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10/16
애벌렌치스의 신보 <No Bad Memories>에는 30초 안팎의 간주곡들이 쿠키 위 초코칩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대량의 광고를 박아 넣은 유튜브 영상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며 인내심을 시험받다가 끝내 스킵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솔직히 이런 곡들은 앨범의 서사에 의미를 더해주기보다는, 토마스 쿤이 이야기했던 '아이디어처럼 보이기 위한 아이디어'에 가까운 것 같다. 이들은 언제나 전체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떼내기보다 본래 원자화된 파편들을 끼워 맞추는 일에 집착했다. <No Bad Memories>의 콘셉트는 유년 시절의 아득한 기억을 뒤집어보는 것으로써, 이들은 오래된 기업 광고, 징글, 그 세대라면 알 수도 있는 효과음 등을 파헤쳐 한층 더 따스하고 흥겨운 무언가로 재탄생시킨다. "어릴 적 이미지와 징글 그리고 그 심장부에 있는 사운드 소스를 가져와 우리만의 유쾌한 팝으로 뒤집어놓았습니다." 나는 어쩌면 허울뿐인 이 발상이 이 앨범, 넘어서 애벌렌치스라는 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스킵을 눌러 넘어가도 상관없을 테지만,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직감, 그러니까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을 앞두고 영화관을 나서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 때문에 단 한 곡도 스킵할 수 없었다. 당신이라면 아이팟과 플로피 디스크가 어깨동무를 하는 앨범에서 료지 이케다가 참여한 Unicorn Quest™라는 제목의 곡을 스킵할 수 있겠는가?
아쉽게도 <No Bad Memories>를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굉장하게 여겨지는 구간이 있는 반면 다소 뻔하게 느껴지는 구석도 많으며 곡들 간에도 편차가 있다. 예를 들어 I Give Everything I Have 2 U나 Can't Get Over Losing You처럼 모타운의 선샤인 소울 넘버로 루프를 만들고 드럼 패턴으로 템포에 변주를 주는 곡들은 반가우면서도 식상하다. 제이미 스미스가 프로듀싱한 Every Single Weekend의 하우스 비트 또한 시작되자마자 비슷한 타입의 곡들이 떠오르며 필연성을 안겨 주지 못한다. Every Single Weekend 뮤직비디오에서 풍자의 오브제로 활용되는 탄산음료 엘도라도처럼, 앨범 전체는 과포화된 미학과 광고 특유의 과장된 감성으로 리스너를 연거푸 쏘아댄다. 그럼에도 부단하게 변화하는 사운드의 흐름 속에서 어떤 것이 간택 받은 샘플이고 무엇이 오리지널 창작분인지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능력만큼은 변함이 없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앨범은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유튜브 영상이라기보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광고의 CM 송을 주워듣던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라이트하우스 패밀리의 High, 풀스 가든의 Lemon Tree, 엔니오 모리코네의 Il Mio Nome È Nessuno,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 앤디 윌리엄스의 Can't Take My Eyes Off You 등, 내게 바다 건너의 음악을 소개해 주던 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가 아니라 바보상자에서 흘러나오던 광고 음악이었다.
모듈러 레코드의 저작권 담당자들을 악몽 속으로 밀어 넣었던 <Since I Left You>는 하나의 감정을 완벽하게 응축시켰다. 뒷면에 날짜와 낙서가 적힌 빛바랜 필름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부산물이랄까. <No Bad Memories>는 방향성 면에서 <Since I Left You>를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문제는 시기다. 마음만 먹으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을 들을 수 있고, 하나의 곡을 무한히 리믹스한다 해도 용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대에 골동품 레코드 디거의 무작위 컬렉션이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올까? 이처럼 노스탤지어 산업에 위기가 닥친 가운데, Oneohtrix Point Never로 알려진 다니엘 로퍼틴은 작년 앨범 <Tranquilizer>에서 밀레니엄 전환기 샘플 팩과 꿈결 같은 톤의 신스를 활용해 그 기기묘묘한 소리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충격적일 정도로 이탈시켜놓았다. <Since I Left You>의 애벌렌치스와 <Tranquilizer>의 다니엘은 똑같은 태도로 음악을 대한다. 과거는 단지 쓸모 있는 식재료일 뿐, 이들은 샘플의 역사적 영향력, 우상숭배, 흑백인지, 저급한지, 상대가 누구든 간에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No Bad Memories>의 애벌렌치스는 다르다. Together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의인화된 아이팟과 플로피 디스크가 손을 잡고 경쾌하게 행진한다. "나는 그 사진 속 사람이 될 수 없을 거야. 가장 사랑했던 모습의 내가 될 수 없을 거야." 아이팟과 플로피 디스크가 스마트폰을 대신하던 때를 기억하는가. 제일 탐스러운 곡들로 배열까지 생각하며 신중하게 추가했던 아이팟 플레이리스트와 디스크에 담긴 유치한 일기와 별거 아닌 문서들을 기억하는가.
자신들이 구축한 콘셉트를 충실히 관철한 덕택에 <No Bad Memories>는 한 곡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샘플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독특하고 비범한 그루브가 성장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앨범의 작은 조각들은 개별 곡보다는 연속된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천 개가 넘는 샘플을 묘기 부리듯 짜 맞춘 팀이 완벽함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나 내심 서운한 것도 사실이다. 이 앨범은 조금 유치하고, 과도하게 감상적이고, 차분하기보다 혼미할 때가 많으며, 대개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애벌렌치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의 음악에 이런 유희적인 성격과 올드 팝에 대한 애착이 없었더라면 지금만큼 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목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로비와 토니 그리고 앤디는 오래된 광고 음악과 컴퓨터 프로그램 부팅음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과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지 이해했으며, 그 잊혔던 소리들을 하나의 앨범으로 엮어 또 한 번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구워냈다.
"요새 아이들에게 우리 음악이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네요."라고 그들은 말한다. 나 역시 궁금하다. 젊은 시절 나의 감수성을 어루만져 주었던 아티스트가 요즘 세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팝 문화의 유구한 전통일 것이다. 당신에게 애벌렌치스는 어떤 의미인가? <Since I Left You>가 발매된 2000년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진 FABRICLIVE 시리즈와 포 텟, 제이미 스미스, 베리얼, 카리부, 비건 등의 등장을 지켜봤지만, 그 누구도 애벌렌치스만한 감흥을 전해주지는 못했다. 가장 좋아하는 두 장의 플런더포닉스 앨범 <Since I Left You>와 <Donuts>. 제이디는 자신의 바운더리, 즉 힙합, 흑인음악, 흑인문화가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트를 만들었고, <Donuts>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을 힙합과 흑인음악이라는 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로비와 토니에게 그 정도 사명감은 없을 듯하지만 두 거장 사이의 작은 공통점이 고유한 감흥을 빚어내는 것 같다. 애벌렌치스와 제이 딜라의 음악을 듣고 선택한 샘플을 살펴보면 그들이 직접 선별한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만의 음악과 나만의 세상을 상대방에게 넌지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나의 취향이 조금이나마 누군가에게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 살면서 수없이 느꼈을 그 자의식이 내 심정을 대변하듯 이들의 음악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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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다소 냉소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No Bad Memories'는 흡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완벽한 형태로 보존하기로 선택한 것은
채널을 돌릴 때마다 나오던 '광고 음악'이야.
실제 삶의 눈부신 순간 대신 말이지."
All The Time In The World에서 리버스 쿼모는 특유의 앳된 음성으로 노래하죠.
"우리에겐 세상 모든 시간이 있어. 우리에겐 넘쳐나는 시간이 있어."
'Since I Left You' 시대였다면 이 가사를
낙관론에 기댄 애벌렌치스식 슬로건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런데 열심히 엄지를 튕겨 가며 도파민을 충족하고 있는 이 순간에는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느껴지네요.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애벌렌치스의 음악에는 여전히 애벌렌치스만의 감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No Bad Memories'가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들어봤는데 너무 좋게 들었어요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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