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에넥도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내가 이 앨범을 접한 맥락을 담고 있다. 당연히 개인적인 안목의 부족과 제한된 시야로 인해 많은 오류가 있을 것이다.
에넥도트는 명반인가?
도발적인 질문일 수 있다. 이제 이 앨범은 발매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고, 힙합을 넘어 2010년대 한국 음악을 대표하는 ‘명반’의 자리에 올라 있다.
명반이라는, 다수가 사용하지만 다수가 오해하는 이 이름은 무엇일까. 나는 대중음악뿐 아니라 영화, 연극, 미술,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서 ‘명반’의 기준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형식만이 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다. 다만, 음반이라는 특수한 형식에서 나는 이 명제가 종종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내 얄팍한 음악적 지식과 통찰력 때문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앨범이라는 묘한 형식 자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나는 ‘명반’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 하나의 앨범이 뚜렷한 비전을 공유하며, 좋은 곡들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이루어 취합되어 있을 때.
그렇다면, 에넥도트는 명반인가?
빈약한 안목으로 감히 말하건대, 그렇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앨범의 ‘명반으로서의 위상’에 대해 말하고 싶다. 에넥도트는 누명을 제외하면, 한국 힙합의 어떤 앨범도 도달하지 못한 위치에 오른 듯하다. 한대음이나 각종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고, 수많은 리스너들이 ‘최고의 앨범’에 꼽는다. 그래서 내가 진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 과연 에넥도트는 다른 앨범들, 이를테면 eat, zissou, 이방인, 12, 노비츠키, 저금통 등과 비교해 확연히 다른 레벨의 작품인가?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이센스라는 이름에 붙은 여러 수식어 — 리릭시스트, 진실된, 무거운 — 는 어느 시점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한국 힙합을 오래 들어온 일부 청자들이 지적했듯, 데뷔 초 그의 이미지는 ‘노는 것 좋아하고 랩 잘하는 청년’에 가까웠다. 무겁고 사회에 성찰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2000년대에 태어난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변화에는 에넥도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앨범의 소재는 묵직했고, 냉소와 분노, 슬픔을 오가는 이센스의 태도는 그 이미지를 강화했다. 다만, 그가 이 앨범을 옥중에서 발매했고, 녹음 당시 누구라도 진지하게 삶을 되돌아볼 상황이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앞서 말한 수식어들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이센스와 에넥도트를 규정해버리는 불편함은 남는다.
이 불편함은 2015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예민했고, 글을 잘 썼고, 예술과 책에 관심이 많았다. (적어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힙합은 이미 메인스트림에 진입해 있었지만, 나는 힙합을 적극적으로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앨범을 둘러싼 반응은 들려왔다. 그중 딥플로우의 코멘트 — “드디어 한국의 Illmatic이 나왔다” — 는 이센스의 실력과 맞물려 엄청난 하이프를 만들었다.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명반’의 자리에 올랐고, 한국 힙합의 상징이자 승리의 기념비가 되었다. 나는 이를 실시간으로 목격했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제 에넥도트와 이센스를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드머의 평을 보면서 든 의문은 이것이다 — 우리는 이 앨범에 너무 많은 의미를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이를테면 ‘쇼미’가 대표하는 트렌드의 반대편에 있는 리얼함, 한국 힙합의 구원자, 사회와 씬에 대한 일침, ‘진짜 힙합’ 같은 것들을 말이다. 켄드릭의 앨범이 나올 때 모두가 ‘흑인 인권과 인종차별’이라는 프레임을 들이대는 맥락과 닮아 있다.
이 앨범의 붐뱁 사운드 역시 그 시각을 고정시켰을 수 있다. 트랩의 시대에 단단한 붐뱁 비트 위의 절륜한 랩과 진지한 가사는, 지금까지 없었지만 응당 있었어야 할 ‘정통 힙합’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결과, 이 앨범이 90년대를 연상시킨다는 점은 단점이 되지 않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 것을 정리한 접근 방식에 대한 불만도 무의미해졌다.
에넥도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앨범에 대해서만 쓰자면 한참을 더 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 2015년에 우리는 너무 빨리 이 앨범을 추대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이 작품 속에서 보려 한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은 너무 빨리 평가받았고, 너무 많이 말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아직 덜 말해졌다. 이제 이센스는 이방인과 저금통이라는 또 다른 면모를 담은 좋은 앨범들을 발표했다. 다시금 다른 방식으로, 에넥도트를 듣고 이야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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