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들을새 없이 바빴던 해외여행을 마친 뒤의 귀국장. 한국 땅을 밟은 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글을 쓰게 되었고, 지금에야 글을 마감한다. 글의 이유 역시도 여행 끌에 정말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고 하나 때문. 한국에 다시금 다다른 설렘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로는 ‘가장 한국 냄새나는 앨범‘, ‘한국 힙합 하면 떠올리는 앨범’이 듣고 싶었달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센스(E SENS)의 에넥도트(The Anecdote)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을 뿐인 이야기다.
에넥도트, 아마 본 작품을 처음 접했던 시점이 발매 연도인 2015년은 아니다. 보다 정확한 기억을 끄집어 내자면,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인 2017년이 첫 만남 아니었을까. 당시로는 힙합에 막 빠져있던 시기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들었을 시기다. 으레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음반들이 왜 훌륭한 지조차 모르고 음악을 듣던 때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의 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힙합이라면 가리지 않고 섭취했는데, 숱한 명반들 사이에서 에넥도트에 붙은 수식 딱지에 묘한 회의감이 들던 참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일매틱(illmatic)' 같은 수식이랄까. 머리로는 이해되나, 당시의 수식어로 마음으로는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마음에 안 들었다기보다도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혹 그 원인이 이센스를 둘러싼 당대의 사건이나 본작을 둘러싼 과열된 상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데, 그런 사고는 뒷전이고 본작에 대한 묘하디 묘한 생각은 여전히 뇌 한 켠에 자리 잡았다. 결국 제 사고는 에넥도트라는 작품은 왜 좋은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사실 에넥도트가 주는 감흥은 일매틱과는 훨씬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애초에 만들어진 지역도, 프로듀서진도, 각 앨범이 나오기 위한 각고의 시간과 노력도 한참은 다르니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일화(The Anecdote)라는 제목부터 재밌다. 개인의 일화를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에피소드, 사건, 이야기, 에넥도트까지. 이미 누군가에게는 역사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르나, 내게 그 무언가가 거창하거나 거룩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단지 본인의 이야기와 감정을 묘사할 뿐. 그저 이센스가 보고 느낀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줄기를 이룰 뿐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게 공간을 조성하는 비트가 되었든, 생생한 디테일이 되었든, 적절한 묘사의 랩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좌우간에 이센스에게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단서들이 음악 전체에 흩뿌려져 있다. 이센스의 학창 시절부터 래퍼가 되기까지, 그리고 현재의 이센스까지 에넥도트라는 말로 하여금 매듭 지어진다. 여러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이고 이윽고 인간 강민호이자 이센스라는 래퍼로 현상한다. "주사위"에서는 중학교 3학년의 강민호를, "Back In Time"에서는 고향 속 비춘 자신의 모습을, "Writer's Block"에서는 가사를 쓰는 당시의 이센스를 그려내는 것처럼. 단순한 한 래퍼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설명하기에는 이센스 본인의 수많은 모습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여러 시간대, 여러 모습을 담는 와중에도 산만해지지 아니함은 이센스의 랩과 정체성에 근간을 둔 작품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작이 이렇게나 많은 공감과 칭송을 받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음반이 대중에게 여러 감각을 촉발하는 것은 과연 대단한 일이자, 많은 음악가들이 꿈꾸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에넥도트는 나스나 우탱클랜 시대의 음악을 듣고 자란 만큼이나 농밀한 음악을 자랑한다. 본인을 90's kid로 일컫는 장면과 뉴욕의 이야기에 뻑가는 장면이 곧 청자에게 옮겨가며, 이센스 개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삶을 음악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계기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에넥도트 전체를 조율한 프로듀서 오비(Obi)가 준비한 무대에 이센스가 있으며, 그 위에 이센스의 치열한 퍼포먼스는 90년대의 황금기를 재현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기술과 90년대 붐뱁의 접목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음악 최대한의 감성을 전달하면서도 이센스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순간, 우리가 바라보는 이센스는 그 누구보다도 래퍼이자 M.C.에 가까워진 순간이 아닐까.
'한국의 일매틱', 그럼에도 난 이 수식어에 회의감이 든다. 내가 일매틱 러버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에넥도트라는 앨범을 일매틱과는 한참은 다른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기에 회의감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일매틱과는 다른 앨범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 시점, 가사, 프로듀서, 비트 모든 것들이 다르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일매틱에서 느끼지 못하는 정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Unknown Verses"의 해후가 되었든, "Back In Time"의 회고가 되었든 간에. 앨범의 마무리인 "Unknown Verses"를 들으며 진실한 그 무언가를 본다는 감상에 잠기곤 한다. 제 머리 안에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것들이 일화라는 제목으로 압축될 때 난 묘한 감상을 남기는데, 그것이 이센스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가 아닐까.
에넥도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나열하다 보면, 우리는 이센스라는 주체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인간 강민호, 슈프림팀을 지나, 에넥도트, 이방인, 저금통까지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진솔함이 가득하다. 언젠가 작품마다 다른 색채를 지니는 듯하지만, 그 작품들은 작품을 만들 당시의 이센스와 가장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 숱한 아티스트들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와 본인 주체를 적절히 배합하려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아왔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이를 거리낌 없이 지행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에넥도트를 다시금 들여다보면, 그는 가장 유약하고 험난한 삶조차 드러낼 자신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곤 한다. 그렇기에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이센스라는 인물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느껴지든, 에넥도트가 누군가에게 느껴지든 말이다. 한 인물을 우리가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듯이, 우리가 느끼는 이 앨범에 대한 감상도 하나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왜 이 앨범이 유난히도 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인지조차도 그때그때 다른 경우가 많기에.
나처럼 한국 냄새가 나는 작품을 찾는 사람들, 언젠가 이센스의 음악을 다시금 찾는 사람들, 10년이 지나도 에넥도트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저런 사항들이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다소 아리송하지만, 이센스의 솔직함이든,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었든, 우리는 래퍼의 솔직함과 진정성에 매료되곤 하는 것이다. 이센스라는 래퍼는 언제까지나 작품을 통해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지금까지도 에넥도트의 명성에 훼손되는 요소가 전무하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대한 여러 물음을 남기었지만, 그래도 좋다. 이 작업은 그의 이야기를 다시금 들을 때의 생동하는 내 마음을 다시금 확인했고, 그것이 아직까지도 유효함을 확인했으니까.
10주년이네요!
가장 개인적이기에 가장 공감할 수 있던 앨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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