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리뷰는 월요일 발매된 <H.O.M #20>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더욱 멋진 리뷰들이 많으니 다들 많이많이 봐주세여
https://drive.google.com/file/d/15haVGCwub2CYnAtF9qXBnHkrgPNMQfVs/view?usp=drive_link
제네 더 질라 <94-24>
writersglock
2024.11.22
1. No easy
2. Life
3. 빛이 바랜 별
4. 1500 (Feat. Double Down)
5. 서울의 달
6. Dancing in the rain (Feat. MELOH)
7. 적자생존 (Feat. DON MALIK)
8. 한 바퀴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 유안진 <내가 나의 감옥이다> 중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쩌다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는가?
어느 순간부터 씬에서 제네더질라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으며 앰비션뮤직에 입성한 이후로 정규 4장에 ep 2장, S+FE, FLOCC 등의 크루 활동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 대한 리스너들의 기대치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기대치는 높았지만 그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듯한 작업물들에 실망감이 높아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년 발매한 정규 4집 <Bad Nights>는 오히려 썩 환영받지 못했고, 그 뒤로 제네더질라의 활동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리스너들 사이에서 생겨난 ‘앰비션뮤직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멸칭은 좁아진 제네더질라의 입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앰비션뮤직 공식 sns 계정에 올라온 한 영상이 순식간에 리스너들의 주목을 모은다. 도프한 트랩 비트 위에서 변화무쌍한 플로우로 랩을 뱉는 영상 속 주인공은 제네더질라였다. 바로 그의 5번째 정규 앨범 <94-24>의 발매 예고 영상이었던 것이다.
<94-24>의 제네더질라는 어딘가 낯설다. “뜨거워 완전”의 유쾌한 돈색머리도, “리버보이”의 여유만만한 제네도 아니다. “ITX”에서 야심만만하게 고향 춘천을 내세우며 서울에 상경한 제네놈도 보이지 않고, <Bad Nights>에서 밤과 술, 여자를 저울질하던 나쁜 남자도 사라졌다. 지금까지 제네의 음악을 쭉 쫓아왔던 사람이라면 이 앨범이 그동안의 음악과는 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제네더질라의 랩 톤과 그에 걸맞게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스들로 이루어진 비트, 진솔하다 못해 부끄러울 정도인 가사 내용까지. 앨범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94-24>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야심만만한 제네놈을 이렇게까지 달라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94-24>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돈색머리 제네더질라로 살아왔던 ‘인간 이상용’의 회고록이다.
앨범의 첫 가사 ‘인생이 쉽지 않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뭇 진지한 제네더질라의 랩 톤이다. 그 뒤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쇄적인 가사들은 제네더질라의 현재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사를 보면 그간 줄어든 그의 입지를 제네더질라 자신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어든 자신감과 변해버린 마음은 점점 자신을 현재 위치에 안주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당장 눈앞에서 벌리는 돈은 그의 눈을 현혹했고 마치 ‘뭐라도 된 것마냥’ 돈을 물처럼 써버리곤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 그에게 뱉은 ‘너 변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낀다. 뭐가 변했냐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지만 정작 돌아보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 제네더질라는 자신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날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2번 트랙 “Life”의 첫 라인이자 <94-24>라는 앨범을 탄생시킨 최초의 질문이다. 그는 처음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로 돌아간다. 어찌 보면 우연이지만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은 버스 안 MP3를 만난 그 순간부터 돈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독기에 차서 음악을 만들고 자신을 외치고 다녔던 그 시절, 꿈에 그리던 앰비션뮤직과 계약을 채결하던 순간까지 순식간에 훑어본 그는 어느 순간부터 정체된 채로 녹슬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오히려 음악을 시작했을 때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였던 길은 성공이 찾아온 순간부터 흐릿해졌고, 목표를 잃어버린 그는 미아처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 바랜 별”은 3번 트랙의 제목이자 제네더질라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원하던 성공이 찾아왔고 이젠 꿈꾸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너무나 당연해져 버린 지금, 그는 제자리에 고여있다. 새로운 목표는 보이지 않고 이전에 이룩한 성공만으로 현재의 공백을 메꾸기에는 공연 시간 20분을 채우기에도 급급할 정도로 턱없이 부족하다. 동료들은 점점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고 같은 무대에 오르기 부끄러울 정도로 제네더질라는 초라해진다. 무대에 선 그들은 빛이 나고, 무대에서 내려온 제네더질라는 빛이 바래버렸다. 아니, 무대에 오른 제네더질라의 꿈은 빛이 바래버렸다.
그러던 중 제네더질라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데려온 길고양이의 병원비로 1,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이게 된 것이다. 한참 돈이 벌릴 때는 몇백이고 물처럼 쓰던 그였지만 점점 벌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1,500만 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뼈아픈 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돈을 들여 고양이를 살렸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 ‘돈이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있다.’ 이전에는 단지 원하는 것(그의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스왈로브스키, 데이비드 아발론, 프라다 등등)을 마음껏 가지기 위해 돈을 벌었다면, 이젠 지키기 위한 힘으로써 돈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제 더는 헤매서는 안 될 일이었다.
5번 트랙 “서울의 달”을 기점으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자격지심과 두려움을 털어버리기로 다짐한다. 그 방법은 ‘나다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외부에 비교 대상을 두며 번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아직 주변 그리고 자신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네더질라 자신의 마음가짐은 변했다. 아마도 이제부턴 그의 삶도 변하지 않을까. 그는 빗속에서 춤을 추며(“Dancing in the rain”) 달라질 미래를 낙관한다. 이는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무책임한 낙관이 아닌 ‘안 괜찮아도 괜찮아’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낙관이다. 비에 젖고 빗길에 미끄러지더라도 나다움을 잃지만 않는다면, 이 비는 언젠가 그칠 테니까, 그러니까 안 괜찮아도 괜찮아.
“적자생존”에서 제네더질라는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린다. <zillamode>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유쾌한 그로 돌아온 듯하다. 레이블 동료인 던말릭이 피쳐링으로 참여해 힘을 실어줬다. 이전에 동료들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제네더질라를 떠올렸을 때 이 곡에 던말릭이 참여한 것은 과거의 제네더질라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의 목표는 ‘잘 살아남는 것’. 잘 살아남기 위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목표이다. 그리고 앨범은 “한 바퀴”에서 이전의 야심만만하고 자신만만한 제네더질라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마무리된다.
앨범의 전반적인 흐름을 다루었으니 프로듀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기존의 제네더질라는 트랩 비트 위에서 중독적인 멜로디를 곁들인 플로우를 타는 랩을 주로 구사했다. 비트는 주로 슬로가 주조했고, 슬로 특유의 뽕끼가 흐르는 트랩 비트는 제네더질라의 목소리에 굉장히 잘 묻어나며 강력한 시너지를 생성했다. 그러나 이번 <94-24>에서는 제네더질라의 멜로디랩을 듣기 매우 어렵다. 비트 중에서는 빈티지한 소울 샘플을 활용한 BPM이 빠른 트랩 비트가 눈에 띈다. 특히 1, 2번 트랙의 비트가 심상치 않은데,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며 초반부터 청자를 휘어잡는다. 참여 프로듀서진도 플래그맨, 스머글러스, 헤콥 등 다양하다. 제네더질라는 평소 톤보다 더 가라앉은 느낌으로 랩을 뱉으며 전반적으로 타이트한 플로우를 구사하고 있다. 특유의 발음을 흘리는 라이밍도 빛이 나고, 변화무쌍한 플로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베테랑적인 면모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또한 제네더질라의 음악답게 시그니쳐 사운드나 애드립 등을 적재적소에 다양하게 사용하여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믹싱과 마스터링에 참여한 더콰이엇은 앨범의 전반적인 형태를 다듬어주었고, 그 덕에 귀에 거슬리는 구석 없이 깔끔하게 앨범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현재 위치와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간은 벽에 마주치면 대체로 자신의 바깥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곤 한다. 시기를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장비를 탓하거나, 사람을 탓한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항상 내 안에 있다.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이니, 해결할 수 있는 것 또한 나 자신이다. 제네더질라는 이번 앨범을 통해 이 간단한 논리를 깨달은 듯 보인다. 과연 그의 깨달음이 앞으로 제네더질라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꺼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94-24>는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듣기에도, 그가 돌아온 후에 듣기에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다. 다시, <94-24>는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밝게 빛날 별이 될 작품이 확실하다. 고여있던 제네더질라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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