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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들을 다 듣고 난 뒤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최선인가?' 생각해보자. 본선에 올라온 아티스트들은 장기와 개성이 뚜렷한 이들일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나름의 성공적인 디스코그래피를 이뤄낸 이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프로듀서들이 참가자들의 이러한 개성을 다 죽여놓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곡의 퀄리티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덕션도 안정적이고, 퍼포먼스의 완성도도 나름대로 준수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을까? 프로듀서들의 색에 끼워맞추느라 참가자들의 매력과 개성이 다 죽어버린 이 곡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단 한 번 분석해 보자.
1. 블라세-Holiday (Feat. 릴보이 (lIlBOI), 기리보이) (Prod. GroovyRoom)
다분히 시즌 9의 'Credit'(2020)을 의식한 것이 느껴지는 곡이다. 참여진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트랩 기반의 편곡 위에 종 소리를 은은히 배치하고 그 위에 멜로디컬한 퍼포먼스를 얹어 연말의 따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한 부분에서 특히나 그렇다. 다만 종 소리 뒤로 잔잔히 깔리는 기타 소리와 스타카토로 끊기는 스트링 운용과 같은 부분에서는 역시나 그루비룸의 시그니처가 느껴지긴 한다.
블라세는 기본적인 랩 피지컬이 준수한 편이고, 그만큼 이 곡에서도 영국식의 독특한 발음에 각진 랩을 안정적으로 선보이지만, 사실 분량으로 보나 퍼포먼스로 보나 이 곡의 주인공은 역시 릴보이다. 멜로디컬함의 범주 안에서 탁월한 완급 조절과 뚜렷한 톤을 활용하여 릴보이는 훅과 벌스를 완전히 장악했다. 후반부에 예의 멈블한 퍼포먼스로 곡에 상큼한 맛을 더하는 기리보이의 벌스도 곡과 상당히 매끄럽게 맞물렸다.
연말 분위기의 안정적인 팝 랩 넘버인 것은 분명하다. 프로덕션도, 퍼포먼스도 완성도가 낮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굳이 블라세에게 이 곡을 시킬 이유가 있었을까? 블라세가 무엇을 잘 하는지 알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곡이다.
2. NSW 윤-으리으리 (Feat. 호미들)
프로듀서인 더 콰이엇은 믹싱으로만 빠지고, 대신 언더그라운드에서 트랩-드릴 곡을 자주 만들어온 신예들인 징베(JINBE)와 피비오(Fivio)가 NSW 윤에게 딱 맞는 야성적인 UK 드릴을 선사해 주었다. 비트 전반에 음산한 보이스 샘플을 깔고, 여기에 드릴 특유의 변칙적인 드럼이 배치된 편곡은 미니멀하고 언뜻 단출해 보이나, 그만큼 이 곡 위에 올라탄 네 MC들의 퍼포먼스를 더 돋보이게 한다.
NSW 윤이 예의 꼬인 발음과 독특한 억양을 통해 강렬한 타격감으로 치고 빠지고, 그 뒤로 호미들의 CK, 루이가 슬라임 래퍼들을 연상시키는 하이 톤으로 곡의 맹렬함을 배가시킨다. 호미들의 여느 곡이 그렇듯, 친이 오토튠을 잔뜩 낀 로우 톤으로 내려치는 훅의 기세도 곡과 더없이 잘어울린다. 특히 발음을 살짝 뭉개며 특정 단어를 반복하거나, 구음을 통해 탁월한 중독성을 형성하는 부분은 퓨처의 그것까지 생각하게 했다. 참가자에 가장 최적화된 곡에, 음악적으로 빈번히 교류해 온 동료들이 더해져 생긴 시너지는 이 곡을 이번 1차 본선의 몇 안되는 깔끔한 무대로 만들었다.
3. 토이고-BLUE CHECK (Feat. 박재범, 제시) (Prod. by Slom)
슬롬이 브릴리언트의 도움을 통해 전자음으로 가득 채운 트랩 뱅어를 만들었다. 멤피스 풍의 드럼 라인이 기본이 되고, 여기에 슬롬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가져가는 깔끔한 트랩 넘버다. 중간에 브라스가 튀어나오며 살짝 드릴로 전환되거나, 전자음의 다채로운 배치를 통한 변화무쌍한 편곡을 통해 청각적인 즐거움을 의도하고자 신경을 쓴 것이 보인다.
언더성수브릿지에서도 여러번 시도해 본 스타일의 곡인만큼 토이고의 퍼포먼스는 심플하고 강렬하다. 낮고 거친 톤으로 단순한 구조의 플로우를 반복적으로 활용해 중독성을 형성하는 구성은 언더성수브릿지의 여러 곡들에서 보여준 바 그대로다. 문제는 인트로와 훅부터 브릿지와 벌스에 이르기까지 박재범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물론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트집잡고 싶지는 않다. 조곤조곤한 톤으로 만들어낸 훅은 꽤나 중독적이었고, 브릿지에서 오토튠을 활용해 슬라임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부분은 센스 있었으며, 마지막에 이찬혁이 전 시즌에서 남겼던 유행어를 재치있게 받아치며 장르에 대한 진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단연 압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토이고의 곡이어야 했고 토이고의 무대여야 했다. 여기에 제시마저 가세하여 짙은 톤으로 타이트한 벌스를 남기고 가자, 곡에서 토이고의 존재감은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곡의 완성도나 컨셉 자체는 좋았기에 이런 부분이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4. 칸-나침반 (Feat. UNEDUCATED KID, 수퍼비 (SUPERBEE)) (Prod. R.Tee)
기타 소스로 먼저 테마를 잡은 뒤, 그 뒤로 브라스와 플럭 사운드를 통해 충독성을 형성한 다음, EDM을 연상시키는 전자음의 변주를 살짝 가미한 독특한 뉴웨이브 트랩이다. 알티가 의외로 이런 순도 높은 트랩이 가능한가 생각했지만, 블랙핑크의 곡인 'Pretty Savage'(2020)같은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스펙트럼이 일견 이해가 간다. 후반부에 드릴스러운 투스텝으로 리듬을 전환한 다음 EDM을 연상시키는 보이스 샘플을 깔아 칸의 주장기를 위한 안배를 한 것도 꽤 센스있는 부분이었다.
칸의 금속성 넘치는 보이스 톤에 오토튠을 더해줘 칸이 운용할 수 있는 퍼포먼스의 폭이 넓어졌다. 중간의 멜로디컬한 흐름으로 이모한 결을 가져가기도 하고, 후반부에 투스텝 리듬에 맞춰 타이트한 랩을 전개하는 부분은 역시 안정적이다. 다른 곡들에 비해 곡의 호스트가 보다 많은 분량을 가져가 파트 분배가 적절히 된 것도 플러스 요인.
특히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훅 메이킹 능력은 완전히 물이 올라왔다. 오토튠을 먹인채 반복적인 플로우로 중독성을 형성한 멜로딕한 훅은 기존에 자신의 작업물에서 셀 수 없이 보여준 그것이지만 그만큼 파괴력이 강하다. 옛 적과 다름없는 타이트한 벌스와 더불어, 씬에서 논란이 되었던 '뱀새끼' 논쟁을 이용해 재기발랄한 가사를 쓴 수퍼비의 벌스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앨범 단위로는 어떨지 몰라도 한 트랙의 어느 벌스 안에 존재하는 수퍼비의 퍼포먼스는 역시 흠잡을 데가 없다. 세 명의 배합과 더불어 기본기에 충실한 프로덕션으로 완성된 이번 라운드의 또 하나의 베스트 트랙.
5. 잠비노-BINGO (Feat. meenoi & 죠지) (Prod. by Slom)
이번 라운드에서 가장 힙합과 거리가 있는 곡이 나왔다. 슬롬이 피셔맨, 모노캣 등의 도움을 받아 808베이스를 활용한 트랩 리듬을 기반으로 신시사이저와 플럭 사운드, 기타 소스 등 댜양한 악기를 녹여낸 다음, 슬롬 식의 디테일하고 다채로운 편곡과 많은 변주를 가져가는 드럼라인에 그대로 녹여냈다. 역시 슬롬이라는 아티스트의 강점은 이런 공간감 있으면서도 세밀한 부분이 요구되는 곡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잠비노의 보컬 퍼포먼스는 꽤나 안정적이다. 부드러운 음색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싱잉 랩은 은은하고 담백한 맛이 있지만, 지금껏 쇼미에서 pH-1, 빅 나티와 원슈타인 이래로 닳고 닳도록 시도된 스타일인 지라 조금 식상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개인 작업물에서 보여줬던 몽환적인 튠이 이러한 대놓고 팝적인 결보다 더 나았다.
그래도 중간에 가미된 두 보컬들의 퍼포먼스는 곡에 다채로운 안정감을 준다. 미노의 통통튀는 음색은 언제들어도 귀엽고, 죠지의 부드러운 보컬도 곡에 잘 스며든다. 이들이 어디까지나 곡에서 조미료의 역할만 하고 치고 빠지며 곡의 주인을 뺏지 않았던 것에도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안정적인 무대의 안정적이고 담백한 곡이었지만, 또다시 쇼미에서 보컬을 봐야하나 하는 피곤함이 먼저 느껴져 조금 유감스럽다.
6. 허성현-펄펄 (Feat. 다이나믹 듀오) (Prod. R.Tee)
이번 시즌에서 알티가 보여 준 곡 중 가장 YG 엔터테인먼트의 색이 느껴지는 곡이다. 브로스텝에 토대를 두고 브라스를 활용된 강렬한 드랍도 그렇거니와, 곡에서 기타와 전자음으로 긴장감을 형성하는 부분, 마지막에 하우스로 비트가 전환되며 단체 코러스로 터트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 특히나 그렇다. 이러한 레이블 고유의 클리셰를 힙합에 녹여내고자 노력한 것은 분명 흥미로운 시도지만, 이미 iKON이나 빅뱅이 내놓은 결과치가 충분한 상황에서 굳이 이 곡을 찾아들을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플레이어들의 퍼포먼스 자체는 준수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허성현의 명료한 톤으로 멜로디컬함과 타이트함을 오가는 벌스는 나름대로 깔끔한 결과치를 가져간다. 다만 확실한 승리를 위해 허성현이 자신의 레이블의 대선배들을 초빙한 것이 오히려 리스크로 작용한 모양새다. 최자의 매서운 훅과 개코의 타이트한 벌스는 케이팝의 클리셰 아래서도 너무 훌륭히 작동하였고, 이는 이곡을 허성현의 곡이 아닌 허성현과 다이나믹 듀오의 공동명의 곡으로 만들어 버렸다.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 곡의 흐름은 지나칠 정도로 EDM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10여년 전에 이미 에이셉 라키와 스크릴렉스가 브로스텝과 힙합의 완벽한 상호작용을 보여준 상황에서 이 곡은 그저 흔한 케이팝 식의 하위호환에 머물고 말았다.
7. 이영지-NOT SORRY (Feat. pH-1) (Prod. by Slom)
빛과 소금의 장기호에게서 사사 받아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슬롬의 음악은 꽤나 재지한 구석이 많다. 이 곡은 특히나 그런 재지한 경향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피아노 연주로 시작 되었다가 붐뱁 스타일의 드럼이 추가되고, 베이스와 브라스 소스, 기타가 추가되며 곡을 따듯하고 풍성히 채운다. 훅 부분에 코러스를 활용하여 부드러운 결을 추가하고, 역시 이번에도 다양한 편곡을 통한 기승전결을 통해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부분은 역시 건재하다. 슬롬이 이번 라운드에서 선보인 경연 곡 중 그의 정규작인 'WETHER REPORT'(2022)의 그것과 가장 가까운 곡이라 할 수 있다.
이영지의 랩은 옛 적의 윤미래, 조금 멀리 뻗어가면 로린 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낮은 톤과 정박 위주의 심플하고 올드 스쿨한 랩, 그리고 보컬까지 오가는 다채로운 퍼포먼스가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강렬함이 조금 덜한 대신 그 자리에 팝적인 담백함이 깔끔한데. 이것이 재지하고 빈티지한 프로덕션과 더해졌을때의 시너지가 의외로 좋다. 동 세대의 동료들에 비해 디스코그래피가 희박하다는 약점이 있던 만큼, 여기서 보여준 사운드적 결이 이영지의 새로운 방향성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pH-1이 늘 그렇듯 새콤하고 단정한 랩으로 이러한 세련된 무드를 강화해주고, 한편으로는 이영지와 랩을 주고 받는 부분을 통해 자신들에 대한 시선, 그리고 이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으며 곡의 설득력을 증폭시킨다. 적어도 이 곡 안에서 pH-1은 나름대로 훌륭한 멘토가 되어 준 것 같다.
이 곡이 그간의 행보, 그리고 이번 쇼미더머니에서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생긴 부정적 견해를 타파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담백하고 털털하고 솔직하게, 음악적인 행보를 더해간다면 분명히 가능하다.
8. 던말릭-눈 (EYE) (Feat. BIG Naughty, 저스디스 (JUSTHIS)) (Prod. R.Tee)
어쿠스틱한, 때로는 락킹한 기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한국형 이모 힙합 넘버다. 애쉬 아일랜드, 토일, 파테코, 그리고 한요한으로 대표되는 이 장르는 트랩 비트 위에 90년대 락 풍의 기타가 더해지고, 이를 기반으로 멜로디컬한 퍼포먼스로 가족애나 연애담, 자신의 외로움을 노래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사실 'PAID IN SEOUL'(2021)을 기점으로 트랩에도 눈길을 돌리고, 때로는 파테코나 한요한같은 아티스트들과도 협업을 시도한 걸 감안하면 던말릭의 이러한 시도가 딱히 놀랍지는 않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던말릭에게 어울리는 옷이냐는 것이다.
분명 퍼포먼스는 좋았다. 던말릭은 자신의 촘촘한 랩 스킬을 활용해 (아마도 2018년의 성범죄 무고 사건으로 인한) 시선 내문에 고되고 외로웠던 나날을 성공적으로 노래했고, 저스디스도 보컬 트레이닝 덕에 더 능숙하게 멜로디를 컨트롤 하며 2018년에 겪었던 번아웃의 고통을 통해 곡의 서사를 강화시켰다. 빅 나티의 섬세한 음색을 통한 보컬이 곡의 감성적인 부분을 증폭시키며 이 곡은 쇼미더머니 대대로 이어져 온 개인적 서사+감성적 프로덕션+메이저한 보컬로 이루어진, 이른바 '쇼미더머니식 감성곡'의 계보를 이을 만한 곡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의문 부호가 생긴다. 과연 이것이 던말릭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분명히 던말릭과 저스디스의 조합이지만, 이 곡에서는 그간 이 둘의 협업에서 뿜어져 나왔던 맹렬한 화학작용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빅 나티의 보컬에 두 래퍼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 깎여 나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이 곡이 주는 감흥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던말릭이라면, '선인장화'와 '탯줄'의 그 던말릭이라면 이것보다는 더 좋은 것을 보여 줬어야 했다.




NOT SORRY가 제일 안짜치고 멋있었어요. 아이러니하네요. 제가 좋아하던 래퍼들보다 영지 곡이 훨씬 멋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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