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한국 힙합을 들여다보면, 그 가사들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민감한 주제로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性), 폭력, 약물, 자기혐오, 체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금기를 넘나드는 언어의 파열은 이제 일부 아티스트의 스타일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시장 경쟁이나 관심 끌기식 전략으로 환원되기엔 그 저변에 놓인 사회적, 철학적 맥락이 너무도 깊다.
흥미롭게도 이 흐름은 19세기 말 서유럽에서 유행한 ‘데카당스(Decadence)’ 문학과 일정한 평행을 이룬다.
데카당스는 한 시대의 몰락 속에서 꽃핀 퇴폐의 미학이자, 전통적 가치와 윤리를 거부하며 병든 감수성과 병리적 쾌락을 예술로 끌어올린 운동이었다.
보들레르와 위스망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작가들은 병, 타락, 죄악, 퇴폐, 쾌락, 무기력 등을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재조명하며, 문학이 현실의 도덕적 규범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 한국 힙합의 자극적인 언어와 병든 정서, 감정의 해체와 과잉은 이러한 데카당스적 사유와 깊은 친연성을 지닌다.
지금 한국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압축성장을 마친 선진국의 면모를 지녔지만, 내면에서는 급격한 가치 해체의 시기를 겪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와 정서적 고립, 무한 경쟁 시스템의 피로, 성취 이데올로기의 붕괴, 그리고 디지털 세계에서의 감각 마비는 청년 세대에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을 안겨준다.
기존의 이상이나 규범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에도 새로운 가치가 뚜렷이 제시되지 않는 이 과도기의 공허 속에서, 힙합은 자기 표현의 도구로서 극단화되고 있다.
이때 래퍼들은 더 이상 교훈적이거나 건설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파괴적 정서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금기를 침범하며, 때로는 사회적 ‘금지어’를 예술로 전치함으로써, 현실이 감추는 병든 구조를 들춰낸다.
이는 데카당스 문학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이 사회적 진실을 포착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결국 힙합은 ‘진실’을 다루는 장르다.
그 진실이 반드시 정의롭거나 희망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 힙합은, 병든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도 병들어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한다.
데카당스 작가들이 ‘퇴폐’를 통해 인간성과 시대를 해부했듯, 힙합 아티스트들은 ‘자극’을 통해 감정의 마비를 뚫고 나온다.
이들은 대중을 충격 속에 방치하거나, 때론 스스로를 조롱하며, 견디기 위해 더욱 날이 선 언어를 갈고 닦는다.
그렇게 힙합은 지금, 한국 사회의 심리적 단면을 가장 솔직하고 가장 거칠게 담아내는 ‘데카당스의 후예’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 흐름을 단지 타락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라, 왜 예술이 이렇게까지 병들어야만 했는지를 묻는 감식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엘이에서 본 역겨운 글중에 베스트인듯 ㅇㅇ
어디서 데카당스 주워듣고
저열하고 자극적인 언더 래퍼 따라지 쓰레기 가사를
데카당스 문ㅋㅋ학으로 택갈이해서
무슨 사유가 깊고 철학 담은 거 마냥 ㅋㅋ
와 힙찔이 입장에서 읽는데 얼굴이 벌개지네 ㅅㅂ
개추
고양이추
개추
고양이추
시계추
엘이에서 본 역겨운 글중에 베스트인듯 ㅇㅇ
어디서 데카당스 주워듣고
저열하고 자극적인 언더 래퍼 따라지 쓰레기 가사를
데카당스 문ㅋㅋ학으로 택갈이해서
무슨 사유가 깊고 철학 담은 거 마냥 ㅋㅋ
와 힙찔이 입장에서 읽는데 얼굴이 벌개지네 ㅅㅂ
저 사람이 주장을 했으면 그에 맞게 반박하는 게 맞는 거 아닌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욕할 게 아니라요
철구 신태일을 데카당스 인방이라고 올려치는
사람 앞에서 그에 맞게 반박을 어케함?
그리고 댓글 쓴게 반박이지
철학적 사회적 사유 좆도 없는 자극에 뇌가 절여진
애새끼들 (10대에서 20대초반) 니즈 충족시키려고
편승한 가사 찍찍을 데카당스로 포장하는 ㅈㄹㄴ
가 내 의견임 ㅇㅋ?
보들보들이나 와일드가 봤으면 귀싸대기 때릴 글 ㅇㅇ
꼬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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