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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휘트니 휴스턴, The Greatest Singer of All

title: [회원구입불가]Kayla2012.02.13 16:23추천수 2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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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열전] 반백년의 인생을 불꽃처럼 태운 디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2012년 그래미 시상식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11일 로스앤젤레스의 밤, 휘트니 휴스턴이 베벌리 힐스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타전되었다. 2009년 오랜 공백을 깨고 [I Look To You]로 기나긴 마약중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재기를 시도했던 전설적인 디바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전세계인이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한 시대를 호령하며 거대한 궤적을 남기고 스러져간 그녀의 삶을 우리가 몇 개의 문단으로 회고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지금부터 길고도 짧은 인생을 걸었던 그녀의 발자취를 천천히 따라가보자. 



 

노래 부르는 소녀, 휘트니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은 정말 많다. 전세계에 1억 7천만장의 앨범을 판매한 전설적인 디바, 여성가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의 주인공, 여성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데뷔 앨범 중 3곡이나 빌보드 탑 100차트에 1위에 올려놓은 가수, 전세계에서 가장 상을 많이 받은 여성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른 가수, 현존하는 리듬앤 블루스 흑인 여가수들의 성공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가수 등등. 무엇보다 그녀는 가스펠 가수로 유명한 씨씨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며, 가수이자 UN대사로도 활약한 다이안 월윅(Dionne Warwick)의 사촌이고 소울의 여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대녀이다. 


뉴저지 뉴왁과 이스트 오렌지의 교회 등지에서 가족 친지들과 가스펠 콰이어로 활동하던 휘트니는 주로 자신의 어머니의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15살이 되던 나이에는 샤카 칸(Chaka Khan)과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의 백그라운드 보컬을 하기도 했으며 우연히 프로 사진사 눈에 띄여 글래머, 코스모폴리탄, 세븐틴 등의 잡지의 모델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녀가 직접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 계기는 당시 어머니와 뉴욕 등지에 공연을 다니던 중 Arista Records의 수장이던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에게 발굴되면서부터이다. 그녀의 재능을 높이 산 클라이브는 단박에 그녀와 인터내셔널 발매를 조건으로 계약했고, 'Greatest Love Of All'을 포함한 여러 개의 싱글을 히트 시키고 난 후 1985년 2월, 드디어 그녀의 데뷔 앨범 [Whitney Houston]이 발매되었다. 그 앨범은 2천 5백만장 가량 판매 되었으며, 앨범 중 3곡이나 빌보드 탑 100 차트의 1위를 기록하면서 그녀는 생애 첫 그래미 상과 에미상을 동시에 거머쥐고 미국 내 최고 흑인 여성 가수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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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성 가수로서의 시대적 의미 


휘트니가 데뷔했던 1980년대 중반, MTV는 백인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만 주로 방영하고 그 외 인종의 뮤지션들의 음악은 차별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물론 마이클 잭슨이 등장한 후에 흑인 뮤지션들의 음악이 자주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흑인 여성 가수들의 방영 횟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그들은 관심조차 받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빌보드 차트에서의 경이적인 히트와 함께 1986년 그래미 시상식에 '올해의 앨범'을 포함한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휘트니 휴스턴의 첫 앨범은 그 인기를 업고 MTV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흑인 여성 음악인들의 존재도 점점 TV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게 되었으며 그녀의 성공은 훗날 흑인 여성 음악인들의 시장 진출의 포문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발 주자들 중의 한명으로는 자넷 잭슨이 있다. 



 

기록의 역사를 새로 쓰다 


그러나 이토록 화려한 데뷔는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가수 커리어에서 오직 시발점이었을 뿐이었다. 2집 앨범 [Whitney]의 연이은 성공으로 그녀는 또 한번의 그래미를 손에 쥐고, 비틀즈와 비지스가 갖고 있던 빌보드 탑 100 차트내 1위 보유곡 총 6개의 기록 또한 깨버린다. 1집까지만 해도 그녀의 존재는 미국 내에서만 잘 알려져있었지만 2집의 성공 이후로 그녀는 명실공히 국제적인 슈퍼스타가 되어 월드 투어에 나선다. 그런 동시에 막대한 부와 인기를 단숨에 거머쥔 그녀는 경제 매거진 포브스에 1986-87년, 88년까지도 계속 소득이 많은 엔터테이너의 20위권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여 전세계에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기금을 전달한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쓰인 곡 'One Moment In Time'의 발매로 또 한번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아시아 전역에도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3집 앨범 [I'm Your Baby Tonight]을 발매하는데,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고 빌보드 차트의 기록을 올리는 것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1천 2백만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그녀는 또 한번 자신의 커리어에 새로운 역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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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사랑한 스타 


그러던 중 그녀는 1991년의 미국 전역이 열광하는 미식축구 NFL의 수퍼볼 경기에서 미국의 국가인 'The Star Spangled Banner'를 부르게 된다. 원래 수퍼볼 경기의 국가는 당시 미국 최고의 가수가 부르는 것이 관례였던터라, 데뷔 후 5년이 넘도록 미국 내 팝 시장에서 차트 기록을 갈아치우던 휘트니가 선정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미국은 그 당시 걸프 전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의 애국심은 그 어느 때보다 고취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자국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국내에서 가장 큰 스포츠 게임인 수퍼볼에 나타난 휘트니는 미국 국가 또한 자신의 노래로 완벽히 만들어버렸고, 미국 국민들은 그녀를 단순한 팝 가수가 아닌 국민적인 영웅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쏟아지는 요청으로 그녀는 미국 국가로 싱글을 발매했으며, 자신의 노래가 아닌 국가를 불러서 빌보드 탑 100곡 차트에 20위까지 올려놓은 가수는 미국 팝 음악 역사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유일하다.

 

동시에 그녀는 수퍼볼에서 선 녹음이 된 음원을 틀고 그 위에 립싱크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사실로 드러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라이브 중계 당시 전쟁과 수퍼볼 경기가 맞물려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있던 현장의 분위기는 그때의 오디오 기술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혹시 방송사고가 난다면, 아티스트는 물론 방송사의 이미지, 경기의 흥행 등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의 마이크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실제로 음원에 가까울 정도로 온 힘을 다해서 불렀고, 타인의 목소리나 실력을 빌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승부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들은 여전히 그녀를 지지했고, 업계에서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보다는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수익금 모두를 미국 적십자회에 기부했다. 


♪ Whitney Houston - The Star Spangled Banner


 

결혼, 보디가드, 그리고 배우로서의 휘트니

 

그녀의 국제적인 성공으로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특이한 반응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제도권 내에 가장 보호받는 인종과 성별은 백인여성- 백인남성- 흑인남성-흑인여성의 순으로 매겨졌는데, 그 중 가장 하위에 있던 그녀가 이루어 낸 성공은 주류 사회를 주도하던 백인여성이나 남성들도 쉽게 거머쥘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흑인 커뮤니티의 대다수는 그녀를 사랑했으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그녀가 주류 사회에 합류하여 백인들과 같은 삶을 누리게 되자 그녀가 변했다며 못마땅해했다. 실제로 많은 흑인 연예 스포츠 스타들이 자신의 인종 때문에 받는 불합리함들을 극복, 성공하고 난 후에 백인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고, 그런 점들은 흑인 커뮤니티에 증오를 심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 증오의 불씨는 무대에서의 화재사고 후 피부 색이 변하는 병에 걸린 마이클 잭슨에게도 튀었고, 휘트니 휴스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현 대통령인 오바마조차 만약 미쉘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흑인들에게 그 많은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 인종과 결혼한 흑인 유명인이 주는 심리적 거리감은 주류 사회의 백인들이 주는 거리감보다 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맥락에서 휘트니는 어느 정도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질투와 미움을 받았지만,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변화하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당당히 밝혀 부정적인 인식을 잠재웠다. 또한 그녀는 1992년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으로 다시금 흑인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게 되었지만 같은 해에 백인 보디가드와 흑인 여가수의 사랑을 담은 영화 [보디가드]의 전세계적인 히트로 그녀는 또 한번 흑인 커뮤니티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녀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은 스스로 뿌리를 잊지 않는 흑인이라고 해명해야 했지만, [보디가드] 이 한 편의 영화로 그녀의 재능은 이미 흑인 커뮤니티만이 향유할 수 있는 범위를 오래 전에 넘어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도 뒤 흔들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주말 저녁 상종가를 치던'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연예프로에 이휘재가 패러디를 하면서 '윗니~'라는 코믹한 영어발음을 하는 바람에 더욱 더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보디가드]. 그 전까지 휘트니 휴스턴의 존재를 모르던 이들도 이 영화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고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보디가드] 이후의 그녀를 더 많이 기억한다. 그 당시의 히트를 기록으로 써보자면 이렇다. 


* 싱글 'I Will Always Love You'

- 전세계에서 1천 2백만 장의 판매

- 14주 동안 빌보드 탑 100 차트에서 1위 

- 탑 100, 알앤비,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등 3개의 차트에서 동시에 5주간 1위를 지킨 첫 싱글 곡

- 빌보드 탑 200곡 차트에서 20주 동안 머무름

- 빌보드 차트의 순위집계 시스템인 사운드 스캔(SoundScan)을 주관하던 닐슨의 역사상 가장 오래 빌보드 탑 200차트에 머무른 곡 


* [보디가드] 사운드 트랙 앨범 

- 1주일 사이 무려 1천만장을 판매, 사운드스캔 역사상 가장 단 시간에 많은 앨범을 판 기록들 중 하나 

- 전세계에서 4천만장 판매 

-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탑 10 앨범  


또한 'I Will Always Love You'의 후발 주자로 발매된 'I'm Every Woman', 'I Have Nothing'의 싱글도 빌보드 탑 11위 안에 차례차례 랭크되었으며 그 해 그녀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올해의 곡 등을 굵직한 상을 세 개나 받았다. 또한 그녀는 영화계로 눈을 돌려 [Waiting to Exhale], [Preacher's Wife]에 출연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Rodger's &Hammerstein's Cinderella], 앤 해서웨이와 줄리 앤드류스 주연의 [The Princess Diaries]등의 영화도 제작하여 에미상을 포함, 기타 영화 관련 시상식에서 승승장구하였다.

 

 

 

Queen Of Pop 


1998년,그녀는 다크 차일드(Darkchild), 미씨엘리엇(Missy Elliott)등과 함께 작업한 [My Love Is Your Love]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휘트니는 좀 더 얼반하고 세련된 팝 스타일을 보여준다. 특히 'Heartbreak Hotel'이나 'It's Not Right But It's Okay'등의 트랙에서 보여준 휘트니의 새로운 모습은 데뷔한지 15년 가까이 되었어도 여전히 팝 시장의 흐름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변화시키며 시대를 주도하는 디바로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가뿐히 1천 1백만장을 팔아치우며 자신 생애 여섯 번째 그래미 상을 받았고 그 후 2년 후에 발표한 [Whitney: The Greatest Hits] 라는 이름의 베스트 앨범 또한 1천만장을 팔아치우며 명실공히 세기말을 빛낸 팝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또한 오랜 숙적이던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When You Believe'를 발표하여 아카데미 주제곡 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 VH-1 Diva's Live에 티나 터너(Tina Turner), 셰어(Cher) 등과 함께 참여하는 등 오랫동안 홀로 서 있던 탑의 자리에서 내려와 동료 여 가수들과 함께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풋풋했던 시절을 지나 30대 중반이 된 그녀는 좀 더 성숙하고 현명해진 멋진 여성으로 변해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신나는 파티에 관해 주로 노래하던 그녀가 갑자기 남녀관계 사이에서 힘든 일이 생겨도 굴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상황을 타파해나가는 강한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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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재기, 죽음 


그녀의 팬들은 말한다. 전과 달리 그녀가 사랑의 배신과 인생의 아픔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그녀의 결혼 생활의 불행이 가장 컸을거라고. 실제로 바비 브라운은 휘트니에게 처음으로 대마초와 마약을 하게 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공식적으로 보도된 바는 없으나, 그는 그녀를 무관심으로 방치하거나 손찌검을 일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어릴때부터 오직 노래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녀는 자신의 노래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꿨으며 그 이외의 것들은 잘 알지 못했다. 바비 브라운은 뉴 에디션(New Edition)의 성공을 등에 업고 일찌감치 솔로로 성공했지만 10년 넘게 전세계의 팝 시장을 주름잡던 그녀의 성공에 비하면 그의 커리어는 미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바비 브라운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한 결혼 생활에서 마약과 대마초에 매달리던 그녀는 자주 행사에 늦거나 나타나지 않았으며 목소리 또한 거칠어졌다. 또한 그녀는 아카데미 시상식 축하공연에서도 퇴출당하고 소송에도 휘말리는 등 온갖 고초를 겪기 시작했고 당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녀를 떠났다. 하지만 그녀를 발굴한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여전히 그녀를 믿고 향후 여섯 개의 앨범을 내는 조건으로 천억을 제시,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그녀는 그 후 [Just Whitney]로 3백만장을 기록하고 그후  [One Wish: The Holiday Album] 또한 발매한다.


 

 

♪ Whitney Houston - I Look To You

 

2006년 바비 브라운과의 이혼 후에도 그녀는 종종 마약으로 온통 망가진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어 오랫동안 팬들을 실망시켰지만 드디어 2009년, [I Look To You]라는 그녀 인생의 일곱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특히 앨범과 동명 타이틀 곡인 'I Look To You'에서 그녀는 자신의 뿌리인 가스펠을 적절히 믹스하여 그녀 인생을 회고하고 있는데, 오랜 방황에서 돌아온 그녀가 힘들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알 켈리(R.Kelly)가 쓰고 하비 메이슨 주니어(Harvey Mason Jr.)와 트리키 스튜어트 (Tricky Stewart)가 만든 이 노래는 그녀 음악 인생에서 30번째로 빌보트 차트 20위권에 오른 곡이며 동명 앨범은 빌보드 탑 200 차트에 1위로 진입하는 쾌거를 낳았다. 많은 팬들은 그녀의 재기를 반겼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노래하는 그녀의 미소가 여전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2012년 2월 그녀는 자신의 4집 싱글 곡 'Heartbreak Hotel'에서 같이 노래했던 켈리 프라이스(Kelly Price)의 공연에 참가한 것을 마지막으로 대중들의 곁을 떠났다. 



 

별, 지다


흑인 남성으로서 자신의 음악으로 인종 간의 격차를 좁혔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갔고, 흑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음악을 알려 인종 간의 격차를 좁힌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도 마침내 모두 반백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살아숨쉴 때 영향을 줬던 이들이 아티스트가 되어 현 음악 시장을 점령해온지도 15년 이상이 되어간다지만, 과연 이들을 뛰어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수들이 그 중에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50대의 가까운 나이에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무대를 위해 살았고 또 다른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스러져갔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하여 가수가 글로벌하게 알려지는데에 어려움이 없다지만, 그 옛날 오로지 자신의 재능으로만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던 휘트니 휴스턴. 그녀 이전에도, 그녀 이후에도 또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롱런하며 앨범을 낼때마다 세상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가수들이 또 나올수 있을까? 그녀는 비록 마약에 중독되었었고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잃은 채 살았던 시간이 길었지만, 늦은 나이에도 재기를 위해 자신의 중독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싸우다가 떠났다. 모든 걸 다 가졌던 그녀, 모든 걸 이뤄냈던 그녀, 만인에게 사랑받았던 그녀, 하지만 자신의 옆에 단 한 사람에게는 사랑받지 못했던 가련한 그녀. 그녀의 노랫말처럼 휘트니 휴스턴은 우리 시대가 가졌던 최고의 가수였으며 (the greatest singer of all), 또 우리는 그녀를 영원히 사랑(we will always love you)할 것이다. Rest In Peace. 


 

♪ Whitney Houston - I Will Always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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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2.14 10:07

    다시 한번 숙연해지네요... RIP

  • 2.14 11:19

    잘 봤습니다... Rest In Peace

  • 2.15 02:02

    글을 최종검토하면서 깊은 애정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전설적으로 살다간 휘트니 휴스턴의 삶 전체를 

    뮤지션 또는 슈퍼스타 또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회고하는 글입니다.

    한번 더 읽고나니 또 다시 떠나간 사람이 그리워지는군요

  • 2.15 02:42

    아... 슬픔의 한편으로 바비 브라운에 대한 분노가...

    일찌감치 그녀를 알아서 놓아주었다면 그녀도 잃지 않고 브라운의 노래도

    편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을텐데. 뭐

     

     지금은 미움보다 추모가 중요한 시기. 편히 쉬소서.

  • 3.5 16:26
    RIP.. 한 때 제게 등불같은 존재였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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