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힙합은 음악적 스킬, 가사적 깊이, 리듬과 플로우의 치밀함 같은 요소들로 평가받아 왔고, 그 가치체계 안에서 ‘좋은 힙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Total Xanarchy는 이 모든 걸 정면으로 거부한다.
릴 잰은 여기서 플로우를 미니멀하게 줄이고, 랩과 멜로디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며, 무엇보다 ‘무기력함’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전통적인 힙합이 ‘자기과시’와 ‘파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잰의 음악은 그 정반대다. 차고 넘치는 에너지도, 강한 리릭도 없다. 대신 몽환적이고 힘 빠진 보컬, 어딘가 멜랑콜리한 신스, 반복적인 비트만이 남아 있다.
이건 명백히 ‘퇴행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도다. 하지만 그 퇴행 자체가 곧 시대의 감성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Total Xanarchy는 철저하게 ‘저항’한다. 전통적인 음악적 구조에 저항하고, ‘힙합이란 이래야 한다’는 규범에도 저항하며, 심지어 ‘생기 있는 음악이 더 가치 있다’는 명제 자체에도 저항한다.
이런 점에서 릴 잰의 행보는 오히려 펑크적이다. 음악적 기교를 쌓고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그냥 되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 같은 느낌. 기술적인 완성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특정한 태도를 표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는 일종의 사운드적 다다이스트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Betrayed같은 곡을 보면, 이게 정말 ‘음악적 성취’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이건 음악이기 이전에 하나의 ‘상태’에 가깝다. 우울, 무기력, 마비된 감각 같은 걸 그냥 그대로 녹여낸 것 같은 감각.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감각이 너무나 동시대적이라 결국 ‘새로운 세대의 사운드’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릴 잰의 Total Xanarchy는 기존의 음악적 가치체계 안에서 판단하면 절대로 ‘좋은 음악’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다. 애초에 그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정교한 예술적 도전을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음악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무심한 태도에서조차 문화적 지점이 탄생하는 걸 보면, 이 앨범이 얼마나 시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토탈자나키로 이 정도의 통찰을 하는 게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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