게 속상했었어요.





LE: 앞서도 잠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쇼미더머니>를 결국 돕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도 하신다고 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진짜 보이콧을 할 거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말라고도 하는데,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도 계속 갈등이 있으신가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계속 있고요. 근데 이건 제가 이슈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어떤 게 싫어서, 너무 싫어서 입 다물고 있으면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잖아요. ‘다 좋게 생각하나 보다.’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쇼미더머니>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침묵하고 있으면 (겉으로 봤을 때는) ‘별문제 없나 보다.’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전 그게 아닌데. 그래서 전 얘기하는 거죠.





LE: 그렇군요. 아마… 뒤에 또 <쇼미더머니> 얘기가 있을 겁니다.

네. 아직도… (전원 웃음)





- [Dope Dyed], 데이즈 얼라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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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얘기를 조금 넘어와서 이제 [Dope Dyed] 얘기와 함께 2013년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데이즈 얼라이브 멤버분들 얘기도 조금 더 해보면 좋을 것 같고요. 일단은 2013년에 나온 앨범으로는 [연애담 2]가 있어요. 근데 [연애담 2]가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때보다는 반응이 조금 덜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본인이 분석하기에는 어떻다고 보시나요? 본인도 좀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게 프로덕션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제가 한 작품이었거든요. 디자인만 차인철(INCH) 그 친구한테 맡기고, 나머지를 그냥 제가 다 했던 거였어요. (원인을) 프로덕션의 실패라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저 혼자 모든 걸 다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완성도가 나온 거죠. 그리고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에는 조금 독특한 시각들이 많이 있었다고 보는데, [연애담 2]에서는 그것보다 조금 평범한 느낌이어서… 여러 측면에서 완성도가 낮았던 것 같아요.





LE: 만약에 이 시리즈를 이어가면 이제는 ‘연애담’이 아닐 거 아니에요. ‘결혼담’…? (웃음) 만약에 내신다면 말이죠. 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예를 들면, “둘만 아는 말투” 같은 곡에서 그 어떤 충만한 만족감을 충분히 했잖아요. 그리고 전 매일매일이 행복하고요. 근데 전 매일매일 행복한 얘기를 똑같이 쓰는 데에는 소질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뭔가 갈등이 있고 그러면 그거에 관해 쓰는 건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결혼 생활에 대한, ‘연애담’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는 그런 걸 만드는 건 지금으로써는 전혀 계획이 없어요.





LE: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뀌어서 낼지 안 낼지를 모르는 건 당연하겠고요.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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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같은 주제, 소재의 얘기를 이렇게 저렇게 풀어내는 데에 소질이 없다고 말씀해주신 것 같은데, 근데 제리케이 씨가 취하는 이런저런 표현 방식 중 가장 참신한 방식이 담긴 앨범이 [Dope Dyed]인 것 같기도 해요. [Dope Dyed] 얘기를 시작하면서 그 얘기를 좀 뒤에서 더 이어가 볼게요. 일단 기본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게, 발매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이루어졌어요. 온라인으로도 음원이 나오긴 했지만요. 우려했던 부분은 없으셨는지 궁금하고, 그런 판매 전략, 마케팅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처음에 크라우드 펀딩이 각광 받을 때가 2011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제가 좀 부정적이었어요. 왜냐하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후원으로 돈을 땡겨 오고 이런 게 그냥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잖아요. 근데 그게 음악을 하는, 특히 힙합 음악을 하는 데에서는 멋이 떨어진다고 느껴지기도 했는데, [Dope Dyed] 같은 경우에는 일종의 믹스테입이면서 좀 스페셜한 앨범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크라우드 펀딩을 하면서 후원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베네핏을 확실히 줄 수 있다면 이게 나름대로 재미도, 의미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 마침 크라우드 펀딩 회사에 계신 분하고도 제안이 왔다 갔다 하기도 했고요. 여러 가지로 잘 맞아서 진행했던 거죠. 그래서 CD에만 담긴 곡을 만들 수 있었고, 앨범은 그때 딱 선주문된 수량만 만들어서 팔았죠. 그렇게 시도 자체와 진행 과정이 다 의미 있었는데,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뭐였냐면 수량 예측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인쇄는 어쨌든 발매일보다 일주일 전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일주일 전 수치를 보고 대충 예상해서 인쇄 주문을 넣었는데, 막판에 (후원이) 확 몰린 거예요. 그래서 겨우겨우 어떻게 끌어다가 수량을 겨우 맞췄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되게 위험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온라인 음원이 나오고, 일주일 뒤에 CD가 나오고 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데, 저는 지금도 그런 방식을 싫어하거든요. CD 나오는 날 음원이 나왔으면 좋겠고, 그래서 그걸 맞추려고 했던 게 좀 되게 쉽지 않았던 거 같아요. 또 하나는 제가 확실한 베네핏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전부 기념 싸인을 해서 보냈었거든요. 근데 배송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었어요. 업체 측에서 좀 잘못했던 건데, 그게 굉장히 빡셌죠. 그래서 막 다시 보내드리고 그랬었죠.





LE: 다시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여전히 확실한 베네핏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고요. 정규 앨범은 그렇게 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Dope Dyed]는 정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죠. 조건들이 맞는다면 다시 할 수도 있겠죠. 일단 지금은 계획이 없어요.





LE: 저희가 진행했던 웨스트코스트 먼쓰 크라우드 펀딩에도 후원해주셨었잖아요.

네. 100번째 후원자였죠. 집에 노트가 잘 와 있습니다. 사실 제가 그 노트를 받아서 던말릭한테 선물하려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던말릭이 워낙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너무 좋아해서… 근데 그걸 제가 받기 전에 어떻게 따로 구했더라고요. (전원 웃음) 그래서 선물이 갈 곳을 잃었죠. 지금은 제가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예뻐요.





LE: 다행입니다. [Dope Dyed] 얘기를 다시 해보면, 말씀하시면서 정규 앨범이 아니고 스페셜한 앨범이라고 얘기해주셨는데요. 확실히 작품도 외전의 성격이 강했었어요. 되게 과감한 시도들도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더 땀 흘려”, “턱걸이” ,”Bed Recipe” 같은 곡이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다룬 주제라든가 여러 가지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더 땀 흘려” 말고는 아주 반응이 좋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해요.

“턱걸이”는 그래도 괜찮았었어요. 공연장에서 워낙…





LE: 아, 다 같이 턱걸이 하는 듯한 그런 모션을 하면서 그랬었죠. 이런 시도들을 했던 것도 역시나 자연스러웠던 거라고 봐야 할까요? 단순히 이때는 이런 게 많이 하고 싶었고, 그렇게 개개 곡이 모이게 된 거고, 그걸 스페셜한 형태로 내놔서 크라우드 펀딩을 한 거라고 보면 될까요?

기본적으로는 그런데, 그렇게 된 배경이 있어요. 2012년 대선과 관련이 있어요. (전원 웃음)





LE: 갑자기…

놀라운 흐름인데… (웃음) 이때 대선이 제 입장에서는 되게 충격적인 결과였어요. 그 결과를 맞이하고, 그러고 나서 많은 분이 그랬던 거로 기억해요.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지는 거죠. 대선 결과가 아쉬움으로 남는 사람들에게는요. 뉴스도 보기 싫고… 저도 되게 비슷했거든요. 한동안 진짜 뉴스도 못 보겠고. 심리적으로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음악을 계속 듣고 있으니까 요즘 애들이 하고 있는 걸 듣고, 저도 그런 걸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주제적인 측면, 제가 평소에 집중하는 쪽은 아예 배제했더니 그런 결과물이 나온 거죠. 신기하죠?





LE: 관심이 집중된 거군요. 다른 쪽으로 분산되지 않고요.

그렇죠.





LE: 그렇군요… 이게 이렇게 대선이랑 연결이 되는… (웃음)

박근혜가 만들어준 앨범입니다. (웃음)





LE: [Dope Dyed]에는 아까 말씀드렸던 곳곳에 시도도 눈에 띔과 동시에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까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되게 타이트하다는 인상을 주는 곡도 많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제리케이 씨가 했던 랩 중에 가장 빡센 랩들이 담겨 있는 앨범이 아닌가 싶어요. 이때 랩의 플로우를 디자인할 때랑 다른 정규 앨범에서의 랩의 플로우 디자인을 할 때랑 테크닉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까 말씀드렸던 배경이 작용하면서 주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내려놓으니까 오히려 감각적인 쪽으로 집중하게 됐던 것 같아요. 다른 쪽에 관심을 끊었다고 남들 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면 뭔가를 더 해야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LE: 기억나는 게, 수록곡 중에 “맞춰봐”라는 곡이 되게 인상적이었었어요. 많이들 하듯 래퍼로서의 스웩을 부린다고 해도 사실 그걸 어떤 식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고, 그 점에서 인상적이었는데요. 힙합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도 되게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맞춰봐”는 전체 그림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에 자신을 비유하는 게 되게 흥미로웠었어요.

그 곡 같은 경우에는 XXL 리스트가 가사에 등장하잖아요. (웃음) 그 당시에 XXL에서 한국 래퍼 15인을 꼽았었어요. (그 리스트에)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좀 아쉽지만 뭐…”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 그 리스트를 만든 사람이 김봉현 씨랑 재키 초(Jaeki Cho) 씨잖아요. 김봉현 씨가 얘기해주더라고요. 사실 본인은 제리케이를 리스트에 넣었는데, 재키 초가 뺐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아쉬운 거예요. (전원 웃음) 그 얘기를 안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래서 (“맞춰봐”에서) 그 리스트에 들어갈 만하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죠.





LE: 하여튼, 앨범이 밸런스적인 측면에서는 어긋난 편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지만, 랩 테크닉은 거의 그때가 최고조가 아니었나 싶어요.

근데 [Dope Dyed]도 옛날에 냈던 앨범 중에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운 앨범이에요. 그것 역시 프로덕션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건데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했던 프로듀싱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은 안 하고 있고요. 더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랩에 집중하고 있죠. 그런 측면에서 [Dope Dyed]도 많이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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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2013년에 [Dope Dyed]도 발표하셨지만, 데이즈 얼라이브가 1인 레이블에서 좀 더 모양새를 갖춘 레이블로 거듭나잖아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일단 레이블 이름 뜻에 관해 여쭤볼게요.

‘Daze’로 표기하는데, 원래대로면 ‘Days Alive’죠. 그게 앞에 숫자가 붙죠. ‘10,000 Days Alive’라고 하면, 태어난 지 만 일이 됐다는 뜻이에요. 살아온 날들을 뜻하는데, 그래서 그냥 ‘Days Alive’라고 하려다가 ‘Daze’가 더 예쁘니까 표기를 그렇게 한 거죠. (웃음) 애초에 제가 만들 때는 저는 어쨌든 예전부터 지금까지 삶으로부터 나오는 무언가를 주로 가사에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은 앨범들도 있긴 있었지만요. 그래도 저의 지향점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에 지은 이름이에요.





LE: 처음에 만들었을 때는 인디펜던트 상태가 됐으니까 일단 레이블을 만들고서 시작하자는 생각이 컸었던 건가요?

그게 뭐였냐면, (웃음) [연애담 : 생각해 볼만한 사랑 이야기] 앨범을 만들고 나서 유통을 해야 하는데, (음원 사이트에) 기획사 표기가 되어야 하잖아요. 근데 거기에 김진일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요. (웃음)





LE: 어, 근데 그냥 그렇게 쓰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나요?

있긴 있어요. 가끔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또 ‘Jerry.k Music’이라고만 하기도 싫고… 그래서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만들게 된 게 ‘Daze Alive’였어요. 그때도 후보가 몇 개 있었는데, 다른 후보는 기억도 안 나요.





LE: 원래 그런 기억이 깨알 같은 건데… (웃음)

그러니까요. 그게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진짜 미쳤지.” 싶죠. (전원 웃음)





LE: 그러다가 1인 레이블에서 좀 더 스쿼드를 갖춘 레이블이 됐는데요. 소울 컴퍼니나 로퀜스를 할 때는 역할을 경중을 몰라도 어떤 집단의 일원이었다고 본다면, 데이즈 얼라이브에서는 리더, 수장이시잖아요. 각 집단에서의 역할이라든가, 그 역할에서는 무게감이라든가 여러 가지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소울 컴퍼니의 시작 지점에서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꽤 중심에 있었어요. 그 이후에는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긴 하지만요. 키비랑 더콰이엇이 중심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마무리에 있어서는 제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었죠. 그렇게 되니까 중심에서 뭔가를 이끌어가는 게 그렇게 낯선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울 컴퍼니가 끝날 때쯤, 다들 어떤 레이블을 찾아서 가거나 새로운 레이블을 새울 때, 제가 혼자 했던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소울 컴퍼니에 멤버가 너무 많아서 거기서 오는 피로감이 되게 컸었어요. 챙겨야 할 사람도 너무 많고… 그중에서도 안 하는 사람들은 안 하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하는데,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게 너무 어려웠었어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에너지를 모으는 게 어렵잖아요. 그런 경험들을 생각했을 때, (데이즈 얼라이브 초기에는) ‘그냥 혼자서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렇게 혼자서 해오다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일어난 변화가 저한테는 되게 컸던 것 같아요. 리더로서 처음 나섰다기보다는 혼자 하다가 누구랑 같이하게 됐다는 게 되게 많이 달라졌던 부분인 거 같아요. 근데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그냥 기대감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걱정도 없고, 그냥 얘네가 다 잘하는 애들이니까 지켜봐 달라, 최대한 서포트하겠다 이런 느낌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 친구들의 앨범이 당초 제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시기보다는 좀 늦게 나오게 되면서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좀 많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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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멤버분들 한 명 한 명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슬릭, 리코(Rico), 던말릭… 모두 제리케이 씨가 영입 이전에 발표한 믹스테입만으로 관심이 생겨서 함께 하시게 된 케이스잖아요. 에피소드가 만약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한 분 한 분 영입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과정에 관해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던말릭은 나중에 들어왔으니까 천천히 얘기하고… 리코 같은 경우에는 그때가 카카오톡(KakaoTalk)이 지금처럼 쓰이지 않던 때였어요. (웃음) 네이트온(NateOn)을 할 때였던 것 같은데…





LE: 아, 2013년 아닌가요?

아, 그럼 카카오톡인가? (전원 웃음)





LE: 네. 뭐, 안 쓰실 수도 있었겠죠.

아, 모르겠다. 아무튼, 어글리덕(Ugly Duck)이 어느 날 갑자기 광주 사는 노래하는 앤데 한 번 보라고,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유투브 영상 링크를 보내줬었어요. 눌러봤더니 리코가 그때 <슈퍼 루키 챌린지>에 나갔던 라이브 영상이었어요. 근데 애가 멀끔하게 잘 생기면서 노래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리고 라이브 할 때 특유의 어떤… 몸짓.





LE: 꿀렁거림? (전원 웃음)

네. 몸짓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한 거 같아요. 그런 걸 통한 무대 위에서의 장악력 같은 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 이 친구 되게 괜찮다.’라고 생각했고, 이후에 [연애담 2]에 있는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곡에 피처링 제의를 먼저 했었어요. 그렇게 피처링을 하게 되고, 나중에 만나서 얘기도 나누고 하는데, 리코가 그 당시에 자기 솔로곡을 정식으로 발매하고 싶어 했었어요. “Work That”이라는 곡을 처음 낼 때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길래 제가 약간 눈독을 들이면서 도와주겠다고 했죠. (웃음) 그냥 한 곡 같이 작업한 사이인데, 제가 막 도와준 거죠. 유통도 주선해주고, 리믹스해서 랩 피처링이 들어간 버전을 하나 넣어 보는 건 어떠냐고 하면서 걔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가 리믹스 버전에 들어갈 랩을 해서 보내주고 그랬었어요. 그랬더니 “어, 괜찮은 데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영입에 대한 얘기를 전혀 없이요. 그냥 저 혼자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큰 그림 그린 거죠. (웃음) 그렇게 해서 이 친구가 저에 대한 신뢰를 갖게끔 만들고 나서…





LE: 작업이 들어갔던 거군요.

그렇죠. 밑밥을 던진 거죠.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제가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했죠. 내가 레이블화를 할 건데, 너가 같이 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더니 고민해보겠대요. (웃음)





LE: 한 번 튕기는?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조금 시간이 걸렸어요.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제안했을 때) 이미 OK였대요. 약간 밀당을 했던…





LE: 아마 예전에 리코 씨 인터뷰했을 때, 이 얘기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 리코가 들어오게 됐고… 슬릭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소울 컴퍼니 때부터 제 공연이 있으면 저를 보러 자주 오던 관객이었어요.





LE: 아, 그럼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요?

관객이었고, 그 당시에는 싸이월드(Cyworld)의 시대였잖아요. 방명록에다가 안부를 서로 묻던 김령화 씨…





LE: 이름도 특이하니까 까먹지도 않으셨겠네요.

네. 특이한 이름이었고, 그 친구가 막 저한테 티셔츠를 만들어서 주고 그랬었어요. 흰 티셔츠에 ‘Crucial Moment’라고 쓰여 있는… 그거 아직 집에 있거든요. (전원 웃음)





LE: 언제 입으시나요?

입지 않죠. 입을 수 없어요. 그냥 집에 있습니다. (전원 웃음) 버릴 수 없는 되게 소중한… 그런 김령화라는 저를 되게 좋아하는 팬이 있다는 걸 로퀜스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건 되게 옛날얘기잖아요. 그러다 2012년쯤에 믹스테입 게시판이나 워크룸에 슬릭이 뭘 올리고 그러는데, 그때 제가 블럭(Bluc) 씨 트위터인가, 하여튼 트위터에서 슬릭이라는 애가 잘한다는 걸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 거 올린 적 있으시죠? 블럭 씨가 어떻게 보면…





LE: 숨은 조력자… 블럭 씨가 원래 디깅을 많이 하시잖아요.

근데 슬릭이 잘한다는 얘기를 (그 전에도) 트위터에서 몇 번 봤었어요. 그래서 찾아 들어봤는데, 다듬어지지는 않았어도 갖고 있는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분명한 거예요. ‘얘는 진짜 One & Only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팔로우해서 멘션을 보내고 했는데, 그때 멘션을 주고 받는 와중에 키디비(KittiB)가 중간에 껴서 멘션을 걸었었어요. 그 내용이 ‘령화 성공했네?’뭐 이런 식으로 멘션을 한 거예요. ‘령화 어디서 많이 봤는데?’하고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인 것 같은 거예요. (전원 웃음) 그러고 나서 2012년에 힙합엘이 토크 콘서트하던 첫 회 하던 날, 프리버드(Freebird)에서…





LE: 그 날 아마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뭘 받아가셨을 거예요.

그 날 제가 그걸 보러 갔었는데, 그 자리에 키디비랑 슬릭이 같이 와 있었어요. 그때 인사를 처음 하고… 이게 힙합엘이와 데이즈 얼라이브의 연결고리… (전원 웃음) 그렇게 알게 됐죠. 슬릭이라는 친구가 그때 그 김령화이고, 근데 지금 랩을 잘한다.





LE: 소오름.

그럼 사실 누가 저라도 슬릭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 아니에요. 그 캐릭터 자체가 너무 멋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서사와 스토리가 나에게도 되게 이득이고. (웃음) 그래서 ‘아, 이 친구는 내가 레이블을 하게 되면 꼭 데리고 와야겠다.’라고 생각했었고, 직접 제안을 본격적으로 하는 시즌에 카페에서 얘기했죠. ‘내가 데이즈 얼라이브를 좀 더 레이블화하려고 하는데, 너가 같이 해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요. 그 친구도 (웃음) 너무 좋은데 그때 슬릭이 있던 크루에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래. 정리되면 알려달라.’라는 식으로 얘기했죠. 역시나 한번 튕기고 나서… (웃음) 그렇게 해서 영입하게 됐죠. 그리고 그때 제가 제안을 했던 친구가 두 명 더 있어요. 그게 올티(Olltii)랑 어글리덕이었는데…





LE: 아…

이걸 예전에 한 번 유스트림 방송에서 얘기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근데 뭐 둘 다 알아서 잘살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던말릭은 데이즈 얼라이브를 셋이서 하던 와중에, 그때가 아마 [현실, 적]이 나오기 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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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현실, 적]이 9월에 발매됐었죠. 던말릭 씨의 믹스테입 [Hashtag[#]]는 그해 여름쯤에 나왔던 거로 기억하고요.

네. 맞아요. <SRS> 때 던말릭을 처음 봤었는데… 근데 사실 처음에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일단 [Hashtag[#]에 슬릭이 피처링을 했었어요. 그것 때문에 JJK를 통해서 ‘이런 애가 믹스테입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슬릭이랑 같이 하고 싶어 한다.’라고 얘기가 전달되어 와서 연락이 오간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 친구가 믹스테입을 만들었다면서 어떤 공연장에서 CD를 받고 집에 와서 들어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너무 잘하는 거예요. 특히, 저한테는 가사가 중요하니까 유심히 들어보는데, 가사도 너무 잘 쓰는 거예요. 그래서 막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뮤직비디오가 나오더라고요. 뮤직비디오도 되게 재미있게 잘 만들었고 해서 ‘어, 이 친구 참 괜찮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샤라웃도 해주고 그랬었어요. 던말릭이 샤라웃했던 그 트윗을 아직도 관심글로 지정해서 가지고 있어요. 가끔 ‘추억은 방울방울’ 이러면서 보내요. 그렇게 해서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제가 그 친구의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됐어요. 라이브도 너무 잘하는 거예요. 어리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능숙하고 해서 이 친구가 욕심난다고 리코랑 슬릭한테 얘기했죠. 자기들도 좋대요. 그래서 제가 JJK한테 “던말릭 혹시 ADV로 가니?”라고 물어봤었어요. (전원 웃음) 그게 너무 당연한 코스처럼 보였으니까. 근데 그때 JJK가 ‘326-2 KIDS = ADV’라는 공식이, 자기 레슨생은 곧 ADV라고 보이는 공식이 깨졌으면 좋겠다 싶고, 던말릭이라는 애가 믹스테입이 반응이 좋았는데 왜 다른 오퍼가 안 들어오는지 생각하던 중이었대요. 제가 그래서 얘한테 제안을 하고 싶다고 했었죠. 그랬더니 JJK가 OK해서 만나서 얘기했죠. 나중에 JJK는 후회한다고… (전원 웃음) 그렇게 얘기했죠.





LE: 던말릭 씨도 한 번 튕겼나요?

던말릭도 생각해보겠다고 했죠. (웃음)





LE: 세 명의 멤버를 영입할 때, 동일하게 작용했던 어떤 특정한 기준 같은 게 있었나요? 오리지널리티라고 할 수도 있고,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가능성이었던 거 같아요. 가능성이랑 말씀하신 대로 오리지널리티죠. 남들이 하는 걸 똑같이 잘하는 친구들은 많으니까. 이 친구들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전 되게 확실히 보였거든요. 그런 기준이었던 거 같고, 만나서 얘기해봤을 때 그래도 결이 맞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저는 살면서 가만히 앉아서 얘길 나눌 때,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지는 않거든요. 근데 그게 안 통하면 같은 식구라면 활동을 해 나가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런 것도 되게 크게 작용했었죠. 근데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다들 말이 잘 통했었어요. 앞으로 누군가를 영입한다면 그게 되게 중요할 것 같아요. 이제는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할 거 같아요.





LE: 커뮤니케이션적인 측면에서 말씀하시는 거죠?

커뮤니케이션과 갖고 있는 생각의 방향성? 이런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예를 들면, 데이즈 얼라이브에는 대놓고 ‘여혐’하는 친구는 못 들어오죠. 저희도 배워가는 중이라 오류는 있을 수 있겠지만, 수정 가능성조차 없는 친구들하고는 오래 일 못 할 거 같아요.





LE: 안 그래도 그 얘기를 슬릭 씨가 트위터에서 하셨던 거 같아요. ‘데이즈 얼라이브 멤버들이랑 같이 모여 있으면 그런 뉘앙스의 발언을 전혀 들어본 적 없고 편안하다.’라는 식으로요.

전혀 안 하고 오히려 자기보다 화를 내준다고 그때 올렸었죠.





LE: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떤 수장으로서의 본인이 끼치는 영향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예전에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요. 데이즈 얼라이브 멤버들 걔네 다 제리케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LE: 제리케이와 아이들?

네. 근데 저는 진짜 그 얘기를 듣고 약간 역겨웠거든요. 걔네 다 성인인데. 무슨 소리야 그게.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저는 그런 관계를 원하지도 않고요. 제가 특별히 그래서라기보다는 각자가 접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비슷하고 결이 맞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LE: 그럼 어떤 레이블적인 차원에서의 통제 같은 걸 따로 없는 건가요?

전혀 없어요. 어떻게 통제해요.





LE: <쇼미더머니>에 출연한다 해도?

어쩔 수 없죠. 근데 만약에 “전 출연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다시 생각해 봐.”라고 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자기가 해야죠. 다행히 모두가 너무 싫어해요. (전원 웃음) 진짜 너무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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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영입 과정을 들어보면 되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다른 경로가 있느냐고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쇼미더머니>를 비롯한 여타 매체를 통해서가 아닌 멤버 각각이 직접 릴리즈한 믹스테입을 듣고 나서 제리케이 씨가 영입하신 거잖아요. 이 사람이 확실한 앨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확실히 있다는 게 어느 정도 보인다고 판단하고, 그 이후에 영입하는 게 어떻게 보면 되게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방향의 신예 발굴 방식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의 같은 것도 생각하시면서 신예들을 많이 보시나요?

그렇죠. 소울 컴퍼니 때, 저희는 셀프 프로듀싱이 가능한 아티스트들이 모인 집단이었거든요. 초기 시작은요. 나중에 들어온 멤버 중에는 그게 안 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저는 자기 앨범은 자기가 주도하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집단에서 오래 생활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아요. 근데 제가 영입한 친구들은 모두 자기 프로젝트를 자기 주도적으로 해 왔던 친구들이잖아요. 앞서 말씀드린 그런 요인들도 크게 작용했던 거죠.





LE: 지금 DJ 같은 경우에도 계속 영입하시려고 찾고 계신 과정이라고 들었는데요. 맞나요?

DJ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요. 최근에는 DJ 돌핀(DJ Dolphin)이라는 친구랑 공연을 몇 번 했어요. 이번에 <스페이스 공감> 공연도 같이했고요.





LE: DJ도 역시나 앞서 말씀해주신 여러 기준이 똑같이 적용될까요?

글쎄요. 어쨌든 DJ는 합이 잘 맞는 게 되게 중요하니까 그런 경험을 같이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으로써는 ‘아, 이 사람이면 완벽한 대안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어요.





LE: 베스트를 찾은 건 아직 아니다?

네. 그렇죠. 그런 측면에서 던말릭과 션만 씨의 공연이 되게 좋았죠.





LE: 던말릭 씨 같은 경우에는 매드씬(Madscene)이라든가, 션만 씨와 콜라보하는 게 본인이 주도해서 하는 걸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 흥미로우실 것 같아요. 흐뭇하실 것 같기도 해요.

던말릭 같은 경우에는 그런 걸 자기가 나서서 잘하는 스타일이니까요. 재미있고, 슬릭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의 작업에 있어서 부침이 되게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앨범으로 결실을 맺었으니까요.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요. 여러 가지로 올해가 데이즈 얼라이브로는 결실이 많은 해인 것 같아요. 저도 나왔고, [Tribeast]도 나왔고, 슬릭도 나왔으니까.





LE: 리코 씨는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리코도 공개곡을 하나 냈고, 어쨌든 자기 거를 계속해나가고 있어요.





LE: 앞서 추가 멤버에 관해서 살짝 얘기해주셨는데, 영입 계획을 얘기해주셔도 좋고, 아니면 요즘 래퍼든 싱어든 간에 눈여겨 보는 신예가 있으신지 궁금한데요.

일단 추가로 영입할 계획은 아직 없어요. 사실 우리끼리 컴필레이션 앨범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데이즈 얼라이브로서의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는 계획이 있어서 그걸 할 때까지는 추가 멤버 영입 계획은 전혀 없고요. 신예들 같은 경우에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JJK의 <UH! TV>에 한 달에 한 번씩 나가서 그때 (신예를) 추천하는데, 그때 추천했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쿤디판다(Khundi Panda)랑 오넛(O’Nut), 디스이즈매너, 임레이(Imlay)였어요. 다 너무 잘하시는 것 같아요.





LE: 평소에 디깅을 많이 하시는 편이신가요?

한동안 되게 안 했었어요. 제 앨범 작업 할 때는 아예 못 했었는데, 마침 JJK가 그런 프로그램을 하자는 제안을 한 거죠. 그래서 저도 찾아보다 보면 재미있어요. ‘아, 이런 똑같은 애들이 많이 나왔구나.’ 싶기도 하고… (전원 웃음) 그러다가 ‘오!’ 하면서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LE: 되게 찾기가 힘들잖아요. 근데 계속 찾다가 반짝이는 분 한 분을 보면 진짜 원석 보는 느낌이 있잖아요. 비슷비슷한 분이 꽤 많으니까…

네. 재미있어요.





LE: 데이즈 얼라이브에 관해 종합해서 얘기하면, 길게 봤을 때 제리케이 씨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어떤 건지 궁금해요.

다른 건 없고요. 좋은 음악 계속하면서 음악으로 먹고살기. 그게 전 진짜 전부에요. 중요한 건 좋은 음악에서의 ‘좋은’인 거죠. 좋은 걸로 먹고 살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죠.





LE: 구체적으로 1년 뒤에 혹은 몇 년 뒤에 뭘 이루고 싶다 이런 거까지는 없으신 거고요?

네. 왜냐하면, 제가 생각했던 3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다르거든요.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르니까… 그냥 저는 크게 어슴푸레한 목표 의식만이라도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은 음악으로 먹고사는 게 (목표인 것 같아요.)





- [현실, 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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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데이즈 얼라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이래저래 해봤는데, 이제 2014년 이야기로 좀 넘어와 볼게요. 이제 [현실, 적] 이야기를… (전원 웃음) 이어가 보겠습니다. 일단,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워드 플레이를 해서 앨범 타이틀을 지으신 것 같은데요. 현실하고 쉼표, 적이라고 앨범 제목을 지으신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까 얘기했지만, [True Self]가 굉장히 개인적인 앨범이었다면 [현실, 적]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앨범이고요. 처음에 생각했던 이 앨범의 제목은 ‘3’이었어요. 3집이기도 하고, 30대에 들어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도 해서요. 근데 그게 앨범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을 다시 해보던 와중에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 뭔가?’라는 생각했을 때, 그 바탕에 저 혹은 제 또래의 누군가가 당면한 치열한 현실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게 1집에서의 마왕과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치열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냥 무언가를 편하게 하고, 편하게 살면 그건 치열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봤을 때, 현실과 그 앞에 있는 적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앨범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의 제목을 짓게 됐어요. 현실과 적 사이에 콤마를 찍는 순간, ‘아, 요거다.’라고 생각했었어요. (웃음)





LE: 커버 아트워크 같은 경우에도 제목이랑 밀접한 연관이 있을까요?

그렇죠. 그 커버 아트워크가 굉장히 많은 시안을 엎은 끝에 나온 건데요. 진왕이가 고생을 많이 했죠. 그 커버 아트워크 안에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가 있잖아요. 그 아래 폴리곤으로 표현된 부분이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현실은 단편적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입체적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게 저는 폴리곤으로 잘 표현되었다고 보거든요. 평면이면서도 입체적인 그런 느낌. 그리고 뭔가를 뛰어 넘어서 날아가려는 새의 모습에서 현실에서의 적을 뛰어넘어서 가려는 모습이 잘 표현됐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커버 아트워크를 보는 순간.





LE: 앨범 중반부까지 쭉 살펴보면요. 카테고라이징이 명확하다고 해야 할까요? 곡별로 다루고자 한 이야기와 의식이 향하는 분야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죠. 이를테면, “다 뻥이야”가 부패하게 보이는 언론을 다루는 그런 식인 거죠. 물론, [마왕] 때도 카테고라이징이 꽤나 분명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화법 자체는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은유적이면서도 직접적이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전보다 더 섬세해졌다는 인상을 주는데요. 개개 곡에 대한 설명을 조금씩 해주시면서 ‘이 곡은 이런 화법을 써보려고 했다.’ 등의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화법 측면에 있어서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대출러브” 같은 경우에 어떻게 보면 되게 평범한 사랑 얘기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청년들의 고통일 수도 있는데, 그 두 가지 결을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게 저한테도 되게 새롭고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해커스와 시크릿” 같은 경우도 해커스(Hackers)와 <시크릿>이 상징하는 바가 있잖아요. 그 상징을 향해서 달려가는 전체적인 서사가 현상을 나열하기만 하는 방식과는 달라서 좋은 것 같고요. “난 희망해” 같은 곡도 어떻게 보면 ‘난 희망해’라는 말이 빠지면 전체적인 서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정말 이런저런 얘기를 막 늘어놓는 거로 밖에 안 보이는 거죠.





LE: 그 말이 하나로 묶어준다는 거군요.

네. ‘난 희망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나로 묶이는 거죠. 그런 식의 시도를 그 당시에는 많이 했던 거 같아요.





LE: 근데 중반부까지 그렇게 카테고라이징이 분명하게 된 채로 사회 전반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나오다가 후반부에서는 앞서 앨범 전반의 성격을 만든 트랙들과 조금 성격이 다른 “둘만 아는 말투”나 “Triple 10”가 나와요. “둘만 아는 말투” 얘기해주시면서도 앨범에 수록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을 비롯해서 후반부 구성이 전체적으로 고민되셨을 것 같아요.

고민이 많긴 했는데… 사실 “좀 이기적으로 살아”와 “둘만 아는 말투” 사이에 스킷이 원래 하나 있었어요. 그 스킷이 어떤 거였냐면, 제가 그 당시에 국민TV에 출연하던 코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라디오에서의 멘트였어요. 거기에 두 곡을 연결하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근데 너무 설명적인 것 같아서 뺐었던 거죠. 그걸 빼면서 저는 알고 있는 서사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좀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죠. 그랬었고, 앨범 전체 흐름이, 첫 트랙 “난 희망해”에서 어떤 희망을 갖고 있다가 “다 뻥이야”에서 그게 와장창 깨지면서 현실적인 괴로움을 겪기 시작하는 거죠.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상처도 받고, 거기에서 위로도 받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좀 더 괜찮은 삶과 세상을 위한 투쟁으로 이어지도록 하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는 제가 하고 싶었던 곡들이 잘 응집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기에는 말씀하셨던 대로 ”삐에로 (Remix)”, “Triple 10” 이 두 곡이 완성도 측면에서 지금 생각해도 좀 아쉬워요. 이게 빠졌다면 더 응집된 앨범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그중에서도 “Triple 10”이 이 앨범에서는 제일 아쉬운 곡이에요.





LE: 오히려 [Dope Dyed]에 잘 붙을 만한 곡이었던 거 같기도 해요.

그렇죠.





LE: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결론을 향해 가는 두 트랙은 또 강렬해요. “먼지 쌓인 기타” 같은 경우에는 스토리텔링을 함으로써 어두운 현재의 상황 같은 걸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가 보이는 것 같고요. 거기에 정차식 씨의 그 어떤 황망한 목소리가 더해졌고요.

미친 소울이 있죠.




LE: 그러면서도 수미쌍관이라고 해야 할까요? “Stay Strong”에서는 어쨌든 힘든 세상이지만, 버텨나가면서 각자 자리에서 무너지지 말고 살아가자고 이야기하시잖아요. 뭐랄까,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로 다시금 귀결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결론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그렇죠. 제가 [True Self]와 [현실, 적] 사이에 태도가 되게 많이 바뀌었어요. ‘더 열심히 살아.’, ‘너, 더 잘 될 수 있어.’, ‘꿈을 가져.’라고 말하던 사람이 그게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어떻게 보면. 그래서 해줄 수 있는 말은, 현실의 적 앞에서 가장 현실적일 수 있는 답은 ‘Stay Strong’까지인 거죠. 그걸 제가 그사이에 느끼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죠.





LE: “해커스와 시크릿” 같은 경우에는 어떤 노력과, 인내, 그리고 긍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잖아요. 뭐랄까,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긍정의 힘’과 같은 무형의 그 무언가에 많이 의지하게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워낙 버티기 힘든 상황이니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에라도 기대게 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여러 생각이 있으실 것 같거든요.

일종의 마약 같은 거잖아요. 현실을 잠깐 까먹은 채로 스팀팩을 맞고…





LE: 마취제 같은 거죠.

네. 그냥 희망 고문을 당하면서 좀 살다가 다시 현실에서 무너지고, 그렇게 만드는 게 <시크릿>으로 대변되는 긍정의 서사들이잖아요. 그렇게 사는 게 어떻게 보면 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요. 왜냐하면, 그걸 부정하기 시작하면 되게 비관적이게 될 수도 있거든요.





LE: ‘너 왜 그렇게 사냐?’라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요.

네. 혹은 자신의 삶 자체가 (비참해 보일 수도 있고요.) 왜냐하면, 시스템 앞에서는 누구든 무력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이 되는데, 동시에 그런 긍정의 서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그걸 계속해서 주입하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LE: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그렇겠죠. 김미경 씨라든가… (웃음)

네. 그거에 대한 혐오가 있는 거죠. 물론, 긍정의 힘은 필요해요. 필요한데, 현실 인식이 냉정하게 된 이후에 거기에 맞는 긍정의 힘이 필요한 거지, 그냥 무작정 긍정의 힘을 믿는 건 주사 맞는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해 먹는 건 비겁하다고 할까, 치졸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에요.





LE: 말씀해주시면 시스템 앞에서 누구든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해주셨는데요. 사실 이 앨범이 마지막에 도달할 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역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세월호 사건인데요. 노래 안에도 담겨 있지만, 지금의 관점이든 그때의 관점이든 간에 세월호 사건을 보고서 어떤 걸 느꼈었고, 느끼고 계신지를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과거에 비슷한 사건들이 있긴 있었죠. 성수대교라든가, 삼풍백화점이라든지… 근데 (세월호 사건은)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난 지금의 제가 보게 된 가장 끔찍한 사고에요. 그리고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게 되기도 했고요. 그걸 생중계로 봤다는 게 되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가사에도 썼지만, 시시각각 뉴스 속보가 올라오는데… 계속 뭔가 말이 달라지고, 혼란밖에 없고, 믿을 수 있는 게 없고… 제가 보기에도 고통스러운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그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죠. 그리고 세월호 사건 자체의 경과가 어느 정도 지나가는 시점에서부터 언론이 피해자들과 대중을 분리하려는 작업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너무 역겨웠어요. 결국은 그게 정부의 무능, 그리고 그 무능에서 이어지는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들인 게 너무 뻔히 보이니까… 그걸 지켜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웠던 기억이 나요 지금. 그게 지금까지도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 밝혀져야 할 것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너무 한국이다? 너무 한국이라는 말에서의 ‘한국’은 이런 걸 상징해야 하지 않나 싶고, 부끄럽고, 치욕스럽고 그래요. 그런 생각들이 계속 들어요.





LE: 혹시 정권이 바뀐다면 뭔가 달라질 거로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굉장히 중요한 모멘텀에서 그 당시 야당이 보여줬던 무능함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사실 잘 모르겠고, 근데 그런 식으로 밝혀져야 할 것들이 밝혀지지 않고 묻힌 경우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냥 지금 정권에 대한 어떤 반감과 비판적인 입장만 더 강해지고, 그리고 피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분들에 대한 슬픔 같은 게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생중계로 다 같이 봤는데, 왜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는 건지 전 진짜 이해가 안 돼요.



- 결혼, [감정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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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 어떻게 보면 밝은 얘기로 주제를 전환해보려고 해요. 2015년에는 레이블 멤버분들을 신경 쓰느라, 결혼 준비하시느라 커리어 측면에서 비교적 활발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EP, 혹은 정규 규모의 앨범이 나오지 않기도 했었고요. 그래도 개인적인 측면에서 여러모로 좋았던 한 해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궁금해요. 제리케이, 김진일이라는 사람보다 주변에 챙겨야 할 식구들이 많이 떠오른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제가 퇴사하고 나서 앨범을 내지 않은 해는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한두 장씩 앨범을 계속 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앨범을 내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로 결혼 준비 과정이 있었고요. 사실 결혼 준비라는 게 별거 없는데 별 게 많아요. (웃음) 나중에 해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별 게 없는데 별 게 되게 많아요. 그래서 음악 작업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요. 결혼을 한 이후에는 초반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집에서) 작업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작업을 많이 못 했었던 거죠. 지금은 조금 아쉽긴 해요. 더 일찍 적응해서 2015년에도 앨범을 하나 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제리케이라는 아티스트의 어떤 캐릭터와 연속성 같은 걸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좋았을 것 같았거든요. 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지났으니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어쨌든 가정을 이뤘고, 너무 행복한 한 해였던 걸 확실해요.





LE: 결혼은 원래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계셨었나요?

저는 독신주의로 굉장히 오래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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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근데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아마 있었겠죠?

“결혼결심 (Mobius)”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시고요. (전원 웃음) 제가 혼자서 오래 살았었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자취를 오래 했었는데, 그렇게 혼자 사는 게 좋아서 결혼을 안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근데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 사람하고 같이 있으니까 편한 게 되게 크더라고요. 그냥 혼자서 사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또, 서로에게 진짜 많이 의지가 되고요.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됐죠.





LE: 사실 한국에서의 결혼 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잖아요. <두 개의 선> 같은 영화에서는 그에 반하는 입장을 띤 두 사람이 동거 커플로 지내면서 겪는 이야기들로 동거에 대한 법적 허용이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잖아요. 그럼에도 제도로서의 결혼이 가지는 이점이라고 할 만한 측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제가 원래는 제도로서의 결혼이 가지는 이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동성 결혼 문제가 대두되고, 왜 그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접하게 되면서부터 되게 많이 느끼게 됐어요. 법적인 배우자로서의 지위가 결혼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거라는 걸 그때 이후로 많이 알게 된 거죠. 평소에 제도로서의 결혼이 가진 이점을 느낄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저는 (결혼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그때거든요. 주로 저는 늦게 자고, 와이프는 출근해야 하니까 일찍 자야 하는데, 일찍 재울 때가 되게 행복해요. ‘이젠 자유다!’ 이런 게 아니고, (웃음) 제가 있음으로써 이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푹 자게 되는 모습을 보는 게 되게 행복하거든요. 그런 감정적인 측면이 엄청 큰 것 같아요. 결혼이 제게 주는 이점…





LE: 인스타그램(Instagram)을 통해서 가끔 와이프 분에 관한 신상이 언뜻언뜻 보일 듯 말 듯 할 때가 있는데요. 아주 디테일하게 얘기해주시기는 힘드시겠지만, 심플하게 와이프 분이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공개해도 괜찮은 선까지 말이죠.

어떤 사람이냐면요. 저를 만나기 전에는 힙합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전원 웃음)





LE: 전혀?

네.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어쨌든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 중요하잖아요. 물어봤을 때, 스윗 소로우(Sweet Sorrow)라고 했었거든요. (듣고 저는) “아~” 했었죠. 그랬었는데, 지금은 제 음악을 듣고 있고요. 그리고 “Life Changes” 가사에도 나오지만, 저는 “You’re Not A Lady”에서 되게 독립적인 여자를 찾는 사람으로 저 자신을 포지셔닝 했었어요. 근데 이 사람은 물론 자기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지만, 너 없이는 못 산다고 얘기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저도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니까 그로써 묶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되게 커요. 같이 있으면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인 거 같아요.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고요. 손재주가 좋고요.





LE: 핸드메이드 팔찌 같은 것도 만드시지 않았나요 예전에?

네. 근데 그건 취미 같은 거예요. 어쨌든… 좋은 사람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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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드디어! 올해 얘기를 할 차례입니다. 일단, 올해 발표된, [감정노동]에 관한 간단한 PR 타임을 갖도록 할게요. 앨범이 좀 나온 지 되긴 했지만요.

[감정노동]이란 앨범은 저의 커리어 하이입니다.





LE: 오…

제 앨범 중에 제일 좋은 앨범이라 자부하고요. 말씀드렸듯이 [True Self]가 ‘나’에 집중하고, [현실, 적]이 그 바깥에 집중한다면 이번 앨범은 내밀하면서도 훨씬 폭이 넓은 되게 역설적인 앨범이에요. 진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분노에서 시작해서 더 넓은 이야기까지 한 앨범에 담아낸 그런 앨범이라 생각하고요. 좋은 앨범이니까 한 번씩 들어보세요.





LE: 항상 앨범 제목이 의미심장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타이틀부터가 ‘제리케이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만 같아요.

제리케이다!!!





LE: 네. (웃음) 사실 이 타이틀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트랙은 “콜센터” 정도잖아요. 원론적인 개념만 보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노동’을 타이틀로 정한 이유가 따로 있으실 것 같아요.

이 앨범도 사실 처음에는 제목이 ‘Life Changes’였어요. ‘Life Changes’라는 제목을 짓고 처음 시작할 때는 결혼을 하고 나서 바뀐 저의 삶에 대해서 많이 쓸 수 있게 될 거로 생각했었는데, 쓰다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렇다면 무엇이 이 앨범을 대표할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콜센터”라는 곡이 말씀하신 대로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감정노동이란 개념에) 가까운 곡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테마는 그거였어요. ‘나도 한 명의 음악 노동자이고, 모든 노동자는 감정노동자다.’ 이거였어요. 그렇게 봤을 때, 이 앨범을 통해서 제가 한 명의 음악 노동자로서 그간 겪어온 감정 노동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앨범 전체를 통틀어서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감정노동’이 제일 적절한 제목이었던 거죠.





LE: 그럼 처음 구상과는 달라졌던 거군요. 작업 도중에 진행 과정에 맞춰 타이틀이 바뀐 거군요.

그렇죠. 후반에 그랬죠. 가사가 한 60, 70%쯤 나왔을 때 바꿨죠.




LE: 주제적인 측면도 인상적이지만, 형태적인 측면도 바라봐야 할 것 같아요. 프로덕션의 결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게, 프로듀서 험버트(Humbert) 씨가 앨범 전곡에 함께 하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1MC 1PD 앨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일단, 전격적으로 험버트 씨와 이번 앨범을 함께 하게 된 계기나 이유를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험버트가 예전에 아날로그소년의 [선인장]이라는 프로젝트를 했을 때, 깜짝 놀랐었어요. ‘아, 이 친구 되게 잘한다.’라고 생각해서 눈 여겨 보고 있다가 “결혼결심”이랑 데이즈 얼라이브 2주년 기념 싱글인 “Believe”를 같이 작업하면서 저도 그렇고, 데이즈 얼라이브 친구들도 그렇고 합이 괜찮고 잘 맞는 것 같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래서 4집 앨범 작업을 할 때, 험버트랑 많이 작업해야겠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험버트가 어느 날 갑자기 만나재요.





LE: 먼저?

네. 그래서 ‘뭐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싶었죠. 근데 만나자고 한 거면 뭔가 중대할 거 같잖아요. 그래서 안 물어보고 그냥 나갔어요. 그랬더니 (험버트가) “제가 형 앨범 전체 프로듀싱을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야심을 밝혔죠. 그때 그는 몰랐죠. 이게 그에게 지옥의 시작일 줄은… (전원 웃음) 몰랐을 거예요. 처음에 걔가 저한테 그렇게 얘기했을 때, 전곡을 다 프로듀싱하는 건 원래 머릿속에 없던 생각이었어요. 어떤 앨범 전체적인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면서 다른 비트들을 가지고 왔을 때, 그 친구가 손을 본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는데, 같이 작업하면서 한 곡 두 곡 만들다 보니까 마음에 들어서 그냥 전곡을 다 같이하게 됐죠.





LE: 전곡을 다 같이했으니까 기본적으로 제리케이 씨 마음에 아주 들었다는 거잖아요. 근데 프로듀서로서의 험버트 씨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운드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좋고, 그리고 화성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좋아요. 그 탄탄한 기반을 통해서 다양한 변형이 가능해요. 이 친구한테 제가 되게 이런저런 주문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 친구가 평소에 하지 않던 것도 막 시키고요. 평소에 하지 않던 거 한 번 만들어 달라고 하고, (그 친구가) 만들어서 갖고 오면 제가 뺀찌 놓고. “음 좋은데 좀 더 강했으면 좋겠는데?, 음 좋은데 좀 아쉬운데?” 이러고… 그렇게 많이 했는데, 어쨌든 그걸 통해서 얘가 성장하는 게 저는 보였어요. 이 친구는 만들 수 있는 폭이 굉장히 넓고, 그게 어느 정도의 퀄리티가 늘 보장되고, 그리고 해석하는 능력도 되게 좋아요. “축지법” 같은 경우에는 ‘BPM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만들어줘.”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축지법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만들 거야. 한 번 만들어볼래?”라고 했더니 그런 비트를 갖고 온 거예요.





LE: 이거 약간 클라이언트가 디자이너한테 추상적으로 말하고서 시안 부탁하는 그런 느낌 아닌가요? (웃음)

제가 나쁜 클라이언트처럼 보이는데… (웃음)




LE: 아닙니다.

일부러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었어요. 그냥 축지법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을 막 표현해보라고 했을 때, 나온 결과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간 거죠. 그런 식의 어떤 상상력과 해석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요. 그리고 처음 버전에서부터 완성된 버전에 이르기까지의 편곡 측면에서의 다양함도 좋고요. 또, 커뮤니케이션 쪽으로도 좋아서 요구하는 바를 잘 수용해줘요. 극찬을 하고 있네요 제가.





LE: 다른 아티스트에게도 함께 해보기를 권하고 싶은 프로듀서인가요?

그럼요. 좋은 프로듀서에요.





LE: 그래서 그렇게 험버트 씨와 함께 만든 트랙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요. 첫 트랙 “No Role Models”에서 나플라, 루피, 던말릭, 슬릭을 피처링 게스트로 기용한 게 분명하게 의도가 있어 보여요.

제가 닳고닳은 래퍼로서 루키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곡의 주제인데, 슬릭과 던말릭은 제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고요. 루피와 나플라는 작년 여름에 그 친구들이 막 떠오르기 시작할 때, 되게 눈여겨 보고 있었어요. 신혼여행을 제가 LA로 갔었는데, 그때 만났었어요. 그렇게 섭외하게 됐죠. 루키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루키가 필요했고,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었던 거라고 볼 수 있죠.




LE: 그 다음 트랙으로 나오는 게 “#MicTwitter”인데요. “#MicTwitter”는 우선, 기본적으로 트위터 140자 분량에 맞춰서 랩을 짜야 하다 보니까 제약이 좀 컸을 것 같아요. 또, 트위터 코리아에서 굿즈를 선물해줄 정도로 트위터 안에서 화제가 됐던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런 작업 과정, 곡에 대한 반응 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MicTwitter”의 컨셉은 제가 트위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소울 컴퍼니에서 “우리 이런 거 한 번 해볼래”라고 내부에 제안했던 적이 있는데, 다들 ‘그게 뭐야?’ 약간 이런 느낌이 있어서 바로 까였었죠. 그래서 그냥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실현하게 된 거죠. 제약이… 사실 그 BPM에 그 비트에는 그냥 쭉 써내려 가면 140자 이내로 8마디가 나와요. 근데 한 벌스가 되게 빡빡했어요. “뭔갈 말로 하긴 한다만 자기 말이 아닌 말을 하니 말이 말 같지 않잖아” 이 부분이었는데, 그 벌스를 쫙 써놓고 보니까 한 150자 정도가 나와서 글자를 몇 개 빼고 띄어쓰기를 약간 조작하고 이런 식으로… (전원 웃음)





LE: 어, 떳떳하지 못한데요? (전원 웃음)

제가 그 부분 처음 가사를 쓸 때, 그렇게 해서 140자를 다 맞췄다고 생각했었어요. 글자 몇 개 빼는 거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그 곡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잖아요. 거기에 가사 그대로를 올려보니까 한 글자가 넘는 거예요. 그래서 ‘아, 어떡하지?’ 싶어서 또 하나를 줄였었죠. 이 자리에서 밝히네요.

반응도 재미있었어요. 워낙 트잉여들에게는 반갑고 재미있는 곡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여성혐오에 대한 배격 이런 측면도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리트윗을 많이 해주고 해서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초반에 이런 가사를 트윗할 거고, 이게 다 녹화되어서 뮤직비디오에 등장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트위터미담’이라고 썼었거든요. 그때쯤에 사람들이 자기 트윗에 ‘#트위터미담’을 붙여서 올리더라고요. 전 약간 사람들이 코믹한 요소로, ‘트위터에서 이런 것도 했지롱.’ 이런 느낌으로 쓰는 거라고 이해하고 붙인 거였는데, 그게 트위터 코리아에서 트위터 10주년을 맞이해서 미담 사례를 모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트위터미담’을 붙인 거였는데, 트위터 코리아에서 그걸 보고 연락한 거예요. 그래서 트위터 코리아랑 트위터 10주년 기념 인터뷰도 이 자리에서 하고, 트위터 굿즈를 엄청 선물 받았었죠. (전원 웃음)





LE: 최고의 트잉여가 되신…

그러고 나서 계정에 ‘Verified’ 표시가 뜨면서 트잉여로서 모든 걸 이뤘다고 할 수 있겠죠.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 곡도 그렇지만, “콜센터”의 가사도 “#MicTwitter”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기 이틀 전인가에 어떤 분이 캡처해 올리면서 ‘한국힙합에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여성이 엄마가 아니고 창녀가 아닌 그런 가사를 쓰는 이가 있다.’ 이런 식으로 쓰신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의 트윗이 리트윗이 몇 천 번씩 되고 그랬었거든요. 그때도 실시간 트윗에 또 오르고 그랬었어요. 트위터가 그런 측면에서 되게 고맙죠. 저한테 영감을 주기도 하고, “#MicTwitter”라는 곡에서는 예술의 형식을 정해주기도 하고요. 그게 나왔을 때의 반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재미있었던 경험이에요.





LE: 그런 얘기도 있잖아요. 온라인만 보면 여론이 이쪽인 것 같은데, 현실에서의 여론은 아니고. 예를 들면, 대선, 총선을 치르다 보면 트위터나 온라인에서는 지지 세력이 되게 많아 보이는데, 현실에서는 득표율에 그에 비례하지 않는 후보들도 종종 보이잖아요. 온라인 정치와 현실 정치의 괴리가 굉장히 심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죠.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들 얘기 많이 하죠.





LE: 트위터를 많이 하시는 입장에서는 그런 측면에서 상실감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해요.

그걸 되게 많이 느꼈던 시즌이 있었어요. 대선 직전에 있었던 총선 때 특히 그랬고, 대선 때도 그랬고요. 근데 그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된 게 트위터가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하는데, 그 태풍이 바깥으로 나가게 돼요. 나가서 사회 어딘가를 변화시키고 있어요. 소라넷 잡는 거 보세요. 어딘가를 변화시키고 있어요.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퍼지게 된 것도 저는 트위터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작은 변화가 쌓여서 큰 변화가 되는 거기 때문에 찻잔 속에서도 태풍이 계속 일어나면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혀 아쉽지 않아요.



LE: 아까 잠시 트위터 얘기를 하면서 “콜센터” 가사에 관한 얘기를 살짝 했는데요. 근데 실제 콜센터 직원이라고 밝히신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서 “콜센터”의 뮤직비디오를 보고서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는 뉘앙스로 의견을 얘기하시는 걸 본 것 같아요. 그런 의견에 제리케이 씨는 본인의 의도를 설명하면서도 어쨌든 그렇게 느꼈으면 죄송하다는 식으로 답변해주셨던 거로 기억해요.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만큼 단순히 항변만 늘어놓기보다 그런 스탠스를 취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다산콜센터를 찾아가는 영상이 있잖아요. 그때도 그분들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었고, 인스타그램에서도 그런 의견을 주신 분이 계셨었어요. 저는 그 곡에서 그 직종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은 제 또래를 상정하고 묘사했는데, 실제로 그 직종에서 오랫동안 프라이드를 갖고 일하신 분들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벌스 1에서 ‘이력서도 허전한 여성으로서 갈 곳이 없어서 콜센터를 가게 됐다. 옛날 같았으면 공장에 갔으면 사람이었다.’라고 느껴지게끔 내용을 쓴 거죠. 근데 그건 진짜 전적으로 제 잘못이잖아요. 그 표현을 그렇게 해서 그분들이 느꼈다는 건요.




LE: 어떤 섬세함에 있어서의 잘못이라는 거겠죠.

네. 제가 표현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렇게 느낀 거니까요. 전적으로 제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제 의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나는 그렇게 쓴 게 아니야.”라고 백번 말해봐야 그다음 심리적인 장벽을 넘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거고, 지금도 표현을 그렇게밖에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긴 남아요. 좀 더 치열하게 고민했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하지만 어쨌든 과거에 비해서 지금의 사람들이 그만큼 노력을 안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훨씬 더 노력을 많이 하고, 고생을 많이 하면서 스펙을 쌓지만, 그 스펙이 기업들 앞에 가서는 휴짓조각이 되어버리는 매일을 우리가 마주하니까 그런 의미로 (가사를) 썼다고 설명을 작게나마 드린 거죠.





LE: 그렇게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을 거치면서까지 “콜센터”로 감정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룬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곡 안에서 공장과 콜센터, 이렇게 크게 서로 대비되는 장소가 시대적인 배경이나 맥락을 많이 보여주고, 내용도 단순히 콜센터 직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시대 전체를 지배하는 전반적인 흐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한다고 하는데, 그리고 규모는 계속해서 커진다고 하는데, 우리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미래에 희망을 품으면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과거와 같이 많아지고 있느냐고 하면 절대 아니잖아요.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으로 가고 있는데, 그런 희망 없음과 불안정함, 그리고 그 안에서 매일같이 무너져 내려가야 하는 자존감 같은 것들이 그냥 제 또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들인 것 같아요. 그게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LE: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가 그렇게 “콜센터”에 담겨 있다면 “Studio Gangstas”에는 씬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아주 극렬하게 담겨 있는데요. 말 그대로 ‘격노’하는 트랙이잖아요.

진짜 ‘딥빡’이죠. (웃음) ‘딥빡’.





LE: 가사 중에는 ‘Real Vibes Only’라는 말이 인상 깊어요. 그 반대에 놓인 ‘좋은 게 좋은 거지.’, ‘네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하다보면 돈을 따라와.’라는 말로 대변되는 ‘Good Vibes Only’가 어떻게 보면 <시크릿>의 변형된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일단 ‘Good Vibes Only’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뭐, 각자 삶의 태도가 있는 거니까요. ‘그러세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아지지 않네요.’죠. ‘저는 왠지 당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지금도 눈에 들어오고, 당신들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 내 마음속에는 들어오고, 그건 아마 우리 성격의 차이겠…죠?’ 그런 거 같아요.





LE: 그것이 ‘딥빡’을 통해서 “Studio Gangstas”로 나온 거군요.

네, 그렇죠. 이렇게 얌전히 말할 수 있는 건데… (전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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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대표적으로 ‘Good Vibes Only’를 많이 말하고, 추구하는 레이블이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잖아요. “Studio Gangstas” 인트로에서 돈 얘기 말고는 할 얘기 없다는 래퍼들과는 진짜 할 얘기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하고요. 일리네어 레코즈의 일원 중 한 명이 오랫동안 보고 지내왔던 더콰이엇 씨이기도 한데, 일리네어 레코즈에 대한 여러 생각이 궁금한데요.

우선, 일리네어 레코즈가 말하는 ‘Good Vibes Only’는 굉장히 리얼해요. 그 친구들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걸 이뤄냈잖아요.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그냥 그렇고, 제가 “Studio Gangstas” 인트로에서 그런 말을 한 건 정말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거예요. 저랑은 진짜 다른 사람들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마 할 얘기 없을 거고. 둘 다 언더그라운드라고 쳤을 때, 정말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는 거죠. 우린 지향점이 정말 다르고, 각자 갈 길 가자는 선언에 가까운 거예요. 그리고 일리네어 레코즈 친구들에 대한 지금 현재의 감정은 그 친구들이 <쇼미더머니>에 두 번째 나오고 있기 때문에… (웃음) 일리네어 레코즈가 <쇼미더머니>에 처음 나왔을 때, 제가 되게 속상했던 건 도끼가 ‘랩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쇼미더머니> 말고도…’ 그런 뉘앙스의 가사를 썼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좀 속상했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또 나온다고 해서 또 속상하고. (웃음) 그 정도.





LE: 그쪽 분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거의 안 하죠.





LE: <나 혼자 산다>든, 인스타그램 포스팅이든 여러 방식으로 그분들이 사는 삶이 노출되잖아요. 개인적인 심정에서 그분들의 삶이 부럽다고 느낀 적도 있었나요?

부럽죠. 돈 많이 벌고, 좋은 차 타고. 그것보다도 진짜 부러운 건 여행 많이 다닐 수 있는 게 부러워요. 왜냐하면, 저도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고, 와이프도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건 부럽죠. 근데 꿈꾸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어떤 곳으로 향해가는 데에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요. 그 친구들은 그 친구들 방식으로 거기에 도달했고,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게 너무 자연스럽고, 리얼한 거죠. 저는 그냥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천천히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LE: 또 얘기해볼 법한 트랙으로, “You’re Not a Man”인데요. 작년에 세계적인 스웨덴의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이 와서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강연에서 하고 갔었는데요. 또, 취업 등에서 어려워지고 박탈감을 느끼는 남성이 많아지면서 여성혐오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물었더니 아주 강하게 헛소리라며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면 남자도 살기 좋아진다고 하기도 했고요. 근래 페미니즘의 흐름에서는 단순히 여성의 권익만을 보호해준다거나 권리를 신장시켜준다기보다는 남성 자신이 남성 자체에 대한 생각을 깨야 하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은데요. 이 트랙에 그러한 내용이 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다 연결되어 있는 얘기인 거죠. 제가 역시나 트위터를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쯤에 슬릭이 이 곡의 바탕이 된 테드(TED) 강연 영상을 보여줬는데요. 맨 박스(Man Box)에서 벗어나는 게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 말하자면 일종의 되게 좋은 선택지로 나타난 게 맨 박스에서 벗어나는 거였죠. 남성들 사이에서 남자다움으로 인정받는 그 프레임을 버리기만 하면 나도 자유로워지고, 여성들도 그 프레임 바깥에 있음으로 인해서 당하게 된 피해를 겪지 않아도 돼요. (그 테드 영상이) 너무 좋은 답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곡의 모티브로 쓰게 된 거죠.





LE: 과거를 돌이켜보면, ‘아, 내가 정말 맨 박스에 갇혀 살았구나.’라고 느껴지는 시기가 있지 않나요? 그런 광경을 보고도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도 있고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한남’이었죠. (전원 웃음)





LE: “You’re Not a Lady” 같은 경우에는 비판을 받기도 한 데에 비해 “You’re Not a Man”은 그러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물론,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섬세해야겠지만, 어쨌든 본인이 속한 집단에 관해 이야기했기에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지점도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됐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데에는 일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 가치 판단에 해당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판단에) 의견이 여러 가지로 갈릴 수 있겠죠. 게다가 한국 사회는 특히나 젠더에서의 권력관계가 너무 명확한 사회인데, 그 권력관계에서 위에 있는 집단에 속해 있는 제가 그 권력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집단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게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맨 박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더 설득력 있고, 간편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LE: 이래저래 각 트랙에 관해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그래도 조금 더 애정이 가는 트랙이라든가, 다른 건 안 들어도 이 트랙만큼은 꼭 들었으면 좋겠다 싶은 곡이 있을까요?

이거 굉장히 어려운데… 어렵네요.





LE: 어떤 그룹, 어떤 대상에게는 이 곡을 추천한다는 식으로 말씀해주셔도 되고요.

제가 이번 앨범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은… 아, 다 좋은데? (전원 웃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곡은 “축지법”이에요. “축지법”이고, 리코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Studio Gangstas”고, 슬릭이랑 던말릭이 제일 좋아하는 곡은 “기립박수”고요. 그 곡들을 들어보시면 그래도 앨범의 코어한 부분들은 다 들으시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니에요. 그냥 다 들어보세요. (전원 웃음) 버릴 수가 없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마지막 트랙에서 첫 트랙으로 이어지게까지 다 들어주셔야 완성이 돼요.





- 디스전, 못다 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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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감정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좀 길게 해봤는데, 앨범이 나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랙넛(Black Nut) 씨와의 디스전이 있었는데요. 이 얘기를 안 하고 지나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일단 디스 받고 나서 대응곡이 되게 빨리 나왔잖아요. 그리고 그 전에 “Indigo Child”의 가사를 SNS를 통해 문제시하시면서 어떤 디스전의 전초가 있었고요. 이런저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반적으로 어떤 기분이 많이 드셨는 지부터가 궁금해요. 디스전이 처음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 전에 디스전을 겪어본 적이 없었죠. 일단, “Indigo Child”가 나왔을 때, 제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올렸던 내용을 올릴까 말까 되게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이걸 올리면 분명히 시끄러워질 게 너무 뻔해서, 그게 너무 피곤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내가 피곤하기 때문에 넘길 만한 것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아닌 것 같아서 올렸던 거죠. 그랬더니 역시나 굉장히 엄청난 폭풍 속에 휘말리게 됐고, 제가 걸어 들어간 거죠.





LE: 여기 휘말리신 분(블럭) 한 분 더 계신…

아, 그렇죠. (전원 웃음) 거기에 이어서 제가 페이스북에 길게 글을 남겼었죠. 그러면서 뭐랄까, 제가 걷는 행보, 제가 내뱉는 말들이 마음에 안 드는 정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치면, (그 해프닝이) 그 사람들이 완전히 안티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SNS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래퍼인데 왜 SNS로 하냐고…





LE: 아, 네. 래퍼면 랩으로 해야지, 왜 SNS로 할 말을 하느냐는 거죠.

그게 전 너무 싫은데, 어쨌든 그렇게 보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어쩌겠어요. 그분들이 그렇게 보신다는데. 물론, 저는 그게 되게 이상한 시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런 시각까지 더해져서) 안티로 돌아서는 분들이 많아졌고, 그러고 나서 ‘이 친구가 언젠가는 디스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는 했었어요. 근데 실제로 디스곡이 나오고 나서, 그게 자정에 공개됐었는데, 제가 바로는 몰랐었어요. 한 20분 정도 지나서인가 트위터에 들어갔더니 난리가 난 거예요. 난리가 났길래 ‘뭐야?’ 하면서 들어봤더니 (진짜로) ‘…뭐야?’ 싶은 거예요. (전원 웃음) 그다음에 저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아서 가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대응곡) 비트가 [Dope Dyed]의 “Bed Recipe”인데, 그걸 일부러 고른 이유는 블랙넛의 “Part 2”의 비트와 비슷한 BPM과 리듬을 갖고 있어서였어요. 저는 그 얘기에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하지 않고 그 당시에 블랙넛이 했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던, 행동 속에서 보였던 모순만 짚고 심플하고 선비롭게 깔끔하게 쳐내자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가사 쓰고 녹음했었어요. 그렇게 업로드하고 쳐냈었죠. 그러면서 뭐랄까, 더 이상의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았고, 이 정도까지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더 할 얘기도 없고.





LE: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고, 이 정도까지만 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제리케이 씨의 의견이 가진 근본적인 의도를 오해하거나 곡해, 왜곡하는 분들도 더러 있잖아요. 이를테면, ‘세월호를 언급했지만, MC 메타를 공격한 것이다.’, ‘제리케이는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이렇게까지는 나서지 않다가 정치적인 소재인 세월호가 나오니까 나선다.’, 혹은 ‘블랙넛을 왜 일베로 모느냐?’ 등등이 있죠. 근데 사실 말씀하신 걸 나름대로 해석해보면, ‘너 일베.’라고만 하고 싶었던 게 아니고 ‘너가 일베의 문법을 사용하고 있구나.’라는 부분을 좀 더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아닌가요?

그렇죠.





LE: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반박 혹은 입장 표명 같은 걸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제가 쓴 글을 읽어보시고 지금처럼 해석하고, 말씀해주신 거잖아요? 제 입장을 이해하시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페이스북에 그렇게 긴 글을 남겨도 이해를 안 할 사람들은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냥 ‘세월호니까 반사적으로 나왔구나.’, ‘블랙넛을 일베로 몰았구나.’라고 보시고 싶은 분들에게는 제가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가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요. ‘아, 그렇구나. 그냥 그렇게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도 한 번 더 정리를 부탁하는 질문을 해주셨으니까 말하자면, 일단 일베의 문법이라는 게 지금 제 아랫세대, 혹은 지금의 중, 고등학생과 그 아랫세대에게는 굉장히 보편적이라고 들었어요.





LE: 단순히 일베로 정의되지 않아도…

네. 그냥 일종의 문화 코드라고 알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산 지 오래됐고… 그랬기 때문에 일베의 문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거고요. 세월호 라인에 대한 해석은 제가 페이스북에 쓴 글에도 써놨지만, MC 메타 형에 대한 공격한 거라는 의도로도 볼 수 있지만, 추락하는 위치를 걱정하는 사람도 세월호의 진실을 궁금해할 수 있어요.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요. 저는 세월호의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Indigo Child”의 그런 맥락 속에다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세월호에 대한 이슈를 끌어다 댄 것 자체가 모욕적인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그 벌스가 가져온 파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저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그 뒤에 굉장히 많은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나타났죠.





LE: 가히 전방위적이었죠. 굳이 힙합 씬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될 정도로요.

그러니까 힙합을 벗어나서 문화, 사회 전체적으로 그런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던 걸 보면, 제리케이는 정치적이니까 다른 데는 입 다물고 있다가 여기서만 나섰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해야 할 얘기니까 한 거고, 할 만한 얘기니까 했다고 생각해요.





LE: [감정노동] 같은 경우에는 가치 판단의 방향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쇼미더머니>가 작품을 만드는 데에 동력이 되어준 셈이잖아요. 이번 디스전 같은 경우에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주변에서 좀 더 세게 대응하지 그랬냐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워낙 (블랙넛의 언행에) 들어 있는 모순들만 딱딱 치고 나왔기 때문에… 근데 저한테는 이게 이기고 지는 게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어요. 저를 디스한 논리도 너무 부실하고, 모순덩어리고요. 그냥 ‘뭐야…?’ 약간 이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할 것 같지는 않아요.





LE: 근데 그렇게 ‘뭐야…?’라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면서도 즉각적으로 오는 데미지 같은 건 있지 않나요?

있죠. 당연히 있죠. 당연히 욕먹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죠. (웃음) 그러면서도 ‘뭐야?’라고 했기 때문에 그걸 가사로 옮길 수 있었던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공격해 왔지만, 이걸 내가 게임으로 받아서 이 정도로 쳐줄게.’ 그 선에서 저는 마무리한 거죠. (대응곡을 녹음한 게) 한밤중이었잖아요. 와이프는 자고 있었고. 와이프한테 메모를 남겨 놨었죠. 일어나서 이런 소식을 듣게 될 텐데, 너무 놀라지 말고, 난 아무렇지 않고, 내가 할 거 하고 정확하게 빠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메모를 남겨놓고 잤는데, (제가 받는 데미지보다는) 그런 게 오히려 신경 쓰이죠. 제 가족들이나 와이프가 보고서 걱정할까 봐.





LE: 그렇죠. 같이 마음 아파하고…

네. 근데 저는 뭐, 일종의 게임이니까요. 물론, 게임에서도 맞으면 살짝 아프긴 하죠. ‘아! 이 새끼가…’ 이런 느낌… (전원 웃음)





LE: 디스곡 가사 중에서도 “우리 할머니도 걸렸었어 치매” 이 라인은 논리상으로 쉽게 납득되진 않더라고요.

뭔 소리야 그게. (전원 웃음) 블럭 씨한테 얘기한 것도 이게 여성혐오라고 했으니 그 말을 너한테 써준다고 하는데, 그게 뭔 소리에요. ‘뭐라는 거야?’ 싶죠. 근데 저는 좀 신기했던 게,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중들이 있다는 거였어요. 그게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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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지금까지는 커리어 순서대로 이야기를 쭉 다뤄봤고요. 이제는 짧게 짧게, 여러 갈래의 질문을 이래저래 던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생뚱맞은 피처링도 가끔 하셨던 거로 기억해요. 요즘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보이지는 않는데, 이제는 그런 제의가 없는 편인가요? ‘이 사람 앨범에 제리케이가?’ 이런 느낌이 드는 때가 가끔 있었던 것 같은데요.

최근에도 몇 곡 했어요. 프로듀서 앨범 준비하는 분 두 분 거에 참여했고… 또… 아무튼, 최근에도 몇 개 했었어요.





LE: 피처링하기로 결정하는 건 따로 기준 같은 게 있나요? 아니면 그냥 마음에 들었을 때?

그렇죠. 일단,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제가 할 만한 곡일 때?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애정 같은 것도 기준이 될 테고요. 익스에이러(Ex8er) 같은 경우가 제가 애정 있는 친구라서 피처링을 두 번인가 했었거든요.





LE: 페이가 오고 가는 건 드릴 때도, 받으실 때도 항상 철저하게 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되게 철저하게 하려고 하는데요. 받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저도 조금이라도 챙겨주려고 예전부터 해오고 있긴 했죠. 그런 경우가 있어요. 제가 좀 더 크게 되어서 충분히 사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좀 속상하다고 할까? 그럴 때가 많죠.





LE: 혹시 평소에 본인이 선호하지 않던? 좋아하지 않던 집단이나 아티스트가 피처링 제의를 한다면, 그래도 주제나 프로덕션, 의도 등등 무언가가 마음에 들면 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그게 누구냐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LE: 별명 얘기 잠깐 해볼까요? 팬들이 ‘마왕님’이라고 별명을 붙인 적이 있었어요. ‘제사장님’이라는 별명도 있고요.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 따로 있나요? 아니면 이렇게 불렸으면 좋겠다 싶은 거라든가…

사실 없고요. (전원 웃음) ‘마왕님’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신해철 씨가 돌아가시면서 거기에 따라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어서요. 그런 이유로… 그냥 뭐, 저를 뭐라고 따로 부를 일이 있으려나요. 잘 모르겠어요. (웃음)





LE: 인터뷰가 저희와는 되게 오랜만이신 데요. 거의 5년 만이었는데요. 그때는 머리가 긴 편이셨어요. 최근에는 삭발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냥 깔끔해서?

그때 인터뷰했던 게 2011년이죠? 소울 컴퍼니 사무실에서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제가 회사원에서 힙합 뮤지션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리고 그 전에는 스스로를 힙합 뮤지션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어요. 힙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그냥 랩만 좋아하는 애라고 지금은 생각하거든요. [True Self]를 낼 때쯤이 되어서야 그래도 힙합에 대한 이해를 좀 하게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부터 보니까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다 머리에 뭘 하거나 밀거나 둘 중 하나더라고요. 근데 뭘 하기에는 제가 별로 안 어울리고, 그래서 그냥 시원하게 밀고 있어요. 이게 또 약간 디테일이 있어요. 원래 제가 6mm로 밀었었는데, 최근에는 그냥 6mm 하다가 3mm 하다가 이제는 그냥 아예 짧게 밀어요.





LE: 그게 디테일이 있는 게, 옆에 라인 각을 세워야 예쁘지 않나요?

라인을 정리해야죠. 매일매일 면도하고, 라인도 정리하죠. (웃음)





LE: 그런 머리가 길었던 당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5년 전이었고, 이제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그에 따라 많은 게 변했잖아요. 지금 이렇게 쭉 이어오시면서 문득 생각이 들기에 5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가치관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사실 저 빼고 다 바뀐 것 같아요. 진짜로 모든 게 다 변한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바뀌었고, 그때는 아예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됐고요. 사실은 저도 많이 변했죠. 그때의 인간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나 바라보는 방식도 지금에 와서 정말 많이 바뀌었고요. 저 빼고 다 바뀌었다고 할 수 없네요. 모든 게 바뀌었네요. 5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모든 걸 다 바꿔놓을 만큼 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LE: 평소에 ‘약자의 편’이라는 수식어가 제리케이 씨에게 많이 붙는 편인 것 같은데, 대한민국에서 약자란, 그리고 한국힙합 씬에서 약자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대한민국에서 약자… 뭘 기준으로 따지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겠죠. 약자라는 개념을 그렇게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최근에 장동민 씨가 개그프로그램에서 한부모 가정 비하하는 개그를 했을 때, 자신이 한부모 가정인데 왜 날 약자라고 부르는 거냐고. 난 그렇게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약자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가지고 있는 권력의 크기, 누리고 있는 자원의 수치로 판단해서 강자와 약자가 나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여러 갈래가 있겠고, 대한민국에서 약자가 뭐냐고 했을 때는 글쎄요. 너무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어서 뭐라고 답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LE: 앞으로 얘기하고 싶은 사회적 의제가 따로 있으신가요? 어떤 거에 관해서 좀 더 관심이 가더라, 이런 걸 좀 음악으로 풀어내고 싶더라.

제가 아까 ‘아무말’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 무색무취한 단어들? 그런 게 너무 범람하는 느낌을 최근에 받아요. 뭐랄까,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따지고 보면 가치가 0인 거죠. 그런 의미 없는 말들, 의미가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었는데요. 아직 뭔가 구체적으로 잡히는 건 없어요.





- Out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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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이제 거의 막바지인데요. 마무리할 차례입니다. 저희 힙합엘이 자주 오시는지,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종종 들어가고요.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이틀에 한 번은 들어가는 것 같고요. 너무 사랑합니다. (전원 웃음) 왜냐하면, 제가 힙합에 대한 이해를 비로소 하게 됐다고 한 그 시점에 힙합엘이가 있거든요. 힙합엘이가 절 만들어줬어요. (전원 웃음) 그래서 좋고… 앞으로, 글쎄요. 힙합엘이가 언제까지… (전원 웃음) 왜냐하면, 연식이 쌓이고 하다 보면 결국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되니까요. 힙합엘이야 죽지마…





LE: 그런 힙합엘이를 통해 접하신 것도 좋고요. 국내, 외로 최근에 잘 들은 앨범이나 곡 중에 추천해주실 만한 것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오늘 들은 음악도 좋고요.

최근에 제일 많이 들은 앨범은 비욘세(Beyonce)의 [LEMONADE]고요. 그리고 케이트라나다(KAYTRANADA). 새 앨범 너무 신나요. 골드링크(GoldLink)랑 같이한 “Together” 너무 신나고, 국내 곡 중에서 최근에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오넛인 것 같아요. 들으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LE: 세 곡짜리 맥시 싱글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리고 슬릭의 앨범이… 넘나 좋은… (전원 웃음) 타이틀곡 프로듀서가 무려 임레이(IMLAY)라는… 임레이 짱짱맨.





LE: 앞으로의 계획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쨌든 앨범이 거의 1년에 한 장씩 나왔다고 치면, 일단 그 목표는 벌써 달성하셨는데요. 그에 이어 남은 올해에 대한 계획이라든가, 거시적으로 봤을 때 뮤지션으로서의 계획을 말씀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일단 당장은 슬릭의 앨범을 서포트하는 게 제일 큰 임무이고, 그러고 나서 7월 27일이 저희 데이즈 얼라이브의 주년 기념일이거든요. 그때쯤 해서 공연을 한 번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구체화되진 않았고요. 그리고 데이즈 얼라이브 컴필레이션 앨범을 작업하고 싶다는 계획이 있고, 어떤 모습이 될지는 해보고, 나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장 개인 작업은… (웃음) 앨범 낸 지 몇 달 안 됐으니까. 천천히 할 생각이고요. 거시적으로는 제가 아까 얘기했던 내용 중에 “<쇼미더머니> 밖에도 힙합이 있다.’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누군가는 그렇게 자신 있으면 <쇼미더머니>에 나와서 다 이겨버리지 그러냐고 할 수 있는데, 저는 거기에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 밖에서도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리고 그걸 해내고 있는 멋있는 집단들도 있으니까.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바깥에서 살아남는 멋있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할 말이 있을 때는 계속하고 싶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정도.





LE: 네. 이제 저희가 준비한 질문은 모두 소화하셨고요. 혹시 질문에 없어서 하지 못 한 말이나… (전원 웃음)

그런 게 진짜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웃음)





LE: 아니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오늘 되게 길게 인터뷰하셨는데, 인터뷰 소감 같은 걸 자유롭게 해주셔도 됩니다. 다 비워내듯이… 이미 다 비워내셨을지도 모르지만…

음… 네. 절 어디까지 빨아먹으려고 하시는 지… 정말 대단하시고요. 존경스럽고요. (전원 웃음) 다들 너무 수고하셨고요. 어쨌든 이게 아카이빙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말 저한테도 되게 고마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LE: 5년 전 인터뷰에 댓글이 54개 달렸어요. 이번에는 몇 개 달릴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그때 이벤트했던 것 같은데요?





LE: 아, 그래서 54개였군요. 사실 저희가 어떤 인터뷰를 해도 그렇게까지 댓글이 많이 달리는 편은 아니거든요. 아무튼, 인터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글 | Melo, bluc, heebyhee, Beasel(녹취), greenplaty(녹취), Geda(녹취)
이미지 | 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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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7
  • 0000001Best베스트
    3 7.2 19:23
    누가 ㅈ 이나 까라고 전해주라던데요?
    ㅈ이나 까세요
  • 7.30 01:28

    음악이 구리다? 전혀 안구린데... 이정도로 전체 트랙들 균형맞추고 가사신경쓰고 나름 핫한 신예프로듀서랑 1mc 1pd로 만든 앨범이 비슷한 시기에 몇장이나 더 있는지.

  • 7.30 01:29
    몰려와서 분탕치는 통에 댓글수는 올라가서 좋네 ㅋ 제리케이 화이팅!
  • 8.5 17:50
    데절랍 럽럽럽!!
  • 아따 뭐만하면 여혐이라고 하는 메갈들 참 많당께;;; 자칭 메갈이랑 워마드하고 관계없다는 메갈4에서 노시길;;;
  • 8.17 08:34
    안녕 메리케이? 자칭 한남충? 정말 어이 없군...
  • 6.29 08:10
    야 이위로 프사 물음표단애들 물어뜯는거 보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준
  • 11.15 10:12

    제제케가 던말릭 들어가면 후회할 거라 하는 거 이제 보니 존나 웃기네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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