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 하드를 뒤적이다 기억 저 뒷편으로 사라졌던 과거의 글들을 우연히 찾아서 읽고 있는데, 지금도 만만치 않지만 그 시절의 글은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 건지,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더군요. 이 텍스트 파일들은 지금처럼 가끔씩 꺼내서 혼자 피식 하고 집어넣곤 할 것 같네요. 유치원생도 아니고 한 초등학교때 썼던 일기장 보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그런 되도않는 글들을 무슨 공장처럼 찍어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커뮤니티의 평화롭고 정적인 분위기가 제 딴에는 재미가 없었나봐요. 그래서 다들 조용히 수업 듣는데 혼자 관심 좀 끌어보려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지 않았나. 워낙 읽을 거리가 없다 보니 똑같은 글을 네댓 번 읽기도 하고, 작정하고 찾아야 보이는 과거의 아카이브까지 거슬러 읽을 거리를 찾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어떤 글을 써도 완성된 초안을 읽어 보면 그 시절 즐겨 읽던 글을 그저 따라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매번 덧대거나 덜어내는 일을 빼먹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종종 드는 생각이, 만약 제가 힙합을 지금 입문했으면 어땠을까 해요. 힙합에 빠지고 좀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겐 엘이만큼 훌륭한 사료가 넘쳐나는 곳이 거의 없는데, 심지어 2020년대 통틀어 지금처럼 읽을 거리가 많은 때를 전 보질 못했거든요. 과거의 글까지 꽤 뒤적인 제 생각에는 시대를 좀 더 늘려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아요. 최근들어 글을 쓸 생각이 잘 안나는 것도 이때문이 아닐까. 다들 대꾸도 없이 조용히 수업을 듣는 교실에서 관종스럽게 선생님한테 질문하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너나할 것 없이 손 들고 본인의 의견을 공유하고 활발히 토론을 하니까요.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쌤~ 숙제있었는데요." 하는 친구는 있기 마련이지만, 전 그마저도 보기 좋네요. 최소한 죽어있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조금 아쉬운 건 학생들의 열정이 돌아오는 것과는 반대로 선생님들이 조금 지친 것 같달까. 이 글을 빌어 사소한(그렇지만 대단히 복잡할 수 있는) 건의 하나만 하면, 엘이에서 발간되는 매거진같이 중요한 글은 디시인사이드의 시스템처럼 따로 공지로 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개발에 문외한은 아니라 단순한 일처럼 보여도 내부 로직이 복잡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예전부터 이 시스템의 필요성을 자주 느껴와서 조심스레 찔러봅니다.
요새 화두가 되고 있는 논쟁거리들을 보면, 전 그냥 올게 왔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들은 앨범이라는 일종의 커뮤니티 문화에 불만이 속속들이 터져나왔을 때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이 듣는 음악과 남들이 듣는 음악의 괴리감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할 날이 올거라 생각했는데, 저뿐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단순히 생각해보면, 보통 특정 하위장르 혹은 스타일이 유행을 하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소 잡스러운 시도들이 쌓이고 쌓이다 자연스레 형성되는 경우가 더 많죠. 아무래도 국외 음악이다 보니 이런 조짐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극소수고, 저와 같은 평범한 리스너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듯한 스타일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고요. 단적인 예로 익스페리멘탈 자체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낯익은 양식이지만, 커뮤니티의 화두가 될 정도로 다루어진 건 페기가 히트를 쳤던 때부터 라고 생각해요. 익스페리멘탈 앨범을 다루던 글은 이전에도 꽤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거대한 담론을 형성할 만큼의 관심은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요. 이런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이젠 어느정도 객관적이라 부를 수 있는, 평가가 어느정도 정립된 기존의 음악까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기도 하고요.
이 시기에 선민의식도 튀어나오고, 누군가는 불편함이라는 단순한 감정을 이내 불만으로 이어버리며 어떻게든 또 비판을 하려다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이성적인 사람과 싸우다가 증발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건전한 토론이 되기도 하고. 근데 참 신기한 게, 대부분의 분쟁은 다 훈훈하게 끝나거나 3페이지 내로 자연스레 자정작용이 되더라고요. 전 이게 엘이효과인가보다 싶어요. 옆동네였으면 선민의식은 그냥 병신으로, 분쟁은 투기장으로, 토론은 뇌절로 치환됐을 테니까요. 제가 도파민 중독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글들이 탑스터나 LP인증보다 재밌기도 하고요ㅋㅋ. 사실 이건 가볍게 생각해본 일차원적인 이유이고, 제 개인적인 생각은 사람들이 글보다는 대화를 더 원하는 경향성이 강해진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대화가 성립하려면 어느정도 의견이 맞는 상대방이 있어야 할테고, 그런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주장과 근거의 관계나 맥락, 출처, 사유의 깊이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주장하는 글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 이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 거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문제가 된 글 대부분을 읽어보면 글이 너무 쉽게 쓰여졌다는 인상을 주는데 반해 주장 그 자체는 자극적이더군요.
요새 힙합엘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당연하게도 좋은 글이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좋은 글이라는 게 글의 품질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읽는 것만으로 글쓴이의 음악에 대한 감상과 그 감상을 공유하고픈 열정이 느껴지는 글을 말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좋아하고 심지어 1년 전만 해도 이런 글들은 따로 프린트를 해서 제 책장에 꽂아두곤 했습니다. 어제인가 GNX에 대한 리뷰글을 보다가 미사여구나 쓸모없는 문장이 많고 결국 단순한 주장 한 줄을 굳이 길게 늘여쓴 것이 별로라는 취지의 댓글을 봤어요. 저랑 완벽하게 반대로 생각하는 의견은 또 오랜만이라 기억에 남더라고요. 미사여구, 독해의 난이도에 대해서는 호불호의 영역이니 그렇다 치고 싶지만 그마저도 전 좀 반대하고 싶은 게, 제가 앞서 말했던 '글이 너무 쉽게 쓰여졌다'의 전형적인 예시가 바로 미사여구의 고민도 없고 읽기도 너무 쉬운 글이거든요. 읽기 쉬운 글이 나쁜 글은 아니지만 생각을 필요로 하는 글이 나쁜 글 또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철학도, 문학도가 아닌 일반인들은 평생 명작의 절반도 접해보지 못한 채 단순 떡볶이류 힐링 에세이만 읽다가 떠날거에요. 이에 대해서는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과도하게 길어질 것 같네요. 그저 어떠한 미사여구도, 복잡한 문장도 없이 본인의 감상을 완벽히 정리할 수 있다면 전 그 감상의 깊이에 대해서 의아해집니다.
사실 가장 하고픈 말은 '단순한 주장 한 줄을 왜이리 늘여썼냐'는 주장이에요. 이 태도가 간혹 터지는 분쟁의 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전 이번 우지의 앨범이 살면서 들어본 앨범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개쓰레기 같았어요. 우지 자체가 과대평가됐다고 보기도 하고요." 라는 제 단편적인 감상을 주장으로 내세우고서 끝내버리면 댓글을 쓰려다 가까스로 참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겁니다. 쓰레기라는 여론이 어느정도 중론인 것도 맞지만 이런 단순한 두 줄짜리 근거도 없고 자극적이기만 한 주장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거든요. 그저 상대방의 눈에는 여론에 기댄 메아리에 그치고 말겠죠. 그런데 만약 제가 이 두 가지 주장을 위해 앨범을 들으며 어떻게든 개쓰레기 딱지를 붙이고자 근거를 찾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찾아보고 차분히 생각해본 뒤 한 자 한 자 적어보면 적는 도중에 생각이 정리되곤 합니다. 매운맛을 유지할 지, 보통맛으로 갈 지, 맨 처음의 주장보다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고, 읽는 회원도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거나 최소한 본인의 의견을 공유하며 반박할 가치라도 찾을 수 있겠죠. 저는 쓰레기같은 앨범을 쓰레기같다 말하기 위해 미국사와 세계사부터 탐독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얕디얕은 지식이 저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를까 그런 글은 되도록이면 안씁니다. 주장만 냅다 외치기보다는, 주장하는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 저처럼 개떡같이 써도 아무도 뭐라고 안해요. 이미 좋은 글을 쓰고 계신 분들은 저런 댓글을 읽고 괜히 흔들리지 말고 저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마) 더 많을테니 저희를 계속 행복하게 해주세요.
글이 갑자기 산으로 갔네요. 사실 요새 올라오는 글을 여럿 읽다보니 자연스레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배출하고 싶었어요. 이 여섯 문단을 정리하면 대충 '요즘 힙합 엘이 재밌다 히힛. 좋은 글 써라 헤헷' 정도가 되겠네요. 물론 그렇지 않은 글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는 건 아시죠..? 너무 당연해서 생략합니다. 이 글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데 힙합엘이에 올리지 않은 글 하나가 있어 링크 하나 남기고 사라져볼게요.
엘이가 외힙 입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악을 접하는데 제격인 사이트긴 하죠. 분쟁만 적어지면 진짜 좋은 사이트는 맞음.. 잘 읽었습니다.
이 정도 분쟁이면 양반임
다른 사이트를 안해봐서 그렇게 말한거긴 한데 굉장히 클린하긴 하죠
종합 게시판도 생겨서 이젠 대체제가 없지 않나..
하긴 충돌이 없으면 그건 커뮤가 아니죠
과열되는 건 어딜가나 문제지만 전 엘이정도의 미온이면 최적이라고 봐요. 일기장에 가까운 과거의 분위기보단 보는 재미도 있고..
분쟁을 하더라도 나름의 개인의 논리가 담겨있다는게 엘이라는 커뮤니티의 차별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음악을 사랑해서 이곳에 처음 들어왔고 여러 음악적 소통을 나눈 개인으로서 내 의견을 관철하고 고집부릴지언정 다른 리스너들에게 '걔는 그냥.. 병신 분탕임' 정도로 기억되고 싶진 않은 마음도 있을거라 생각해요
정확히 정리해주셨네요. 저도 그 차별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와서 엘이가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것도 있고
음악에 대한 생각과 의견. 이런 거는 계속 고심히 생각해보고 쥐어싸맨 후에야 제대로 정리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정성을 들여 쓴 티가 확 나는 미사여구를 길게 붙인 글에 호감이 가더라구요.
다양한 문화 중에서 음악이 특히 더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청각적 쾌감 혹은 절망을 글로 표현하는 게 막막하기도 하고, 어쩔 땐 제 생각이 어떤지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ㅋㅋ 정성들여 쓴 글은 객관적으로 잘 썼든 못 썼든 그냥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저 울어요
멋진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FM님의 글은 뭐랄까… 뭔가 따뜻한 냄새가 나요. 마음이 편안해짐
나름 저의 허술한 의도가 조금은 성공한 것 같아 매우 기쁘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장문 더 써주세요
역시 겨울은 글의 계절 아니겠습니까.
크 멋있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전 이번 우지의 앨범이 살면서 들어본 앨범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개쓰레기 같았어요. 우지 자체가 과대평가됐다고 보기도 하고요.
이번 우지의 앨범을 들어보지 않긴 했지만요
전 심지어 오늘 들었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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