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
덴젤 커리Denzel Curry의 라이브 영상을 보고, 나도 모르게 뇌리에 스친 말이다.
뉴-메탈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곡 「불스 온 퍼레이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 그는,
그것 자체로 원곡과의 “차이를 생성”하면서 동시에 “동물-되기devinir-animal”를 이루어낸다.
분명 인간으로서 무대에 섰던 그의 신체는, 점점 동물적인 눈빛 / 표정 / 목소리 / 몸짓으로 변해 가며
종국에는 기어코 한 마리의 동물 또는 야수, 날짐승이 되어 포효한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동물은 인간 아래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가령 데카르트Descartes에게 동물은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없는, 인간보다 열등한 기계였다.
그는 어쩌면 덴젤 커리의 퍼포먼스를 보며 “스스로 이성을 내던져버리고,
열등한 존재로 퇴화하려 한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게 있어서 동물이 되는 것은 ‘퇴화’가 아니었다.
그는 동물-되기를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으로 설명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동물을 모방하거나 동물이 되는 행위는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들뢰즈는 똑같이 덴젤 커리의 퍼포먼스를 보며
“날짐승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창조적인 역행을 이룬다”고 갈채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동물을 인간의 지위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박살낸다.
들뢰즈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라는 화가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데,
그는 베이컨의 그림 자체가 자신의 존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립낫Slipknot,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그리고 데스 그립스Death Grips의 곡들을 들으며,
어느 날 문득 “마치 귀로 듣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같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이러한 생각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교황은 비명을 지르고, 인간이 가장 동물적인 순간은 바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라고 한다.
이들 역시 끊임없이 괴성과 비명을 지르며 기꺼이 동물이 되고, 인간을 초극하여 어마어마한 광기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이 동물들이 들려주는 음악의 공통점은, 비명을 지른다는 것을 제외하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폭력적인 퍼포먼스를 행하기도 하고, 음악을 듣다 보면 얻어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베이컨의 작품들 역시 폭력적이다. 그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회화를 “촉각의 주체”로 놓는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신체는 적나라하게 난도질당한다.
작품 속에서 신체적 폭력을 행하여, 촉각을 모든 감각의 위에 놓은 것이다.
이는 근대 합리주의적 사고의 전복으로 볼 수 있다. 근대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단연 시각이었다.
시각은 사물의 형상을 봄으로써 합리적 이성의 기관이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상대적으로 이성과 무관한 촉각을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베이컨의 손을 잡고 근대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역시 박살낸다.
슬립낫, 마릴린 맨슨, 데스 그립스, 그리고 덴젤 커리는 청각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감상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촉각적인 음악을 선사한다.
분명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음악은 아니지만, 오늘은 들뢰즈-되기를 통해
그의 귀를 갖고 이들의 음악을 감상해보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당신도 날짐승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동물이 되어 인간을 초극하게 될지도 모르니……
워드에서 쓴 글을 가져온 거라 보기 불편하실 것 같네요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신다면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철학도 미학도 음악도 글쓰기도 잘 모르는 저이지만 재미삼아 써봤습니다.
It's been a long time~
오랜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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