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을 여는 경쾌한 사운드와 김태균의 연애사가 순서대로 호출되는 가사 내용은 어째서 왜 이 곡의 제목이 ‘막다른 길’인지에 대해 자연히 의구심을 품게 만듭니다. 무슨 길이 막혔다는 걸까요? 일단 이런 급격한 반전은 ‘이제는 떳떳하다 - 보여줄 때’에 이은 두 번째 입니다. 앞에서의 경우처럼 ‘대마초’의 “눈을 감아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잡아 / 눈을 감아 누구라도 지금 손을 잡아줘”라는 아웃트로를 적극적으로 이어보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시간은 ‘대마초’에서 자아의 붕괴와 함께 정지했고, 그렇기 때문에 ‘막다른 길’은 그 정지한 지점으로부터의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김태균의 (구)여친들이 시간 순으로 나열되고 있으니까 왜 나뉘었는지 살펴봐야 될 것 같네요. 처음 등장하는 여자는 “한동안은 첫사랑이라 믿었지”라는 서술로 보아 아마 그냥 썸 정도였는데 혼자 착각한 것이겠죠. 한국에 돌아와서는 공연을 통해 만난 여자와의 장거리 연애, 해운대에서의 만남,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까지 쭉 언급이 됩니다. 그러나 그 추억 속 모두와의 관계를 “나를 버렸던 아니면 잊어버렸던 / 여기 전부가 지금 와 내게 연락을 하는 건 / 내 기억 속의 너와 전혀 닮지 않은걸”이라며 자신이 가지게 된 것을 탐내고 다가오는 여자들로 일축합니다. 이런 태도는 흔히 남자의 돈을 보고 접근하는 ‘Gold Digger’로서,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는 대강 ‘꽃뱀’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와 널 우리로 가두기 전에”라는 라인을 통해 대상화되지 않을 누군가를 원하는듯한 분위기 또한 동시에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붉은 융단’에서 이미 한 번 등장한 가사를 재활용하며 누군지 모를 그녀에게서 지금의 자신이 실패한 과거에 다짐했던 그 성취에 대한 자그마한 희망적 단서라도 확인하길 원합니다. 또한 ‘대마초’에서 연약해진 그의 모습 또한 고려될 필요가 있죠. 그 탓인지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는 이유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보입니다. “날 비추는 조명 때문”인지, “날 쳐다보는 표정들 때문”인지, “어쩌면 공연장에 가득 찬 환호”, “그것도 아니면 바보상자의 화면”, 혹은 “돈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를 거듭 질문하죠. 그러나 이걸 질문한다고 해서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있을까요? 허울의 장막을 벗겨낼 수 있을까요?
벌스 3에서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염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돈만 빌려주러 왔던 자리에서 드디어 그가 찾던 그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질문을 바꿉니다. “널 똑바로 들여다 봤으면 해”가 아니라, “날 똑바로 들여다봐 줬으면 해”로 말이죠. 당시 클럽에서의 즐거웠던 목소리가 삽입되고, 이후 크러쉬의 ‘Red Dress’에 피쳐링에 쓰인 벌스가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벌스를 구성하는데 사용되었던 서술투 대신 상대에게 받은 강렬한 인상만이 감각적 표현만으로 재현됩니다. 결국 “무섭게 요동쳐왔던 이 천둥번개를 뚫어” 다가온 그녀가 “어두운 과거마저 바꿔내”고, 그는 “꿈속의 널 나의 현실로 데려”옵니다.
크러쉬 ‘Red Dress’ 원곡에서 테이크원의 벌스 마지막에서 생략된 부분이 중요합니다. “If you are a gold digger, you maybe a color blind. But here you are standing beside, Love.” 대강 해석하자면 ‘만약 니가 꽃뱀이라면 색맹이었겠지만, 넌 내 색깔을 알아보고 내 곁으로 와줬잖아. 넌 그런 여자가 아니야’ 정도가 될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합일의 순간이 욕망으로 인한 예정된 시험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 12번 트랙 ‘침대’에서 이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합니다. ‘침대’, 그리고 ‘지폐’라는 단어는 ‘Bitch’라는 키워드와 강하게 연결됩니다.
김태균은 힙합의 ‘돈’ 서사와 갈등관계를 맺고 극복하려 하지만 끊임없이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는 힙합의 ‘돈’ 서사가 공허함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척력에 있다고 여기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언제나 순수하고 순결하기 위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경도’만 높은 캐릭터는 깨어지기 쉬워 이내 붕괴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실한 것’이라는 신뢰하기 어려운 이상향을 추구한다면 ‘이제는 떳떳하다’와 ‘막다른 길’의 순환을 감당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겠죠. 그렇게 그는 ‘섬광’에서 경고 되었던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되'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 채 시험의 길에 들어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