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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title: loveless닝닝2025.07.20 10:42조회 수 557추천수 16댓글 12

지금 내 영웅들은 다 죽었다. 꽃이라던 90년대. 그 개화의 시기를 보낸 이들은 오늘날 많이도 사라졌다. 2016년. 검은 별이 화성으로 돌아가던 그 때가 내 마지막 기회였다. 9년 전의 난 David Bowie라는 이름조차 몰랐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 역시 몰랐다. 이젠 남은 사람이 없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날 Ye의 발자취를 견디며 씨름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낀다. 어쩌면 영웅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 겨를조차 없다는 사실이 영광일지도.






한때. 지금보다 국내 힙합을 열심히 들었던 때. 슈프림 팀도 모르던 어린 나는 사이먼 도미닉을 내 영웅으로 삼았다. 훤칠한 외모와 강단 있는 랩.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또랑또랑한 남자. 아는 노래는 요만큼도 없었지만 내겐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멋을 채 느끼기도 전 그의 뒷모습을 봐야했다.


내 영웅이 DARKROOM이라는 앨범을 내고, 수척한 몰골과 정돈되지 않은 복장으로, 잠에 취한 채 음악과 삶의 괴리에서 죽어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그 암실 이야기 속에서 웃고 떠들거리를 찾아나서기에 급급했다. 걱정 섞인 놀림거리를 찾아내며 내 영웅을 비웃고 죽여댔다. 


나도 그 때 내 영웅을 죽였다. 영원할 것만 같던 영웅이 무너지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어린 마음은 한동안 당신을 좇겠노라 내세워댔지만, 내 눈 앞 그 사람은 좇을 수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미워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도망쳤다. 다시 봤으면 좋겠다고. 그러곤 내 음악 취향이 변하며 내 우상들도 바다 건너 사람들로 바뀌었다. 만약 그 이후에, 마치 본연의 지조를 되찾은 듯한 화기엄금이라는 앨범이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비겁하게 오랜 영웅의 존재를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전만큼 존경하진 않지만, 난 오히려 한껏 움츠러든 그 시기의 작품에만 되돌아가고 있다. 당신의 멋은 그런 고뇌와 붕괴를 거치고서야 온전히 탄생할 수 있었다고. 당신의 고통은 진심이었다고. 그걸 딛고 일어섰기에 더욱 멋있는 거라고.






다시. 지금에 이르러서, 내 영웅은 다 죽었다. 오랜 시간 사랑해왔기에 잘 아는 사람도 있고, 떵떵거릴 듯하지만 막상 잘 안다고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힙합에서 그 중 제일이 누구냐고 하면, 지금은 후자에 속하는 어떤 남자가 떠오른다. J Dilla. 어쩌다 보니 세 번을 연속으로 그 영웅에 대해 써온 셈이 됐다.


그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내겐 그가 남긴 흔적을 쫓는 것만이 허락됐다. 남긴 음반, 남긴 비트, 남긴 뮤직비디오, 남긴 인터뷰, 그리고 또 무엇이든.


작품이 날 감격시키고 뒤흔들었지만, 그 안엔 풍파를 견디는 나무 한 그루처럼 우두커니 살아온 J Dilla의 철학과 가치관이 숨어들어왔다. 모두들 그의 육감적인 센스와 프로듀싱 테크닉을 칭찬하지만, 난 그런 전문 용어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Donuts>에 가진 애정도 비슷하다. 겉으론 유작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주로 예술가가 혼을 불태워 삶에 남길 수 있는 최선의 종지부처럼 표현된다. 내겐 내용이 중요하다. 조각난 글자들을 빼면 말 한 마디가 소중한 앨범이지만, 난 그 안에서 J Dilla가 살아온 삶 전부를 담아낸 사진집을 보았다. 사랑하고 아껴온 것들, 우러러본 존재들, 함께하는 친구들, 살아온 기억들, 그 모두를 사진집처럼 흩뿌려놨다. <Donuts>는 그렇다.


이젠 그런 삶이 멋있어졌다.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겉치레도 모양새도 중요하지만, 언젠가 삶을 돌아봐야할 순간이 올 때, 그 때만큼은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며 내 지난날에 후회 없이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기를. 그러니 이젠 내 음악 취향이 중요하지 않다. 내 별은 저물었어도 언제나 밤하늘에 떠 있다.


내 영웅과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숨쉰다는 건 제법 영광스러운 일이다. 몇 사람을 짚어봐도 아직 내게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겠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만나리라고 믿는다. 이 넓은 땅에, 내가 우러러볼 뒷모습이 단 하나도 없을리가. 아마 지금도 묵묵히 제 혼을 불태우며, 나 같은 사람이 닿을 불씨를 뿌려대고 있으리라 믿는다.


IMG_4730.jpeg







여러분들의 영웅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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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
  • 23시간 전

    저도 제이딜라 음악 즐겨듣지만 잘 안다고 하기에는 약간 어려운 면이 있어요. 작성자님이랑 비슷한 이유로요. 이른 나이에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에겐 너무 어려운 행동이에요. 조금 숙연해지기도 하구요.

     

    저에게 영웅같은 아티스트는 별로 없지만, 힘의 원천이 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어요. 검정치마의 주체적인 가사는 저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초록불꽃소년단의 솔직함은 저 자신을 드러내게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프랭크 오션의 앨범들은 예술작품들을 좀 더 넓게 바라보는 데에 도움을 줬고, 칸예 웨스트는 음악이 좋아도 신념이 구리면 안듣는다.. 라는 웃픈 신념을 심어줬죠.

     

    저는 예술의 경계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 경계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구요. 다만 확실한 건, 예술은 관점을 넓혀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에 도와준 가수들에게 고맙기도 하구요.

     

    그리고 글 진짜 잘 쓰십니다. 잘 읽었어요!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민니

    아잉 감사합니다

  • 21시간 전

    글 잘 읽었습니다.

    뻔하게도 제 영웅은 에미넴이네요.

    제 인생의 가장 비참한 지점에서 저의 감정을 대신 배출해주며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거든요.

    그의 인생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는 제 교사이자 반면 교사였죠.

    에미넴은 제가 절망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알려주었고, 제게 공격과 사랑에 대해 깊히 생각할 거리를 알려주었어요.

    그러면서 에미넴이 저질러온 과오들은 제게도 조심성이라는 것을 심어주었죠.

    그의 음악은 제게 여러 영감을 주기도 했어요.

    에미넴이 자신의 음악에서 내비추는 분노, 우울, 사랑, 희망, 열망과 같은 감정과 그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제가 글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어요.

    덕분에 제 진로도 그와 관련된 분야로 정해지게 되었죠.

    전 아직도 에미넴의 음악을 들으며 지냅니다.

    아직도 제 마음엔 쌓인게 많으니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릴랩스베이비

    닉언일치 마싯다

  • 20시간 전

    글 정말 좋네요. 제이딜라와 도넛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저도 괜히 벅차오르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끄응끄응끄응

    감사합니다!

  • 1 20시간 전

    저한테는 한때 테이크원, 김태균이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앨범 녹색이념의 꿈과 현실에 대한 가사들은 저에게 예술로서의 가장 큰 힘을 남겼어요. 깨달음이요

    녹색이념을 처음 들을 당시에 저는 우울하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녹색이념의 현재 사회나, 내가 앞으로 걸을 꿈이나 그러한 가사들 덕분에 현실을 보았던 것 같아요.

    그와 동시에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현실을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자연스레 철학, 문학에 빠져들게 되었고,

    결국에 현재의 저는 취미로 소설 쓰는 인간이 되었죠.

    하지만 지금의 위치에 서서 돌아보면 어느새 김태균과는 동떨어져있네요

    음악을 넓게 듣기 시작하면서 녹색이념이라는 앨범도 이젠 그리 대단한, 역작 같은 이미지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더군다나 김태균이라는 인간도 시간이 지날수록 퇴물이 되어서 래퍼로서의 이미지가 하락하였고

    저는 또 새로운 문학과 철학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저도 님 처럼 이렇게 자연스레 영웅을 떠나보내고 나니 그닥 영웅이라 의지할 사람이 없네요

    전부다 인간으로 보여서요. 나보다 거대한 존재가 아니라.

    그래서 전 그냥 저 자신을 믿으려 하는 것 같아요 잘 안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나아가렵니다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vilence

    결론이 비슷해서 맘에 듭니다 냠냠냠

  • 18시간 전

    영웅이 아직 없어서 오히려 맘속에 담아둔 영웅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지네요. 여태껏 어중간한 마음으로 음악 들었나 싶가도 하고…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HipHaHa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몰입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 10시간 전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의 영웅은 그때도 지금도 켄드릭입니다

    원래 저도 또래 친구들처럼 쇼미와 고등래퍼만 보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alright 뮤비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날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이 아직까지도 켄드릭의 음악을 듣게 했습니다

    alright과 i의 가사를 보며 켄드릭의 철학에 깊게 빠졌습니다

    저는 그 날 이후 켄드릭의 음악과 가사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지금도 켄드릭의 음악을 듣습니다

    지금의 켄드릭이 변했다고 해도 저는 영웅이 죽었다고 생각이 되진 않습니다

    아무리 켄드릭이 변해도 저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영웅이니까요

  • title: loveless닝닝글쓴이
    3시간 전
    @kendrick13

    내 영웅은 아니지만 좋네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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