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Greatest, Most Influencial & Most Overwhelming
Hip-Hop Records of All Time
(30개의 앨범을 선정했으며, 나열 기준은 순위가 아닌 연도순입니다.)
1. Public Enemy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힙합의 틀을 벗어나 대중음악의 만신전에 당당히 오를 만한 첫 번째 힙합 앨범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Public Enemy의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이 아닐까요? 몇 년 동안 꾸준히 명반들이 배출되며 힙합을 상업화하고 혁신적인 작법을 개발하긴 했으나, 뭔가 정말 '예술적인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주는 앨범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저 신나는 길거리의 파티 음악에 불과했죠. 그것은 어쩌면 Public Enemy 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Yo! Bum Rush the Show>는 그룹의 색깔을 확실히 담고 있긴 했으나, 그것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는 아니란 인상이었죠. 그래서 Chuck D는 그들의 차기작을 힙합 버전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로 제작할 담대한 포부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정말로 힙합 버전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됩니다. 이 앨범은 정말 모든 면에서 꽉 차있습니다. 한 순간도 소리가 비는 순간을 허용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시끄러워지려 노력하죠. 하지만 동시에 소름돋을 정도로 질서정연합니다. 고작 한 곡에 수 개에서 수십 개의 샘플이 사용되는 것은 기본이고, The Bomb Squad는 그것들을 동시에 재생시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마치 요새 같은 프로덕션을 구축하죠. 거기에 Terminator X의 스크래치와 Flavor Flav의 찰진 추임새, 무엇보다도 선봉장처럼 우뚝 선 Chuck D의 폴리티컬 래핑이 더해지며 본작의 세계가 완성됩니다. The Beatles와 The Beach Boys가 다양한 소리를 쌓아올린 이래로, 마침내 서로 다른 출처의 샘플을 쌓아올려 제작된 맥시멀리즘 음악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심지어 반골적인 혁명의 메시지를 담은 랩과 함께요. 흔히 80년대의 힙합 앨범은 촌스럽다는 인상이 많지만, 이 앨범만큼은 다릅니다. 몇 곡은 랩메탈의 시초로 평가받을 만큼 락 친화적이기도 하고, 정말 많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응축시키는 지휘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위대한 힙합 앨범은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위대한 최초의 힙합 앨범은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이 아닌가 싶네요.
https://youtu.be/ZM5_6js19eM
2. Beastie Boys - Paul's Boutique
전작 <Licensed to Ill>로 랩 락이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에 입각시키며 파란을 일으켰던 Beastie Boys는 대단한 상업적 성공 이후로 전혀 믿을 수 없는 선택만을 합니다. Def Jam을 떠나고, 성공이 보장된 Rick Rubin의 프로듀싱을 마다하죠. 그리고 훗날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의 OST를 작업하게 될 Dust Brothers와 손을 잡아 자신들이 음악 작업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힙합 그룹으로서 Beastie Boys의 예술성이 한 단계 도약하기 시작하는데, 하는 음악은 힙합이지만 정신은 더 펑크적인 것 같아요. 이때의 Beastie Boys에게서도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의 Public Enemy가 가졌던 야망이 그대로 포착됩니다. 실제로 'The Sound of Science'에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곡을 3개나 샘플링하기도 하고요. 어찌 되었건, 무려 105곡이나 샘플링해 샘플 클리어 비용으로만 140만 달러가 소요된 것과 대조적으로 앨범은 즉흥적인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Beastie Boys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덜 다듬어진 작품이 <Paul's Boutique>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말은 즉슨 가장 창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죠. 샘플이 교체되거나 서로 화합을 이루는 가운데 Mike D, MCA, Ad-Rock은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간결한 래핑으로 작품의 이정표가 되고, 본래 하드코어 펑크 밴드로 시작했던 것답게 락 팬인 그들의 취향을 샘플의 출처로 가감없이 녹여냅니다. 물론 때로 Curtis Mayfield의 소울이나 James Brown의 펑크에 손을 대기도 하며 블랙뮤직적인 향취를 빼놓지 않죠. 그렇게 꾸며진 가상의 옷가게 컬렉션은 다채롭고도 화려합니다. 이 앨범은 그 옛적 사이키델릭 락 음악가들이 구현했던 업적을 샘플링으로 재현한 것과 다름없어요. 동시대의 그 어떤 힙합 앨범과 비교해도 가장 도전적인, 위대한 초기 플런더포닉스입니다. 비록 전위성이 높아진 만큼 상업성은 낮아졌기에 당시의 성적은 저조했으나, 시간은 클래식이 잊혀지게 두지 않았습니다. <Paul's Boutique>는 샘플링 작법이 기성 음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걸작입니다.
https://youtu.be/BptQHAW2T5M
3. A Tribe Called Quest - The Low End Theory
Native Tongues에서 가장 막내 축에 속하던 A Tribe Called Quest의 장난꾸러기들이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을 만들 거라고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1집 <People's Instinctive Travels and the Paths of Rhythm> 역시 훌륭한 앨범이었지만, Q-Tip은 그들의 두 번째 프로젝트를 제작할 때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는 마음가짐을 가졌죠. 그렇게 <The Low End Theory>는 A Tribe Called Quest의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재즈 힙합이란 장르를 성립하고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완성됩니다. 이 앨범을 비롯한 A Tribe Called Quest의 음악이 '재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애당초 재즈라는 한 장르에 국한시키기엔 샘플 출처가 소울, 펑크, 락 등 꽤 다양하기도 하고, 연주적인 음악이라기엔 여전히 샘플 의존도가 높습니다. 이것은 대체(Alternative) 힙합이죠. 그러나 <The Low End Theory>에서는 재즈의 피를 수혈해오기 위해 꽤 노력한 티가 납니다. 비밥에서나 느낄 법한 스윙 리듬을 힙합 버전으로 재현하려 노력했고, 샘플을 가공해 재즈 색소폰과 드럼의 질감을 살려냈죠. 구성 요소들을 절묘하게 조합해 재즈 특유의 박자감을 힙합의 형태로 개조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게다가 Q-Tip과 Phife Dawg의 자유분방한 라임과 리드미컬한 플로우, 입체적인 비유는 당대 최고 수준은 아닐지언정 현대 랩의 공식을 정립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이나 기술적으로 안정된 형태였어요. 무엇보다도 <The Low End Theory>가 위대한 점은, 그 강점들을 모두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Q-Tip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재즈 힙합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부 힙합이 한 차례 샘플링 중심의 맥시멀리즘 프로덕션에서 해체되며 미니멀리즘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 발생한 가장 강력한 사건. <The Low End Theory>는 힙합이 재즈를 참조함으로써, 더 복잡해지는 길을 택하지 않아도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원소들의 조합만으로 더 강력한 원동력을 취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 위대한 명반입니다. 심지어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듣는다고 해도 그 품위가 하나 손상되지 않는 진정한 걸작이죠.
https://youtu.be/1QWEPdgS3As
4. A Tribe Called Quest - Midnight Marauders
<The Low End Theory>는 재즈 힙합을 대표할 만한 얼터너티브 힙합 걸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작품으로 <Midnight Marauders>가 나왔죠. 이 시점에서 이미 A Tribe Called Quest는 음악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당도한 힙합 그룹이 되었습니다. 같은 날에 각각 Nirvana의 <Nevermind>와 Wu-Tang Clan의 <Enter The Wu-Tang (36 Chambers)>가 발매되었음에도, A Tribe Called Quest 앨범들의 가치는 전혀 무뎌지지 않았어요.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했기 때문이죠. 그 말 그대로, <Midnight Marauders>는 전작의 음악적 성공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한 단계 나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유사한 시기 서부에서 등장한 불후의 명반 <The Chronic>에 경쟁의식을 느끼며 더 선율적인 프로덕션을 강조한 Q-Tip의 전략은 유효했습니다. 더 다양한 샘플을 디깅했고, 더 디테일한 척도에서 드럼의 파형을 조절했죠. 그 결과 <Midnight Marauders>는 더 풍부하고 경쾌한 음악적 결과물을 컨셉 앨범의 형태로 엮어낸, A Tribe Called Quest의 또 다른 명반으로 거듭납니다. 전작만큼 절묘한 듀오 랩 호흡이나 탄력적인 텐션의 비트가 이어지진 않지만, 참여도에 있어 더 고르게 분배한 비중으로 엄연한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힙합의 발전에 있어 멜로디의 영역에서도 아직 갈 길이 무궁무진하다는 가능성을 연 혁신성이 돋보이죠. 플로우가 점잖아지긴 했어도 그에 걸맞게 코미디언과 민간 철학자를 오가며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컨셔스한 라임 또한 일품입니다. A Tribe Called Quest가 당시 재즈 힙합의 시류에 있어 유일한 선구자는 아니었을지언정, <Midnight Marauders>의 음악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재즈 랩 아티스트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심상을 도시적으로 포착하고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 절제함으로써 그들의 지성을 비트와 랩 양면에서 유지했죠. 재즈 힙합 역사상 최고의 명곡들이 어디 있냐고요? 바로 여기에 존재합니다. <The Low End Theory>가 재즈 힙합의 견고한 골격이 되었다면, <Midnight Marauders>는 근육과 살이 되어 재즈 힙합이라는 서브 장르를 실제적인 형태로 한 차례 완성시켰죠.
https://youtu.be/WHRnvjCkTsw
5. Wu-Tang Clan -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어쩌면 Wu-Tang Clan의 데뷔야말로 힙합 음악 내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이 아니었을까요? 특히 막대한 상업적 성공 없이 오직 순수히 음악만으로 힙합의 판도를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Enter The Wu-Tang (36 Chambers)>의 위상은 동시대의 그 어떤 힙합 앨범도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 저사양 녹음 장비, 일부 멤버들의 실패한 데뷔 경력, 제한된 예산과 단출한 비트 구성, 랩조차 처음 해보는 Masta Killa까지, 모든 우연들이 절묘하게 강점으로 승화되며 Wu-Tang의 첫 앨범은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시대의 최종장에서 패러다임을 뒤엎고 다른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죠. 점진적으로 간소화되고 흑인 음악 본연의 풍미를 힙합으로 살리려는 여러 시도들이 이어지던 와중, RZA의 로파이 미니멀리즘은 정말 획기적이었습니다. 작업 환경이 열약했던 것인지, 혹은 그가 간결함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앨범에 수록된 비트들의 카리스마를 고려해본다면, 저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RZA는 각 샘플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조각들만을 남긴 뒤 그것을 그저 반복시키기만 했습니다. 홍콩 무협 영화 대사와 함께 동양적으로 합성해 지금껏 그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비트들을 빚어냈습니다. 소울도, 재즈도, 펑크도 아니었죠. 이제서야 비로소 힙합이었습니다. 물론 <Enter The Wu-Tang (36 Chambers)>가 청사진 역할을 한 것은 랩에서도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RZA의 비트 위에서 아홉 랩 무공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메시지나 철학을 전달하려 하지 않았어요. 대신 갱스터리즘과 무협 레퍼런스를 섞어가며 본인들이 래퍼로서 가진 압도적인 역량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며 더 경이로운 플로우를 선보이려 노력했습니다. Inspectah Deck이나 Ghostface Killah 같이 비교적 정석적인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Method Man이나 Ol' Dirty Bastard처럼 매우 독특한 스타일도 존재했죠. 그들의 방법론은 동시대 최고의 래퍼들에게 영향을 끼쳐 힙합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입니다.
https://youtu.be/PBwAxmrE194
6. Nas - Illmatic
힙합 명반의 대명사,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이런 수식어조차도 이제 본작의 위대함을 찬미하기엔 너무나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Illmatic>이란 걸작이 힙합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형용하기엔 상당히도 어려운 법이지만, 그럼에도 하나 확실한 점은 <Illmatic>의 위대함이 결코 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Nas는 수년 전부터 게스트로 등장하는 곡마다 신인으로서 가장 강력한 입지를 가졌고, 가히 Rakim의 후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에 매료된 최고의 동부 프로듀서들이 그의 데뷔에 힘을 보탰죠. 프로듀서 라인업으로 보면 가히 올타임급인데, 심지어 당시로선 한 앨범, 그것도 갓 데뷔하는 신인의 앨범에 이렇게 많은 비트메이커들이 붙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만큼이나 Nas의 랩은 대단했죠. 완벽한 호흡과 진보적인 라이밍,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몰입감을 제공하는 플로우. 개인적으로, <Illmatic>의 수록곡 하나를 꼽아 다른 랩 앨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만큼이나 본작은 완벽한 랩 트랙들로 구성된 완벽한 앨범입니다. 심지어 구성조차도 너무 뛰어나죠. 앨범 길이가 1시간이 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당시의 힙합 시장에서, <Illmatic>은 채 40분조차 되지 않는 볼륨으로 컴팩트한 기승전결을 갖추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소위 입문자들이 듣기에 본작의 첫인상이 엄청나게 강렬하진 않으나, 이 앨범의 진정한 강점은 힙합 뉴비가 듣던 힙합 매니아가 듣던, 얼마나 많은 앨범을 듣고 돌아와도 그 풍미가 옅어지긴 커녕 현상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깊어진다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힙합에 대해 식견이 넓을수록 <Illmatic>은 더 대단하게 들리죠. 그만큼이나 Nas의 데뷔 앨범은 뉴욕 퀸즈 브릿지의 적나라한 현실을 음악적으로나 시적으로나 너무나 잘 포착해냈습니다. 재즈와 소울 음악의 코드를 이식해 게토의 향취를 재현한 비트 속 생동한 스토리텔링과 진솔한 표현, 그리고 래퍼로서의 자신감을 양껏 표하는 천재 작가 Nas의 랩. 그 조합을 능가할 랩 음반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 않아요. 훌륭한 데뷔 랩 앨범은 많습니다. 걸출한 완성도의 붐뱁 앨범도 많죠. 위대한 힙합 대작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Illmatic>은 그 세 개의 카테고리에서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e5PnuIRnJW8
7. The Notorious B.I.G. - Ready to Die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래퍼는 누구일까요? 힙합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랩 퍼포먼스가 담긴 앨범은 무엇일까요? 여기 그 두 질문에 모두 답해줄 걸작이 있습니다. 랩의 발전이 수 차례 이뤄지고 힙합 음악에 대한 사료가 충분히 축적된 현재, 가끔 Biggie가 최고의 랩 실력을 가졌는지 의심하는 의견들이 존재합니다. 그의 랩에 대한 평가가 생전 그의 카리스마와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과대평가되었다는 논지이죠. 백 번 양보해서, Biggie가 최고의 랩 작가가 아닐 수는 있습니다. Black Thought, MF DOOM, Lupe Fiasco 등 그보다 지적이고 복합적인 가사를 써내릴 수 있는 MC들이 존재하긴 했죠. 그렇지만 <Ready to Die>를 듣는 순간, The Notorious B.I.G.가 지구상 최고의 래퍼가 아니었다는 의심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는 소리라는 측면의 랩, 연주라는 측면의 랩, 그리고 시라는 측면의 랩에서 종합적으로 가장 훌륭한 래퍼였어요. 그가 가진 걸출한 세 역량 중 단 하나만 부족했어도 전설에 대한 평가가 붕괴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Biggie는 그 압도적인 성량을 가지고선 절묘한 단위에서 리듬을 역동적으로 종횡무진하며 범죄 일대기와 성공기를 너무나 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유일인이었습니다. James Brown의 펑크를 랩의 언어로 해석한다면 그것이 바로 The Notorious B.I.G. 음악이었어요. 그의 랩에는 연주적인 측면에서나 컨텐츠에서나 충만한 공감대가 존재했으나, 정확히 그처럼 랩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그 본인밖에 없었습니다. 헤비톤급의 라임이 묵직한 붐뱁 스네어와 함께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쾌감을 대체할 래퍼가 얼마나 될까요? 무자비한 하드코어 범죄를 논하다가도 자살을 묘사할 정도로 자기혐오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감성을 표출하는 Biggie의 서술은 그야말로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커머셜 MC이기까지 했어요. 아직까지 거슬릴 수준까진 아니었던 Puff Daddy의 총괄 하에, Biggie는 Easy Mo Bee와 DJ Premier의 정통 붐뱁 비트 위 압도적인 실력과 워드플레이를 과시하기도, 영화적인 비트 위 여운이 짙은 스토리텔링을 남기기도, The Isley Brothers의 알앤비 슬로우 잼과 제법 잘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만능이 종합된 위대한 랩 앨범이죠.
https://youtu.be/phaJXp_zMYM
8. Mobb Deep - The Infamous
퀸즈, 나아가 뉴욕 힙합의 사운드를 대표하는 음반은 무엇일까요? 물론 퀸즈에는 <Illmatic>이라는 막강한 후보가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Mobb Deep의 <The Infamous>를 꼽고 싶습니다. 본작이 위대한 이유는 다소 평범했던 수준의 <Juvenile Hell>로부터 경이로운 수준의 발전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Q-Tip, DJ Premier, Pete Rock, RZA 등이 각자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로 이스트코스트 붐뱁의 진화를 경이로운 수준으로 촉진시키고 있던 무렵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창출해냈기 때문입니다. Havoc의 프로덕션은 그 중에서도 RZA와 Q-Tip의 영향을 유독 짙게 받은 것 같죠. 음산한 건반과 베이스 운용으로 영화적인 톤을 조성하는 능력은 RZA에게서, 상투적이지 않은 독특한 질감의 드럼은 Q-Tip에서 물려받았습니다. 특히 Q-Tip은 아직 어렸던 Havoc에게 여러 조언을 주며 앨범의 몇 트랙을 직접 프로듀싱하기도 했죠. 그렇게 완성된 <The Infamous>만의 드럼은 힙합이 완전히 처음 접하는 재질이었습니다. 단순 림샷이라 치부하기에도 굉장히 금속질인, 경량화되었으면서도 타격감은 극대화된 Mobb Deep만의 정체성이었죠. 그러나 Havoc의 진정한 재능은 그 드럼 위 장식되는 구성 요소들을 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 경쾌한 재즈 피아노의 피치를 완전히 낮춰버려 거의 베이스 음역대로 만들어버린 후, 은은한 신스와 위협적인 베이스를 더하며 마치 마피아 영화의 스릴러를 청각화한 듯한 공포스러운 하드코어 힙합 프로덕션을 건설했죠. 그렇게 해서 결과물은? 힙합 역사상 최고의 비트들이 바로 이 앨범에 있습니다. 그리고 Prodigy와 Havoc은 그들이 만들어낸 퀸즈의 잔혹한 우범가 속에서 비참한 현실을 시적으로, 그리고 냉담하게 포착해냅니다. 프로듀서로서의 압도적인 재능에 묻혀 잘 부각되진 않지만, Havoc은 엄연히 듀오의 일원으로서 훌륭한 랩을 선보입니다. 물론 Mobb Deep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주연은 Prodigy죠. 그의 무심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작가로서 그가 가진 독보적인 재능과 결합되며 단순 랩 스킬로 설명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승화되고, 동시대와 후대의 하드코어 래퍼들에게 경쟁자의 뼛속까지 위협하는 가사는 바로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몸소 보여주었죠.
https://youtu.be/yoYZf-lBF_U
9. Raekwon - Only Built 4 Cuban Linx...
Wu-Tang Clan은 그야말로 최고의 래퍼들만 모인, 말도 안되게 재능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본인들끼리 한 치도 밀리지 않으며 불꽃 튀는 경쟁을 하다가도, 다른 래퍼의 앨범에 등장했다 하면 그 앨범을 통틀어서도 가장 인상적인 벌스를 남길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졌죠. 그 Wu-Tang Clan 중에서도 순수하게 랩 실력으로만 따지면 최고봉에 있는 이들이 바로 Raekwon과 Ghostface Killah였습니다. 그리고 한때 서로의 정적이었던 이들은 의기투합해 한 서브 장르의 성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쿵푸 영화를 랩으로 묘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걸출한 MC였던 둘은 Kool G Rap이 선도했던 마피오소 랩을 통해 갱 범죄와 빈민가에서의 생존을 럭셔리하게 포장하며, 동시에 압도적인 라이밍으로 래퍼로서의 역량을 과시하죠. Raekwon과 Ghostface Killah가 각각 주연과 조연으로 분하며 한 벌스씩 주고받는 랩 트랙의 호흡은 투탑 체제로 기획된 모든 랩 앨범을 통틀어서도 가장 몰입감이 높습니다. 물론 놀랍게도 그에 준할 만큼 뛰어난 게스트들의 활약도 존재하고요. 무엇보다도, 여느 Wu-Tang 멤버들의 솔로 앨범과 마찬가지로 이 앨범 역시 전성기의 RZA가 프로듀싱했습니다. 그의 비트메이킹은 미니멀리즘을 기반으로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것에서 벗어나, 더 많은 요소를 첨가해 영화적인 프로덕션을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최면적인 루프 제작 방식은 유지한 채, 주로 현악을 이용하여 갱스터 영화의 삽입곡 같이 엄중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조성하죠. 모든 면에서 마치 힙합으로 듣는 최초의 마피아 필름과도 같은 명작, 그것이 바로 <Only Built 4 Cuban Linx...>였습니다. 랩 앨범으로서의 압도적인 완성도로 동시대의 경쟁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본작은 곧 다른 MC들까지 그들의 마피오소 컨셉을 차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지금도 적지 않은 래퍼들이 우수한 라임과 어휘력으로 범죄 현장을 고급스럽게 미화하고 있죠. 무엇보다 <Only Built 4 Cuban Linx...>의 주인공들이 자랑스러울 만한 점은, 래퍼들이나 프로듀서들이나 하나 같이 이들의 업적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업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유지하며 갈고 닦고 있다는 것입니다.
https://youtu.be/jgh10of6DKA
10. GZA - Liquid Swords
무당파는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며 힙합 씬에 일약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이후 가장 인상적인 족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GZA의 <Liquid Swords>일 것입니다. 마초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래퍼들이 주를 이뤘던 Wu-Tang 내에서도 GZA의 랩은 유난히 점잖고도 지적이었죠. 그리고 RZA가 문화계에 대해 품은 탐구 욕구는 GZA의 그것과 유난히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시기 수많은 Wu-Tang 솔로작이 존재했음에도, 심지어 같은 해에 <Only Built 4 Cuban Linx..>라는 걸출한 랩 걸작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RZA는 GZA를 위해 그가 가진 최고의 역량을 선사했습니다. RZA의 가장 실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비트들이 본작에 수록되었죠. <장군 암살자(Shogun Assassin, 1980)>을 기반으로 넓은 범위의 과거 흑인 음악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며 신비로운 비트들을 창조한 RZA의 프로덕션은 붐뱁의 관점,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관점, 그리고 앱스트랙 힙합의 관점 중 그 어느 쪽으로 봐도 그저 경이롭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죠. 스타카토 건반, 강렬한 신스, 초기 칩멍크 소울 등이 뇌리를 스쳐가는 가운데, GZA는 그룹 내에서도 압도적인 어휘력을 뽐내며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장을 몇 번이고 고안해냅니다. 그의 랩은 유연하고도 현학적이었어요. 마치 체스를 두는 선수의 자세 내지 검법을 연마하는 사무라이의 태세처럼, GZA의 고차원적인 라이밍과 플로우는 <Liquid Swords>의 음악을 마음껏 오가며 독특한 세계관을 그려냅니다. Method Man에게 곡의 주권이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거나, 타 Wu-Tang 멤버들의 역량이 폭발하거나, 혹은 마지막 곡에서 Killah Priest에게 자리를 양도하는 예상 외의 순간까지도 모두 GZA의 현안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강대한 응집력이야말로 향후 앱스트랙 힙합이란 장르가 뿌리내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아닐까요? RZA와 GZA, Clan의 초기 멤버들이 각자의 최고를 투영한 명반 <Liquid Swords>. 아직까지도 연구가치가 넘쳐난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날 수록 클래식으로서의 기품이 더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5qDhaWqeNMc
11. JAY-Z - Reasonable Doubt
데뷔 앨범이 그 아티스트의 최고작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많은 래퍼들은 랩 게임에서의 성공에 대한 야망을 기반으로 그들의 데뷔를 클래식으로 장식할 꿈을 꾸곤 했죠. 그리고 JAY-Z는 정말로 그의 데뷔 앨범을 클래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동시기에선 더 큰 임팩트를 가졌던 앨범들에 눌려, 본인의 디스코그래피에선 상업적으로 훨씬 성공하면서도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앨범들에 비해 잘 언급되지 않았으나, <Reasonable Doubt>이야말로 JAY-Z의 진정한 최고작이자 힙합의 황금기에서도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입니다. 자신보다도 어린 래퍼들이 벌써부터 씬의 중심에 서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마약상과 프리스타일 래퍼로서의 이중생활을 이어가며 조용하게 기반을 쌓고 있던 JAY-Z는 마침내 충분히 준비가 되었을 시기에 첫 앨범을 발표합니다. <Reasonable Doubt>은 순수 완성도를 떠나 다른 '뉴욕의 왕' 후보들의 데뷔작들과 많은 공통분모를 가집니다. 데뷔 신인을 위해 여러 프로듀서가 담합해 비트를 제공한 것은 <Illmatic> 쪽을, 장르적인 쾌감과 커머셜한 감각을 이루 갖춘 것은 <Ready to Die> 쪽을 닮았죠. 어쩌면 래퍼로서 소화할 수 있는 음악적 스펙트럼은 Biggie보다도 JAY-Z 쪽이 더 넓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본작 내에서 JAY-Z가 커머셜 MC로서 가진 역량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지만, 대신 그는 야망이 넘치는 신인답게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가장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플로우를 소화해내기에 이릅니다. 모든 라임과 라인 한 줄은 허투루 쓰인 법이 없이 재치있고, 향후 후배들에게 구전될 정도로 인상적인 명가사들이 가득하죠. 그것들을 깔끔하고 현란하게 뱉어내는 방식마저 세련된 신사와도 같았습니다. 마약상으로서의 경력을 고급 범죄로 포장하면서도, 마치 후회에 젖은 듯이 자조하는 듯한 어조와 삶에서 얻은 교훈을 교조적이지 않게 전달하는 작사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내로라하는 프로듀서들이 지난 날의 동부 힙합 음악을 교훈 삼아 주조한 고급스러운 붐뱁 비트들이 그런 JAY-Z의 재능을 보조했죠. 결과적으로, <Reasonable Doubt>은 가장 도시적인 마피오소 걸작이자 힙합 최고의 래퍼에게 어울리는 데뷔가 되었습니다.
https://youtu.be/DvTcUCeIJEc
12. DJ Shadow - Endtroducing.....
그 기원부터, 힙합은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났습니다. 현대적이고, 미술적이고, 공간적인 음악이었죠. 어쩌면 DJ Kool Herc가 Merry-Go-Round 테크닉을 처음 선보였을 때부터 <Endtroducing.....> 같은 작품의 등장은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턴테이블과 디제잉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다른 장르들을 힙합이라는 이름의 샘플 뮤직으로 다시 명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초래한 거대한 연쇄반응과도 같죠. 어쨌든, 그렇게 <Endtroducing.....>은 역사상 최초로 오직 샘플만을 사용해서 제작된 앨범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손 안에서 말이죠. Public Enemy와 Beastie Boys, 그리고 De La Soul 이후로 마침내 플런더포닉스라는 기법을 정의할 만한 인스트러멘탈 힙합 대작이 등장한 것이죠. 그리고 본작의 위대함은 비단 상징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DJ Shadow는 너무 유명한 곡이라면 샘플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듣고 애정을 가진 음악들의 영향을 충실히 녹여냅니다. <Endtroducing.....>이 샘플 기반 음악으로서 정말 위대한 점은, 샘플들의 융합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그 자체가 마치 하나의 원본처럼 들리면서도 해체 분석할 시 샘플이 되어 활용된 음악들의 영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펑크 브레이크비트부터 시작해 락의 베이스, 재즈 키보드, 포크 피아노, 블루스 기타 등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아티스트부터 DJ Shadow의 작업이 아니었다면 재발견되는 것마저 어려웠을 밴드의 음악까지 턴테이블리즘의 마법으로 하나가 되죠. <Endtroducing.....>은 단순히 훌륭한 힙합 비트들의 모음집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트립 합이자 후대의 플런더포닉스 명반들을 위한 교본이었고, 무엇보다도 DJ Shadow가 고상하고도 지적인 LP 문화에 바치는 하나의 헌사였습니다. 랩 대신 샘플들이 각자의 얘기를 나누며 생동하게 살아움직이는, 그러면서도 떨칠 수 없는 애상과 멜랑꼴리함이 표면을 부드럽게 스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음악. 샘플들은 조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DJ Shadow의 손 안에서 다시 악기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았고, 분명히 연주되었습니다. 그렇게 힙합 샘플링은 예술이 되었습니다.
https://youtu.be/InFbBlpDTfQ
13. Lauryn Hill -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당대 그 어떤 힙합 아티스트 중 Lauryn Hill만큼 오리지널한 아티스트는 없었습니다. 내로라하는 남성 래퍼들 사이에서도 실력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였는데, 어쩌면 랩보다도 더 훌륭한 가창 실력을 가지고 있었죠. 물론 그녀가 랩과 보컬 양면에서 재능을 보인 유일한 흑인 여성은 아니었으나, 그 누구도 Lauryn Hill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André 3000만이 유사한 부류였는데, 그는 그의 출신에서 독립하는 선택을 하진 않았죠. 반면 The Fugees를 떠나고서도 오히려 Lauryn의 재능은 만개하기만 했습니다. 단순히 음악적으로 독립한 것을 넘어서, 진정 한 개인으로서 독립했어요. Wyclef Jean과의 결별, 과거 동료들과의 불화, 그리고 첫 아이 출산. <The Mideducation of Lauryn Hill>은 Lauryn Hill이란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탄생한 앨범이었습니다. 그녀는 역경과 장애를 모두 음악의 영감으로 전환하며 그 누구보다 진솔하고 당당하게 악보 위 심상을 펼쳐갔죠. 본작의 성과가 온전히 그녀의 몫은 아닐지라도, 그 총체적인 천재성을 주도하는 강력한 존재감은 그녀의 것이었습니다. The Fugees 때부터 이민자 음악을 유연하게 수용하던 그녀답게, 앨범은 힙합과 알앤비, 소울과 레게, 가스펠을 자연스럽게 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힙합 소울을 제시했습니다. 한 앨범에 Wu-Tang Clan과 The Doors의 흔적이 공존한다니요. 당시 부상하던 네오 소울 대작 중에서도 구성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Lauryn Hill 본인의 역량이 훌륭했죠. 랩을 할 때는 견고한 호흡과 플로우로 무게중심을 잡으면서도, 감정적인 호소력으로 충만해 진솔함이 더욱 돋보이는 그녀의 보컬에선 Aretha Franklin이나 Whitney Houston 같은 과거 디바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본작의 게스트는 Nas나 Common이 아닌 Mary J. Blige와 D'Angelo죠. 개인의 사상을 앞서나간 음악으로 담아낸 본작의 존재로 Kanye West가 노래를 부르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Drake가 힙합과 알앤비 사이를 오갈 수 있었으며, <IGOR>라는 역작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앨범의 테마가 단순 여성주의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경지까지 도달했다는 증거죠.
https://youtu.be/cE-bnWqLqxE
14. Outkast - Aquemini
힙합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듀오를 꼽으라면, 열 중에 아홉은 아마 Outkast를 고를 것입니다. 그만큼 이들의 대중적 입지와 전위적인 힙합 아티스트로서의 예술성은 타 래퍼들과 비교가 불가한 수준이죠. 그들은 편한 길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독립적으로 행동했습니다. <ATLiens>가 André 3000과 Big Boi는 단순히 탁월한 역량의 남부 힙합 듀오가 아닌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예술가라는 것을 선포한 야심작이었다면, <Aquemini>는 이들 둘을 음악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지에 올려놨어요. 매우 정교하고도 도전적인데, 심지어 대중적이기까지 한 작품이죠. 남부의 다른 래퍼들이 아직까지 포주 랩이나 멤피스 랩을 하고 있을 무렵, Outkast는 이렇게 이른 속도로 나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방가르드 힙합 음반을 배출했습니다. 이미 SF 컨셉을 기반으로 재즈 힙합과 사이키델리아를 융합해 독특한 형태의 더티 사우스를 제안한 Outkast와 Organized Noize이지만, <Aquemini>에 이르러 이들의 시도는 더욱 과감해집니다. 특히 프로듀싱 과정에서 Outkast의 비중이 더 늘어나게 되며 이들의 창의력이 가감없이 드러나게 되죠. 무엇보다 샘플 중심의 프로덕션에서 실물 악기 연주를 선호하게 되며 Outkast의 음악은 더욱 실험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기타, 하모니카, 호른, 피아노, 신시사이저 등 힙합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악기들의 조합으로 구성한 프로덕션은 매우 유기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루프 중심의 음악이라는 힙합의 미덕을 준수했습니다. 특히 이때까지만 해도 Big Boi의 참여 비중이 더 높았기에 저평가된 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죠. 물론 Big Boi가 프로듀싱에서 앞서는 것 이상으로 André 3000은 랩에서 앞서나갑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록 예측 불가하고 기묘한 그루브를 구사하는 그의 라이밍은 당대 힙합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의 천재성을 따라잡을 래퍼는 나타나지 않은 것 같고요. 그렇게 이 두 천재는 남부 힙합에서 블루스, 피펑크, 컨트리, 네오 소울, 심지어 하드 락과 사이키델릭 락까지 엮어내고, 독특한 관점에서 사회 다방면을 관찰하며 힙합 역사상 가장 전위적인 음반을 창조해냈습니다.
https://youtu.be/F0tamp9XdqU
15. The Roots - Things Fall Apart
Soulquarians Collective는 비단 힙합을 떠나 흑인 음악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집단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음악은 지적이고, 실험적이었으며, 품위가 있었죠. 그들은 대중적 성과를 떠나 시류를 거부하고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의식적인 주제를 성숙한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과거 흑인 음악의 영혼을 발굴하고 재해석해 새롭게 단장했던 그들, 네오 소울의 발전에는 이들의 공헌을 결코 제할 수 없죠. 그 모든 중심에는 Questlove라는 한 드러머가 있었습니다. 그가 연주한 드럼 리듬 위에는 D'Angelo의 <Voodoo>가 쌓아올려지기도 했고, 때론 Common의 <Like Water for Chocolate>이 피어나기도 했으며, Erykah Badu의 <Mama's Gun>으로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Things Fall Apart>가 있었습니다. 그가 몸담은 밴드 The Roots의 4번째 앨범, 그리고 통상적으로 그들의 최고작으로 인정받는 앨범. 무엇이 <Things Fall Apart>를 그토록 고평가받게 했을까요? <Things Fall Apart>는 어딘가 두드러지는 혁신을 상징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경이로운 랩 스킬이나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힙합 앨범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밴드의 앙상블이 가장 훌륭했죠. Questlove의 드럼을 시작으로 끼얹어지는 키보드, 기타, 베이스, 색소폰 등의 악기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일정 수준의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그 안에서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그루브를 선사했죠. 기성 힙합 프로덕션과 다른 길을 걸어오며 진정한 의미에서 '재즈 힙합'을 하던 그들의 호흡이 마침내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프론트맨인 Black Thought의 완벽주의적인 랩은 경이로운 어휘력과 고차원적인 라이밍을 토대로 스웨거부터 흑인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했고, Malik B는 때로 Black Thought에 뒤치지 않은 벌스를 소화하며 그를 보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J Dilla를 비롯한 Soulquarians 멤버들이 있었고, 이 거대한 합작은 향후 앞서 언급했던 또 다른 대작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초석이 됩니다. 시대정신과 소시민들의 호흡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얼터너티브 힙합의 역작, <Things Fall Apart>는 힙합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자유분방하고도 의식적인 음반입니다.
https://youtu.be/MJCHeEQV454
16. Mos Def - Black On Both Sides
어떤 면에서는 뉴욕을 상징하기에 가장 적법한 음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Yasiin Bey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Mos Def는 세기말 컨셔스 힙합과 백팩 랩의 대표주자였고, Soulquarians 운동의 조력자이자 역대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Talib Kweli와 함께 <Mos Def & Talib Kweli Are Black Star>로 씬에 중후하게 데뷔한 그의 랩에는 도회지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들을 조명하는 웅변력이 있었고, 학문적인 그의 표현은 랩이 진정 새로운 형태의 시임을 확신케 하는 가장 완벽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첫 솔로 정규작 <Black On Both Sides>에 이르러 Mos Def는 그의 관점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의 레게톤 목소리에는 애향심과 흑인 문화에 대한 자부심, 상업성을 거부하고 영(靈)을 탐구하겠다는 신념, 흑인 민족주의가 서려있었습니다. 또한 더욱 고차원적으로 발전한 그의 라임에는 A Tribe Called Quest나 Black Thought 등 앞서 의식적인 주제를 탐구했던 MC들의 창의적 표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죠. 그리고 최고 수준의 붐뱁 비트들이 수록되었죠. 뉴욕 언더그라운드 씬을 대표하는 실력파 비트메이커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Illmatic>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것들이었고, 그 사이에마저도 뉴욕 올드스쿨 힙합에 대한 애정이 서려있었습니다. 마치 진성 시네필 출신의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마냥, 이전 세대의 힙합 곡들이 넘치는 애정으로 오마주되었죠. Spoonie Gee, Wu-Tang Clan, Beastie Boys, Boogie Down Production, Digable Planets, Stetsasonic, 그리고 The Notorious B.I.G.가 Ayatollah의 초기 칩멍크 소울과 Preemo 비트, 네오 소울 사이에 있었습니다. 오마주 자체가 작품의 의도를 그려내는, 위대한 경지의 헌정이죠. 힙합 매니아일수록 더 깨닫기 쉽겠지만, 결국 이 앨범 자체가 뉴욕입니다. 그리고 Mos Def는 확고한 관점을 견지하며 MC로서의 탁월한 역량을 통해 아프로센티미즘적인 라임을 학문적인 방식으로 집필하죠. 허나 결국 그가 전달하려는 것은 배척보다는 사랑이었습니다. 프리미엄 품질의 비트들과 엘리트 래핑이 담긴, <Black On Both Sides>는 힙합에 대한 찬사이자 흑인 민족성에 대한 가장 강렬한 러브레터입니다.
https://youtu.be/01yUzXQctcM
17. Ghostface Killah - Supreme Clientele
Wu-Tang Clan의 무공들은 한 명 한 명이 최고 수준의 래퍼들이었습니다. 허나 각자도생의 길에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겨내지 못했죠. 정규 1집이 Wu-Tang Clan 결성 전에 발매된 GZA를 제외한다면, 소포모어 징크스를 유일하게 극복해내다 못해 아예 산산히 부숴버린 장본인은 바로 Ghostface Killah였습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그들의 전성기를 Wu-Tang의 전성기와 함께했지만, Ghostface의 전성기는 질적 저하도 거의 없이 그보다 훨씬 길었죠. 그리고 그 20년 커리어의 방점이 되는 걸작이 바로 <Supreme Clientele>이었죠. <Ironman>이 완성도로는 힙합 클래식의 경지였으나 <Only Built 4 Cuban Linx...>와 차별성이 거의 없었다면, <Supreme Clientele>은 RZA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도 오히려 더 훌륭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위대한 랩 앨범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죠. 뛰어난 비트와 뛰어난 랩. RZA는 여전히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를 지키는 반면, 다른 프로듀서들이 RZA 본인보다도 더 Wu-Tang의 소울을 가진 최상급의 언더그라운드 붐뱁 비트들을 제작했죠. 마치 앨범에 하나의 색채가 도는 것마냥, 주로 소울 음악에 기반한 <Supreme Clientele>의 붐뱁 프로덕션 기조는 매우 확고했습니다. 하지만 Ghostface Killah 본인의 활약이 없었다면 <Supreme Clientele>이 이 정도의 걸작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뇨와 환청을 겪으며 그의 랩에서도 자유분방한 표현력 빼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랩메이킹에 도입하며 막힘없이 라임을 적기 시작했어요. 그가 비트 위에서 뱉는 구절은 굉장히 멋들어지게 들렸지만, 실은 대부분이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들에 불과해요. 중요한 것은, 수많은 고급 어휘들이 추상적으로 스쳐가는 가운데 그의 무의식 속에서 가끔 정말 날카로운 라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이죠.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앨범 단위의 랩으로 담아낸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밍크 코트와 챔피언 벨트를 두른 채 능청스레 스웨거를 뽐내는 Ghostface Killah였음에도, 그것이 결코 우습지 않고 되려 후대 힙합 아티스트들의 철학과 앱스트랙 래퍼들의 작사법에 지대한 영향을 준 데에는 역시 그의 실력이 한몫했습니다.
https://youtu.be/S0bYHTApml0
18. Outkast - Stankonia
기초적인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남부 힙합의 음악적 성취를 주도한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많지만, Outkast의 두 젊은이야말로 진정 더티 사우스를 완성한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Aquemini>로 완성한 업적을 그들 스스로 초월해버리기까지 했죠. <Stankonia>의 발표를 직접 접한 이였다면, 필히 이 듀오의 음악적 야망이 어디까지 뻗어가려 하는지 두렵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다만 정확히 따진다면 아티스트로서 Big Boi는 확실히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관건은 André 3000이었죠. 그는 MC로서나 음악가로서나 발전할 길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전작 때까지만 해도 Big Boi의 프로듀싱 비중이 좀 더 높았지만, 본작부터 André의 취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래퍼임에도 오히려 힙합보다 다른 장르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죠. 몽환적인 이상향으로 현실 도피를 꿈꾸는 히피는 힙합 씬에 결코 흔치 않은 캐릭터였고, 오히려 레이브 씬이나 사이키델릭 락에 더 잘 어울렸습니다. 때문에 <Stankonia>의 음악 세계에는 Jimi Hendrix, Prince, George Clinton 같은 아티스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죠. 남부 힙합의 골격에 피펑크, 사이키델릭 락, 테크노, 가스펠 등 상이한 장르들이 뒤섞이며 매우 급진적인 음악이 제작된 것입니다. 드럼을 백마스킹하는 한편, BPM 154의 드럼 앤 베이스를 소화하기도 하죠. 왠만한 익스페리멘탈 힙합 음반조차 <Stankonia>의 공격적인 장르 융합에 비견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25년이란 시간이 지난 현재도 마찬가지이죠. 정신없이 시끄럽고 빠르다가도 금새 침울해지고 몽롱하게 변화하는 가상 세계에서 Big Boi와 André 3000는 서로 다른 자세로 대응합니다. Big Boi는 좀 더 갱스터나 포주 랩에 가까운 스타일로 남부의 동료들과 힙합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반면, André는 보컬과 랩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사회 문제에 대해 진중하게 접근하다가도 형이상학적인 라임을 마구 쏟아내며 말도 안되게 경이로운 벌스들을 소화하죠. Outkast의 정체성을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본다면, 힙합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걸작 <Stankonia>만큼이나 그들을 대표하기에 적절한 앨범은 없을 것입니다.
https://youtu.be/lVehcuJXe6I
19. JAY-Z - The Blueprint
대중성으로나 음악성으로나, 누구나 Biggie가 뉴욕의 왕으로 불리기에 적법한 인물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사후였죠. Nas, DMX, Mobb Deep 등이 그 모든 조건을 갖추지는 못한 채 유의미하지 않은 격차에서 경쟁 중일 뿐이었어요. 그 중에는 JAY-Z 역시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반 <Reasonable Doubt>에 씬에 등장한 후 탁월한 랩 스킬과 우수한 상업성을 겸비하며 나날이 큰 성적을 거둬가던 그였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더 큰 성공을 이룩할 수록 음악적 평가는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JAY-Z는 훌륭한 래퍼였고, 필요한 인재를 발굴할 줄도 알았으며, 클럽의 취향을 노릴 줄도 알았지만 정작 진정 좋은 앨범을 내놓진 못했죠. 해서 JAY-Z는 그가 당면한 과제를 아주 강력한 한 방으로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The Blueprint>가 최고가 되려는 야망으로 가득찬 작품이 된 이유죠. 전작에서 기용했던 Kanye West와 Just Blaze, 그리고 Bink!의 작법을 앨범 단위로 도입한 시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소울 특유의 따스한 질감과 락의 강렬한 멜로디는 천재적인 신예들에 의해 피치업되고 해체, 다시 조립되며 칩멍크 소울 프로덕션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곡 단위에서만 실험적으로 시도되던 작법이 고작 2주 만에 음반째로 완성되며 드디어 빛을 본 것이죠. 가장 예술적인 방식으로 힙합에 화성학적 가치를 부여한 이들의 비트는 힙합 역사에서 최고로 언급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Kanye는 Jackson 5부터 The Doors까지 아우르며 그들의 곡을 육감적으로 커팅해 천부적인 리듬감을 선사했고, Just Blaze는 승리감에 도취되게 할 만큼 강력한 비트부터 잔잔한 발라드까지 소화할 수 있는 만능이었죠. 물론 Bink! 또한 앨범에서 결코 제외되어선 중대한 순간마다 제 역할을 톡톡히 했고요. 그리고 그 모든 스타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래퍼는 오직 JAY-Z뿐이었습니다. 천부적인 랩 테크닉으로 담백하게 박자를 오가는 제이지의 라임은 그의 음악적 역량 자체를 증빙하기도, 라이벌들을 대대적으로 견제하기도, 진솔하고 연약한 내면을 드러내며 거리의 신뢰를 공고히 하기까지 했습니다. 단 하나의 앨범만으로 이뤄낸 업적들이야말로 본작이 진정 위대한 힙합 음반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죠.
https://youtu.be/UCFAkD4EkYI
20. Viktor Vaughn - Vaudeville Villain
물론 현재에 와서 재평가되며 그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전에도 언더그라운드에서 MF DOOM의 컨셉 플레이는 나름 유명했습니다. 이름은 마블 코믹스 최고의 빌런에서 따오고선 정작 <글레디에이터(Gladiator, 2000)>의 검투사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가 엄청난 수량의 라임을 배치하며 엽기적인 코미디 라인을 내놓는다니요, 얼마나 컬트적인가요? 어느 시대에 등장했어도 그의 컨셉은 만인을 사로잡을 만큼이나 매력적이지만, 이토록 이른 시기에 등장했으니 두 말할 것도 없죠. <Operation: Doomsday>로 데뷔한 후 마치 DOOM은 그런 관심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한 술 더 떠 가면을 벗은 컨셉을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Dr. Doom이 가면을 벗는다면 그 안의 Victor Von Doom이 모습을 드러내겠죠. MF DOOM의 경우 Viktor Vaughn이었고요. Viktor의 라임 패턴은 이전처럼 추상적이고 실험적이기보다, 정통적인 랩에서부터 아주 기술적으로 발전한 형태입니다. 랩을 향한 그의 원초적인 욕구는 마치 타락한 버전의 Nas이나 Raekwon를 목도하는 것 같죠. 유례없이 공격적이고 기술적인 면모가 표출되는 Viktor Vaughn 페르소나는 여타 MF DOOM 시리즈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도 선사합니다. 타임머신을 수리하고 현재 시간대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공상과학적 라임들을 꾸리는 Viktor는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셀프 프로듀싱 타이틀마저 포기합니다. 그의 독창적인 비트들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타 프로듀서들이 프로듀싱한 비트는 뉴욕 밤거리의 스산하고 습한 공기를 재현할 만큼 으스스하고 SF 펑크적입니다. 창의성 면에서는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부족할 지라도 전반적인 톤앤매너에서만큼은 더 높은 몰입감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1996년의 <ATLiens>와 <Dr. Octagonecologyst> 이후로 이 정도로 순도 높은 SF 컨셉의 힙합 음반은 처음이죠. 독특한 컨셉으로 고평가받는다고 주장하는 혹자의 의견도 존재하긴 하나, 애당초 결과물 자체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컨셉 또한 그저 장난질 정도로 받아들여졌겠죠. <Vaudeville Villain>은 당대 발표된 독창적인 힙합 음반 중에서도 가장 음험하고도 전율적인 작품입니다.
https://youtu.be/WyiB-lkQBFY
21. Madvillain - Madvillainy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성서가 어느새 힙합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은 그것보다도, 그만한 완성도와 위상을 지닌 걸작이 즉흥적인 원격 작업을 통해 발표된 사이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MF DOOM과 Madlib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대체 불가한 역량과 스타일을 지닌 베테랑들이었으나, 그들은 2년 간의 <Madvillainy> 작업 당시 서로 비교우위를 가지는 지점에 집중하며 그저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입니다. 과거의 사이키델릭 락 음악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Madvillain 듀오는 알코올과 환각버섯에 취한 채 자유분방하게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개중에는 역사상 최초로 아코디언 곡을 샘플링해보자는 것부터, 4분의 3박자인 브라질 재즈 곡을 4분의 4박자로 만드는 것, <아이언사이드(Ironside, 1967~1975)>의 테마곡을 힙합 곡으로 가공하자는 것까지 매우 무궁무진했습니다. 분명 재즈와 소울에 기반하고 있지만 잔뜩 취한 Lord Quas는 사이키델릭한 감성을 DOOM 특유의 음악 스타일과 섞어내며 완전히 새로운 힙합 프로덕션을 개척해냈죠. 수십 개의 샘플과 다이얼로그가 빈틈없이 연결되며 마치 46분 분량의 곡을 듣는 것마냥, 이들의 슈퍼빌런 지침서는 비밥과 브라질 음악, 마블 코믹스 애니메이션과 B급 공포 영화를 오가며 거악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MF DOOM은 경지에 다다른 Madlib의 괴기한 비트들에 마땅히 걸맞는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라임을 써내리며 힙합의 미덕에서 완전히 엇나가는 DOOM의 플로우는 그 자체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었죠. 음험한 저출력의 보컬과 한 줄을 넘어가는 분량의 고도화된 라임 패턴, 겹겹이 축적되는 말장난과 자유롭게 채택하는 테마까지, 언더그라운드의 마왕은 무도할 정도의 창의력을 뽐냈습니다. 그리고 두 천재의 환상적인 시너지는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며 시간이 지날 수록 되려 더 짙어지기만 하는 영향력을 행사했죠. 위대한 언더그라운드 힙합 음반은 많지만, 그 중 진정 만고불멸하게 남을 최고의 음반은 역시 두 천재 악당의 최고가 집결된 <Madvillainy>인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rpaonSDPw7Y
22. MF DOOM - Mm..Food
2003년부터 2004년까지 MF DOOM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힙합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래퍼를 꼽자면, 음악적으로 이 시기의 MF DOOM은 분명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야 했겠죠. <Take Me To Your Leader>, <Vaudeville Villain>, <Madvillainy>, 그리고 <Mm..Food>까지 언더그라운드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여겨질 음반을 연달아, 그것도 심지어 각각 다른 명의로 발표한 DOOM은 진정 그 컨셉 그 자체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DOOM 본연의 모습에 근접한 정규 2집 <Mm..Food>는 힙합 역사상, 어쩌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앨범 중 하나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컬트 클래식이죠. 여러 정황 증거들을 통해 <Mm..Food>가 체계적으로 제작되었기보다는 상당 부분에서 즉흥성에 주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앨범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비트가 <Special Herbs> 시리즈의 것을 재활용했다는 사실이죠. 그럼에도 DOOM의 프로덕션은 흥미롭고도 창의적입니다. Anita Baker나 Sade 같은 알앤비와 소울 곡 반주를 거의 가공하지 않고 올드스쿨 브레이크비트와 합성한, 말 그대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적 작법을 DOOM 말고 누가 시도할 생각을 할까요? 그러면서도 애니메이션 곡이나 대사를 샘플링해 너드적인 감성을 이식하는 것도 놓치지 않죠. 중반부 4연속으로 이어지는 사운드 콜라주 인터루드마저도 그의 비트메이킹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또한 앨범과 곡 제목에 모두 '음식'이 포함된 것에서 드러나듯이, DOOM은 음식을 테마로 설정하며 특유의 기발한 언어유희를 선보여요. 맥락 없이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라임은 일종의 점프 스퀘어 구간까지도 조성하며, 힙합 라임의 문학적 가치를 확장해냅니다. 그 어떤 진중함도 없고, 자신의 작업물을 키치하게 포장하려는 시도 하나 보이지 않기에 B급 감성으로 가득 찬 <Mm..Food>의 결과물은 되려 아주 멋진 것처럼 들립니다. 세월 속에 무력하게 묻혀가며 제 가치를 채 발하지 못한 다수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앨범들과 달리, 말도 안 되게 허무맹랑한 컨셉이 천재적인 역량과 결합된 본작은 현재진행형의 성공을 거두고 있죠.
https://youtu.be/h69FSgua80A
23. Common - Be
딱히 혁신적이지 않아도 모든 요소가 완벽에 달하면 명반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Common의 수려한 디스코그래피에서도 <Resurrection>, <Like Water for Chocolate>, 그리고 <Be>를 놓고 무엇이 그의 최고작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술적 성취도 면에서는 <Like Water for Chocolate>이 가장 극적이었으나, 적어도 랩 앨범으로서의 완성도만큼은 <Be>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 그대로 최고의 인력이 본작에 투입되었죠. 가장 지혜로운 랩의 시인 Common, 그와의 이전 작업에서 이미 눈부신 성취를 이뤄낸 J Dilla,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이은 Kanye West까지. 이 앨범은 컨셔스 힙합과 백팩 랩, 얼터너티브 힙합의 결정체가 되기 위해 탄생한 것만 같습니다. 특히 Kanye West는 완성형 칩멍크 소울을 선보이며 음반의 완성도를 결정적으로 끌어올리죠. 인트로에서 Dilla의 베이스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쌓아올리는 환상적인 하모니는 마치 시작에 불과하다는 듯이, 그는 그의 비트메이킹 방법론에서 재현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최고 수준으로 실체화합니다. 소울 샘플들은 육감적으로 차핑되고 그 본연의 향취를 백분 살리는 방식으로 가공되며, 과감한 드럼 프로그래밍은 거슬리긴 커녕 가장 훌륭한 재즈 힙합의 드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올드 Kanye 스타일의 정점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J Dilla의 존재감이 결코 희석되진 않습니다. 홀로 프로듀싱한 비트는 오직 두 곡뿐인데도 경지에 달한 샘플 차핑과 스윙 리듬은 그가 어째서 힙합 역사상 최고의 프로듀서인지 몸소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힙합 프로덕션 위 Common은 그가 어째서 무릇 래퍼들의 존경을 받는 리릭시스트인지 증명하죠. 평화와 사랑, 애향심을 노래하다가도 성적인 주제와 재판장에서의 극적인 스토리텔링마저 손대는 그의 가사는 미려한 표현과 본능 단위의 몰입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자아와 시카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요.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훌륭했죠. 폭력과 범죄, 드릴 음악 사이에서도 현재까지 꾸준히 컨셔스한 래퍼들이 시카고에서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 그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요?
https://youtu.be/YCe1gC5VaW4
24. Kanye West - Late Registration
Kanye West의 정규 1집 앨범 <The College Dropout>은 여느 위대한 래퍼의 데뷔작이 그렇듯이 힙합 클래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솔직히, 기준을 아주 조금만 낮춰도 <Vaudeville Villain>과 <Madvillainy> 사이에는 Kanye의 이름이 들어갔겠죠. 하지만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개인 견해도 있고, 무엇보다 그 후에 나온 2집 <Late Registration>이 전작을 아득히 초월한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Old Kanye'로 분류되는 <The College Dropout>, <Late Registration>, <Graduation> 간 우열 관계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긴 하지만, 적어도 예술성만큼은 <Late Registration>이 압도적임을 부정한다면 그 의견엔 논거가 부실하다고 치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Be>와 동기간에 작업되며 전작의 공식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Late Registration>의 프로덕션은 빈티지와 혁신이 절묘하게 맞닿아있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샘플 찹 루핑 외에 그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은 채, 되도록 원곡을 그대로 사용하고 고전적인 붐뱁 브레이크비트 작법을 선호하며 소울과 재즈 특유의 서정미와 엔티크함을 온존하는 기획은 1960~70년대의 향수감을 힙합의 형태로 재현했죠. 거기에 Jon Brion의 오케스트라가 더해지며 바로크 음악이나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변화무쌍하고도 웅장한 규모의 힙합 교향곡이 탄생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당시 힙합이 도달할 수 있었던 예술적 한계와도 같았습니다. 같은 해의 걸작 <Illinois>나 전성기 The Beatles의 음악적 야망에 비견되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르네상스 수준의 작품이었죠. Kanye West 본인 역시 이런 대작에 걸맞는 퍼포먼스를 들려줍니다. 전작보다 더욱 발전한 래퍼로서의 기량은 물론이고, 냉소적인 표현과 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흑인 사회의 관찰자로 분하며 다각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한편, 적재적소에 든든한 우군들을 배치해 최고조의 벌스를 소화케 하며 기획자로서의 재능을 결과물로서 증명했습니다. <Late Registration>은 어떤 면에선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얼터너티브의 시인들이 고대하던 궁극체와도 같았죠. 하지만 정작 Kanye West 본인은 자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었죠.
https://youtu.be/92FCRmggNqQ
25. J Dilla - Donuts
이제는 오직 음악으로만 찾을 수 있는 이름이 된 J Dilla, 그리고 그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 되어버린 유작 <Donuts>. 하지만 혹자의 찬사처럼 <Donuts>는 결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갑작스레 발화한 천재성의 집합체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눈부신 작업들을 연대순으로 놓고 본다면, <Donuts>는 오히려 J Dilla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이질적인 작품이었죠. 그는 병실에서 죽어가는 몸으로 SP-303을 가지고 비트들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Dilla의 이전 작업물들과 비교해보면 비트라고 부르기에 참 애매한 결과물이었죠. <Donuts>는 완성된 비트 모음집보다는 불규칙적으로 기워진 하나의 거대한 샘플 콜라주처럼 느껴집니다. Dilla의 독특한 드럼 패턴이 그러했듯이, MPC에 이식된 소울과 재즈, 로큰롤과 펑크, 힙합과 일렉트로닉 음악 샘플 찹들은 육감적으로 배치되며 기묘한 스윙감을 만듭니다. 그런 독특한 그루브 속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또 다른 샘플이 등장하며 랩의 공백을 대신하죠. 이미 비트메이킹 테크닉에서는 완성형인 J Dilla였기에, 오히려 그가 행하는 실험은 긍정적인 도전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샘플의 부피를 늘리고 질감을 절묘하게 가공하며, 박자와 속도를 바꾸거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곡을 멈추고 다음 곡으로 넘어감으로써 샘플과 드럼을 다루는 힙합 음악에서 그가 진정 최고의 프로듀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부분은 죽음을 앞둔 그의 감정이 음악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는 것이죠. 유동적으로 발화하고 지나가는 소리들 속에 그는 과거의 목소리들을 빌려 죽음에 대한 공포, 음악에 대한 여전한 열정, 미래에 대한 수용과 남겨질 이들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업물과 의지는 동료들과 후대 음악가들에게 전승되어 또 다른 형태로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죠. 하나의 곡마다 1년씩, 총 31개의 곡이 수록된 그의 삶. 허나 아웃트로가 맨 처음을 차지하고 인트로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성처럼, 현실 세계에서는 안타깝게 자취를 감춘 생명이 음악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끝없이 윤회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 영생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위대한 예술가의 이름은 앞으로도 계속 울려퍼질 것입니다.
https://youtu.be/fC3Cthm0HFU
26. Kanye West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21세기 최고의 아티스트 Kanye West. 그의 출신이 힙합임에도, 그가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음에도, 오직 음악적으로만 본다면 저 도발적인 수식어는 과장된 것이 아니라 되려 다소 상투적인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배경의 중심에는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라는 희대의 걸작이 존재합니다. 발매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찬사일색인 명반 중의 명반이었지만, 본인의 최고작 논쟁, 힙합 장르 내의 최고작 논쟁, 그리고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작 논쟁에 휘말리며 본작은 언제나 의문의 시선을 받곤 합니다. '과연 그 정도로 훌륭한 앨범인가?' 그 질문에 확실히 답하기 전에, 우리 모두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가 최고가 되려는 야망으로 제작되었고 실제로 그 야망에 걸맞게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대작인 것만은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 본작을 수식할 때 '맥시멀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정확히 따지자면 앨범의 모든 곡의 악기가 포화 수준으로 많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점은 분명 엄청난 수준일 뿐더러 앨범이 추구하는 미학 자체가 신화적이죠. 모든 요소가 기억에 남고 강렬한데, 매우 조화롭게 어울립니다. 동부와 중서부 힙합을 기반으로, Kanye West는 지금까지 자신이 선보인 모든 기법을 총동원함과 동시에 소울과 펑크는 기본, 프로그레시브 락과 바로크 음악, 앰비언트 등 힙합과 어울릴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장르들을 수용함으로써 웅대한 힙합 오페라와 교향곡을 탄생시켰죠. Kanye는 본인의 예술적 비전에 걸맞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시간과 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색욕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컴플렉스까지 그 자신의 논란을 정당화시키고 신화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그에게선 분명 우리가 Michael Jackson과 Pink Floyd, 그리고 그가 샘플링하기까지 한 King Crimson에게서 느꼈던 야망을 똑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분명 힙합이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한계에 위치한 앨범입니다. 그리고 장담컨데, 힙합 역사와 전 장르를 통틀어서도 두 번 다시 이 수준으로 독창적인 걸작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https://youtu.be/L7_jYl8A73g
27. Kendrick Lamar - good kid, m.A.A.d city
컴튼의 신성이 발표한 힙합 버전의 <데미안>은 어느새 현대 힙합의 성서가 되었습니다. 최고 수준의 스토리텔링과 고품질의 비트들, Kendrick의 랩 스킬과 컨셉 앨범으로서의 총체적인 완성도까지 <good kid, m.A.A.d city>는 현실 고발로서 <Illmatic>의 후계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죠. 비록 Kendrick 본인은 그 비교를 부담스러워했으나, <good kid, m.A.A.d city>는 정말 그 정도의 앨범이었습니다. 비록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최고 수준까진 아닐지라도, 분명 최고의 힙합 앨범 반열에 충분히 오를 만한 앨범이었죠. 정통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힙합 앨범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들이 완벽했고, 거기에 더해 시류에서 한 발자국 앞서 나가기까지 했죠. Kendrick Lamar는 당시 루키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랩 테크니션이었고, 막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스토리텔링에선 기술적인 면모보다도 더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기성 갱스터 랩에서 살짝 방향을 틀며,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범죄로 점철된 우범가의 삶을 꾸밈없이 묘사하면서도 철학적인 통찰을 잃지 않았습니다. 쾌락의 유혹과 황금만능주의가 인간의 자아를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갱 간의 전쟁 속에서 선량한 개인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진중하게 다뤘죠.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으로 본인의 삶을 성찰하고 기독교적 구원을 얻는 서사를 비선형적 플롯 구조로 그려내며 힙합 역사상 가장 몰입감 높은 앨범 단위의 스토리텔링을 설계한 것입니다. 물론 단순 랩 앨범으로서도 훌륭했습니다. 트랩이 부상하고 맥시멀리즘과 럭셔리한 스타일의 힙합 비트가 유행하고 있을 시절, 전통적인 샘플링 기반 프로듀싱으로 회귀하면서도 현대적인 사운드를 채택하며 클래식함과 트렌디함을 모두 잡아냈죠. 지펑크, 사이키델리아, 알앤비, 재즈 힙합 등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유기성이 저해되지 않는 선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부터 위협적인 톤까지 훌륭하게 연출해낸 것입니다. 본작은 진솔함이야말로 힙합 컨셉에서 최고의 무기이며, 그 무기가 적절한 자원과 인력을 만났을 때 어떤 결과물이 되는지 몸소 증명했습니다. 발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명료한 의식에 영감받고 있으니까요.
https://youtu.be/GF8aaTu2kg0
28. Freddie Gibbs & Madlib - Piñata
한 장르에 이미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었다고 가정할 때, 혁신적인 명작을 만드는 것보다 클리셰적인 명작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혁신성을 추구하기 위해선 기존 공식에서 탈피하고 그를 실현할 만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되지만, 클리셰 내에서 잘 만들기 위해선 그 클리셰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요소가 기술적으로 완벽해야죠. 그리고 <Piñata>는 후자에 해당하는 앨범이었습니다. 발매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던 본작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 평가가 내려가긴 커녕 오히려 의아할 정도로 수직상승하고 있죠. Freddie Gibbs의 견고한 랩과 Madlib의 환상적인 프로덕션이 맞닿았으니 힙합 앨범으로서 고평가받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Freddie의 커리어가 지속적으로 눈부신 음반들로 장식되고 황금기로부터 영향받은 새로운 형태의 갱스터 랩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들이 많아질 수록 <Piñata>는 하나의 교본이자 장르 내에서 등장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로 평가받는 것만 같습니다. 아직 2010년대 세간에 진정한 정통파 MC로 인정받을 만한 래퍼가 Kendrick Lamar나 J. Cole 정도밖에 없었을 무렵, <Piñata>는 정말 골든 에라나 2000년대 언더그라운드에서 고스란히 튀어나온 것 같은 음악이었어요. 어쩌면 힙합 역사상 최고의 미학적 사례 중 하나일 수 있는 Madlib의 프로덕션은 90년대의 향취를 재현하기 위해 60~70년대의 소울, 펑크, 알앤비, 재즈 음악들을 샘플링하고 로파이와 블랙스플로이테이션적 요소를 도입하며, Gibbs는 초저음의 남성적인 톤과 탄탄한 랩 스킬을 기반으로 리듬의 속도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수준 높은 코크 랩 스토리텔링을 써내리고 마약상으로서의 삶을 마초적으로 표현해냅니다. 그리고 그 둘의 조합으로 파생된 카리스마는 앨범의 모든 순간에 유효하며, 완벽에 가까운 몰입감과 호흡으로 청자를 매료시키죠. Freddie Gibbs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이후 작품들에서 그의 랩이 더 향상되었다는 이유로 Madlib의 공을 더 쳐주는 이들이 일부 존재하긴 하나, Madlib의 비트 테이프 목록에서 앨범에 수록될 비트들을 손수 채택한 장본인이 바로 Freddie Gibbs 본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될 것입니다.
https://youtu.be/kGaRbhat-FA
29. Kendrick Lamar - To Pimp A Butterfly
<To Pimp A Butterfly>라는 역작이 세상으로 나온지 어느새 10년이 넘어가지만, 그 세월조차 본작이 흑인음악계에서 가지는 위상에 걸맞아지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해보입니다. <To Pimp A Butterfly>는 단순히 역사상 최고의 힙합 앨범 정도가 아닙니다. 젊은 흑인 지성들이 머리를 맞대 창조한 현대 흑인음악의 결정체이자 Kendrick Lamar라는 한 개인의 고뇌와 고통이 그대로 투영된 명시(名詩)이며, 대중음악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진 명반 중의 명반이죠. 이 음반의 위대함을 부정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 개인의 취향뿐입니다. 흔히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진중한 메시지로 고평가받는 편견과는 달리, 본작은 음악적으로도 단연 최고 수준입니다. Soulquarians로 대표되는 재즈 힙합 작법에 영향을 받아 West Coast Get Down 출신의 음악가들과 함께 재즈 세션을 구성해 적절한 음악적 자원이 발굴될 때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죠. 그렇게 재즈 힙합, 네오 소울, 하드 밥, 피펑크, 프로그레시브 소울, 펑크, 아방가르드 재즈가 한 데 어울리며 당대 가장 실험적이고도 고도화된 블랙뮤직이 탄생했죠. 그렇게 다양한 장르가 한 데 어울림에도 힙합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준수하며 한 래퍼로서 Kendrick Lamar의 정체성을 고수케 합니다. Kendrick은 마치 펑크 퍼포머나 스포큰 워드에서 영향받은 것만 같은 유연하고도 극적인 플로우를 구사하며 랩으로 가장한 메소드 연기를 이어갑니다. 래퍼로서 그는 숙련된 재즈 플레이어와도 같아요. 더군다나 추후 그에게 씌워진 '흑인 메시아'의 이미지와 달리 Kendrick은 그저 흑인 스타, 즉 나비가 되길 희망하는 하나의 번데기로서 한없이 개인적인 면모를 강조할 뿐입니다. 정서불안과 자기혐오의 정서가 주인공을 장악하는 가운데, Kendrick은 화살촉을 흑인 사회 내부로 전환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차원의 컨셔스 랩을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정부에게서 제도화된 흑인들이 자아성찰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개인의 서사에서 점진적으로 확장해나가며, 결국 '자기애'라는 궁극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스토리텔링 능력은 <To Pimp A Butterfly>의 Kendrick을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하게끔 만들죠.
https://youtu.be/Z-48u_uWMHY
30. Danny Brown - Atrocity Exhibition
<Atrocity Exhibition>은 Danny Brown 개인의 커리어에서도,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역사에서도 연쇄작용으로 인한 가장 강렬한 폭발과도 같은 앨범입니다. 그 많은 래퍼들 중에서도 Danny Brown에게서 이 정도로 경이로운 수준의 음반이 배출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Atrocity Exhibition>에서는 여느 힙합 클래식이 응당 그러하듯이 초월성이 느껴집니다. 20년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고, 동시에 분위기로 충만하죠. 본작의 제목과 첫 곡 제목은 각각 Joy Division과 Nine Inch Nails의 곡명과 앨범명에서 먼저 사용된 바 있는데, <Atrocity Exhibition>에서는 정말 그들의 음악이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단순 힙합 앨범이라기보다 익스페리멘탈 락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적이고 비연속적입니다. 인더스트리얼, 포스트 펑크, 댄스홀 등 일반적인 힙합 아티스트가 수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장르들에 기반해 제작된 프로덕션은 어떤 면에서는 Death Grips의 음악보다도 더 급진적이죠. 허나 힙합의 틀을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Atrocity Exhibition>이 힙합의 관점으로서나, 실험적인 음반으로서나 최고의 평가를 받을 수 있던 이유죠. 호러코어의 영향을 받아 잔뜩 왜곡된 신시사이저, 불안감을 조성하는 체명악기, 뒤틀린 샘플들이 기이하게 얽히며 발하는 분위기는 정말 마약에 취한 상태를 그대로 청각화한 것만 같고, 동시에 중독으로 인한 정서불안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표현하기도 합니다. 스릴러와 카타르시스의 균형을 완벽히 맞춘, 더 없이 훌륭한 프로덕션입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광인은 개선의지 없이 오직 문제가 자생하도록 방치하며 청자들로 하여금 그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게 만듭니다. 그루브를 일부 포기해가면서까지 출력을 높이는 길을 택한 그의 플로우는 고통받는 영혼의 절규와도 같으며, 약물로 인해 고통받음에도 다시 약물을 통해 실존적 위기와 정신적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조증적 욕구는 앨범 내내 굴레의 형태로 반복되며 조금의 구원이라도 희망했던 청자들에게 처연히 조소하는 것만 같죠. 힙합 앨범 하나가 거대한 블랙 코미디와 악몽으로 승화되는 광경인 것입니다.
https://youtu.be/7L4JnAuW00k
"만점 힙합 앨범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발상은 지인 분D****B과의 대화 중 문득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Liquid Swords>에 지금까지 4.5점을 레이팅하셨는데, 뒤늦게 알고 급하게 5점으로 수정하셨다고 해요. 그 말에서 출발해, 5점 만점을 받을 만한 힙합 앨범은 무엇이 있나 논의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대화였어요. 클래식 중에서 클래식을 가리는 논의였던지라 하나 같이 저희가 좋아하고 고평가하는 앨범들이 나왔었고, 또 그 분과 제 힙합 취향이 매우 비슷한 편인지라 이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참 재밌었어요. 뭔가 정말 좋아하는 명반들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지 않나요? <Ready to Die>, <The Infamous>, <Liquid Swords>, <Piñata>... 이름만 봐도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대단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장 친해져서 실제로도 만담을 나눠보고 싶은... 이건 제가 90년대 힙합 명반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을까요 ㅋㅋㅋ 그치만, 정말 골든 에라는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저 라인업의 30%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나온 앨범들이에요. 사실 리스트의 거의 절반이 1990년대 힙합 앨범들이고요. 역시 힙합이 가장 급격하게 발전하고 장르의 완성형들이 배출된 시대답네요. 이때는 비트며 랩이며 부족한 기술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정말 압도적인 체급의 무언가가 느껴졌달까요... 심지어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이들조차 그 시절의 자신을 재현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에 반해 2010년대는 뭔가 부실한 느낌인데... 고점은 매우 높지만 뭔가 딱 잘라서 만점이다 싶은 앨범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평가가 덜 여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은 역으로 만점 리스트에 올라간 5개의 음반이 의심의 여지 없이 정말 훌륭하다는 얘기로도 성립하지만요. 아무튼 각 앨범에 대해 적을 때마다 그냥 힘을 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쭉 적어내려보자, 라는 생각으로 적으니 잘 써지더라고요. 사실 현실 문제로 닥친 글정병으로 인해 요즘 작문에 여러모로 또 회의감이 드는 시기인데, 저에게는 뭔가 힐링과도 같은 시간이었어요. 일정 과제를 설정하고 차근차근 자연스럽게 제 생각과 애정을 써내리는... 논의 단계에서 "이게 5점이라기에는 약간 부족하지 않나" 싶은 앨범들도 있었습니다. <Paid In Full>, <3 Feet High And Rising>, <Stress: The Extinction Agenda>, <6 Feet Deep>, <Labcabincalifornia>, <ATLiens>, <Moment Of Truth>, <Capital Punishment>, <Mos Def & Talib Kweli Are Black Star>, <Like Water for Chocolate>, <Deltron 3030>, <The College Dropout>, <Modal Soul>, <Mista Thug Isolation>, <The Money Store>, <Yeezus>, <We got it from here... Thank You 4 Your Service>, <IGOR> 등 정말 많은 앨범들이 통곡의 벽을 벗어나지 못했죠. 그리고 2020년대에 나온 앨범들도 몇몇 후보로 거론되었는데, 진지하게 논의되기 전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리스트에 의도적으로 올리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바로 그 거론된 앨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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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시간이 지난다면 만점으로 격상시킬 수도 있는 앨범 5개
1. JPEGMAFIA - LP! (OFFLINE)
<Madvillainy> 이후 최고의 독창성을 겸비한 엽기적인 익스페리멘탈 프로덕션의 음반입니다. JPEGMAFIA의 음악은 베이퍼웨이브에 가까운 실험적 음성 합성물에서 모호함은 덜어가고 원초적 쾌감은 증강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LP! (OFFLINE)>은 그의 음악 커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난해함은 줄어들고 완성도는 향상되었죠. 인터넷 너드들의 우상답게 Peggy는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장르들을 상당히 정제된 형태로 수용해요. 알앤비, 소울, 가스펠, 하이퍼팝, 뉴메탈, 멤피스 랩, 보사노바, 일본식 신스웨이브, 80년대 올드스쿨 힙합, IDM 등 도저히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은 다양한 장르음악들을 익스페리멘탈 힙합이란 카테고리에 묶어, 클라우드 랩에 유사한 포화되고 로파이한 믹싱을 통해 독특한 질감으로 개조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장기인 샘플링이 경이로운 방식으로 활용되었죠. 라카펠라 스타일을 엄청나게 묵직한 트랩 드럼셋으로 재현하거나, J Dilla에 의해 이미 한번 완벽하게 활용된 샘플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발력을 불어넣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죠. 그리고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본작에는 놀라운 비트 드랍이 가득합니다. 물론 Peggy의 랩 플로우 또한 더 능숙해지고 가사 또한 보다 수용하기 용이한 코미디 라인들로 넘쳐나고요. 대체 불가한 창의성이 직관성을 갖춰버린 이상, 이 앨범은 향후 2020년대의 <The Blueprint>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https://youtu.be/2CGFU1lBdCI
2. billy woods - Aethiopes
앱스트랙 힙합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 암약하며 서서히 세를 불려왔습니다. 그 언더그라운드 역사에는 El-P, Aesop Rock, MF DOOM과 같은 전설적인 이름들이 있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Earl Sweatshirt로 넘어가기 전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아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billy woods는 압도적인 음악성으로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언급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죠. 근 몇년 간 billy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음반을 연달아 발표하며 언더그라운드 힙합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작 중에서도 <Aethiopes>는 가장 탁월한 음반입니다. 실제로는 즉흥적이었다 한들, billy woods와 Preservation 모두 정말 초월적인 수준의 음반을 창조하겠다고 마음 먹고 만든 앨범 같달까요. Preservation은 차마 다 발굴하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이국의 샘플을 자신의 기이한 감각으로 재해석해내며 아방가르드 재즈와 아프리카 토속 리듬에 기반한 비트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billy woods는 특유의 탈관습적인 플로우와 본관념을 생략하는 고급스러운 방식의 리릭시즘으로 품격을 더해갑니다. 그렇게 그려낸 <Aethiopes>의 음악은 근원 불명의 초현실을 목도하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죠. 고의적으로 의뭉스럽게 집필한 billy woods의 사서(史書)는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힙합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랩과 비트를 통해 청자를 원초적인 경지의 물아일체에 들게 합니다.
https://youtu.be/zwzIaa6xrNg
3. Danger Mouse & Black Thought - Cheat Codes
이처럼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정통 힙합 앨범이 또 있을까요? 만약 힙합 매니아들이 <Illmatic>에게 적용했던 평가 기준을 <Cheat Codes>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면, 이 앨범은 우습다는 듯이 그 기준을 통과할 것입니다. 언더그라운드 씬을 중심으로 다시 황금기 힙합과 드럼리스가 유행하고 있을 무렵, 두 거장은 오래 전부터 기획하고 있던 합작을 시의적절하게 공개했죠. Danger Mouse와 Black Thought는 각자의 분야에서 분명 최고의 역량을 보유한 음악가들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최고 논쟁에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Cheat Codes>에서 이들의 능력은 유기적으로 화합하며 그 진가를 보이죠. Danger Mouse는 특유의 영화적인 샘플링으로 고전 재즈와 소울, 사이키델릭 락으로부터 멜로디를 추출하고 그것을 붐뱁 비트로 재가공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로파이 터치를 더하며 본작의 음악이 더 먼 시대, 더 먼 차원에서 건너온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부여하죠. 신기한 점은, 로파이 믹싱에도 불구하고 샘플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드럼의 무게감은 오히려 더 위력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Black Thought의 경이로우리만치 기술적으로 완벽한 랩과 추상적이며 학술적인 가사 또한 그 빈티지함 속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갖추게 됩니다. 경이로운 비트, 경이로운 랩, 경이로운 게스트들의 활약까지. <Cheat Codes>는 힙합 고전주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례입니다.
https://youtu.be/MHvNapx5PFo
4. JID - The Forever Story
정석의 가치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훌륭한 힙합 앨범을 만드는 방법은 언제나 좋은 비트 위에 좋은 랩을 하는 것이었고, 청자들에게 가장 간단하게 감동을 주는 방법은 극적으로 자신의 성공기를 담아내는 것이었죠. JID의 <The Forever Story>는 그 공식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다만 그 공식에 담아낸 역량이 기대치를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뿐입니다. JID의 랩 스킬은 멈블 래퍼 강점기에도 당당히 인정받을 만큼 기술적으로는 단연 최고 수준이었으나, <The Forever Story>에서 그의 플로우는 가히 힙합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거론될 만하죠. 비트 체인지보다 더 잦게 플로우와 톤을 갈아치우며 말도 안되게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경이로운 랩 퍼포먼스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랩의 쾌감에서 벗어나면 그가 가사에 담아낸 진실성이 보이기 시작하죠. 가족과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 우상들의 모습을 보며 꿈꿔왔던 성공 등 JID가 품어온 소중한 가치들은 그가 자라난 환경에서 겪은 불운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피어나며 더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재즈 랩, 네오 소울과 결합된 양질의 애틀랜타 트랩 프로덕션이 이를 감싸며 음반의 정서를 극대화하고 서사의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보조하죠. <good kid, m.A.A.d city>가 발매된 지 10년, 그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기에 너무 어린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아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The Forever Story>가 있었을 테니까요.
https://youtu.be/ScDgJJi5Guc
5. JPEGMAFIA & Danny Brown - SCARING THE HOES
미친 힙합 앨범. 더 무슨 수식어가 필요할까요? 1973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Sweet Jesus, Pracherman>에 자신들의 모습을 어설프게 합성한 커버야말로 이 앨범의 톤앤매너를 대표하는 것만 같습니다. 현대 익스페리멘탈 힙합을 상징하는 두 신성 JPEGMAFIA와 Danny Brown이 합작을 발표한다고 했을 때, 모두의 뇌리엔 <Atrocity Exhibition>과 <LP!>의 위대함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SCARING THE HOES>는 기대를 아득히 벗어나는 앨범이었죠. <LP!>의 공식을 따라가는가 싶으면서도 훨씬 더 광포하면서 댄스음악에 유사한 비트들이 고막을 마구 자극합니다. 고전 알앤비와 가스펠 찬양가, 심지어 일본 CF까지 '인터넷 힙스터'스러운 것들을 샘플링하고 힙합 드럼과 과잉된 일렉트로니카 신스를 더하며 경이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설계한 Peggy의 프로덕션은 <Donuts> 이후 MPC 하나로 해낸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결과물이에요. 그 위에서 JPEGMAFIA는 그보다도 더 정교하게 능숙하게 박자를 오가며 와일드 카드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Danny Brown과 함께 억제제 없이 마구 날뛰며 신랄하고도 믿을 수 없이 웃긴 라인들을 수놓습니다. 실험 음악의 극단에서 역설적이게도 정통 힙합 명반의 기준을 충족해버린 것이죠. 그리고 작금 하이퍼팝과 디지코어가 더욱 더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SCARING THE HOES>의 역사적 가치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에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https://youtu.be/8YgxQlS2054
블로그: https://blog.naver.com/oras8384/224023664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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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여담입니다. 최근에 음악 입문자에게 RateYourMusic이나 AlbumOfTheYear 차트로 입문시키는 게 좋냐는 이야기부터, 평론의 의미는 무엇인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제 의견은,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것은 좋으나 한 곳만 참고하는 것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RYM처럼 힙스터 성향이 여론에 강력한 여파를 끼치는 사이트의 경우에, 입문자가 비교적 힙스터스러운 취향을 먼저 접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순위와 점수를 익히며 오직 첫인상만으로 앨범들의 가치를 내정해버린다는 점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기에 편견 아님. 통계임. 인터넷 커뮤니티에 빠지기가 쉬운데, RYM이나 AOTY의 영향력이 커지는 작금 그 일방적인 영향력이 더 커질까 두렵네요. 차라리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은 있어도 평가 기준이 확실히 보이는 롤링 스톤 500선 명반이나, 좀 진부하더라도 통계 자료만 모아놓은 어클레임드 뮤직 리스트로 입문하는 게 더 나아보이기도 하고요. 가장 좋은 방법은 유사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직접 만나거나,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SNS로라도 서로 소통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겠죠. 무엇보다도 음악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취향을 토대로, 그것을 음악계의 다양한 관점과 혼합해 독자적인 음악적 관점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 점수로 제단하기보다도, 자신의 음악적 의견을 언어로 조리있게 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단순히 만점 앨범 리스트를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에 관해 글을 쓰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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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엘이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또 하나는, 제가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엘이 국외 힙합 게시판이 그리워서입니다. 요즘이 무작정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외게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정말 활발하던 시기였거든요. 단순히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023년은, 제가 기억하기로 2020년대를 통틀어 아웃풋이 가장 적었던 해였어요. 그때는 정말 사람들이 본인의 의견을 활발하게 공유하려고 애썼던 때였죠. 모두가 리뷰를 쓰던 때는 아니었어도, 적어도 본인의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할 줄은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좀... 그냥 일차원적인 재미만 찾고 단편적인 생각만 툭 던져놓고 끝나는 것 같아요. 건설적인 논의를 더 이상 찾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너무 진지함만 추구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신다면, 최근에는 인기글이 2개밖에 없거나 그마저도 추천수가 3~4개 정도밖에 안되는 것도 봤어요. 더 이상 사람들이 이곳에 흥미를 느낄 만한 장점이 자취를 감췄다는 뜻도 되겠죠. 사람들은 불씨가 필요한 겁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전 인정욕구가 무척 강한 사람이에요. 특히 제가 잘한다고 믿는 분야에서는. 그래서 엘이에 글을 올렸을 때의 반응이 좋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소양을 갖춰가는 과정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글을 최대한 잘, 수준 높게 쓰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분의 관심과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수준을 낮출 각오도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잘 써서 얻는 성취감보다 사람들과 공감대를 나누며 소통하는 행복이 제게는 더 크거든요. 제 '골든 에라 정주행 후기글'이 많은 인기를 얻은 걸 기억합니다. 물론 그것 또한 시간만 오래 걸렸지, 아주 대충 쓴 글이었죠. 이 글은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써내린 글입니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의 공감대를 자극할 수 있길, 하나의 불씨가 될 수 있길.
2025.09.27
명-반 리스트이니께..
선정하신 앨범과 더불어 글들이 너무 잘 읽힙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술술 읽히도록 회화적으로 글을 써봤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너무 정배픽이에여
명-반 리스트이니께..
아무래도 만점을 받아도 무방한, 정말 위대한 힙합 앨범들만 뽑다보니 의견이 자연스레 정배픽으로 수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전혀 뜻밖의 앨범이 등장했다면 오히려 글의 취지에 맞지 않았겠죠. 다만 이런 의견 또한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선정된 음반들이 진정 대단한 이유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내려가봤습니다.
아무래도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보니 사실 당연히 납득이 가는 앨범들입니다
다만 저는 취향이랑 수준이랑 따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대니 브라운의 잔혹전시회, 정말 잘 만든 앨범이지만 전 안듣거든요
근데 제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이 앨범을 5점 만점에 3.5를 주기는 힘들어요 최소 4.5는 줘야할 것 같은데
근데 그럼 또 문제는 제가 즐겨듣는 4점짜리 재즈랩 앨범들보다 점수는 더 높은데 듣지는 않으니
음 뭐랄까
어쨋든 작성자님의 만점 리스트가 그대로 취향으로 이어지는 건 신기합니다
저는 위 리스트에 있는 앨범들이 역사에 남을 명반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 제 취향은 아니거든요
구구절절 공감가는 말씀뿐이네요
요즘같은 혐오의시대에 건설적인 소통은 어렵다고 느껴요
선생님 같은분이 계셔서 불가능은 아니지만요
취향이 맞는 사람과의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미다
"와! 이거 아시는구나" 식의 표현이 나온다 해도 상관없으니,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생각을 주절주절 떠들어보면 저로선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ㅎㅎ
진짜 거를게 없는 명반들이네요!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잘 읽고 갑니다!
잘읽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근래 눈팅만 하던 저를 댓글을 쓰게 만드는 훌륭한 글이군요.
하나하나 거를 타선이 없는 픽들
혹자는 그걸 뻔하다라고 하겠지만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나 많은 리스트의 자리를 차지한 것...
그렇죠. 사실 어떤 앨범이 선정되었나보다는 이 앨범들이 선정된 이유에 좀 더 중점을 둔 글입니다.
나름 재밌었던 힙합 토론이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냥 가볍게 재미로 시작한 얘기였지만 거기서 이렇게 훌륭한 글이 탄생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ㅋㅋ 아직 저도 바빠서 다 읽어보진 못했는데 스크랩해두고 찬찬히 읽어볼게요.
4.5점 리스트도 만들어보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그건 정말 많아질 것 같기도 하네요 ㅋㅋㅋ 저도 이 아이디어로 많은 원동력을 얻을 수 있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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