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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디판다 정규 1집-가로사옥

title: 박재범Alonso200013시간 전조회 수 653추천수 7댓글 3

https://blog.naver.com/alonso2000/223933733235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中

 

 

야심을 가지고 높이 오르려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회에 던져진 이상 상승의 과정에는 필연적인 경쟁이 따른다. 경쟁에서 밀려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아래에 위치해 있던 이는 더 높이 올라간 이에 대해 동경하거나, 부러워하거나, 때로는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학생일 시절에는 그 척도는 공부 아니면 주먹이었다. 졸업한 이후에는 물질과 성공으로 바뀌게 괸다. 우리 대다수는 위일 때보다 아래일 때가 더 많을 것이기에, 질투와 열등감, 이를 떨쳐내기 위한 부담에 대해 꽤나 익숙해지게 된다. 쿤디판다 역시 위로 오르려는 이었다. 뚜렷한 이상을 지닌 상승의 과정에서 그 이상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 겪는 혼란을 그 또한 겪어야 했다. 혼란을 끝내는 방법은 이상에 이르거나, 이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숱한 좌충우돌과 탈출 끝에, 쿤디판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정 혼란을 끝내려면,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인생은 상승이라기보다도 전진이라고.

길다란 건물을 지나가는 것은 여러 방에 머무르기도 하고, 갇혀서 문을 열고자 고생하기도 하고, 결국 그 방을 나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일의 반복일 것이다. 마치 삶을 살아가며 숱한 사건과 마주치듯. 그러므로, <가로사옥>에 있어 각각의 트랙은 건축물을 구성하는 방이며, 그 형상은 쿤디판다 자신이 음악에 뛰어든 이후 겪어온 일의 재구성이다. 자신이 지나갈 사옥의 설계자로서 쿤디판다는 세심하게 설계를 조력할 도우미들을, 소리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쌓을 줄 아는 건축가들을 마땅히 섭외해야 했다. 이에 <재건축>을 함께한 그의 파트너인 비앙은 물론 아이오아, 바밍 타이거의 언싱커블, 수퍼프릭 레코즈 출신의 뷰티풀 디스코까지, 최소한의 소스만으로 최대의 그루브를 뽑아낼 수 있는 이들이 엄선되었다. Flying Lotus와 Knxwledge로 대표되는 LA 비트 씬부터 J Dilla와 Danny Brown으로 대표되는 디트로이트 씬에 이르는 전자적이고 실험적인,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재지하게 정석을 지키는 양식의 영향이 앨범에 이식되었으며, 이내 완성된 드럼과 베이스로 구축된 최소한의 골조에 인더스트리얼한 장식이 더해지는 건물의 구조는 쿤디판다의 뚜렷한 레이 백과 가는 톤, 섬세한 라임이 머무르기에 최적의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자동차 시동을 까지 더러 활용되는 한편, 복잡하게 쌓아 올린 전자음과 독특한 드럼 룹으로 앨범에서 제일 실험적인 조류를 견지하는 "블랙박스" 또한 LA 비트 씬의 재지한 실험성의 방법론을 상당 부분 따른다. 물론 이 경향에는 예외 또한 없지는 않은데, 이는 후술한다.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中

 

 

그렇다면, 쿤디판다가 자신의 생으로 지은 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실, 그 형상은 꼭 곱지만은 않다. 질투라는, 또한 열등감과 같은 부류의 감정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마련이다. 이름 그대로 자신이 음악을 처음 시작한 시점을 들여다보는 오프닝인 "블랙박스"의 내용만 보아도 이는 명확해진다. 학교 다닐 적에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 - 작 중에서는 '지훈이'라고 표현되는 - 에 대한 열등감과 이를 뒤집고 싶었던 반항심이 그의 랩의 출발점이었다. 첫 굴욕을 딛고 드디어 힙합 씬에 들어왔음에도 그 질투와 열등감을 빠져나오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어느 아티스트를 동경하고 질투했다가 벗어나는 과정, 타인과 자신을 어느 척도로 재단하던 시절과 그 기준에서 밀렸을 때의 뻘쭘한 경험을 겪으며 쿤디판다는 스스로도 다소간의 민망함을 겪었던 듯싶다.

사람이 솔직해지지 못하는 상황은 언어의 방아쇠를 당기기 주저하는, 당당하지 못하게 움츠러든 모습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결국, 이를 극복하려면 사람들과 부대끼며 영감을 받고, 용기를 얻은 어느 시공간의 편안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편안함을 마주하며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러지 못했던 지난날의 후회도 함께 삼키게 되었다. 멘토를 따라 과거를 품고 나아가는 동안 어른의 금고에 쌓인 후회를 팔아 진취를 샀고, 그것이 결국 인정에 대한 갈망과 불안을 벗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동료의 공연에 게스트로 섰을 때, 관객들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그의 음악에 호응하는 순간 그의 결여는 낙찰되어 팔려갔다. 타인의 위치,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며 꿈꾸던 그 자리에는 이제 자신만의 위치와 입지가 가득 찼다. 그렇게 다다른 종착지는 생각보다는 차분하다. 방을 들어갔다 나오고, 다시 다른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환을 반추하는 모습은 히피는 집시였다 특유의 앰비언스한 질감 위로 그려졌다. 또 다른 방, 또 다른 공간이 다가오지만, 결국 그 공간 또한 자신이 지은 것이고, 지을 것이기에 두렵지만은 않다. 다만 그 끝을 알 수는 없기에, 이를 그려내는 감성은 탈출의 환희라기보다도 고정의 침잠이어야 했다. 히피는 집시였다만의 동양적인 선율과 기이한 몽환이 공존하는 얼터너티브 알앤비 선율이 앨범의 결론에서 유효하게, 미려하게 맞아떨어지는 이유다.

 

 

 

 

철저하게 자신을 향하는 앨범의 구조 상, <가로사옥>의 객원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언어로 서사를 돕기보다는 일종의 악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앨범이 지닌 간결하며 재지한 소리의 구성, 이에서 오는 쓸쓸함과 처연함을 증폭시킬 만한 보컬들이 쿤디판다의 지휘에 맞춰 그와 가까운 곳에서 섭외되어 배치되었다. "자벌레"의 형선(HYNGSN), "낙찰 전/용기의 합창단"의 담예가 선사하는 그루브가 대표적일 것이며, 앨범 곳곳에서 베이스 세션으로 활약했던 누기의 투박한 보컬은 돈 싸인의 화려한 토크박스 소리와 맞물리며 "향바코"의 은은한 멋을 북돋운다. 쿤디판다에게 멘토가 되어 잘 될 거라며 용기와 희망으로 안내하였던 진보가 "어덜트금고"의 말미에서 다시 한번 힘을 불어넣는 부분은 아티스트 개인의 서사는 물론 소리의 편안함과 화창함까지 안겨주는 특히나 상징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작은 가락 만으로도, 어떨 때는 쿤디판다 자신의 이야기와 어우러지며 앨범에 조립된 보컬들은 <가로사옥>에 우리가 쉽게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한다. 서사적으로도 물론 정교하지만, 여기에 쿤디판다 본인의 체계적인 랩 피지컬과 객원 보컬들의 섬세함까지 더해지니 우리로서는 거침없이 그 구조물에 머무르며 질투를 벗어나는 경험을 함께할 수 있다.

<가로사옥>은 질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낮추던 자신이 그저 관점이 다름을 인정하고 스스로 당당해지는 과정은 방과 방을 지나며 한 겹씩 구체화되어갔다. 이는 동 세대의 다른 누구보다 체계적이었고, 또한 간결하고 명징하게 이루어졌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지지하는 이들과 조우하며 비었던 마음은 조금씩 채워져 갔다. 방에서 벗어나려 억지로 발버둥치기보다는, 되려 머무르는 것을 배운다. 구조물의 안에서 실존하는 것, 그 존재에 의의를 품으며 생긴 희망으로 다음 문을 박차고 지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자를 향했던 질투는 자아를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갔다. 이 과정이 장르의 미학에 발맞춰 충실히 이루어졌기에, 그 모습이 자신을 넘어 영감을 받은 시절의 한국 힙합 씬의 풍경과 맞닿아 있기에 <가로사옥>은 쿤디판다 개인은 물론 한국 힙합 전체에 비춰보아도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마침내 다음 단계로 이어지기 위한 결론이 지어졌으니, 이제 이 짧고 굵은 시를 마무리 할 때가 된 듯 싶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中

 

 

음, <가로사옥>을 지나며 얻은 쿤디판다의 결론은 약간 다른 것 같다. <가로사옥>의 마지막 방에 다다른 쿤디판다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알았노라

 

 

Best Track: 네버코마니, 향바코 (Feat. Noogi, Don Sign), 어덜트금고 (Feat. J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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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title: 박재범Alonso2000글쓴이
    13시간 전

    본 리뷰는 HOM#26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hausofmatters.com/magazine/hom/#lastet

  • title: 박재범Alonso2000글쓴이
    13시간 전

    P.S. 가로사옥 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12시간 전

    아 오늘이 가로사옥 5주년이었군요 그냥 지나칠 뻔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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