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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벌진트는 지금의 한국 힙합을 정립하는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아티스트 중 하나다. '1219 Epiphany'(2008)에서 스스로 말했던 것 처럼 현재 한국 힙합에 쓰이는 운율의 구체화 방법은 그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운드적으로도 기존의 한국 힙합에 만연하던 샘플링을 최소화한 채, 시퀸싱만으로도 높은 수준의 사운드를 완성시켜 또한 혁신을 이루어 냈다. 또 한편으로는, 버벌진트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기량만큼이나 음악 외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외고-서울대 로스쿨 로 이어지는 엘리트 급 학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진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의 거만함은 그를 게시판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한국 힙합 사상 최대의 혁신가이자 풍운아였던 그가 어느 날, 예상 외로 감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쾌한 면으로 가득 채워진 앨범을 가져왔을 때 리스너들이 받았을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중성의 한 켠에는, 다양한 사운드적 시도와 언제나 그렇듯 진솔한 버벌진트의 생각이 담겨 있었고, 그렇게 'Go Easy'는 말 그대로 인간 '김진태'에 대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게끔 하는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버벌진트는 '힙합음반을 만들겠다는 생각 대신 좋은 송 라이팅을 중심으로 두고 작업했던 거 같다'던 그의 인터뷰 대로, 이 앨범의 사운드에 힙합 외에도 다양한 장르를 도입했다. 슬로우 잼('우아한 년 2012')과 투 스텝('Luv Songz'), PB 알앤비('어베일러블')와 네오 소울('깨알같아')을 오가는 알앤비는 물론, 레게('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훵크('우리 존재 화이팅'), 심지어 어쿠스틱 팝('약속해 약속해 2012')과 모던 록('원숭이띠 미혼남', '좋아보여') 등 전체적인 사운드 톤은 지금까지의 버벌진트의 정규 작 중 가장 가볍다. 'Favorite'(2007)에서 선보인 바 있는 팝에 가까운 편곡이 보다 장르적으로 발전된 듯한 느낌이다. 재즈 힙합('긍정의 힘')과 칩멍크 소울('Want You Back'), 그리고 쥬라식 5 류의 얼터네티브 힙합('My Audi') 등 정석 적인 힙합도 이 앨범의 가벼운 톤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사운드의 변화에 맞춰 그 안에 담긴 내용에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한국 힙합 씬에 대한 견해와 비판('무명'(2007), '누명'(2008)), 죽음('The Good Die Young'(2009)) 등 이전에 다루었던 무거운 주제나 거대 담론 대신에 연애담, 자신의 자가용에 대한 생각, 하룻 동안의 일들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 등 보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자신의 이야기가 앨범에 가득 차 있다. 특히 곳곳에 있는 인터넷 밈들과 예능, 또 대중가요에 대한 언급이 청자로 하여금 '피식' 하게 만드는 인간적인 순간을 형성한다. 힙합이라는 방법론 안에서 보다 편안한 자세로 곡을 풀어가려 한 흔적이 앨범 곳곳에서 엿보인다.
장르적 확장에 맞춰서 피처링 진에서 보컬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오버클래스 동료인 조현아를 비롯해 쿤타와 태완 같은 흑인 음악의 영역에 있는 아티스트들은 물론, 레이디 제인이나 검정치마 같은 흑인 음악에서 조금 비껴가 있는 아티스트들의 참여 덕에 앨범의 색이 보다 화려해 졌다. 이 중에서도 어장관리에 대한 분노와 허무함이라는 감정을 허스키한 톤에 제대로 실어낸 쿤타와, 특유의 촉촉한 톤에서 슬픔과 미련을 드러낸 검정치마의 보컬이 단연 빛난다. 그렇다고 '힙합'이라는 자신의 본령을 저버리지 않은 버벌진트는 래퍼들 과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역시 오버클래스 크루 소속인 산이와 노도, 당시 같은 소속사 후배였던 블락비의 지코, 한창 주가가 올라가던 신예 오케이션, 막 일리네어 레코즈를 세우고 확장 중이던 더 콰이엇 등 다양한 참여진 중에서도 특히 지코, 산이, 오케이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만 해도 아직 무뎌지지 않은 산이의 능글맞은 그루브, 비상을 준비하던 지코의 재기 발랄함, 오케이션의 감각적인 절제는 후일 이들이 이름을 떨치게 되는 이유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 될 것이다.
대중성에 매몰되어 작품성을 상실한 다른 아티스트들의 여러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Go Easy'가 거둔 음악적 성과는 가히 놀라운 것이다. 어떻게 이런 성과가 가능했을까? '결정에 있어서 저는 저 자체가 일단 되게 편안한 상태였던 거 같아요. (...) 그냥 음악을 떠나서 김진태 자체가 약간 더 세상이랑 더 편안해 져서 그런 거 같아요.'라는 버벌진트의 말에 그 해답이 있을 듯하다. 이 앨범을 작업하면서 버벌진트는 대중성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기존의 팬들을 위해 억지로 '누명' 때와 같은 시니컬한 색을 띄지도 않았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곡 안에 편안히 자신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니, 대중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장르의 옷을 입던 간에, 랩을 뱉건 노래를 부르건 프로듀싱을 하건 간에 그 안의 내용물은 '김진태' 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국 결론은 어떤 시도를 하건,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명확해진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앨범은 우리가 '힙합'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과 거리가 있을지 언정, 여전히 힙합적이고 버벌진트스러운 앨범이다.
Best Track: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Feat. Koonta), 우아한년 2012 (Feat. San-E & Okasian), My Audi (Feat. The Qu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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