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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랩의 고점만 따졌을 때 제이지는...

온암8시간 전조회 수 886추천수 21댓글 22

랩의 고점만 따졌을 때 제이지는 힙합 역사상 TOP 5에도 들기 어렵습니다. 물론 제이지는 정말 꾸준히 랩을 잘해왔죠. 활동 경력이 30년이 넘어가는 MC에게 뚜렷한 기복을 — 그나마 Kingdom Come의 래핑이 아쉬웠지만, 오랜만의 컴백이었고 비트의 문제가 컸으니 —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복이 없다는 것은 곧 딱히 튀는 때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죠.

 

제이지의 랩은 그의 최고작들(Reasonable Doubt, The Blueprint, The Black Album, 4:44)을 제외한다면 정말 압도적인 역량을 자랑했다시피 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1집 Reasonble Doubt에서는 고급스러운 비트와 화려한 랩의 조화만으로 Illmatic, Ready to Die, Enter The Wu-Tang, The Infamous와 같은 골든 에라의 클래식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죠. 사실 이것은 Reasonable Doubt이 자칫 저평가받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제이지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서도 정말 훌륭한 음반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4:44에선 데뷔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씬의 최정상에 위치한 대부로서 랩을 얼마나 감각적으로 할 수 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일종의 현자로서 자신을 격상시키며 젊은이들에게 뼈가 되는 조언들을 수도 없이 건내기도 했죠. Smile이나 Marcy Me 같은 곡은 반백을 앞둔 사람의 랩이 이렇게나 세련될 수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블랙 소트 같은 MC와 비교했을 때는 — 제이지가 매 순간 최고의 벌스만을 보여줬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릴 웨인만큼은 아니지만, 제이지의 벌스 중 다수는 라임이 건성이라고 느껴질 만큼 절제되었습니다. 반면 블랙 소트는 거의 매 순간 최고의 어휘, 최고의 라임, 최고의 플로우, 최고의 워드플레이, 최고의 주제의식을 가져오며 매 순간 비할 이가 없는 랩을 보여줬죠. 랩 스타일이 아예 몇 차례 손상되었던 에미넴은 둘째치고, 그 나스조차도 랩의 기복은 있었는데 블랙 소트는 정말 꾸준하게 최고조의 실력만을 보여줬습니다. 모스 데프나 커먼 같은 구 소울쿼리언스 동반자들과 비교해도 블랙 소트의 랩은 품위를 더했으면 더했지 예전에 비해 목소리 빼고는 딱히 퇴화된 부분을 찾을 수 없죠. 그리고 그 블랙 소트조차 Super Lyrical에서 퍼니셔와 정면으로 라임을 주고받았을 때 근소하게 밀렸다는 점에서 빅 펀이 얼마나 대단한 MC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John Blaze에서도 빅 펀은 나스의 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죠.

 

이야기가 블랙 소트 급찬양으로 좀 샜지만, 아무튼 힙합 역사상 최고의 실력을 지닌 MC를 떠올려본다면... 비기, 나스, 슬림 셰이디, 빅 엘, 빅 펀, 블랙 소트, 안드레 3000 정도가 떠오르네요. 라킴, 빅 대디 케인, 쿨 지 랩, 우탱 클랜의 다수, 엠에프 둠, 모스 데프, 푸샤 티, 루페 피아스코, 켄드릭 라마 등의 이름도 떠오르지만 저 수준은 아니라고 —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이지 역시 순수하게 랩만 본다면 저 라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랩 테크닉으로만 본다면 제이지는 분명 역사적인 랩을 보여준 몇 명곡이 있긴 하나 나스의 N.Y. State Of Mind 같은 아이코닉함, 비기의 Gimme The Loot 같은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죠. 오히려 제이지의 랩이 인상적이었을 때는 대부분 그가 기술적인 면모를 일부 포기했을 때였습니다.

 

제이지의 랩은 압도적인 인상보다는 범용성 면에서 정말 탁월한 랩입니다. 이게 제이지가 테크니션으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적인 면모로는 힙합 전체를 뒤져도 제이지에 비견될 래퍼를 찾기 어렵죠. 제이지보다 라임을 잘 쓰고 고차원적인 워드플레이를 구사하는 래퍼는 많지만, 제이지만큼이나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라임의 소리/리듬을 조절하고 벌스의 균형을 맞추는 래퍼는 드뭅니다. 제이지의 능력을 가진 테크니션 계보로는 릴 웨인, 켄드릭 라마, 제이아이디 등이 떠오르네요. 물론 이 계보에서 푸샤 티를 빼놓는다면 섭섭하겠지만, 푸샤는 제이지의 영향 하에 있다기보다는 그의 우상인 비기의 영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제이지의 모델 또한 참고한 느낌이랄까요. Drug Dealers Anonymous 같이 둘이 함께 한 곡을 들으면 발성과 전달법의 차이일 뿐 어휘나 문장, 그리고 플로우 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Politics As Usual - The Games We Play와 같이 푸샤 티는 제이지의 라인을 많이 오마주하죠. 또 일전 "제이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그가 기술적인 면모를 일부 포기했을 때"였다는 등지의 얘기를 했는데, 실제로 제이지 최고의 라인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그가 강조하고 싶은 구절을 탁월한 연출로 조명한 것들이었죠. 쉽게 말하면, 그의 랩이 느려지고 쉬워질수록 오히려 인상적인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켄드릭 라마는 어째서 나스의 라인보다 제이지의 라인을 더 많이 오마주했을까요? 제이지의 라임과 펀치라인은 가장 고차원적이기보다도 가장 직관적이고 예리하게 우리의 이해를 스칩니다. 루페 피아스코나 릴 웨인과 같은 트랙 위에 섰을 때 특정 분야에서 제이지가 밀릴 수는 있어도, 그 모든 조건을 한번에 갖춘 래퍼는 현재로선 제이지가 유일무이하거든요. 그의 대중성에 관해서도 유사한 것이, 제이지는 The Blueprint 발매 당시, 그러니까 2001년을 제외한다면 그 해 최고의 래퍼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투팍, DMX, 50센트, 릴 웨인, 칸예 웨스트 등에게 밀리곤 했죠. 하지만 그들이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쇠퇴하거나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질 때 제이지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재산이 아닌 음악으로서요.

 

정리하면, 제이지보다 랩을 잘하는 래퍼는 찾자면 많고, 힙합 역사상 최고의 벌스를 꼽자면 제이지의 것은 생각보다 많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이지만큼이나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며 유려하고 감각적으로 랩할 수 있는 MC를 또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막대한 커리어와 대중적 성공에 더불어 제이지는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래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What's better than 1 billionaire? Two.

 

랩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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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2
  • title: Chance the Rapper (2)명둥이입니다Best베스트
    5 8시간 전

    더 나누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 온암Best글쓴이베스트
    5 6시간 전

    모르겠습니다.

  • 온암Best글쓴이베스트
    5 6시간 전

    엘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빅 대디 케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죠. 실제로 제이지가 빅 엘의 스타일에 비기나 나스의 그것만큼이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프리스타일에서 밀리기도 했으니... 빅 엘의 생전 라이브나 프리스타일을 들어보면 정말 랩으로는 이 사람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래퍼가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오점이 없는 완벽한 랩이랄까요.

  • 8시간 전

    잘 읽었어요

  • 5 8시간 전

    더 나누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 온암글쓴이
    5 6시간 전
    @명둥이입니다

    모르겠습니다.

  • 8시간 전

    이런 글 아주 좋아요

  • 1 8시간 전

    반박하러 들어왔다가 글에 감탄하며 댓글남겨요.. 잘 읽었습니다

  • 8시간 전

    블랙땃은 신이야

  • 8시간 전

    마지막에one아닌가요

  • 온암글쓴이
    6시간 전
    @외힙린이

    손가락이 흔들렸네요.

  • 8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8시간 전

    잘읽었어요

  • 7시간 전

    잘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랩의 고점으로만 보자면 제이지 대신 빅엘을 뽑고싶네요

  • 온암글쓴이
    5 6시간 전
    @Melted

    엘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빅 대디 케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죠. 실제로 제이지가 빅 엘의 스타일에 비기나 나스의 그것만큼이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프리스타일에서 밀리기도 했으니... 빅 엘의 생전 라이브나 프리스타일을 들어보면 정말 랩으로는 이 사람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래퍼가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오점이 없는 완벽한 랩이랄까요.

  • 7시간 전

    제이지가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기술을 일부 포기했을 때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벌스를 예로 들 수 있을까요?

  • 온암글쓴이
    6시간 전
    @FINNIT

    지금 당장 딱 떠오르는 건 The Story Of O.J.의 "I'm not black, I'm O.J.. ...okay."와 Diamonds From Sierra Leone (Remix)의 "I'm not a businessman, I'm a business, man."이 있네요. 제이지는 그가 강조하고 싶은 가사가 있다면 일부러 플로우의 속도를 줄이고 자연스럽게 강세를 주는, 뻔뻔하면서도 대담한 연출을 애용했죠.

  • 7시간 전

    빅엘이랑 동시에 프리스타일한것만 봐도 좀 차이나죠

  • 온암글쓴이
    6시간 전
    @NAs_The Don

    그때는 제이지의 랩이 완성되기 이전이라 엘에 비하면 차이가 좀 나지만서도, 이후 제이지가 래퍼로서 충분히 원숙해진 시점에서 놓고 보았을 때도 빅 엘이 생전 보여줬던 플로우의 완성도를 능가했나 싶긴 하네요. 다만 여전히 제이지가 커머셜 래퍼로서는 빅 엘보다 잘 먹히는 목소리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 7시간 전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누가 나한테 힙합을 사람 한명으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난 제이지 꼽을꺼임

  • 온암글쓴이
    6시간 전
    @MarshallMathers

    본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종합적으로 모든 요소를 고려해보면 결국 힙합이란 문화에서 최고봉을 차지하는 건 제이지밖에 될 수 없는 것 같네요... 모든 스탯이 9점인 캐릭터 같달까요.

  • 1 6시간 전

    오 본문에 공감이 많이 가네요. 특히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한 라인이 제이지의 펀치라인으로써 기억에 쎄게 남는듯요. 이런점은 릴웨인이랑 통한다 느끼고.

  • 개인적으로 빅엘이 랩스킬 자체로는 역대 최고인것 같습니다

  • 5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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