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심리학>
예술이 있으려면, 어떤 미적 행위와 미적 인식이 있으려면 특정한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 : 즉 도취라는 것이.
도취는 우선 기관 전체의 흥분을 고조시켜야만 한다 : 그러기 전에는 예술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기원을 갖는 온갖 종류의 도취는 모두 예술을 발생시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함의 느낌이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물에게 나누어주고, 우리로부터 받기를 사물에게 강요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만사를 풍요롭게 만든다 : 무엇을 보고 무엇을 원하든 사람들은 그것을 부풀려서 보고 절실한 것으로 보며 강하고 힘이 넘쳐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물이 그의 힘을 다시 반영해낼 때까지 사물을 변모시킨다-- 사물이 자기의 완전함을 반영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완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술인 것이다.
그의 원래 모습이 아닌 것 전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기쁨이 된다 ; 예술에서 인간은 자신을 완전성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 이와는 반대되는 상태인 본능의 특수한 반예술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은 모든 사물을 피폐하게 만들고, 희석시키며, 소모적으로 만드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반-예술가들, 생명에 굶주린 자들은 역사상 아주 많이 있었다 : 필연적으로 사물을 취하고 쇠약하게 만들며 메마르게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자들이, 이를테면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그런 경우이다 : 예술가이면서 그리스도교인 경우는 전혀 없다.....
순진하게 라파엘이나 19세기의 몇몇 유사 요법과도 같은 그리스도교인을 예를 들면서 내게 반박하지 말라 : 라파엘은 긍정의 말을 했고, 그의 실천은 긍정이었으며, 그래서 라파엘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것이다.....
예술 안의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항상 예술 안에 있는 도덕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이는 것에 맞서는 싸움이다.
도덕을 설교하고 인간을 개선하려는 목적이 예술에서 배제되어버리면, 예술의 목적, 목표, 의미가 없고 단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예술은 삶을 향하고 있다. 삶이 소망할 만한 것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다 :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술은 삶의 수없이 많은 추한 것, 강한 것, 의문시되는 것도 역시 등장시킨다. 이를 체념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염세주의자의 ‘사악한 시선’에 불과하다.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것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ref.
우상의 황혼, 책세상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에서는 니체는 '예술'에 관해서 많이 언급했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니체에게 예술이란 삶과 아주 밀착되어 있으며,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삶에 관한 혹은 도덕에 관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예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건 바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니체가 한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예술가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너의 삶을 고취시키는, 혹은 보는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예술을 하라일까요?
저는 단언컨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석에 의하면 니체의 말은 너무나 협소한 대상을 향한 부분적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예술을 하지 않는 혹은 저처럼 음악, 미술 등에 관심이 '전무'한 사람들한테는 큰 의미없는 얘기에 불과하죠.
그래서 제가 얘기했던 것이 '예술적인 것'이었습니다. 굳이 예술이 미술, 음악 등에 한정될 필요가 있을까? 예술가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예술이란 분과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예술가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그정도로 전 반-예술적이진 않습니다.
니체가 '병'을 단지 생리학적인 것에 국한 시키지 않듯. '예술' 역시 그러하단 겁니다. 뭐 세미나 땐 제가 깝쳤습니다. 과잉해석했네요. 이랬지만 사실 니체가 드는
반-예술가들은 그리스도교인이며, 파스칼입니다. 뭐 그리스도교인 예술가, 문학자로서 파스칼을 지칭한다고 하면 뭐 할말은 없지만요-_-
여튼 그렇다면 예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혹은 예술가 아닌 삶 속에서 예술적인 것을 구현하는 게 뭐냐? 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예술이란 것이 "사물이 자기의 완전함을 반영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완전성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그 예술가의 손 안에 혹은 작업의 대상에
종이가 악보가, 노트북만 해당할 것같진 않습니다. 어설프고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자기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완전성"을 추구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이하는 것. 아마도 이런게 예술, 혹은 예술적인 삶(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니체 역시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이구요.
예술이란 오히려 니체가 말한 "섭생법"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니체였네요...
혹은, 이 모든 방식들을 다 예술이나 예술적인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예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혹은 예술가 아닌 삶 속에서 예술적인 것을 구현하는 건 대체 뭐냐?" 하는, 이런 질문들 말이죠.
사실 니체가 말하는 예술 그리고 이 예술을 행위하는 예술가들은 고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그래서 성스럽기조차 한 어떤 것들, 이를테면 일련의 도덕적, 법적 규칙, 물자체 혹은 신적 관념 따위가 아니라,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대지 그 약동하고 생성하는 땅의 충만한 '삶'에 그 목표나 목적을 두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적 예술이라는 건 분명 -최소한 외견상으로는- 형용모순이겠죠.
그리스도교인들은 내세적 삶의 모방 혹은 가상으로서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삶을 살아내니까요.
가상을 실재로서 살아내는, 아니, 더 나아가 가상과 실재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혹은, 십분 양보해서 가상만이 허락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가상을 아모르 파티(운명애)로서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낭비스럽게 쏟아내는 니체적 예술가들, 이네들은 분명 그리스도교인들과 구별될 수밖에 없죠.(사실 이 구별점은 '그리스도'가 니체적 예술가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해요. 그 또한 군중들이 엮어낸 가상을 실재로서 받아들이고 황홀한 고통의 십자가를 걸머졌던 예술가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예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답니다.
물론, 니체적 사유에서는 꽤 비껴나가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꼭 그의 사유를 졸래졸래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자기(니체)를 따르려거든 자신(나)을 따라가라고 했던, 또 다른 니체의 언명이 고귀하게 읽히는 까닭인지라..
다시 정리를 하자면
<자신의 삶을 고취시키는 예술>이란 표현은 글 내용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도취>가 <예술>을 발생시키는 힘으로 말하고 있고,
이런 도취는 힘이 상승하고 충만한 느낌으로
이를 주변에 퍼뜨린다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충만함으로 만사를 풍요롭게 만들고,
주변을 변모시키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오늘날 주변의 많은 예술가들이 기본적으로 그것에 미쳐서
푹 빠지고 하는 것 없이 덤덤하게 예술을 행하진 않죠
그러나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싫어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예술이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이면 안되고
이데아든 목적론이든에 봉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본 것이죠.
단지 예술을 위한 예술은 안되고, 이데아에 봉사하든, 신에 봉사하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든, 어떤 국가를 위해 봉사하든 해야 한다는 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보는 사람을 고취시키는 예술을 행하는 자> VS <단지 관람자로서만 접근가능한 대중>
이런 구도로 나눠서 글 내용에서 말한 것 같진 않습니다
삶을 향한 예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니체 역시 그걸 지향했다고 전 생각하고,
그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에서 볼 때
그리 이해됩니다.
<기댐의 실존>이나 <타력구원>이 아닌
삶이 비극이고 고통임에도
그런 덧없는 존재라도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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