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검색

리뷰

Back To 2006

deepurple2026.01.06 00:02조회 수 1289추천수 9댓글 4

Back to 2006

2006/02/07

Donuts by J Dilla

 

600x600bb.jpg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장인의 끈질긴 인내심일까. 혹은, 언젠가 중간 다리를 자유롭게 거니는 악동의 호방함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으레 혁신가라고 불리는 자들은 위 명제를 두루 통과하는 것만 같다. Igor Stravinsky, John Coltrane, Jimi Hendrix, Ennio Morricone... MF DOOM, 그리고 James Yancey. 일명 제이 딜라(J Dilla). 위 불세출의 천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득한 경지를 보여준다면 믿을 텐가. 그런데, 혁신의 출처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을 단순하게 비트는 과정이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둠의 빽빽한 홀로-라임이 청자에게 수많은 분석 거리를 제공할 때, 둠은 그저 라임을 비틀고 일상적으로 내뱉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딜라가 MPC로 삽입한 엇박자 드럼과 수없이 조각낸 샘플링이 수많은 이들의 연구 거리일 때, 딜라에게는 샘플링 기계를 악기로 사용하는 평범한 과정의 일환이었다면? 하나의 가정일지도 모르겠으나, 혁신가들의 천재성은 거창한 곳에서 비롯되기보다, 꽤 일상적이고 단순한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의외로 단순함에 비롯된 그들의 교보재를 한사코 뜯어보려는 충동에 이르고 만다. 이를 증명하듯이, 딜라가 거닐은 길은 수많은 청자에게 탐미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실제로 <Donuts>을 비롯한 그의 손을 거쳐 간 여러 작품이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현대의 프로듀서에게 귀감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나 역시도 딜라식 스윙을 탐미하고자 하는 충동을 막을 수는 없었달까.

<Donuts>은 근본적으로 제이 딜라가 다루고자 했던 음악 설계 방식을 초월한 기점이기도 하다. 특히나 샘플을 다루는 방식에서 음악 안에 다방면으로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 주요하다. 매 순간을 생생하고, 격렬하게. 어쩌면 루푸스 신장병으로 말조차도 할 수 없는 지경에 간 딜라에게는 음악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을 테다. 마치 음악에 사용된 모든 샘플들이 딜라에게는 전하고 싶었던 말을 옮겨다 놓은 식으로, 가령 샘플을 선별하는 방식에서도 음악에 상응하는 치밀한 면모가 드러난다.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을 체감하고는 시간을 멈추고자 하는 "Stop", 안녕이란 말을 의미심장하게 내포하곤 샘플 흐름을 길게 늘어뜨린 "Hi"와 "Bye"는 또 어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통제하려는 듯이, 수많은 샘플의 시간과 흐름을 조각내어 편집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딜라는 수많은 샘플들을 분절하고, 결련한다. 둠이 내뱉은 라임들이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듯이, 딜라가 다룬 샘플 역시 어디로든 이어지고 헤어질 수 있다. 결국 이들의 연결고리는 하나의 정해진 루프를 탈출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딜라의 음악이 탁월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시간대에 허를 찌르기 때문이다. 매 순간의 샘플이 청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착각 역시도 음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샘플의 근간을 형성하는 생동감은 딜라의 드럼이 조타수를 잡았을 테다. 딜라의 드럼이 특별한 이유는 의도적인 오류에서 비롯된다. 의도적으로 들어가는 킥 드럼 사운드를 흩뜨려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드럼을 연주하듯이, 오류라고 불릴만한 드럼 배치를 통해 생동감을 부여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즈의 라이브 섹션과 같은 드럼 흐름, 불완전함을 따라가려는 노력이 담긴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 딜라식 터치이자 그루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기막힌 점은 숱한 오류의 향연에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항상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으레, 수많은 프로듀서가 딜라의 흐름을 따라가려 노력할 때, 딜라는 비웃음이라도 짓듯이 아주 당연하게 라이브의 불완전함을 꿰매고는, 쉬이 제시간에 도착한다. 마치 '듣기에 좋으면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운드의 경직성을 최대한 탈피하기 위한 노력은 이로써 더욱 각별해진다. 음악의 불안정함이 주는 청각적 안정감이라니 재밌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딜라가 음악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크나큰 자신감마저 담겨 있지 않나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MPC 설명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 청년이 제시한 비전이 바로 그런 것이다. 아주 아닌 것도 아닌 게, "Don't Cry"에서 보여준 초반 40초 뒤의 샘플을 조각내고 드럼을 엮어내는 방식은 가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딜라 본인만이 가능한 포부에서 비롯된 곡처럼 느껴진다. The Escorts의 "I Can't Stand To See You Cry"를 잘게 조각내어 다시 붙여놓은 이음새는 치밀하기 그지없다. 또한, 한 가수(B.R. Gunna)의 샘플을 빌려 본인의 목소리로 대체하며 사이사이에 매듭짓는 드럼이 일품인 "Dilla Says Go"는 딜라의 전언을 상상하게끔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각고의 노력들이 단순하게 음악 하나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딜라가 바란 지향점도 아니었을 것이며, 앨범의 콘셉트와도 맞지 않은 이야기겠다. 삶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 이 열망 하나가 청자의 과녁을 적중한다. 녹록지 않은 개인의 삶과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적절히 포개어지고서는 탄생한 곡들이 모여 이룬 결실이 곧 <Donuts>다.

오늘날에도 딜라식 드럼 캐치와 샘플 활용에 생동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젠 유전적으로 각인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숱한 사람들이 연구한 딜라식 로파이 처리들이 Kaytranada, Flying Lotus 등에게 흡수되었고, 이어받은 아티스트들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하나의 향취가 곁들어지게 되었다. 히지만 이 방식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샘플의 향연과 딜라식 드럼 캐치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죽음 직전에 이르러 가장 밝게 타오른 표현의 열망이 아닐까 싶다. 그 미묘한 차이가 딜라만의 각별함을 완성한다. 수많은 레코드들이 가득한 방과, 죽음을 목도한 제이 딜라의 모습, 그럼에도 놓지 않은 MPC. 이 모든 게 융합되곤 삶으로서 드러난 작품이 <Donuts>이며, 이 재생 버튼을 누르면 납득 가능한 순간을 청자에게 제공할 뿐이다. 장난기 어린 트랙 배치나 모순적인 보컬 가사의 활용, 수많은 딜라의 상상력이 이윽고 딜라의 스펙트럼이 되며 널리 뻗어져 나간다. 종종 이 음반을 들을 때면, 딜라 특유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디트로이트 시내를 응급차로 달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빽빽이 모여있는 건물들의 디트로이트 시내, 경종을 울리는 시그니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입에 도넛을 문 딜라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Donuts>의 종점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 트랙에서 멈출 이유도 없다. 그 덕분에라도 하루 종일 루프식 노동 음악으로 틀어놓는 한 친구의 감상도 이해된다. 도넛의 생김새처럼 무한히 반복된다는 해석, 딜라의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해석, 죽음을 예견한 스완송의 해석 등.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여러 해석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감상하며 다양한 충동에 빠지곤 하는데, 결국은 앨범 커버의 딜라의 웃음을 포착한 장면처럼 실실 웃어넘기고 만다. 정답을 구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음악이 답해주겠지.


 

Next Maybe... 1976?

제 묘사가 완벽할 수는 없겠습니다.

처음에는 여기나 다른 비평 매체 리뷰글들을 눈팅용으로 보며 나도 저런 글을 언젠가는 써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입 겸 휘갈겼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혹, 다른 이들의 향기가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양식 같은 것을 참고하며 글을 작성한 부분도 있고요. (글 잘 쓰는 분들 부럽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저만의 향기가 나기를 응원하며, 시리즈를 이어나가 보려고요.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신고
댓글 4
  • 1.6 00:18

    오늘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을 조금 들었는데, 서두부터 나오니 괜스레 반갑네요. Donuts는 어떤 주체의 언어로 서술되어도 각자의 방식으로 매력적인 마성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딜라 본인조차 Donuts가 후대에 이토록 칭송을 받을지 예상을 못했을 것 같은데, 위대한 예술이 의도해서 탄생하는 경우는 새삼 참 드문 것 같네요.

  • deepurple글쓴이
    1.6 00:38
    @온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역시도 단순한 과정에서 창작된 경우가 많았다고 해서 넣어봤습니다. Donuts 역시도 확실한 의도보다도 표현의 욕구가 우선되어서 매력적인 작품 같아요.

  •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앨범 하나만 듣자면,

    저에겐 단연코 J Dilla의 Donut일겁니다.

    양질의 리뷰글 감사드려요

  • deepurple글쓴이
    1.6 00:38
    @귀염뽀짝앤디모린

    감사합니다! 오늘도 도넛 들으면서 먹었어요.

댓글 달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아이콘] André 3000 & Santa Bear 등 아이콘 출시 및 재입고...30 title: [회원구입불가]힙합엘이 2025.12.25
[공지] 서버 문제 조치 중입니다4 title: [회원구입불가]HiphopLE 2025.12.12
[공지] 회원 징계 (2025.12.03) & 이용규칙3 title: [회원구입불가]힙합엘이 2025.12.03
화제의 글 인증/후기 다시 한번 MF DOOM 전집 수집 완16 gunacho 13시간 전
화제의 글 인증/후기 파싸이드 labcabincalifonia 30주년 앨범 도착!6 9houl 2026.01.06
화제의 글 음악 UK 힙합의 오래된 보물상자를 열다3 Glokk40Spaz 2026.01.06
226617 일반 상상 그 이상의 구림 경보9 title: Frank Ocean - BlondeGayGay 2026.01.06
226616 음악 Enter The Wu-Tang 트랙별 최고의 벌스들6 title: Imaginal Disk외힙노인 2026.01.06
226615 일반 이번 라키 신곡 뮤비에 출연한 아주머니의 리즈 시절.jpg7 title: Eminem (2)MarshallMathers 2026.01.06
226614 일반 이거 뭔가 되게 앨범 커버 깔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3 title: Playboi Carti (MUSIC)Yeisdumbasf 2026.01.06
226613 음악 보통 라이브 앨범은 디스코그래피 정복하고 듣나요4 Waster 2026.01.06
226612 일반 오늘아침8시 릴어메 Uneven Compromise 바이닐 발매!!!!1 title: Imaginal DiskNyeong 2026.01.06
226611 일반 불리 vs 돈비덤 vs 아이스맨5 title: Santa Bear椎名林檎 2026.01.06
226610 음악 브루노 마스 근황3 Waster 2026.01.06
226609 음악 라키형 나 기대해도 돼? title: Jane Remover신이홉 2026.01.06
226608 음악 라키 신곡1 title: Santa BearKHZJEH 2026.01.06
226607 음악 라키 신곡 후기 title: Imaginal Disk외힙노인 2026.01.06
226606 일반 Polo G의 생일입니다! 🎉 생일봇 2026.01.06
226605 음악 라키 드랍떴다1 전칸예현예 2026.01.06
226604 음악 아무생각없이 밤새다가 라키 선공개 싱글 들은사람 <<<4 Itrac 2026.01.06
226603 음악 그래서 라키야1 title: Santa Bear오케유더킹 2026.01.06
리뷰 Back To 20064 deepurple 2026.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