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은 유리창에 찍힌 손자국 같아서, 평소엔 드러나지 않아도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흔적을 선연히 내보이곤 한다. 또 어떤 감정은 메아리와 같아서 당신과 그가 함께 만들었던 마음의 풍경에 있는 힘껏 내질러도 그 모습 그대로 부딪혀 되돌아오곤 한다. 우리는 이를 미련이라고 한다. 미련은 가려진 감정이고, 혼자만의 감정이다. 그래서 미련은 다른 감정의 탈을 빌려 쓰고 나타난다. 분노, 애틋함, 질투, 체념, 혼란, 환희 등등. 우리는 다른 감정의 탈을 쓴 미련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만큼 미련은 복잡미묘하며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련이 그만큼이나 고독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미련에 휩싸이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자석에 둘러싸인 나침반처럼 방향을 잃는다. 감정의 잔재는 끊임없이 우리를 간지럽히고, 희망의 탈을 쓰고 우리를 유혹한다. 미련은 우리에 눈에 착각이라는 베일을 드리우고 귀에는 아집이라는 귀마개를 씌운다. 헤매는 마음과 가려진 눈과 귀는 계속해서 탓할 무언가를 찾는다. 결국 미련은 장막 뒤에 모습을 감추고 우리에게 자기연민이라는 반창고나 붙여주는 것이다. 미련은 사람을 헤매게 만든다. 는 이런 미련을 주제로 한 지바노프의 소곡집이다.
앞서 사용한 ‘소곡집’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는 한 권의 단편소설집 같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중심축이 되는 곡은 동명의 타이틀곡인 “Misery”다. 앨범 소개글을 보면 해당 앨범은 “Misery”에서 파생된 이야기들을 묶어놓은 컨셉임을 밝히고 있다. 각 곡의 화자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 감정은 어떤 변화나 진전을 보이지 않으며, 비슷한 톤으로 계속해서 웅얼거린다. 주목할 점은 곡들이 마치 혼잣말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오늘은”을 제외한 모든 트랙에서 화자는 누군가와 결별한 상태이며 혼자다. 화자들은 오래전에 떠난 너, 오지 않는 너, 연락이 되지 않는 너를 떠올리며 드는 단상들을 되뇐다. 분명 들어야 할 사람은 있지만, 듣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나를 여기 남겨 두지마/언제라도 상관없지만/내게 돌아올 거라고 한 번만(“Thinkin' bout U”)’, ‘니가 원했듯이/날 다 지워냈겠지/너는 모르는지/내 맘은 널 잡고 싶지(“Misery”)’, ‘여전히 혼자만/널 기억하는가 봐/네 손을 잡고서/그저 좋아하던 날(“딱 한번만”)’과 같은 가사들에서는 대상과의 단절감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Meet Me At Dream”에서는 “꿈에서 만나 우리/내가 하고 싶던 말/네가 싫어하던 말/전부 다 뱉어 줄게”라고 말하며 미련이 남긴 집착을 예상치 못한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곡에 쓰인 표현들은 모두 미련의 변용이며, 그 안에서 미련들은 때론 무기력으로, 때론 집착으로, 때론 슬픔으로 변모한다. 산뜻한 프로듀싱과 대비되는 곡의 가사들은 역설적 분위기를 더하며 감상의 몰입도를 더한다.
복잡 세심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만큼, 지바노프의 퍼포먼스도 가창력보다 세심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전 정규작인 는 강력한 힘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보컬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다면, 이번 앨범에서 지바노프는 보다 섬세하고 가벼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상당히 가벼운 소스들로 이루어진 인스트루멘탈이 합쳐지며 앨범은 전반적으로 이지리스닝의 분위기를 풍긴다. “낯선 사람”은 댄서블한 베이스 라인 위에서 몽환적으로 울려 퍼지는 건반이 매력적이다. 그런가 하면 이어지는 “가려진 사진”은 에스닉한 타악기와 보사노바를 연상케 하는 기타 반주를 내세우며 흥미로운 전환을 이끌어 낸다. 그 위에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지바노프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 쓸쓸한 향취를 풍기며 곡에 녹아든다. ‘날씨’라는 키워드로 이어지는 “오늘은”, “기상예보: 너”, “날씨 탓”의 진행은 사랑에 대한 설렘(“오늘은”)에서 이별 이후의 공허와 무력함(“날씨 탓”)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대비를 드러내는 프로듀싱이 일품이다. “Meet Me At Dream”은 시티팝의 향수가 풍기며, 꿈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만큼 공간감 가득한 몽환적인 인스트루멘탈이 인상적이다. 마지막 곡인 “Back To You”에서는 앨범 수록곡 가운데 가장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만날 수 있다. 앨범 내내 반복됐던 미련의 모티프가 극에 달한 곡이기에 이러한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지바노프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프로듀서 Lennon과 GiiANA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자신들의 플레이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으며, 이들이 앨범 내내 보여주는 호흡은 완벽에 가깝다.
미련은 상처를 계속 후벼 파며 딱지 앉을 새도 주지 않는다. 미련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막 뒤에 숨은 미련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모습을 바꾼 미련을 정확히 분별해내야 한다. 그리고 미련은,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미련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는 예술적인 시선을 조금 걷어내고 본다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은 작품이다. 작품 내 질척거리고 뚝뚝 떨어지는 미련들은 징글징글하며, 결국엔 불편한 순간까지 우리를 몰고 간다(“Meet Me At Dream”). 그러나 를 들으며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미美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추醜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이런 역설의 작업이야말로 예술가만이 가능한 일이 아닐까. 검정치마의 문제작 가 그러했듯이, 지바노프의 는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히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며, 특유의 세심함으로 세공한 한 번은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마땅한 명품이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