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목소리와 기품 있는 보컬 퍼포먼스, 고작 몇 년간의 커리어가 담긴 이력서 한 장으로 증명 가능한 프로듀싱 능력과 출중한 기타 연주를 전부 갖춘 아티스트가 자신의 초라한 소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그 어느 때보다 쉬워진 21세기에 나타났다는 것보다 대중음악의 팬들에게 희망찬 소식은 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주인공의 나이가 이제 막 24살이 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프랭크 오션이 새로운 앨범을 발매한다는 낭설이 돌기 전까지 우리의 기대감을 전부 가져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연유로 이런 옥석을, 그것도 Apollo XXI가 발매되고서 3년이나 지났음에도 분별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데뷔 앨범과 본작의 품질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오히려 밴드 시절부터 돋보였던 기민한 기타 연주는 Apollo XXI에서 더 두드러지는 부분이고, 프로듀싱 면에서 그의 능력이 3년 만에 회까닥 바뀔 수 있는 것이라기엔 이미 평균치를 한참은 상회하는 지점에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 이유를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본인을 소개하기로 결심한 스티브 레이시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 다재한 능력을 갖춘 그에겐 현대적인 감수성과 맞물려 선순환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가시적인 결과로 산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뷔 앨범 Apollo XXI은 여타 솔로 싱어송라이터의 관습적인 패턴을 따르며 본인으로 시작해 본인으로 귀결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곳에는 얼터너티브 R&B 밴드 인터넷에서의 중독적인 훵크와 몽환적인 감성의 기타 연주가 돋보이고, 그의 목소리를 돋보이기보다는 사운드와 자연스레 융화됨을 택했다. 오히려 프로듀싱면에서 볼거리가 더 많은 작품은 Apollo XXI라는 팬의 주장이 허튼 소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작의 가치를 더 높게 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전통적인 이분법을 극복하는 가장 까다로운 난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PBR&B를 지향했던 프랭크 오션은 예술성을 유지한 채 팝적인 감수성을 흡수하고서 다중에게 손을 뻗었고, 대중음악의 지평에서 본인의 절대적인 영역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어떠한 화질의 타협도 없이 사진의 크기만을 키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성공시켜야 하는데, 나는 R&B씬에서 이 과정을 완벽히 수행해낸 싱어송라이터를 지금껏 프랭크 오션 단 한 명뿐이 보지 못했다. 그런 내게 갑자기 나타나 아무런 문제 없이 변환 과정을 끌어간 스티브 레이시가 기인처럼 보이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본작 Gemini Rights에선 분명하게 그의 세련된 보컬이 주목을 끈다. 스티브의 반신이었던 기타를 한 발자국 뒤로 밀어두고서 보다 단발적인 소스로 활용하고, 신시사이저와 보컬을 앞으로 꺼내와 삼위일체로 몽환적인 질감을 구현해냈다. 덕분에 미니멀한 구성만으로도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으며, 그 사운드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할 스티브의 보컬을 위해 충분한 공간을 내준다. 비교적 강한 개성으로 다가오던 전작과는 달리 더 보편적인 감동을 주며 포근하게 청자를 감싸 안지만, 당연하게도 이를 위한 퀄리티와 개성의 희생은 일체 없는 확실한 상향 조정만이 진행되었다. 이토록 미묘한 변화를 함축한 것은 "Cody Freestyle"이 될 것이고, 고혹적인 팔세토와 아름다운 백 보컬이 돋보이는 “Amber”는 앨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훌륭한 예시로, 더 안정적인 베이스의 지지대 위에서 부드럽게, 강렬하게, 때로는 한없이 달콤하게 분위기와 장르, 목소리를 조정한다. 특정 장르의 문법이, 혹은 아티스트가 그대로 오버랩되는 든든한 후광을 두고서 연출된 보편적인 감각이 아닌, 독자적인 분위기를 통한 세련됨이 앨범 내내 유지되는 작품을 Blonde 이후로 찾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이 작품을 당당히 추천하는 바이다.
호오가 갈리는 지점들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대에는 무엇보다 앨범의 구성에 그 공로가 있다. 역사상 하루 만에 가장 많은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21세기에서 역설적으로 과거보다 더 확고한 개성의 작품을 강요받는 현시대의 싱어송라이터들은 이 과제를 풀기 위해 구조적인 측면에서 급격한 선회를 통하여 기분 좋은 충격을 가하거나, 마치 최면을 걸듯 유려한 곡선처럼 매끄러운 흐름으로 청자를 빨아들이는 유기체를 교묘히 조작해낸다. 본작은 무게감을 강조한 베이스와 베드룸의 감성에 가까운 오프너 “Static”에서 단 한 트랙만에 보사노바의 “Mercury”로 전환되지만 당신이 심찰하지 않는 이상 이것이 보사노바의 리듬인지 감각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이어지는 “Bad Habit”은 비교적 단조로운 구성으로 브라질의 열기를 식히지만 여지없이 어쿠스틱 기타와 거칠어진 질감으로의 전환을 통해 반전을 꾀한다. 인터루드 이후 사이키델릭한 연출로 엮어낸 두 곡을 이어받는 “Sunshine”은 라이브 세션을 택한 장점이 두드러지는 곡으로, 단조롭지만 현장감 있는 드럼 비트 위에서 은은하고도 아름답게 흐르는 Fousheé의 코러스는 “Forrest Gump”, “Godspeed”가 오션의 작품에 아름다운 여운을 선사했던 것처럼 Gemini Rights에 걸맞은 효과를 만들고 증폭시킨다.
주목할 요소가 산재한 사운드의 묘미와는 다르게 스티브는 본작의 텍스트에 무게감을 덜어내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물론 가정한 과거일 뿐이지만, 나는 오히려 Blonde에 뚜렷한 스토리 라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토록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히려 아티스트의 추상적인 사상 혹은 이념에 몰입하느라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사운드를 흘려보내는 것보다, 소리에 심취해 무아경에 빠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수용적인 경험은 우리가 음악에서 얻어낼 수 있는 더 큰 가치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언어라는 장벽은 고사하고 형이상학적이기까지한 Blonde의 해석을 과감히 덮어두고서 눈을 감고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Blonde의 가사에 해석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롯이 사운드에 몰입할 가치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티브의 가사가 담고 있는 주제를 인식하는 과정을 벌써 거쳤다면, 마찬가지로 Gemini Rights는 확고한 믿음 아래 눈을 감고 당신의 감정을 편향적으로 소리에만 넣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것은 팝송을 듣는 비영어권 청자의 비애이기도 하지만, 모국어가 아니기에 얻을 수 있는 좀 더 예민한 감각이자 축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얼터너티브, 인디펜던트 R&B에 애정이 있는 리스너라면 영상 속 스티브의 몸짓과 착장, 콘셉트와 사운드에서 묘하게 Blood Orange가 겹쳐 보일 수도 있다. 얼터너티브의 특징이 주류 문화의 대안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만약 그러한 대안들이 겹치고 또 겹쳐 통용되는 모델을 만들어낸다면 그때도 여전히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장르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그저 호소인으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인 운명일까. 이 또한 가정한 미래이지만, 그런 현상은 최소한 근일 내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티스트가 하나의 작품을 발매하며 현재의 만족감과 동시에 다음이라는 기대를 불러오는 것은 감상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Blood Orange, Moses Sumney, 그리고 Frank Ocean을 기약 없이도 언제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언제나 충분한 인내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기대감을 주었기 때문이고, 그 기대감에는 답습이라는 두려움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 감상에 본격적인 취미를 두지 않는 이상 흘려듣기도 힘든 The Internet의 음악 뒤편에서 기타와 작곡을 담당하던 스티브 레이시가 어느새 유튜브 알고리즘의 수혜를 입어 무대를 한껏 키우고 있다. 이만큼 의도한 결과를 완벽하게 얻어낸 스티브의 능력에 박수를 치고 싶다.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의사 표명이 팬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지만, 나는 여지없이 그의 다음을 고대하는 인내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포인트 이벤트에서 댓글을 달아주신 분 덕에 제가 올해 지금까지 가장 좋게 들었던 앨범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시간을 얻은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앨범이지 싶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아티스트 중 하나입니다.
https://blog.naver.com/nikesfm/222872050762
빌보드에서의 성취와 별개로 굉장히 과대평가된 작업물이라고 생각함
안그래도 평이 꽤 갈리는 작품인 것 같더라고요. 리뷰 작성했으니 이제 다른 분들 글좀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아이폰으로 만든 비트”로 유명세를 얻게된 베드룸팝의 기수로써 여타 클레어오와 디존만큼 파괴적인 진화를 보여주진 못했다고 생각-자신의 포뮬러에 천착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선배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작업물이라고 생각함. 브라질로의 도피는 감지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베드룸팝의 4마디 루프 경제성을 선택하는 안타까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다른 시각에서 더 깊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전 딱 맞는 평가같음
근데 미구엘도 인지도가 있으면서 자신 색채를 지켜오지 않았나요
죄송해요 제가 미구엘을 별로 안좋아합니다. 극히 주관적이기만 한 글로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저는 이 앨범 잘 못느끼겠더라구요. 여러 번 끝까지 들어보려 시도했지만… Damn..
저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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