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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힙합에 있어 2010년대 중후반은 당시 10대였던 유망주들이 도약의 준비를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엠넷이 깔아준 '고등래퍼'라는 판은 이들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고, 애쉬 아일랜드, 릴 타치, 이영지 등 미래의 슈퍼스타들이 이를 기반으로 발돋움하였다. 물론 군계일학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고등래퍼의 첫 우승자인 영비(現 양홍원)다. 쇼미더머니에서의 활약으로 먼저 주목받았던 그는 타격감 넘치는 랩 스킬과 깔끔한 리리시즘으로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는 스윙스와의 인디고 뮤직 계약으로도 이어졌다. 물론 과거의 부정적 행적이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학폭 래퍼'의 딱지, 이로 인한 대중의 주홍 글씨는 쉽사리 지우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는 인디고 뮤직에서의 본격적인 활동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영비는 상술된 성공과 변화, 그리고 이에 대한 여러 관점에서 오는 감정을 자신의 첫 정규인 <Stranger>에 고루 녹여내려 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갓 성인이 된 아티스트의 음악적 창작욕이 자신의 네거티비티와 마주하는 순간에서 피어오른 이상적 화학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SOkoNYUN>(2018)에서부터 합을 맞추기 시작한 판다 곰(Panda Gomm)은 본작에 이르러 영비의 확고한 페르소나로 거듭났다. 트랩과 붐뱁을 오가며 강렬한 타격감을 부각시키는 "Next?"라거나 락적인 샘플을 기반으로 폭주하는 "B-Site"같은 후반의 타이트한 부분도 훌륭하지만, 특히 "ROSE", "밤에"로 대표되는 중반의 이모(emo)한 파트에서 판다 곰과 방자의 공간감과 절제미가 빛을 발한다. 텐타시온(XXXTENTACION)을 위시한 이모 랩 아티스트들의 영향으로 갈수록 영비의 퍼포먼스가 멜로딕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판다 곰의 미니멀한 감각과 멜로디 메이킹은 그의 변화에 있어 지대한 조력이 되어주었다. 다만, 영비가 그간의 성공을 기반으로 호쾌하게 치고 나가는 전반부는 또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퓨처 베이스에 기반한 짙은 예리함("서울"), 혹은 딥 하우스에 토대를 둔 요란한 베이스("Business class") 등의 전자적인 접근에는 MISU, Blish 등 조금은 낯선 이름의 프로듀서들의 공로가 실로 컸다. 이 위로 전개되는, 이전과 비슷한 듯 사뭇 다른 정석적이고 맹렬한 퍼포먼스 또한 앨범의 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반 흐름의 산만함을 지적할 수도 있겠고, 후반부에 드러나는 급격한 분노에 의문 부호를 가질 수도 있겠다. 다만 신경정신과를 오갈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영비의 마음 상태의 발로라는 관점에서 본 다면, 그 사이에 자신만의 선과 친절이 내재되어 있다는 영비의 설명이 자못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오히려 이 혼란함을 호응하기 쉬운 형태로 앨범 전반에 녹여낸 그의 감각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영비의 내면에 집중하는 앨범인 만큼 앨범의 게스트들도 그의 주변인들이 큰 줄기를 이룬다. 특히 210과 쿠지(kuzi)는 같은 딕키즈 크루의 동료이기도 하지만, 앨범 작업 내내 영비와 자주 소통하며 '흑과 백' 등으로 대표되는 앨범의 키워드를 형성하기도 하고, 같이 레퍼런스들을 디깅하며 이를 담아낼 음악적 하드웨어를 빚어내는 등 앨범의 제작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는 전반부의 요란하고 전자적인 부분에 IMJMWDP 동료들이 여럿 참여한 것이 흥미롭다. "junky."의 기묘한 퍼커션을 타고 흐르는 윤훼이의 멜로딕한 플로우라거나, 언제나처럼 'Business class'의 매서운 베이스를 찢어발기는 저스디스의 퍼포먼스도 훌륭하지만, 특히 씨잼의 오토튠 운용과 플로우 디자인은 후일 <킁>(2019)에서 보여줄 한국어 랩 구조의 혁신을 암시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 의의가 중요하다. 하지만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연인과의 추억을 그리는 "ROSE"는 그 추억과 관련된 아티스트인 홈보이(Homeboy)까지 초빙하여 특별히 공을 들였으며, 멜로디 랩의 신성이었던 스키니 브라운까지 투입하여 당시 한국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이모 랩의 하이 엔드를 보여주었다. 자칫 산만해질 수도 있는 앨범의 분위기를 가다듬기 위해서인지 앨범의 초입과 후미에 각각 더 콰이엇, 그리고 스윙스, 도끼 등 베테랑을 포진시킨 것도 상당히 영리한 대목이었다. 특히 앨범 전체의 모티프를 제시하는 "Gray"의 쓸쓸함을 극대화시키는 더 콰이엇의 담담함이 돋보였다.
영비는 본명인 양홍원으로 활동하게 된 이후에도 이 앨범에서 보여준 감정적인 부분을 더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불러"(2021) 등에서 이미 원숙한 형태를 갖추었던 양홍원의 싱잉은 <오보에>(2022)에서 비로소 만개하게 된다. 물론 초반에 다소 호오가 갈렸던 것도 사실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젊은 아티스트의 재능은 더더욱 재평가 받고 있다. 이러한 재평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이 앨범 내내 드러나는 진정성과 솔직함을 예시로 들고 싶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악업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에 대해 반성하고 수용하려 하면서도, 이에 대해 지나치게 선을 넘으려 하면 이내 날카로워지기도 하는 인간적인 면모 또한 보여준다. 성공 이후 겪은 혼란과 주변인에 대한 미안함 등 앨범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은 <Stranger>만의 개성으로 고스란히 흘러간다. 영비는 이러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그 사이의 친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과도 기꺼이 섞이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이 이 이방인으로 하여금 세상과 섞이게끔 한다. 어쩌면 이러한, 모난 구석이 있는 이들조차도 세상으로 나아가고 소통하게끔 하는 것이 음악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Best Track: Gray (Feat. The Quiett), ROSE (Feat. Skinny Brown, Homeboy), Next? (Feat. 스윙스, Dok2), REVENGE (Feat. 210, kuzi)
양홍원의 다재다능함이 빛을 발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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