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ZA - SOS
올해 새로운 앨범을 발매 예정이었던 흑인음악의 거포들이 전부 단타로 타석을 나가버렸다. 실상 장르의 생명선을 늘리는 역할은 보증된 다수의 단타가 아니라 소수의 홈런이 핵심이다. 때문에 나는 흑인음악이 지금의 지위를 곧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던 중이었고, 12월의 SOS는 본의 아니게 올해의 마지막 구세주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의 단타 퍼레이드를 떠나서 Ctrl과 5년의 공백은 이 정도의 부담을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만큼 내 기대를 힘껏 끌어올렸다. 듣기 좋은 음악과 예술적인 음악의 공존, SZA를 위한 '트래비스 스캇'과 '켄드릭 라마'가 아닌 Ctrl을 위한 그들의 목소리와 랩, 자극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보컬. 21세기 흑인음악의 절대적 존재들인 프랭크 오션과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FKA twigs가 가까운 과거와 미래에 그들의 최고작을 만들어냈음에도 Ctrl은 여전히 빛난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서 이번에는 시저가 거포의 역할로 타석에 올랐다.
오프너이자 타이틀 트랙 "SOS"의 샘플 루프는 드레이크의 6집 오프너 "Champagne Poetry"에서도 쓰인 바 있다. 미세한 피치의 차이를 제하면 샘플 위에 선 주인공만 달라졌다. 개별 트랙마다 작업 일자까지 적힌 크레딧은 찾아보기도 힘들기에 둘의 선후 관계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특색 있는 보컬과 타고난 유연함을 장점으로 공유하는 둘의 비교에선 내 마음이 확실하게 SZA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SOS의 오프너는 시작부터 자극적이면서도 충분한 호기심을 유발했다. 이것이 전략이든 아니든 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출발임은 분명하다. 오프너를 뒤이은 R&B 넘버 "Kill Bill"은 단언컨대 근래의 그 어떤 곡보다도 아름답고 오묘하며 신비롭다. 물방울이 떠다니는 듯 고요한 비트는 분명 독특한 컬러를 갖고 있지만 이것이 곡을 특별하게 만들 만큼 혁신적인 것은 아니다. 가사 또한 과감하면서도 직설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킴은 분명하지만 부드럽게 소리와 섞일 만큼의 인상만을 준다. 그럼에도 이 곡에서 어떠한 기시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저 그녀의 보컬에서 느껴지는 서정성이 수많은 팝송, 컨템포러리 알앤비에서 느껴지는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짙을 뿐이다. 목소리만으로 불편한 수식어를 지워버린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장점인지 모르겠다.
"Blind" 또한 이와 비슷한 결을 지니고 있다. 더없이 보드라운 멜로디와 그녀의 팔세토는 그 자체로 사운드가 지닌 이미지와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각을 극대화한다. "Gone Girl"과 "Ghost in the Machine"도 특기할 만큼 앨범의 '미니멀함, 그리고 짙은 서정성'이라는 특징을 돋보이게 한다. 아마 본작은 전작 Ctrl에서 그녀의 보컬이 주었던 감흥 이상의 것을 차고 넘칠 만큼 제공할 것이다. 예컨대 전형적인 팝 무드의 사운드와 가사를 지닌 "Nobody Gets Me"도 SZA의 보컬이 얹히자 이 곡을 수식하기 위해 특별한 단어를 뒤적여야 한다. 물론 상기한 트랙을 제한다면 본작은 전작의 유기적인 흐름에 비해 다소 과할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러나 저마다의 앨범에서 매력적인 한 곡 한 곡을 똑 떼어와 만들었다기보단 하나의 테마를 깔아두고서 제작된 플레이리스트의 느낌이 강하다. 그 또한 본작의 사운드에 설명할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 아니라 보컬, 그리고 전반적으로 큰 전환 없이 흐르는 분위기의 시너지 때문일 것이다.
난 SOS를 재생하고서 얼마 안가 비욘세의 Renaissance를 떠올렸다. 일전에 글을 쓴 적 있듯이 느닷없이 들고 나온 댄스 위키피디아가 이토록 집약적이고도 높은 완성도를 보일 줄 몰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SZA가 네오 소울,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정반대에 놓인 진부한 태그를 가져와 이 정도의 앨범을 만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비욘세의 Renaissance를 예측하지 못했던 건 진짜 감이 안 왔기 때문이고 SOS의 경우는 SZA에게 내심 원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Ctrl 만큼 예술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음악을 강요하려는 마음은 아니다. 상기했듯 그녀만큼 팝스러운 음악과 시너지를 보이는 아티스트도 없을 것이고, 본작을 통해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에게 기대한 것은 훌륭한 음악 뿐 아닌 훌륭한 앨범이기도 했다.
"Kill Bill"과 "Blind" 사이에 놓인 "Low"와 "Love Language"는 분명 따로 떼어놓고 보았을 땐 가볍게 듣기 좋은 매력적인 곡들이다. "Blind"와 "Gone Girl" 사이의 "Notice Me"도 마찬가지고, 그 이후로도 군데군데 홀로 존재했을 때 매력적인 트랙들이 끼어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Kill Bill"과 "Blind"처럼 본작의 진짜 매력적인 순간들은 그녀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시킨 팝/컨템포러리 알앤비이고, 비교적 아쉬움이 느껴졌던 곡들 또한 팝 지향적인 R&B, 힙합 넘버에 가깝다. 둘의 결이 비슷하기에, 후자의 아쉬운 부분들을 다름이라는 매력으로 무마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감상 후에는 SOS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이런 곡들이 일정 수준의 기대치를 채워주기에 안정적인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지만, 상술한 곡들을 지나가는 순간이 짧지 않기에 다소 루즈함이 느껴지고 그렇기에 앨범을 감상하는 집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약간의 트랙 시퀀싱을 거쳤다면 그녀의 장점을 여과없이 보여준 독보적인 앨범이 됐을 듯 하다. 이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감상 중 떠올랐던 Renaissance가 어느새 Certified Lover Boy로 교체된 것을 인지하는 일은 꽤나 찝찝한 순간이었다. SZA의 Ctrl만을 뚜렷이 드러냈던 것처럼 SZA의 SOS만을 보여주기엔 5년이라는 세월이 그녀에게 너무도 긴 시간으로 다가온 것 같다. 커리어를 끝낸다는 루머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거짓말이었다면 이곳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던 트랙들은 언젠가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색을 뽐낼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이가 아닌 그녀의 이름을 내건 음악에서는 유난히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던 SZA가 단 하나의 작품만으로 분야의 최고 반열에 올랐다. 이 사실은 팬들이 느낀 양가적 감정만큼이나 그녀 스스로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SOS는 5년 전의 순간이 단순하게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증명한다. 분명 아쉬운 점이 없는 앨범이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그녀가 꾸준히 좋은 음악을 들려줄 것이라는 근거 있는 믿음을 가져간다. 근일내로 흑인음악의 생명줄이 끊길 걱정이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뜻이다. 근심 걱정 없는 현재만큼이나 불안 없는 미래가 가치 있다는 것은 이미 주식과 부동산에서 데여본 이라면 알 만큼 아는 정론이다.
https://blog.naver.com/nikesfm/222963920755
이번 앨범 들을수록 좋더라고요
지금 Kill Bill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gone girl open arms sos 이 3개 엄청 많이 듣고 있는데 너무 행복하네요
수록곡 대부분이 일정 수준의 만족은 다 채워주는 것 같아요.
kill bill
low
이 두개가 너무 좋음
전 Kill Bill에 제대로 꽂힌 것 같습니다.
Low 너무 좋아요
Low도 나중에 따로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자주 들을 것 같아요.
너무 잘 읽엤습니다! 쪽지 한번만 확인 부탁드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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