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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포크의 창조주, Either/Or

TomBoy2023.09.30 09:57조회 수 518추천수 9댓글 5

엘리엇 스미스를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마구 쥐고 흔드는 그 불가사의한 힘에 놀라곤 합니다.

포크, 특히 인디 포크라는 장르 자체가

다른 음악보다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엘리엇이 죽지 않고 계속 음악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모습과

그의 추모 벽에 적힌 셀 수 없는 감사 인사들을

엘리엇이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1994년 히트마이저의 기타리스트로 무대에 올랐던

스티븐 폴 스미스는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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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프얀 스티븐스 덕에 엘리엇 스미스를 알게 됐다. 정확히는 수프얀을 들으면 엘리엇과 아서 러셀을 알게 되고 결국 닉 드레이크에게까지 가닿게 되는 알고리즘을 통해. 엘리엇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복잡다단한 핑거 피킹과 이에 대비되는 섬세하고 절제된 보컬의 조화일 것이다. 또 잘 쓰인 수필이 으레 그렇듯, 그의 가사는 사랑에 관한 자유시와 세상이나 도시에 관한 예리한 칼럼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단출한 형식 속에 온갖 디테일과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는 것. 이는 인디 포크라는 장르의 주된 특성이자, 그야말로 우리를 눈멀게 하는 은밀한 신호였다. 엘리엇의 멜로디는 많은 면에서 그의 우상인 비틀스와 60년대 포크 음악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의 암울하고도 무심한 태도에는 레논과 매카트니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내포돼 있었다. "인디 포크"라는 장르를 식별할 수 있는 첫 번째 표식이 생긴 것이다. 이 밖에도 허기 베어, 비키니 킬, 슬리터 키니 같은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를 후원하며 엘리엇에게 첫 음반 계약을 안겨준 킬 록 스타즈, 자신의 영화 '굿 윌 헌팅'에 엘리엇의 음악을 수록한 구스 반 산트, 엘리엇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Sea Change>라는 걸작으로 승화시킨 벡 등, 그의 음악은 당시의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 모든 정보를 접한 뒤에도 '이 단출한 포크 음악이 그토록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수프얀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엇의 음악에 대한 반응 역시 종교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오히려 특별함으로 따지자면 엘리엇은 이 부문의 마이클 잭슨일 것이다. 그 어떤 포크 가수도 이토록 깊은 여운을 드리우거나 자신의 불우했던 생애를 음악과 결부시키지 못했다. 이전에 나는 기타를 든 수프얀 스티븐스를 나의 신이라고 표현했는데, 수프얀이 (인디 포크의) 신이라면, 엘리엇은 (인디 포크의) 창조주였다.

 

엘리엇의 음악은 꼭 그의 정신처럼 가냘프고 씁쓸하면서 어딘가 달콤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번민과 씨름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천재 이미지에 잘 들어맞는다. 이 비운의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그의 자살과 너무 뒤엉켜 있기에, 그는 도니 해서웨이, 이안 커티스, 커트 코베인에 이어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이 빛바랜 관용구에는 어폐가 있다. 내가 보기에 근현대 문화사에서 자신의 죽음이 끼칠 반향까지 계산해 목숨을 내던진 인물은 다자이 오사무 한 명뿐이다. 죽음이 아니었다면 다자이의 글이 지금처럼 읽혔을까 생각해 보는 것은 가정의 영역이지만 나머지는 다르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그들의 생을 앗아간 것은 우울증과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이미 당대에 과거의 유산을 꽃피워 한 세대를 정의한 역작으로 평가받았다. 나의 요지는 '인간실격'과는 다르게 엘리엇 스미스의 <Either/Or> 같은 작품을 들여다볼 때는 역사, 비극, 맥락 등의 요소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엘리엇의 음악은 불안정하고, 자기혐오적이고, 마약 남용의 기록이며, 마침내 엘리엇 자신마저 끝없는 우울함 속으로 침잠시켰다." 물론 나 역시 그의 음악을 역사와 비극 그리고 맥락 안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음악 자체가 훌륭하지 않다면, 위키피디아에 접속해 그들의 불행에 감정이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ither/Or>는 엘리엇의 최고작이면서 동시에 과도기 감수성이 담긴 작품인 듯하다. 그는 이 앨범에 앞서 소포모어 앨범 <Elliott Smith>를 통해 자신만의 로파이 사운드를 완성하며 컬트 스타로 자리매김했고, 98년작 <XO>를 통해서는 드럼, 하모니카, 첼로, 오르간 등을 적극 도입하며 체임버 팝과의 융화를 꾀했다. 나는 <Either/Or>가 전환기의 두 앨범을 연결해 주는 이음쇠이자 두 앨범의 장점을 모두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영리함이 느껴지는 편곡은 홈 리코딩의 열악함을 라이브 무대의 현장감으로 둔갑시킨다. 특히 Ballad Of Big Nothing에서의 드럼 파트는 그 자체로 충분히 드라마틱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마추어 밴드의 리허설을 지켜보는 것 같은 유쾌한 설익음이 느껴진다. 이런 생생한 현장감의 근원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엘리엇의 녹음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최근처럼 각각의 파트를 '믹스'하는 게 아니라, 비틀스처럼 기타 연주와 보컬을 '한 테이크'에 녹음했다.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녹음 도중 수정이 어렵다는 것인데, 보완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 때마다 그는 기타를 들고 한 번 더 녹음했다. 이런 면에서 엘리엇의 방식은 라이브와 다름없었다.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들리도록 뭔가를 조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단순했거든요." 앨범 프로듀서였던 롭 슈나프의 말이다.

 

<Either/Or>는 제작자가 자기 가슴에 시퍼런 비수를 꽂기 전부터 깊은 아름다움과 심오한 슬픔을 안겨줬다. 이제 이 앨범은 그의 비통한 사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지만, 사람들의 생각만큼 죽음으로 가득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발매로부터 25년이 흘렀지만 이 앨범은 여전히 내 마음 절반을 온기로 덥혀주고, 약간 색다른 방식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인간성을 곧이곧대로 탐구하며, 고통과 인생은 불가분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일깨운다. 혼자서 앨범을 만드는 것은 이제 인디 음악의 표준이 됐지만 <Either/Or> 같은 작품은 늘 보기 드물다. 이 앨범은 프랭크 오션의 <Blonde>처럼 비틀스의 영향 아래 탄생했지만 정작 비틀스를 연상할 만한 요소는 그리 많지 않다. <Blonde>가 그랬듯 보컬 하모니와 사운드가 희미하게 중첩되고 개별 수록곡 간에 연관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잠시 <White Album>이 떠오를 뿐이다. 자신이 받은 절대적인 영감을 음악 속에 슬그머니 감추는 것, 나는 이것이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의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White Album>과 <Magical Mystery Tour>에서 받은 영감을 핑거 피킹 주법과 절제된 보컬 속에 축약한 뒤 그의 가장 내밀한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Either/Or>는 단순하다." 이 명제는 그것이 창작자의 의도라는 점에서 참이지만, 가지각색의 주제, 영리함이 느껴지는 코드와 튜닝, 천의무봉의 멜로디, 인디 포크의 태동, 포스트 팝과 포스트 하드코어 등 우리가 거의 모든 단서를 놓쳤다는 점에서 거짓이다.

 

우울증과 약물 남용 그리고 죽음이라는 배경을 모르고 접한다면(그럴 수가 없겠지만), 엘리엇의 가사는 조숙한 아이들이 읽어도 좋을만한 시집에 가깝다. 게다가 이 시집은 다시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어린 왕자' 유형의 문학이기도 하다. 이 시집은 세부 사항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음에도 작가의 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미묘한 창을 제공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서정시와 칼럼으로서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엘리엇은 역사상 최고의 엔딩 신을 집필한 작가일 것이다. 엘리엇의 아웃트로에는 그의 가장 낙관적인 자세와 삶이라는 굴레에서 기진맥진한 채 체념하는 태도가 모순처럼 맞물려 있었다. The Biggest Lie와 I Didn't Understand도 근사한 폐막이었지만, 이런 모순의 신비로움을 체현해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인디 포크라는 장르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Say Yes만한 엔딩은 없을 것이다. Say Yes는 단출하면서도 극적인 기타 리프와 세심하면서 무던한 보컬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곡이다. 하지만 엘리엇의 많은 노래가 인연의 끊김 또 거기서 오는 상실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만의 방식으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노래하는 엘리엇의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따듯해진다. 그의 음악은 소탈한 친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진솔하고 담백하게ㅡ때로는 어둡게ㅡ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나 또한 평소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 가지를 알아듣는다. 그렇기에 확신하건대, 엘리엇은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다. 어떤 논리와 이미지의 도움도 없이 오직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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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9.30 10:29

    수프얀에서 시작해 엘리엇을 거쳐 닉 드레이크까지... 이거 인디 포크 듣는 정식 루트 같네요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 9.30 11:19

    제가 앨리엇스미스를 들으며 느꼈던 감정이나 순간순간 떠올랐던 생각들을 이렇게나 말로 잘 풀어내주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 10.1 09:50
  • 글 정말 잘 쓰시네요.

  • 1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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