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시간을 넣을수록 좋게 들린다. 처음에 낯설었던 음악도 나중가서 보니 내가 귀에 솔찬히 꽂고 다니는 음악이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음악들에 인생을 붙힌다. 인생명반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시간을 희생하여 만들어내는 정말 친구라고 볼 수 있는 것. 시간이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음악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즉 남에게 시간의 틀로서 제시되는 것, 그게 음악이며, 동시에 우리를 틀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도 음악이다. 그래서 우리와 음악은 끈끈한 친구다. 서로 존재를 이끌어내는 존재. 그렇기에 음악은 우리의 삶에 이바지 한다. 정말로 친구와도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 친구와도 같이 어색했던 처음이 친숙해지고, 그렇게 베프로 몇십년간 같이 인생을 여행하게 된다. 인생명반이란 그런 동반자이며, 동시에 우리 존재에 절대 뺄 수 없는 핵심 기어와도 같다. 이런 시간을 잡아먹음으로서의 음악이 우리를 잡아먹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타인으로 이루어지는 특성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언제 당신이라고 느껴졌는가? 알 수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나라는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아니다. 즉, 태초의 나는 없다. dna가 밑그림을 그려놓은 빈 껍데기다. 거기에 무엇을 그려넣냐에 따라 인간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 그려지는 것은 순전히 타인의 것이다. 부모님의 것 말이다. 그런 인수인계를 거치며 우리는 우리를 확립해간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음악 또한 우리의 칠판에 그려넣는다. 즉, 우리는 타인으로 존재하는데, 그 타인 중에 음악 또한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은 우리의 존재를 나눠가지면서 자신의 형태를 가진다. 아, 제대로 말하자면, 우리 시선에서의 음악의 형태를 가진다. 그렇기에 음악은 존재를 나눈 분신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나로 정립되지만, 음악은 엄연히 우리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은 시간을 희생함으로서 나타난다. 1분밖에 듣지 않은 나와 관련 없는 음악은 절대 귀에 좋게 들리지 않는다. 허나 그것을 항상 귀에 꽂고 다닌다면 그 음악이 우리의 존재를 아로새기면서 나의 존재를 먹어치운다. 그렇기에, 음악은 시간을 넣을수록 좋게 들리며, 좋은 음악은 시간의 사용량으로 결정된다.
허나 음악은 시간을 먹이로 삼지만 동시에 나로 들어갈 틈이 있어야한다. 즉, 나와 통하는 지점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우울한 사람에겐 앰비언트가 쉽게 들어갈 수 있으며, 신나는 사람에겐 하우스 음악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토양의 문제다. 씨앗은 토양에 심어져서 시간을 먹고서 성장하지만, 토양이 안맞으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우울한 사람이 하우스 음악을 5초만에 끄는 것처럼 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비슷한 음악일수록 음악은 시간을 잘 먹어치운다. 그래서 자연스레 우리는 우리를 찾는다. 우리의 존재를 이미 나눠가진 그 장르들, 그런 음악들을 찾는다. 그것이 존재의 균열을 일으키지 않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접근성은 현실에서 선험된다. 특히 음악을 뒤늦게 접한 인간은 이러한 현실에서 선험된 것을 방향삼는다. 현실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은 그 반동으로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험으로서의 음악은 그 선험된 현실의 시간, 즉 존재의 틀을 강화시키는데 사용된다. 선험된 현실의 시간을 음악으로 추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들어갈 틈이 맞는 음악은 역설적이게도, 예술적이지 못하다. 나와 만나는 일이 매번 즐겁다면 그것은 아마, 정신 분열증이 아닐까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즉, 음악 이전에 예술은 그런 자신의 꼬리를 무는 자신 같은 너무나 정박적인 뻔함을 혐오한다.
그렇기에, 음악은 존재와 무의 중간적 위치다. 음악은 동반자임과 동시에, 예술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머금은 음악은 특정 시기가 지날 쯤부터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음악에 놀라게 되는 일이 없어지며, 루틴과도 같은 죽은 것이 되어버린다. 정박적으로 뛰는 그냥 그런 하루의 진통제와도 같은 것, 그것이 동반자로서의 음악이자, 절대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인생명반은 역설적으로 명반이 아니며,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나 자신의 분신체일 뿐이다. 늘 보던 친구와는 늘 재밌지만 감탄은 없다. 그것이 늘 먹던 음악들의 맛이다. 허나, 이러한 시간을 머금은 음악이 언제 예술적 가치가 상해버릴지에 관해서는 순전히 음악에게 달렸다. 예를 들어, 마라탕후루가 인생 음악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것을 처음엔 줄기차게 듣겠지만, 금방 흥미가 식어서 재미마저도 나오지 않을 만큼 닳아버릴 것이다. 그만큼, 마라탕후루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며칠 들으면 다 알게될만큼 마라탕후루는 평면적이고, 매우 단순한 저급함의 극치라는 것이다. 반면에 핑크 플로이드의 닼사문이 인생명반인 친구가 있다 해보자. 이 친구도 닼사문을 줄기차게 듣는데, 적어도 그 시간이 마라탕후루 보다는 길게 갈 것이다. 왜냐하면, 닼사문은 그래도 마라탕후루보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마라탕후루보다 더 먹을 게 많으며, 숨겨진 의미나 음악적 감탄이 나올만한 센스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한 기준은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늦게 상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를 유지하는 음악이 진정 예술적인 것이며, 존재와 무의 중간에서 감탄을 느낄 것이다. 그치만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자신의 인생명반을 부수지는 말라. 인생명반은 이미 삶에 기여한 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팔을 부러뜨리는 꼴이 된다. 이때까지 그 앨범을 듣던 시간을 배신하는 게 된다. 인생명반이 예술이 아니라 한들, 절대로 도움이 안되는 것이 아니다. 동반자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함으로서 불안정한 우리의 정신 상태를 안정 시켜준다. 그러니, 자신의 분신을 죽이는 짓은 하지 말아달라. 인생명반은 그자체로 소중하게게 품어야할 존재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으로 나아가기다. 그것이 우리가 동반자가 아닌 예술을 소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결코 새로운 음악으로 나아가 타인을 만나야하며, 그것으로 우리는 감탄을 얻어서 음악이라는 예술적 면모를 온전히 먹어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보일 것이다. 허나, 다들 그런 새로움의 욕구가 심할 때가 있다. 수없이 디깅을 하다가 지치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욕구가 과도한 순간들이다. 왜냐하면, 예술적 면모를 온전히 먹는 인간들, 즉 예술 애호가들은 절대 그런 속도로 새로운 음악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 애호가들은 음악에 시간을 먹인다. 그러면 내가 지적한 비예술화가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하게 시간을 먹였을 때의 얘기고, 적당히 시간을 먹인 음악은 최고의 황금빛깔을 내뿜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감탄을 길어내고, 다시 들을 때마다 다른 부분에서 놀라고. 이런 것들이 황금빛의 일부분이다. 예술 애호가들은 이런 황금빛 하나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런 황금빛만을 온전히 먹고나서야 다른 음악으로 옮기는 것이 예술을 즐기는 자의 그것이다. 결코 빨라선 안된다. 그렇다고 느려선 안된다. 이것 또한 존재와 무의 곡예이며, 인생의 곡예다. 그렇게 사는 곡예사는 늘 웃고 있다.




캬 잘 읽었어요
근데 디지코어는 신나고 자극적인 사운드의 우울한 음악이랍니다.
음 우울이라기엔 혼란 절망 우울 분노 외로움 대충 안 좋은 거라 해야 되나
ㅇㅎ 그냥 다른 걸로 바꿔야겠군요
잘 몰라서 미안합니다
아무튼 인생명반을 들을수록 그 음악과 동반자가 돼가며 그것을 들을 때의 즐거움은 점점 닳겠지만 그 음악의 가치에 따라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질 거라는 건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나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말 같아서 좋네요. 좋은 말 받아가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이거 작년 11월에 쓴 개 오래된 글이긴 한데
암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