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들의 위상이나 음악적 완결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xxx와 김심야의 앨범을 가끔 듣고, 더 콰이엇의 몇몇 곡을 즐겨 듣는다. 스윙스의 앨범은 몇 장 들어본 적 있지만 다시 듣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적 디테일을 논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다만 이 셋을 볼 때마다 한국힙합의 ‘자의식’을 생각하게 된다.
자의식은 모든 예술이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피할 수 없이 맞닥뜨린다. 형식에 대한 질문, 매체에 대한 사유. 세잔, 히치콕, 셰익스피어, 체호프, 조이스, 쇤베르크 같은 이들이 그렇다. 힙합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자의식은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힙합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창작자와 수용자의 의식, 그 특유의 감각에 관한 것이다.
피타입의 ‘힙합은 음악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에서 나는 멈칫했다. 예술이 삶이 될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그냥 음악이기도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스윙스의 발언을 들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는 힙합만이 유독 공격받는 듯 말했다. 그러나 연예계, 정치, 공직—어느 분야나 욕은 먹는다. 왜 본인과 힙합만 특별하다고 생각할까.
스윙스는 덩치를 키우고, 그 덩치를 과시한다. 그는 이목을 끌지만, 그래서 시야가 좁아진다. 반대로 더 콰이엇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읽고 넓힌다. 일리네어 시절, ‘상자 속 젊음’의 감성, ‘연결고리’의 가사—그는 필요한 자아를 꺼내 상황에 맞게 쓴다. 범고래가 바다에서 말하는 자부심과 아쿠아리움에서 말하는 자부심은 다르다. 스윙스는 여전히 수조 속에 있다. 더 콰이엇은 바다에 있다. 돈을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확장하는 도구로 보고, 취향이 다른 이들까지 장에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김심야는 날카롭다. 냉소와 통찰이 랩에 스민다. 그러나 그는 종종 시장과 리스너를 공격한다. 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천재학자이자 전략가 라수 규리하가 연상된다.
“ 너는 세상을 비웃으며 입매가 매서운 학자로 살았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나가기 두려웠던 네가 선택한 타협안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네 방식이니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그의 세계는 좁다. 그가 범고래임을 스스로 알더라도, 우물 속 범고래를 보러 오는 사람은 없다. 우물을 넓히거나 나와야 한다.
이 셋은 각기 다른 자의식을 품고 있다. 스윙스는 자기 덩치에, 더 콰이엇은 자기 외연에, 김심야는 자기 방에 매달려 있다. 같은 힙합이라도 그 자의식의 크기와 방향은 이렇게 다르다.
흠
그래도 김심야는 dog 이후로 꾸준히 확장하는 듯 해서 다음 앨범이 기대된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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