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6때였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오게된 나는 강한아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다리든, 배든 매일 맞으며, 뜻도 모르던 모욕적인 말들을 들으며, 나는 차츰 폭력당하는 입장에 익숙해졌다. 지금도 몇가지 기억나는 폭력의 단면. 유달리 발길질이 아팠던 어느 하루 나는 500원 동전하나를 제발 때리지말아달라며 건넸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나는것은 그 이후로 돈을 계속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돈을 받은게 더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이정도 수위의 폭력은 10년간 나를 휘감고 도는 정신적 고통의 근원이었다. 결국 나는 정신병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약이 없으면 잠을 누릴수 없고, 이어폰이 없으면 햇빛을 누릴수없는 바퀴벌레처럼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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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플렉은 소시민이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녹록치않고 등에 뼈가 훤히 보일정도의 신체적 약자이다. 불량청소년들에게, 길거리 양아치들에게 잘못걸려 린치당하는 일은 일상이다. 발길질 몇번에 넘어져 사타구니를 손으로 막은채 애처롭게 쓰러져있는 모습은 보기 불쾌할 정도로 내겐 익숙한 장면이었다. 반복되는 폭력, 방치하는 사회, 남겨진 피해자. 끝없이 반복되는 고리에서 아서의 정신병 및 폭력에 대한 내적 분노가 점점 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영화에서는 열차에서 권총을 꺼낸 그 순간, 마침내 아서의 비겁하고 비열한 세상에 대한 반란이 시작된다.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그 장면을보며 소리없이 울었다. 나도 저럴 용기가 더 컸다면... 거기서 내 폭력의 반복이 끝났을까?라는 생각이 영화 내내들었다. 내게 열차 씬은 충분히 옹호가능한 폭력이었다.
영화가 진행되어가며 아서는 살인에 대해 무감각해짐에 따라 그가 저지르는 살인들의 동기와 과정이 다수관객이 옹호가능한 수준에서 이입불가능한 개인적측면으로 확장된다. 종국에 가서 많은 시민들이 보는 텔레비전 코미디쇼 프로그램에서 권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다수의 관객에게 충격과 전율을 선사한다. 극중 최후반부에 가서는 '조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나이가 개인적으로 지닌 사이코패스적 성향과 수없이 그에게 행해진 폭력을 동기로하는 복수의식을 기반으로 한 살인행각이 그를 비웃은 미디어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며 군중들을 아노미로 이끌게 되고 그는 아노미 속에서 영웅으로 미화되게 된다. 조커(2019)는 옹호가능한 복수로부터의 카타르시스와 옹호불가능한 폭력으로부터의 불쾌함을 호아킨 피닉스의 놀라운 메소드 연기로 이끌어가는 영화이다.
한줄평 : 옹호가능한 복수로부터의 카타르시스와 옹호불가능한 폭력으로부터의 불쾌함




일반적인 영화에서 나오는 빌런이 아니라서
어린 친구들에게 악영향을 줄거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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