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ame is El-P, I produce and I rap too"
언더그라운드의 위대한 프로듀서이자 래퍼인 엘피의 가사입니다. 락에서도 DIY(do it yourself) 정신이 있듯이 힙합에서도 당연히 자신이 직접 비트를 찍고 그 위에 랩을 하며 믹싱 마스터링까지 본인이 끝내는 래퍼들이 있습니다. 익스페리멘탈 힙합(Experimental Hip Hop)씬의 주역 중 한명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패기 넘치는 아티스트 제이펙마피아 역시 이러한 래퍼 중 하나입니다. 15살 때 부터 프로듀싱, 특히 샘플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제이펙은 프로듀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비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설령 비트를 줘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비트를 수정하는 것에 싫증을 느낀 제이펙은 결국 자신이 직접 랩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제이펙은 자신의 온전한 음악세계를 표현해 내기 위해 프로듀싱, 래핑, 보컬, 마스터링을 전부 혼자 해내는 아티스트가 됩니다.
Devon Hendryx - The Ghost~Pop Tape (2013)
초창기 제이펙마피아는 자신의 본명 Barrington DeVaughn Hendricks에서 본떠온 Devon Hendryx 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당시 공군에 속해 있었던 디본 헨드릭스는 현재도 여전히 교류 중인 댓피프마피아(DATPIFFMAFIA)와 일본에서 만난 아티스트들과 함께 Ghost Pop 라는 밴드를 결성합니다. 비록 이들은 1년 만에 해체됐지만 이들의 [The Ghost~Pop Tape]은 초기 제이펙마피아의 사운드를 대표하는 믹스테잎으로 제이펙의 팬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작업물입니다. 지금의 글리치(Glitch) 하고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한 힙합 사운드와는 꽤나 거리가 먼 앰비언 팝(Ambient Pop)적인 얼터너티브 알앤비(Alternative R&B) 사운드가 특징인데 이러한 점 덕분에 같은 장르에 속한 프랭크 오션의 [Endless]와 종종 비교당하곤 합니다. 혹자는 [The Ghost~Pop Tape]이 [Endless]의 다크 버젼이라고도 하죠.
[The Ghost~Pop Tape]에서 제이펙이 보여준 몽환적이고 앰비언트하면서 로파이 한 프로덕션과 감미로운 보컬은 도저히 2013년에 나온 믹스테잎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시대를 앞서 나갔고 이후 제이펙이 보여줄 다양한 실험적인 음악에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록 이 믹스테잎은 현재 스트리밍 플랫폼에선 찾아볼 수 없지만 제이펙이 향후 리마스터링 및 정식 발매할 계획을 밝혔기 때문에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믹스테잎에서 추천드리고 싶은 곡으로는 칼리 레이 젭슨의 대표곡을 자신만의 우중충한 스타일로 커버한 Call Me May Be,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와 멜로디 라인이 매력적인 인트로 Ballad of A Poor Man, 제이펙의 랩이 돋보이는 Behold! A Pale Horse, 미니멀한 비트와 제이펙의 보컬이 매력적인 Sakura 등이 있습니다.
JPEGMAFIA - Black Ben Carson (2016)
바깥세상은 위험하다는 공군 동료들의 만류 속에서도 기어코 전역을 한 제이펙마피아는 후에 그 때의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공군에 들어간 것은 살면서 한 최악의 선택이라고 밝힙니다. 군에서 제이펙은 꾸준히 음악을 해왔지만 동료들은 그를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대 후 군에서 쌓아온 음악 경력을 바탕으로 제이펙마피아로서의 첫 정규 앨범 [Black Ben Carson]을 성공적으로 발표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음악은 인더스트리얼하고 글리치한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색채를 띕니다. 또한 제이펙 특유의 날카롭고 정치적인 펀치라인 역시 이때부터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Black Ben Carson 이라는 앨범 타이틀도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에 성공하여 많은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공화당을 지지하면서 여러 논란이 될 만한 발언들을 하여 많은 지탄을 받은 흑인 의사 Ben Carson 앞에 Black을 붙힌 파격적인 타이틀입니다. 이 앨범의 추천곡으로는 drake era, black ben carson, try me 등이 있겠네요.
JPEGMAFIA - Veteran (2018)
2018년 제이펙은 현재의 그를 있게 해준 앨범 [Veteran]을 발매합니다. [Veteran]은 전작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는 글리치 합,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와 제이펙의 뛰어난 샘플링 감각이 더해져 유니크한 프로덕션으로 많은 장르팬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Real Nega에서 ODB의 Goin' Down을 샘플링 한 것은 제이펙의 감각적인 샘플링 센스가 가장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Veteran]에서 사운드 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이펙의 랩과 정치적인 가사입니다. 통통 튀는 비트 위에 유연한 플로우로 랩하는 1539 N. Calvert에서 제이펙은 도널드 트럼프를 무작정 옹호하는 미국 공화당의 켈리엔 콘웨이를 디스하고 있고 Baby I'm Bleeding의 난잡한 비트속에서 강렬하게 랩을 뱉는 제이펙은 절대 칸예처럼 금발(공화당 지지를 의미)이 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My Thoughts On Neogaf Dying와 I Cannot Fucking Wait Til Morrissey Dies에서는 아예 제목에서부터 성폭행 혐의로 고소된 네오가프와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을 희화화한 모리세이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귓속으로 침투하는 듯한 사운드의 비트와 제이펙의 보컬 퍼포먼스가 인상적인 Thug Tears, 인터넷에서 밈으로 자주 쓰이는 울음소리와 트래비스 스캇의 3500과 같은 샘플을 사용해 아방가르드한 느낌을 트랩 사운드와 독특하게 결합시킨 Rainbow Six 역시 앨범 내에서 주목할 만한 트랙입니다.
[Veteran]에서의 제이펙은 마치 변칙적인 글리치와 광범위한 샘플링으로 무장한 21세기의 ODB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Veteran]의 밴드캠프 버젼 앨범 커버에서 ODB의 [Return to the 36 Chambers]를 오마주 하여 그에 대한 존경을 들어냈는데 ODB는 자신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래퍼라고 합니다. TMI지만 저 커버에 쓰인 사진은 제이펙의 운전면허라고 하네요. 스트리밍 플랫폼에 올라와 있는 버젼의 커버 역시 우측 상단에 숨겨져 있는 마우스 커서가 JPEG(이미지 파일)MAFIA라는 캐릭터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재밌는 커버라고 생각합니다.
JPEGMAFIA - All My Heroes Are Cornballs (2019)
[Veteran]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익스페리멘탈 힙합씬의 또 하나의 큰 축이 된 제이펙은 1년 만에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프로덕션은 여전히 실험적이면서도 전작보다 더욱 정제됐고 한 곡 안에서 극적으로 진행되는 전개는 그의 실험성을 더욱 부각 시킵니다. 그는 여전히 난잡한 글리치와 샘플링을 조합해 듣기 좋은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All My Heroes Are Cornballs]와 전작들을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은 제이펙의 보컬 퍼포먼스입니다. 그의 얼터너티브 알앤비적인 보컬은 캐치한 멜로디를 통해 인상 깊은 후렴구를 만들어 내고 제이펙의 음악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중성을 가미합니다. 앨범의 인트로인 Jesus Forgive Me, I Am A Thot 에서부터 제이펙은 특유의 유연한 플로우와 몰아붙히는 듯한 래핑 그리고 캐치한 멜로디로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참회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바로 다음 트랙인 Kenan Vs. Kel에서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내면의 불안을 노래하다가 강렬한 싸이키델릭 기타 리프가 나오는 순간 하드코어 펑크가 떠오르는 파괴적인 사운드로 기도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외칩니다. 이처럼 제이펙은 강렬한 래핑과 감미로운 보컬,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져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은 가사들 그리고 그것들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프로덕션과의 조화로 앨범을 구성합니다.
[All My Heroes Are Cornballs]를 통해 제이펙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악이 갖는 실험성과 천재성을 입증했고 익스페리멘탈 힙합씬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놓는데 성공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트랙 외에도 일본 에니메이션을 샘플링을 해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Beta Male Strategies, 솔쟈 보이의 트위치 스트리밍을 샘플링한 Thot Tactics, 묘하게 불쾌한 비트와 래핑이 인상적인 PTSD, IDM 글리치 합 아티스트 Vegyn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Rap Grow Old & Die x No Child Left Behind, 베이퍼 웨이브(Vaporwave) 느낌의 비트와 제이펙의 보컬이 매력적인 All My Heroes Are Cornballs 역시 앨범에서 주목할 만한 트랙들입니다.
JPEGMAFIA - LP! (2021)
그동안의 커리어에서 꾸준히 상승세를 유지하던 제이펙은 [LP!]를 통해 그의 새로운 커리어 하이를 찍습니다. [LP!]는 샘플 클리어 문제로 인하여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하는데 스트리밍 플랫폼에 올라와 있는 온라인 버젼은 샘플 클리어가 되지 않은 곡들을 쳐내고 예전에 냈던 곡들로 대체한 버젼이고 밴드캠프에서 들을 수 있는 오프라인 버젼은 온전히 제이펙의 의도대로 설계된 버젼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오프라인 버젼의 [LP!]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분들이 많을 것 입니다.
[LP!]는 비록 전작들에 비해 글리치스러운 색채가 많이 연해졌지만 NEMO! 같은 트랙에서는 여전히 그의 센스있는 전자음의 활용을 느낄 수 있고 THE GHOST OF RANKING DREAD! 같은 곡에서는 제이펙이 예전부터 꾸준히 시도해오던 클라우드 랩과 나른한 비트의 조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앨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HAZARD DUTY PAY!는 그루비한 베이스 라인과 함께 따뜻한 소울 음악을 통샘플링하여 그 위에 통통 튀는 제이펙의 래핑이 매력적인 곡 이고, 댓피프마피아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REBOUND!는 비트가 스위치 되면서 웅장한 관악기들의 등장과 함께 제이펙의 다양한 플로우와 랩의 강약조절이 매력적인 곡 입니다. TIRED, NERVOUS & BROKE!는 자칫하면 그냥 흔한 제이펙의 곡이 될 뻔 했지만 아름다운 피아노의 연주로 곡이 끝나면서 다른 곡과 차별점을 두는데 성공했습니다.
[LP!]는 제이펙이 그동안의 앨범들에서 지속해왔던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깔끔하게 정제된 앨범 입니다. 비록 그에게서 예전만큼의 날 것의 실험정신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LP!]는 제이펙의 커리어에서 그 어느 때 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트랙 외에도 DIRTY!, WHAT KIND OF RAPPIN' IS THIS?, DIKEMBE, UNTITLED 역시 훌륭한 곡들이니 꼭 들어보시는 것 추천드립니다.
양산형 트랩 음악이 판치고 있는 현재 힙합씬에서 제이펙마피아 같이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아티스트의 존재는 더욱 빛이 납니다. 하마타면 데스 그립스의 아류 중 하나로만 기억 될 뻔한 그는 아티스트로서의 성장세를 꾸준히 이어나가 현재는 익스페리멘탈 힙합씬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베테랑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제이펙마피아 같이 유니크한 힙합 아티스트가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네요.
이번 앨범 미쳤잖씀~~~
크으 좋은 글이네여
양질의 글 닥추
페기는 닥추지
고수
잘 읽었습니다! 항상 후속작을 자신의 최고작으로 만드는 거 보면 난 놈은 난 놈이에요
너무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팬으로서 너무 잘읽었습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