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론드 같은 앨범을 감상할 때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오히려 그 앨범의 핵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뛰어난 앨범은 그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믿을 수 없이 정교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믿음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 모호한 가사와 스킷 같은 것들을 나머지와 엮을 수 있다면 앨범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쓴 글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혹은 다른 누군가가 볼 땐, 논리나 개념이 길을 잃었거나 심지어 앨범과 멀어져 버린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블론드에 가장 가깝게 다다르기 위한 나만의 생각의 지도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인생앨범의 정의에 대한 나만의 생각 중 하나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 혹은 계속, 좋아한 책의 한 문장이나 심지어 알고리즘에 뜬 영상들까지도 그 앨범을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앨범이다. 이 글도, 그러한 한 때에 생각나서 떨쳐버리지 못한 키워드들에서 시작된 글이다.
영원과 순간
영원과 순간의 모호함은 우리를 눈물 나게 한다. 잊지 못할 순간은 영원으로 너무나 쉽게 각인되어버리지만 우리에게 영원은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각인된 영원도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순간과 영원이 닿아있는, 그 짧지만 영원한 공간에 블론드는 있다.
be yourself?
자기 자신마저 잊을 만큼의 강렬한 순간들이 있다. 잔소리에 따라, 자신을 잊게,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드는 순간들을 조심해야 할 이유다.
그러한 순간들을 엑스터시(ecstasy)라 하며, 보통 황홀경 혹은 종교나 명상 같은 것에 의한 신비주의적 체험을 뜻한다. 후에 마약(MDMA)의 속칭으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다.
고대 그리스어 'ekstasis' 로부터 유래된 이 단어의 어원에 따른 뜻은,
ekstasis : ek("밖으로") + stasis("자신의 위치")
즉, 자신의 위치에서 빠져나가 '자기의 바깥'에 있음을 뜻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 '자기의 바깥'에 있음은 현재 순간에 절대적으로 동화되어 시간, 즉 과거(경험)와 미래(가능성)를 완전히 망각하는 것이라 한다.
시간마저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무아지경인, 이 '자기의 바깥'에 있음의 순간에 우리가 쓰는 표현이 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혹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순간에 영원을 떠올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엑스터시의 순간은 영원과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을 시간의 부정(시간으로 규정될 수 없기에)이라 한다면, 둘의 공통점은 시간의 망각 혹은 부정이라는 것으로 모호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이 모호한 공통점에 엑스터시의 위험이 있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처럼 느낄 수 있고, 영원의 대용품으로 이 엑스터시를 찾는다.
엑스터시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을 망각한다. 그 순간과 망각마저도 영원하길 강하게 바라는 것을 넘어 그 순간만이 영원한 것, 영원해야 할 것으로 믿게 한다. 또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엑스터시의 순간에서 영원을 연역하고, 잊을 수 없을 순간의 강렬함을 표현할 때 영원의 이름을 붙인다.
이처럼 우리의 어떤 순간은 순간일 뿐인 순간이 아니고, 이런 순간들로 인해 영원은 한낱 거짓말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영원은 우리가 가질 순 없지만 강렬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순간을 영원만큼 아름답게 느끼고, 언제나 지나갈 뿐일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남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애초부터 영원할 수 없는 우리가, 영원 혹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를 넘어서는 것(천국,열반과 같은 이상향, 불변과 불멸 혹은 그러한 사랑)을 욕망하고 그것들에 결핍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하질 않을 순간들에 아파하며 그리워하는 것도 이상한게 아니다.
임신한 몸으로 대마초를 피지만 이상적인 가정을 원하는 여성(solo), 변해버린 주위에서 혼자 남은 듯한 기분에 대한 랩 (solo reprise), 가상 혹은 불멸의 인터넷에서 사랑의 확인을 바라는 연인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스킷 (facebook story), 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음에도 단 한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해 좌절하는 대화 (good guy) 에서 씁쓸함이 묻어 나온다. 우리의 일, 연애 등의 일상에서 영원은 물론, 그와 닿아있는 순수한 사랑, 몰입, 도취의 순간들마저 사치처럼 여겨지거나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낙원을 만들고 심지어 낙원을 고향(잃어버린 영원)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영원의 대용품으로 엑스터시의 순간을 찾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서 그런 순간마저 어렵기에, 영원과 그와 비슷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커져갈 뿐이다. 그로 인해, 대용품의 대용품으로 그러한 순간을 쉽게 약속하는 듯한 너무나 현실적인 것들(돈,가상의 세계,약물,술 등)을 찾기도 한다.
'pink + white' 에서 '하늘로부터의 영광' 같은 아름다운 사랑이 pink and white의 색깔로, 'nikes'에서 코카인 같은 약물들이 그것의 색깔이자 은어인 white와 pink로 묘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원의 아름다움에 눈 먼 우리는 영원하지 못하다. 또, 영원으로 각인된 순간마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게 될 것을 안다. 이는 영원에 대한 결핍 앞에 우리를 직면하게(우리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고 이 대용품들에 대해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블론드의 초점 중 하나는 이처럼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순간과 기억, 그로 인해 취약해진 순간에 있다. 오션은 영원할 수 없는 영원의 충만함이 지나간 후 남는 결핍과 공허함 속에서 그러한 영원과 순간의 모호함을 노래한다. 그에 따라 가사와 시간의 경계는 모호하고 흐릿하며, 일상적이면서 저속하기까지 하다. 이에 따라 매우 개인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블론드는, 역설적으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원 하질 못할 우리도 그들처럼 취약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영원에 닿아있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고, 영원 앞에 직면해 결핍을 느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비어버린 영원의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be yourself!
잔소리로 돌아가서,
어머니는 너의 꿈을 찾거나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처럼 성공하기를 당부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이 되지 말기를 경고한다. 우리는 술에 취해도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깨고 나면 시간 속에서 순간을 책임져야 할 것은 결국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경고는 '자기 자신 밖에 서는 것'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삶이 영원이 아니기에, 영원을 향한 강렬한 엑스터시의 순간( 그 순간 우리가 쓰는 표현을 추가하자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은 죽음에 가깝다. 다시 말을 빌리자면, 엑스터시의 순간에 어떤 슬픔, 환희의 열광으로 인해 감동은 절정에 이르며, 동시에 자신의 부정에도 이른다. 아름다운 영원의 향수, 엑스터시로부터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 '나의 삶, 시간 속에 사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같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소리가 잔소리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앨범의 마지막, 오션은 'futura free'에서 자신은 신이 아님을, 영원을 가질 수 없음을 말한다. 또,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현실에서 강해진 자신을 내비친다. 다만, 그 모습은 영원과 그와 비슷한 것들은 없는 듯한, 혹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이 현실에서 울지 않으려 애쓰는 소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곡의 마지막, 죽지 않고 영원히 자고 싶다는 어릴 적 녹음된 오션의 목소리와 1억 광년의 거리를 궁금해하는 순수한 질문 혹은 'pretty sweet'의 어린이들의 합창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우리의 이런 영원에 대한 갈망은, 엑스터시의 순간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인간의 한 조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낮과 밤이 반복되듯, 우린 어쩔 수 없이 달콤한 영원과 순간의 모호함에 취해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until time we die
그렇다면 'be yourself 대한 대답으로 느껴지는 'solo' 에서 취해있는 모습처럼 죽기 전 까지 방황할 뿐일까? 강렬한 사랑,몰입,도취의 엑스터시의 순간도 결국엔 위험한 중독이고, 더 쉽지만 나쁜 것들에 취한 것처럼 깨고 나면 기억조차 못 하는 것일까?
또, 시간마저 망각하는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회상 혹은 향수 같은 것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남을 수 있을까?
모호함 때문에 여러 대용품과 구분이 어렵다는 것도 엑스터시의 위험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우리의 어떤 순간은 기억으로 지속된다. 'close to you 오션은 그렇게 믿는다. 대신, 그 순간은 시간과 독립적이기에, 하나의 공간으로 우리의 안에 남는다.
다시 쿤데라에 따르면, 엑스터시의 순간에 시간을 망각해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린다면 현재 순간은 생과 생의 연표(시간)의 바깥의 빈 공간에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원할 수 없는 충만함이 채우고 난 후에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는 빈 공간이 남을 것이다. 이 비어버린 영원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기억으로 지속될 공간이지만, 비어 있음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결핍 혹은 공허함의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잊혀지지 않음과 결핍으로 인해 닿을 수 없지만 돌아가야 할 고향이 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가 있다.
nostalgia, 고대 그리스어 두 단어가 결합된 단어를 어원으로 하며 그 뜻은,
nostos('고향으로의 귀환') + algos('고통') :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음에서 나오는 고통
이러한 기억과 감정에서 공간의 구체적인 물리적 특성은 중요치 않다. 다만 기억은 '그리움' ,'고통' 혹은 '아름다움'처럼 다분히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으로 남는다. 기억 속에 불편했던 것들마저 그립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남기도 한다.
심지어, 실재 여부 혹은 경험 여부도 중요치 않을 수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는 우리는, 닿을 수 없거나 경험하지 못한 혹은 못할 것에 대해서도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다. 모호함에 취한 결핍과 공허함은 비슷한 것들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러한 것들은 돌아갈 수 없는 한때의 'white ferrari' 처럼 닿을 수 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운 거짓말로 남는다. 다만, seigfried의 '수영장 딸린 집', white ferrari의 '다른 차원' 처럼 거짓말로 인식된 이런 이미지마저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스탤지어로 눈물 나게 한다. 닿을 수 없음의 고통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 공간의 결핍과 공허함에 의한 노스탤지어는 강렬하고 위험하다. 돌아갈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닿을 수 없는 것, 경험할 수 없는 것 즉, 우리에게 영원처럼 느껴지는 다른 것들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노스탤지어가 시간의 경계를 흐려 우리의 현재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영원의 충만함을 느낀 우리는 그것을 대신할 비슷한 크기의 이미지들과 감정으로 결핍과 공허함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모두 채워질 수 없기에 다시 결핍과 공허함을 불러올 뿐이다. 오션이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션의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그 순간들이 영원할 수 없음에 대한, 영원 그 자체에 대한 갈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엑스터시뿐이기에, 결국 엑스터시와 노스탤지어의 순환 속에 방황할 것이다.
다만, 이런 이유들로 블론드의 결핍과 공허함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강렬하고,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노스탤지어라는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다. 또한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일깨워준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로 인해 우리는 결핍 혹은 공허함의 크기로, 그에 비례하는 아름다움과 슬픔의 크기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결핍, 공허함 속에서 기억 속의 영원한 공간을 꺼내 슬프고도 아름다운 감정과 이미지들을 채울 수 있다. 또,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지만, 그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같이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다.
블론드는 이러한 공간과 기억을, 노스탤지어를 사운드로 구현한다. 리버브로 공간감이 느껴지는 사운드는 우리를 빈 공간에 두는 동시에, 단절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미니멀한 사운드의 여백은 결핍과 공허함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특히 드럼이 빠져 있는 트랙들에선, 음악에서 시간을 구분 짓는 요소 중 하나인 리듬이 약해져 있다. 이로 인해 완전함과 뚜렷한 분절 대신 모호하고 흐릿한 잔향이 남는 사운드는 '기억으로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에 대한 회상'인, 노스탤지어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론, 리듬을 대신하는 보컬의 라임과 반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기에, 어떤 이야기와 순간에의 몰입을 위한 혹은 몰입된 상태에서 희미하게 기억에 남은 배경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돌아가서,
사랑과 같은 엑스터시의 순간마저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고 그 기억마저도 고통스럽게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순간과 그에 의한 기억들은 애초부터 결핍되고 공허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역으로 엑스터시의 건강한 대체품인 닿을 수 없는 영원을, 진정으로 시간이 망각된 공간을, 예를 들어 paradise 나 heaven 같은 것을 추구해야만 할까?
paradise : 울타리 혹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heaven : 하늘 혹은 신이 거처하는 곳
이러한 공간들은 어원에 따른 뜻에서부터 인간의 삶 안에서 닿을 수 없는, 인간과 단절된 곳이다. 인간에게 시간이 망각된 공간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다는 현대과학 명제의 비극성을 떠올리게 될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공간들은 닿을 수 없기에 우리의 영원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이러한 공간들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 돌아가야 할 고향 혹은 이상향이 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돌아갈 수 없음과 같은 결핍이 시간의 망각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블론드에서 오션의 결핍과 공허함은 무신론자 혹은 허무주의자의 것과 다르다. 자신의 고향이 되어버린 순간이 영원할 수 없음에, 돌아갈 수 없음에 슬퍼하고 방황하는 오션은 영원을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영원을 찾고 있다. 그의 결핍과 공허함은 아담과 이브처럼 낙원에서 쫓겨남으로 인해 생긴 결핍과 공허함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이유로, 오션은 결핍된 자신의 영원과 고향인 그 순간과 기억들을 그저 순간으로 치부할 만큼의 용기가 없다. 또, 그러한 순간들의 대용품으로 수영장 딸린, 경관 좋은 집을 택할 만큼의 용기가 없다.
앨범 후반부, 영원과 순간의 모호함, 엑스터시와 노스탤지어의 순환 속에서 방황하던 오션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을 다시 생각한다. 물질보다 정신을 믿고(white ferrari) 정착하지 못함과 영원하지 못함의 결핍을 받아들인(seigfried) 오션은 '순간이 된 영원'을 '영원이 될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오션은 우리의 결핍과 공허함, 그리고 유한함이 시간을 망각한 사랑을 가능하게 함을 알고 있다. 그렇게 그는 영원 대신 지금 이 순간에서, 돌아갈 수 없기에 결핍된 순간과 기억들을 사랑하는 용기를 선택한다.
godspeed에서 오션은 이런 그리움과 사랑으로, 상대를 위한 'home'이 된다고 한다. 어쩌면 영원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듯한 상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기로 한다. 자신의 안에서 고향이 되어버린 이 공간과 순간을 언제나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과 공허함의 빈자리마저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닿을 수 없기에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위해 기도한다. 다만, 순간의 결핍과 그 유한함마저 사랑할 오션은 영원이 아닌, 시간 속에서 지속될 순간에서 '항상', '어느 순간에나' 사랑할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곡의 마지막에서 'untill time we die', 우리가 죽기 전까지 지속될 사랑을 노래하는 가스펠 보컬과 오션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순간과 영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영원은 순간에 있다.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도 한다. 우리는 끝없이 방황하지만 그 방황 속에서만 영원을 느낄 수 있을 뿐일까. 어쩌면 블론드는 많이 변해버린 우리 시대의 가스펠일지도 모른다.
무한한 영원이 찰나의 순간에 닿아있는 것처럼, 그토록 바라는 꿈만 같은 순간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어째서 꿈과 꿈은 같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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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옹 개추벅벅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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