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H6DGCvmKQgE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찬 자우림의 앨범이 있던가. 물론 애초에 이들이 상냥하고 다정하기만 한 팀은 아니었다. 보통 시니컬했고, 때로는 염세적이기도 했다. 냉소의 기저에는 따뜻한 유머가 있었다. 믿음이 존재했고, 결국 사랑과 연대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은 좀 다르다. ‘삶’을 대문자로 외치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신보에서 이들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자신의 운명에, 나와 남을 괴롭히는 타인에, 구태와 혐오로 뒤덮인 이 미친 세상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건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반면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목적을 갖고, 올바른 방식으로 화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자우림의 12집 [LIFE!]는 이 지점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이들은 올바르고 정확하게 화내는 법을 안다. 전작 [영원한 사랑](2021)과 이번 앨범 사이의 시간 4년. 그 기간을 충실히 살아낸 밴드는 사회의 면면을 차갑게 바라보고 뜨겁게 일갈한다. 타깃은 명확하고, 메시지는 날카롭다. [LIFE!]는 한마디로 동시대를 투과하는 ‘분통 스펙트럼’이다.
트랙 리스트의 구성 또한 흥미롭다. 데뷔작 [Purple Heart](1997) 이후 최초로 타이틀곡이 첫머리에 놓였다는 점에서다. 게다가 자우림으로선 처음으로 세 곡을 타이틀로 앞세웠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앨범을 여는 동명의 타이틀곡 ‘라이프!’는 막다른 길에 서서 인생의 답을 갈구하는 사람이 목놓아 외치는 절규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막막한가. 그렇다고 뜻대로 풀리는 삶만 사는 사람이 어디 얼마나 있겠나. 통쾌한 연주와 중독성 강한 후렴, 캐치한 멜로디를 갖춘 ‘라이프!’는 더러운 판에서 몸부림치며 분투해 본 적 있는 모두의 주제곡이 될 노래다.
이어지는 또 다른 타이틀곡 ‘마이걸’은 통렬한 여성 연대의 송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소지니(misogyny) 범죄가 점점 늘어나는 게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당사자인 여성의 체감은 남성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이걸’에는 더 이상 같은 여성인 이웃, 친구, 동료를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의지가 담겼다. 슬프고 분한 감정이 격정적인 선율과 사운드에 펄펄 끓어넘친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남성이라면 이 곡을 가볍게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뱀파이어’와 ‘카르마’에선 듣는 재미가 두드러진다. 하드 록 스타일의 묵직한 ‘뱀파이어’에는 강렬한 기타 플레이와 파워풀한 밴드 사운드가 정교한 연주 미학을 이룬다. 여기에 마치 다크 판타지의 한 장면 같은 노랫말을 극적으로 소화하는 김윤아의 카리스마 보컬이 짜릿한 감상을 선사한다. ‘카르마’의 귀를 잡아끄는 신시사이저 라인, 질주감을 내는 기타 솔로와 드러밍은 어떤가. 일상을 해친 상대에게 업보를 상기시키며 회복의 뜻을 밝히는 ‘카르마’가 유독 서늘하게 들리는 이가 있다면, 자신의 최근 행적을 돌아봐도 좋겠다.
각양각색의 분노 한복판에 놓인 마지막 타이틀곡 ‘스타스’는 앨범의 완급을 조절하는 노련한 키다. 오래도록 변치 않을 무조건적인 사랑을 서정적으로 그린 가사, 수록곡 중 가장 편안하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작품의 반환점에서 고고히 빛난다. 숨 고르기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화가 몰아친다 마치 메가폰을 들고 거리에서 외치듯, 일그러진 목소리로 변화를 촉구하는 ‘렛잇다이’에서 이들은 매력적인 선동가로 변신한다. 낡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의 기를 들고 새 시대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달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 법 아닌가.
상대를 향한 경멸과 조소는 ‘유겐트’에서 극에 달한다. ‘렛잇다이’의 선동 기조에서 이어지는 행진곡풍의 이 노래는 제목이 포인트다. 나치 독일 시대에 청소년을 세뇌하고자 운영된 청소년 조직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에서 힌트를 얻은 노래는 악에 부역했던 당시의 꼭두각시들을 신랄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유겐트(jugend)’가 독일어로 청춘, 청소년, 청년 세대를 가리킨다는 걸 생각하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어설픈 진영 논리에 휘말려 이성을 잃고 혐오에 찌든 젊은이를 얼마나 많이 보았나. 무턱대고 태양 끝까지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되는 건 차라리 젊음의 특권일 수 있다. 태양 근처도 가보기 전에 그 열기에 눈멀고 귀먹어 우르르 몰려다니며 증오의 칼을 휘두르는 건 비참한 일이다. 민감한 오늘날의 세태를 우아하고 정확한 풍자의 언어로 그려냈다.
어두컴컴한 앨범에서 가장 반가운 곡은 단연 ‘아테나’다. 관악기가 힘차게 터져 나오는 인트로부터 그렇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언제나 전장의 중심에 선다. 그의 곁에는 늘 승리의 여신 니케가 있다. 니케를 거느린 아테나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처럼, 이 노래에 이르러 앨범에 넘실대던 암울한 기운은 단박에 걷힌다. 어둡고 추운 세상이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 것이란 확신과 희열을 안긴다. 타이틀곡 ‘라이프!’와 더불어 떼창 구간이 가장 확실하고 멜로디가 선명한 ‘아테나’를 각종 공연과 페스티벌 현장에서 힘차게 부르는 상상을 해본다. 승리의 앤섬이 될 것이다. 되어야만 한다.
포스트 펑크의 영향이 감지되는 경쾌한 댄스 록 ‘바쿠스’에서 이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잔을 든다. 이대로 앨범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안다.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동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콜타르 하트’의 콜타르는 석탄을 원료로 얻은 타르다. 얼마나 시꺼먼 물질인지는 직접 검색해 보길 바란다. 그렇게 싸우고 이겨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슴 속의 폭풍은 멎지 않는 법이다. 그걸 아는 이들만이, 속이 콜타르만큼 까맣게 타들어 간 이들만이 서로를 진정 위로할 수 있다. ‘아테나’, ‘바쿠스’가 아닌 ‘콜타르 하트’의 6분 남짓한 시네마틱 사운드로 앨범이 닫히는 건, 그만큼 현실이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뜻이다.
뚜렷한 주제 의식 아래 놀라운 스토리텔링을 펼쳤다. [LIFE!]는 자우림이 현재를 살아가는 밴드임을 웅변한다. 이들이 여기서 그린 인생이란 결국 오늘날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 다른 사람과의 싸움, 혐오와의 싸움, 시대와의 싸움... 지독하게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은 놓치지 않았다. 답답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일일이 분통을 터트리는 건 끝내는 우리가 이겼으면, 그래서 이 세상이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음악의 매력을 풍성히 챙겼다. 과연 자우림답다.
정민재(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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