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라고 봅니다. 시장의 규모가 쇼미 폐지 이후 작아졌다는 말은 맞지만, 아티스트의 평균적인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니,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 힙합이 변했다고 느끼는 이유, 1, 2세대 래퍼들이 현 세대 래퍼들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이유의 제법 큰 지분은 현 사회의 특징에 있다고 봅니다.
현대 사회는 거대서사가 점차 배제되고 미시서사가 부각되고 있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거대서사'와 '미시서사'는 리오타르라는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인데, 자세한 이야기를 전부 없애고 전하고자 하는 느낌만 남겨 말씀드리면 쉽게 말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요소'가 거대서사이고, '사회 내부의 소집단이나 개인이 가지는, 또는 개인의 차원에서 공감 가능한 사회, 문화적 요소'가 미시서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전 철학 전공자가 아니니, 혹시 잘못된 인용이 있다면 전공자분들께서 비판해주세요.)
거대서사의 해체, 미시서사의 부각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입니다. 그러나 어떤 서사나 사회, 문화적 요소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하고 더 큰 폭으로 끌어올렸죠. 예를 들어 2020년대에 특히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힙플밈' 채널은 미국의 흑인들이 가지는 결속성과 갱스터적인 삶의 방식을 특유의 쌈마이한 감성과 '쌈@뽕', '깔@롱'과 같은 재치 있는 유행어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한국 대중들에게 유행시켰습니다. 이처럼 여러 거대서사가 보편성의 부재로 인해 해체되는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재미있고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일부 서사들이 소비와 향유의 대상이 되어 사회적 인기를 끄는 현상은 주목할 만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힙플밈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미국의 흑인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요소가 바로 힙합입니다. 힙합이야말로 후드 같은 동네의 모습을 각종 미사여구로 치장하여 보기 좋게 박제하고, 흑인 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지요. 영국적 정체성을 강조한 브릿 팝, 히피들의 손에서 발전한 각종 음악 장르가 그들의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은 힙합의 가사 문학은 이를 생산하는 문화 주체의 삶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가사 문학보다 직접적이고, '우리 갱 최고, 너넨 병신.' '우린 이런 곳에서 이렇게 자랐고 성공할래.' 같은 날것의 메시지는 힙합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힙합이 들어왔을 때 대두되었던 우려도 이와 비슷합니다. 힙합이 한국에서 흑인들의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여 문화적 의의를 갖지 못하리라는 조롱과, 이와 반대로 흑인들의 폭력적인 성향을 강조하고 부풀리는 힙합이 한국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걱정이 이러한 우려의 핵심적인 논리였죠. 이 맥락에서 피타입이 말한, '힙합은 폭력적인 잡종문화'라는 말은 힙합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힙합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심과 호승심, 힘에 대한 일차원적 갈망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흡수해서 만들어진 잡탕. 맵고 짠데 계속 당기는 부대찌개 같은 음악. 그것이 힙합의 본질이니까요.
윗 문단에서부터 반복하고 있듯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힙합 음악이 한국의 문화 요소로 자리잡지 못하고, 흑인 문화의 비주류 조각 정도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죠. 흑인 문화와 한국의 문화는 그 결도 성격도 너무 달랐으니까요. 그러나 버벌진트와 피타입 등의 래퍼들이 한국어 라임을 정립하고, 1~2세대 래퍼라고 불리는 래퍼들이 점차 여러 앨범을 내며 뜻밖에도 한국 힙합의 '거대서사'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미국의 폭력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성격과는 다르지만,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청소년기~청년기의 고민들을 '함께하는 형제 정신, 신명 나는 음악, 함께 즐기기 쉬운 음악'을 표방하며 오묘하게 거대 서사의 궤에 올려 놓을 수 있도록 가공한 겁니다. 소울컴퍼니의 감성 힙합과 같은 '한국 맛 나는 힙합'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후 많은 래퍼들은 한국형 거대 서사를 띤 힙합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피타입의 Street Poetry는 '한반도 전체를 거대한 게토로 설정하여 우리의 고민들을 풀어 놓으면 어떨까'하는 치열한 고민 속에서 탄생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트랙, 폭력적인 잡종문화에서 '나는 목화밭도 못 봤고, 피부 색깔 역시도 못 바꿔.'라는 선언은 피타입의 태도와 정신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명가사라고 봅니다. 이 맥락에서 <광화문>의 가사는 피타입이 고민한 한국 힙합의 가사 예술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흑인들의 힙합에서 비롯되어 있지만 하는 이야기는 영락없는 한국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정말 많은 래퍼들이 미국 힙합의 방향성은 유지하되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우리만의 서사를 꾸리자! 하는 시도를 계속 보여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공한 사례가 24 : 26과 Lifes like에서 빈지노가 전시한 한국 20대 청춘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이쪽은 좀 미화와 가공 작업이 많이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요 ㅋㅋㅋ
그런데 201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거대 서사가 전반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무한도전이 종영하고, 모두가 함께 보던 예능이 점점 사라지고, 개인주의적인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퍼지면서 그나마 제법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사회의 거대 서사가 본격적으로 미시 서사로 대체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와 그 근거를 더 얘기하고 싶지만, 이건 힙합 글이니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천천히 형성되던 한국 힙합의 공통된 담론, 즉 거대 서사는 그 힘을 점차 잃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던 고전 명반의 기조와 달리, <선인장화>, <가로사옥>, <독립음악>처럼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조각들을 전시해서 관람자의 공감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끌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화문>의 가사를 들으며 우리는 광화문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이 내포하는 권력적 관계, 그리고 서울이라는 커다란 게토에서의 우리가 보내는 삶에 대해 생각하며 탄식하지만, <살아가야해> 같은 곡들의 가사를 들으면서는 보다 개인적인 경험을 최엘비의 이야기에 덧입혀서 '나도 저런 적이 있었는데'라는 식의 공감이 일기 마련이죠. 즉, 힙합의 가사 문학에서 하려는 이야기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계속 이러한 맥락에서 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 같긴 한데, 이러한 맥락에서 테이크원의 <녹색이념>은 앨범 전체가 당시 한국 힙합의 변화를 보여 주는 하나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융단>과 같은 곡에서 서울의 원경을 테이크원의 눈으로 비추다가, 마지막인 <책상> 같은 곡에서는 테이크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관찰하며 거기에 내포된 '우리를 지배하는 돈이란, 권력이란 대체 뭘까?'를 관람자에게 간접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죠. 한국 힙합의 거대서사에서 비롯된 후기 걸작이자, 미시서사로 넘어가는 초기의 단추인 셈입니다.
하여튼 2010년대 말을 기점으로 한국 힙합의 이야기는 거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사 예술이나 메시지의 매개체로 삼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법은 각각의 래퍼들이 해 주는 이야기가 보다 작은 규모로 축소되었음을, 공감의 방식이 관람자 본인의 개인적 경험에 더 크게 의존하게 됨을 뜻합니다. 즉, 리스너들이나 대중들은 더 이상 힙합을 들을 때 자연스러운 공감을 예전만큼 쉽게 하기는 어려워진단 얘기죠. 음악은 점차 실험적이고 다양하게 변하는데 음악에서 다루는 공감의 폭과 서사의 폭이 좁아진다면, 이제 사람들은 '어 넌 네가 좋아하는 거 들어. 난 내 거 들을게.' 와 같은 취향존중 파벌싸움의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소울컴퍼니 같은 집단이 힙합을 이끌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는 예전 한국 힙합의 형태가 돌아오기 어려워진 이유, 그리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그때 힙합이 더 좋았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힙합은 근본적으로 그 향유자들을 하나로 묶어 함께 즐기도록 유도하는 파티 문화에서 시작한 음악이고 그 가사 문학 또한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이 공유하는 이야기에 뿌리를 두는데, 거대 서사가 무너지고 미시 서사에 주목하기 시작한 한국 힙합이 예전의 맛을 못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의견이지요.
쓰다 보니 엄청 길어졌습니다. 열이 끓는 상태에서 겨우겨우 정신 붙들어 가면서 글 쓰려니까 문장에 두서도 없고 글이 늘어지네요. 원래 투팍의 사회저항적 음악은 어떻게 성공했는지, 비슷한 사례가 우리나라에 어떤 게 있는지, 미시서사의 방식으로 거대서사를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009의 <ㅠㅠ>는 어떻게 그런 느낌을 냈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뇌피셜로 더 풀어보고 싶었는데...
하여튼 다음에 좀 더 다듬어서 다시 올려 보겠습니다.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한국 힙합 과거 vs 현재는 마치 펠레와 메시가 같은 세대였다면? 이라는 이야기 만큼이나 참 결론짓기 힘들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싶네요.
가장 쉽게 퉁칠수 있는 말은 메시가 펠레세대로 갔다면 펠레 승.
펠레가 현시대로 온다면 메시 승. 이렇게 얘기할수도 있겠죠 ㅎㅎ
님 이야기를 쭉 정리해보면 201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의 거대서사가 무너지며 래퍼들의 메시지가 변화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이 부분은 제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목보다 글의 내용에 집중해서 작성해보겠습니다.
사실 90년대에도 힙합은 거대서사보다는 미시서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미 그때에는 님이 말씀하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화된 이후입니다.
힙합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이 있습니다.
즉 거대서사가 녹아있는 힙합 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힙합의 역사를 곡해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한국에서 힙합이 사회적인 운동이나 반향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인스트림에 있던 서태지의 메시지(이 역시 거대서사가 아니라, 미시서사입니다.)가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거죠. 쉽게 설명드리면 서태지의 의도한 범위가 기대효과. 사회적인 반향은 파급효과입니다.
즉 힙합은 역사이래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를 다룬 사람이 소수입니다.
이건 시대를 불문하고 반박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 래퍼들도 없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만,
그 구조도 엄말히 말하면 개인의 경험이 주가 되기때문에 미시서사에 가깝습니다.
님이 철학을 좋아하시는건지 어디서 글을 읽고 적은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대서사에 대한 개념만큼은 부족하다고 판단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님이 생각하는 거대서사란 무엇인지, 또 초기의 래퍼중 누가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로 랩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짧은 글은 아니네요.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힙합엘이에서 여태 본 양질의 글 5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큼
아주 흥미롭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써주셨네요
굉장히 쉽게 설명을 해주셔서 보는 내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참 좋은글
한국 힙합 과거 vs 현재는 마치 펠레와 메시가 같은 세대였다면? 이라는 이야기 만큼이나 참 결론짓기 힘들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싶네요.
가장 쉽게 퉁칠수 있는 말은 메시가 펠레세대로 갔다면 펠레 승.
펠레가 현시대로 온다면 메시 승. 이렇게 얘기할수도 있겠죠 ㅎㅎ
님 이야기를 쭉 정리해보면 201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의 거대서사가 무너지며 래퍼들의 메시지가 변화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이 부분은 제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목보다 글의 내용에 집중해서 작성해보겠습니다.
사실 90년대에도 힙합은 거대서사보다는 미시서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미 그때에는 님이 말씀하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중화된 이후입니다.
힙합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성이 있습니다.
즉 거대서사가 녹아있는 힙합 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힙합의 역사를 곡해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한국에서 힙합이 사회적인 운동이나 반향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인스트림에 있던 서태지의 메시지(이 역시 거대서사가 아니라, 미시서사입니다.)가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거죠. 쉽게 설명드리면 서태지의 의도한 범위가 기대효과. 사회적인 반향은 파급효과입니다.
즉 힙합은 역사이래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를 다룬 사람이 소수입니다.
이건 시대를 불문하고 반박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 래퍼들도 없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만,
그 구조도 엄말히 말하면 개인의 경험이 주가 되기때문에 미시서사에 가깝습니다.
님이 철학을 좋아하시는건지 어디서 글을 읽고 적은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대서사에 대한 개념만큼은 부족하다고 판단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님이 생각하는 거대서사란 무엇인지, 또 초기의 래퍼중 누가 거대서사에 대한 메시지로 랩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헉 정확한 허점을 들켰습니다... 사실 거대서사, 미시서사라는 개념어를 여기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쓰면서도 했는데, 제가 잘못된 개념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거대서사에 대해 논하려고 했다기보단, 래퍼들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서사는 주제나 내러티브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저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바에 대해서는 내일 시간이 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견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간단하게 제가 원래 표현하려고 했던 바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전달하려고 한 것은 래퍼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힙합 음악이 시대적 저항 정신에서 출발한 음악이 아닌 하우스 장르의 직관적인 사운드에서 출발한 음악이라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서 힙합이 출발한 것 또한 서태지를 비롯한 여러 90년대 말의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음악에 일종의 감초 역할로 첨가한 사운드를 통해 댄스 음악과 같은 경로로 확산된 것이라는 사실은 저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오멘오맨님께서도 말씀하셨듯 서태지가 원래 의도한 바에 비해 더 큰 사회적 반향, 즉 파급효과가 발생하였고 때마침 피타입과 같은 초기 힙합 아티스트들이 힙합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그러한 정체성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한국 힙합이 초기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맥락에서, 힙합 아티스트들의 표현 방식은 실제로는 같은 '규모'의 서사(오멘오맨님의 말씀대로 미시서사에 보다 치중된)를 다루고 있음에도, 당시와 지금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아티스트들의 가사 작법에서는 래퍼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일종의 영사기처럼 활용한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아티스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래퍼로서의 자신을 분리하여 래퍼, 또는 뮤지션으로서의 '나'를 언급하는 것을 일종의 서사적 장치나 캐릭터성으로 삼았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개인의 경험을 말하는 래퍼들의 가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더 큰 맥락을 느끼고 '동조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사적 관점에서는 오멘오맨님의 말씀대로 엄연히 미시서사에 해당하는 내용이 마치 모두가 함께 겪는 일처럼 들릴 수 있었던 것이죠. 표현이 조금 주관적이고 횡설수설한데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면 현재 래퍼들의 가사에 청자들이 보이는 공감은 동조적이라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래퍼에게 투사하여 생각한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예시로 든 <독립음악>이나 쿤디판다의 두 장의 정규 작업물 등에서도 화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개인적인 관점에 비추어 내밀하게 파고든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러한 앨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 역시 청자 개인의 경험과 곡을 연결지어 공감한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기억합니다.
물론, 저는 과거 래퍼들이 작업물을 발표했을 당시의 대중의 반응이 어땠는지 직접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저의 주관적이고 좁은 범위의 시야에 기인한 착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은 다른 엘이 회원분들께서도 함께 의견을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기조의 차이를 일본 애니메이션에 비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저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므로 제가 본 것들, 최근의 메이저 작품들에만 비유하자면), 과거 힙합의 곡들은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 <썸머워즈>나 <늑대아이>처럼 '분명히 래퍼가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같은데 어투 때문에 되게 큰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느낌이었다면 요즈음의 힙합은 여러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처럼 래퍼가 자기 주변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관점 또한 철저히 화자 중심적이라서 미시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저의 댓글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댓글을 쓰면서도 본문의 제 주장에 여러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당장 2008년에 발매된 최고의 명반인 버벌진트의 <누명>만 하더라도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이 판에 혁명을 불러오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라... 확실히 말씀을 듣고 되짚어 보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한 '내 이야기를 큰 이야기처럼 풀기' 방식이 한국 힙합의 주요한 기조라고 말하기도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센스의 에넥도트도 그렇구요...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재고할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엔터좀쳐주세요
'취향존중 파벌싸움' 이게 지금 시점에서 이미 나타난지 꽤 됐다 보는데, 단순 장르의 파편화 이전에 미시 서사의 도래가 시발점이 된 게 맞는거 같네요.
양질의 글 잘 읽었습니다!
글도 댓글도 읽다보니 생각해볼 지점이 많이 생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질의 글과 양질의 댓글 추
캬 오랜만에 좋은글 하나 보고 개추누르고갑니다
한국에 힙합이 처음 들어온게 폭력적인(갱스터) 음악의 형태로 들어온게 아니라 뉴잭스윙 류의 세련된 음악 형태로 들어왔구요. 그후 마스터플랜을 통해서 컨셔스ㅡ힙합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죠. 그래서 힙합은 저항의 음악이라는 한국만의 개념이 장착되는 계기가 됩니다. 예를들어 가리온(한국식 네이티브 텅, 누비아), 주석(라킴),돕보이즈(후드랩.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후드개념으로 나온 첫번째 뮤지션) 등등.. 사실 이때는 리스너들이 가사를 상당히 들여다보는 시점에다가 한국식 라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시절이라 어줍잖은 가사는 조롱의 대상 (대표적인게 맥작. 재미교포로 치카노 랩 컨셉으로 나왔다가 가사가 학교 급식문제 ㅋㅋ 이런거였습니다. 데뷔와 동시에 조롱 폭격을 맞고 사장)이 될 정도였는데 요새는 가사,스킬보다는 곡 자체의 분위기로 승부하는 시대니 씬 진입장벽이 낮아진 부분도 있겠죠.
네, 저도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 힙합의 '대중적 이미지'가 한국 힙합의 '본질'과 무관히 저항과 사회비판의 정신을 담은 음악이라는 편견이 형성된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와 래퍼들의 가사 작법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철학적 개념의 사용이 잘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첨언 정말 감사합니다.
퇴보의 기준이
질적 퇴보냐, 외적 이미지냐, 돈이냐에 따라 갈리는데
사실 예전보다 1세대 래퍼 시절보다 요즘 래퍼들이 전체적으로 돈도 잘벌고 질적으로 평균치도 올라갔음
근데 질적으로 하락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건 그냥
그 사람들이 원하는 힙합이랑 지금 래퍼들이 주류로 하는 힙합이 맞지 않아서 그럼
17년 지난 앨범하고 9년 지난 앨범, 5년 지난 앨범
누명 에넥도트 킁 이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나잇대별로, 취향별로 너무 갈림 ㅋㅋ 요즘 주류는 또 킁하고 또 멀어진 또 다른 무언가임. 드릴도 저문 느낌이고
지금 당장 사라지는 레이블이 많고 사라지는 래퍼들이 많은건 그냥 쇼미로 인한 거품이 걷어지는거지 퇴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봄..
엔터테인먼트쪽이 될때 바짝 벌고 쫙 빠지는건 어딜가든 매한가지라 ㅋㅋ
거품 다 걷어지고 계속 꾸준히 할거 잘 하는 래퍼들 많아지고 그들만의 힙합 문화 잘 형성하면 나중에 또 잘되는 시기가 오겠죠 유행은 돌고 도니까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정상화에 가깝지 퇴보는 아니라고봄
글 잘봤습니다
이거 팟캐스트도 님 본문이랑 관련되게있어서 함 들어보시길
https://www.podbbang.com/channels/16848/episodes/24943842?ucode=L-krEkkvhB
초반부 잠깐 읽었는데 좋군요 나중에 댓글과 같이 천천이 읽겠습니당
위에서 다른분이 잘 지적해주시긴 했지만 어차피 쉽게 가는 인터넷 글인데 적확하지 않게 용어를 썼어도 속뜻을 짐작하는데 무리가 없다면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씬 전체(각 서브장르의 창작자만 아우르는게 아니라 감상자들도 포함되는 진짜 전체)가 참여하는 명시적 공통 아젠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데에 공감합니다. 따라서 그 공통 아젠다에 대한 메타토론과 설왕설래에서 오는 재미가 많이 사라진것같네요. 대신 파편화된 서브장르 안에서의 단발적 쾌감달성과 소소한 사운드 실험이 지금 씬에서 즐거움의 단위(unit)가 된것같습니다. 뭐 이대로도 좋죠. 오히려 지금와서 공통아젠다 토론하고 놀려면 좀 촌스럽게 느껴질거기도 하구요 ㅋㅋ
그러고보면 대형 스타의 세대교체가 힙합뿐 아니라 많은 음악장르, 그리고 영화계 문학계 패션계에서까지도 잘 안이뤄지고있는 이유도 지금 문화계 전반에서 ‘모두’가 명시적으로 참여하는 공통아젠다가 소강상태고, 다들 각자의 서브섹터 안에서 놀고있기때문인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경제때문일까요?
근데 제생각엔 그렇다고 공통아젠다의 진행 자체가 종결된건 아닌것같아요. 대신 각 섹터의 담벼락 안에서 각자 놀다보니 여러 담벼락들을 아우르는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어려운 상태라서, 공통아젠다의 진행상황을 종합적으로 지각할 시야를 가질 수 없을뿐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면 플레이어/리스너가 명시적 의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하나의 장르가 가진 거시적 흐름은 마치 비인격적인 기후현상처럼 특정 방향을 향해 묵묵히 쉬지않고 진행된다는점에서, 거시적 흐름은 언제나 존재함.)
즉 공통아젠다에 사람들이 오직 간접적이고 귀납적으로만 참여중이어서 마치 당장은 공통아젠다가 없는것처럼 착각되고있는것같아요. 그게 퇴보, 포화, 정체 등의 착시를 만들수도 있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2024년 8월 현재에는 다들 자기 취향섹터 안에서만 즐기느라 그 즐김이 씬 전체에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오는지 미처 모르고 ‘내가 즐기는 섹터 내에는 우리만의 작은 스타들은 있지만 더이상 씬의 전체 흐름에 응답하는 대형스타는 없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2034년쯤에 귀납적으로 2024-2034의 장르흐름을 되돌아보면 ’아 사실 그때 그놈이 그 시대의 공통아젠다의 흐름을 자기도 모르게 결과적으로 견인하고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귀납적 슈퍼스타]였네?‘ 하고 뒤늦게 캐치될것같기도 합니다.
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통아젠다의 진행 자체가 종결된건 아닌것같아요. 대신 각 섹터의 담벼락 안에서 각자 놀다보니 여러 담벼락들을 아우르는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어려운 상태라서, ...>가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래퍼들이 공통아젠다를 다루는 화법 또한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함께 달라졌기 때문에, 댓글 아랫부분의 귀납적 슈퍼스타를 알아채는 속도와 공감의 페이스가 조금씩 뒤처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페이스 이탈은 점차 곳곳에서 증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 이탈이 나쁜 건 아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입장을 다시금 자유롭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이해하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거대서사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조금 모호하게 느껴지는 한데 예전이라고 거대담론을 다루는 MC가 많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래퍼들은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해왔죠.
글 내용으로 봐서 작법이 더 다양해졌고 취사선택이 가능해졌다라는 부분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예전에도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가사로 벌스를 채우는 래퍼들은 많았지만 에픽, 다듀, 리쌍, 버벌진트의 대중적 히트곡들은 대중적 멜로디에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쉬운 가사였던 것이 성공의 요인 중 하나일 수도 있었겠죠.
물론 그렇지 않은 히트곡들도 꽤 많지만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감은 내가 동일한 경험이 있을 때나 혹은 동일한 경험이 없더라도 화자의 스토리텔링에 이입했을 때 화자의 논리에 설득력이 있을 때 그리고 화자의 서사에 대한 이해가 이뤄졌을 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과 달리 현재 힙합팬들이 공감에 초점을 두고 예전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빈지노,씨잼,비프리는 <노비츠키>,<킁>,<프더비>라는 작품에서 불친절한 개인적 언어로 힙합팬들의 인정을 받았고 성공의 요인이 물론 이 작품들에서도 공감적 요소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게 메인이라기 보다는 전체적인 작품의 완성도와 무드를 본게 맞지 않나 생각됩니다.
다음절 라이밍, 속사포랩, 발라드랩, 펀치라인, 스웨거, 플렉스 등등이 힙합장르안에서 뜨거운 이슈였던 것은 맞지만 이런 것들이 거대서사라고 표현될 수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친다면 이런 현안 이슈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걸 다루는 래퍼도 있고 아닌 래퍼도 있겠죠.
그런 이슈에 대해서 랩하는 것이 거대서사를 다루는 래퍼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겠네요.
힙합씬 한정 이슈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 것과 사회적 현안에서의 소신을 밝히는 것은 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제리케이의 시국선언, 마왕pt2 등의 폴리티컬 랩은 공감 여부를 떠나서 리스크를 안고 거대담론을 다룬 것 아닌가 생각해요.
특정작품이 큰 영향을 미쳐서 유행을 잠깐 리드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케바케 사바사라고 봐야할 것 같네요.
장르 특성상 워낙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공존해왔기 때문에.
댓글 남겨주신 분들의 의견 모두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과 조언 모두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글 감사합니다!
평화로운 국계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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