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그니토 (Ignito)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라고 말하여지는 도는 더이상 도가 아니며)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이름을 붙여 그 이름으로 부르면 더이상 그 이름이 아니게 된다)' 동양 철학 중 도가 사상의 대표 주자인 노자의 <도덕경>을 여는 첫 구절이다. 도가 사상은 이 말을 비롯해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측면이 있어 소위 말해 뜬구름 잡는다는 평가와 함께 해석의 갈래가 여러 개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 근본으로 파고드는 이 인식론적인 말은 21세기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굉장히 중요한 말일 수 있다. 더 좁혀 말하면, 전세계를 통틀어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특히 그렇다. 근래 들어 얼마나 많은 래퍼들이 스스로를 예술가로 규정한 채로 자신들의 행동을 예술로 규정하는 데 바빴으며, 그것을 얼마나 많은 노래에서 자의식 과잉적인 형태로 담아왔는가? 또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다른 이야기가 배제되었으며, 작다면 작은 이 힙합 씬이라는 공간에 대한 과장된 집착은 얼마나 커졌을까? 힙합이 작자의 자의식에서부터 출발한 장르 음악은 맞지만, 이제는 종종 그렇게 자의식 그 자체로만 차 있는 음악도 더러 보이고 있다. 그 점에서 이그니토(Ignito)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데다가 실제로 자신의 음악 안에서 이를 경계하는 태도를 실천한다. 그는 앨범 안에서 자신이 힙합 아티스트로서 멋진 걸 하고 있고, 이게 얼마나 멋진지를 설파하는 말로만 내용을 구성하며 젠체하지 않는다. 대신 힙합, 예술, 아티스트 따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에서 벗어나 그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의 한 방식을 제대로 보여준다. 11년만에 새 정규작을 내놔도 누군가는 여전히 '악마의 음악'이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어쨌든 이그니토는 새 앨범 [Gaia]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 근원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 속에 내포된 더 많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듣기 위해,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래퍼 이그니토를 만나고 왔다.
LE: 힙합엘이 회원분들께 간단하게 인사, 그리고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오랜 시간 활동했는데도, 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참 난감하고 어렵네요. 그냥 진지한 랩 음악을 하는 이그니토라는 래퍼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LE: 앨범 발매 이후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한데요.
최근에는 마음을 많이 놓고 쉬려 하고 있었어요. 사실 예전에는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거든요. 마음 한편이 늘 답답했어요. 몇 년간 앨범 준비를 하다 보니까, 쉴 때도 항상 너무 괴로웠죠. 앨범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컨트릭스(Kontrix)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항상 죄책감과 부담감에도 시달렸어요. 그 당시에는 게임도 다 지워버리고, 게임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어요. 이제는 좀 편히 놓게 된 거 같아요.
LE: 이상하게 이그니토 씨가 일상적인 행동을 하면 괜히 신기하고 그런 거 같네요. 평소에 게임류의 여가 활동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저는 남들이 하는 대중적인 게임은 거의 안 한 편이에요. 어릴 때부터 <스타크래프트(Starcraft)>도 안 했고,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오버워치(Overwatch>, 심지어 <디아블로(Diablo)> 같은 게임도 전혀 안 했어요. 대신 학창 시절부터 <킹 오브 파이터즈(The King of Fighters, 이하 킹오파)>만 엄청 했어요. (웃음) 그때는 <킹오파>가 완전 주류였는데, 이제는 비주류잖아요. 요즘 대전 게임은 다 <철권>으로 넘어갔죠. 그런데 저는 지금도 <킹오파>에 굉장한 애착이 있어요. 14 시리즈가 발표되기 전에 부천에서 시연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다녀오기도 했었어요. (웃음) 최근엔 PC용 스팀(Steam) 버전으로도 발매가 돼서 구매 후에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어요.
LE: 언뜻 이그니토 씨에게 <킹오파>의 네스츠(Nests) 같은 느낌이나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여담이지만, 비밀 조직 네스츠의 수장 이름이 2001의 보스, 이그니스(Ignis)잖아요. 사실 제가 이름을 정할 때, 이그니스와 매그니토(Magneto)에서도 영감을 받았거든요. 둘 다 악의 보스잖아요. 그런 뉘앙스가 어울릴 것 같아서 참고했었죠.
LE: 그런 측면도 있지만, 평소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왠지 블리자드(Blizzard) 게임들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세계관이 있는 게임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신가 보네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달라요. 저는 블리자드 스타일의 게임을 아예 안 접해봤어요. <베르세르크(Berserk)> 같은 만화도 전혀 안 봤죠. (웃음) 물론, 실제로 하거나 보면 좋아할 텐데, 아직까지 접하지는 않고 있어요.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구요.
LE: 본격적으로 이번 앨범 이야기를 하며 커리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섞어 해볼까 하는데요. 우선, 각설하고 정규 2집 [Gaia]에 관해 소개 부탁드릴게요.
앨범 소개를 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어요. 일단은 앨범 소개 글을 한 번씩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바이탈리티(Vitality) 크루의 일탈(illtal)이 써준 내용이에요. 제가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이나 가사를 쓰고,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의를 많이 했던 친구이기에 부탁했고, 일탈이 문학적으로 아주 멋지게 잘 써줬어요. 어느 날 아침에 번뜩여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받아보고, ‘내 앨범을 이보다 잘 소개할 수는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앨범 소개는 그 글로 대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IGNITO 2nd Album Gaia 소개 글 by 일탈세상의 시작과 그 종말은 어떠한 풍경일까.영웅은 어떻게 태양처럼 떠오르고, 그 위대함은 어떻게 하강하는가.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광인은 한 줌 달빛 아래에서 나고,그의 예술은 선택을 기다리지 않는 마음으로 조용히 피고 진다.이제 시간의 절벽 앞에한 소년의 사랑이 마감하고, 그 침묵이 모여 한 시대의 행진이 멈출 때.이윽고 무심히 내리는 빗살이 추억을 시선 밖으로 밀어내지만,그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본다.이 작품은 지리한 우리네 하루의 반복부터역사의 순환까지, 그 정밀하고도 거대한 질서를 관장하는수레바퀴에 대한 찬가.그리고, 세상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운명적인 인간으로서의자신에 대한 고백이 담긴 편지.비정하지만 아름답고 장엄한 우리 세상을 정면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사실 영원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시지프의 과학이지만,이그니토(Ignito)의 가이아(Gaia)는 바로 이러한 위험한 실험이 줄기마다 서려있는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LE: 앨범 소개는 소개글로 대신 한다면, 커버 아트워크를 비롯한 앨범 디자인적인 부분은 직접 이야기해주시는 게 어떨까 싶어요. 크림빌라(Cream Villa)의 브레드(BRED) 씨가 맡아서 진행해주셨는데, 어떤 발상에서 출발했으며, 그 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궁금한데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앨범 명을 그리스어로 써두셨는데, 그 이유도 함께 말씀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커버 이미지를 구상할 때 어둡고 강렬한 느낌보다는 광활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색감은 보랏빛을 원했는데, 저희 바이탈리티 앨범들이 각 앨범마다 고유의 색 이미지를 갖고 있거든요. [Gaia]를 작업할 때는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보라색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업했었기 때문에 커버 색도 그에 맞게 진행되었죠. 이런 부분들을 브레드 님에게 이야기 드렸고, 그 결과물이 너무도 잘 나왔다고 생각해서 참으로 감사해요. 앨범 커버 중앙과 후면에 있는 상징적인 원의 이미지도 브레드 님의 아이디어고, 그리스어 문자를 사용한 부분도 가이아가 그리스 신화의 여신인 것에 착안해서 브레드 님이 디자인적으로 삽입한 부분이에요. 만족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LE: 앨범이 굉장히 오랜만에 나왔어요. [Demolish]로부터는 11년, 규모 있는 개인 작품으로는 [Black]으로부터 6년 만의 새 작품인데, 이렇게까지 오래 걸린 이유가 무엇인가요?
[Black] 이후로 공백이 길지 않았어야 했어요. [Black]을 내자마자 컨트릭스를 알게 됐고, 곡 선정은 2011년과 2012년에 이미 다 마무리 지었었거든요. 아무래도 제일 오래 걸린 건 가사 작업이에요. 제가 스타일상 가사를 금방 쓰는 편이 아니거든요. 항상 쓰기 전에 가사를 쓰자는 마음가짐을 갖고, 자리에 앉아서 가사를 써 내리기까지가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어느 정도는 게으름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대학원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을 놓고 살았던 적도 있었고, 컨트릭스가 안 좋게 되어서 몇 년 지체된 부분도 있죠.
가장 컸던 건 열정이 [Gaia]의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같지 않았다는 거예요. 속되게 표현하자면, 결과적으로 그동안 재미를 보지도 못했고,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에, 작업을 하면서도 ‘앨범을 낸 들 무얼 하나?’라는 생각이 늘 들었죠. 제가 이렇게 힘들게 앨범을 내도 그만큼의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거죠. 이런 시커멓고 어두컴컴한 음악이나 불편한 가사들로 아무리 잘 만들어도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성과적인 부분에 대한 허탈함이 늘 있었고, 자연스럽게 앨범 작업이 지연되지 않았나 싶어요.
LE: 평소 정규 앨범을 만들 때와 다른 형태의 작품을 만들 때와 마음가짐이 다른 편이신가요? 왠지 정규 앨범에서는 직설적인 가사 내용이 담겨 있던 [Black]과는 달리 더 철저하게 작업에 임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어느 정도 있죠. [Black]은 이그니토스럽지 않은 앨범을 만드는 게 컨셉이었어요. 편한 말들과 상스러운 언어를 담고, 제가 평소 다루지 않던 음악 씬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게 목표였어요. 사실 저는 피처링에서나 가끔 하지, 제 정식 작업물에서는 음악 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Black]에서 털어내고 나면, 2집 작업이 더 잘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오히려 힘이 빠지는 데 일조했고 허탈함에 시달렸죠. (웃음) 그때도 반응이 다 비트 얘기밖에 없었고, 가사적인 변화에 대한 피드백은 거의 없더라구요. 그중 일부는 애초에 제대로 들어보시지 않고 어느 정도 선입견으로 평가하셨던 거겠죠.
LE: 앞서 언급했듯 [Demolish]와 [Gaia] 사이의 공백이 무려 11년이고, [Black]으로부터 쳐도 6년이에요. 말씀해주신 그 당시 반응처럼 시기별로 동일하거나 달라진 피드백의 양상을 실감하실 거 같기도 한데요.
일단, 그 사이사이에 바이탈리티나 레버넌스(Revenans) 앨범이 있었는데, 제 개인 앨범으로만 치면 말씀하신 대로겠죠. 우선, 가사적인 피드백은 사실 항상 똑같았어요.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가사라고. 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희 크루 전체를 그렇게 바라보시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2010년에 일탈의 앨범 [Naked]가 나왔을 때도, ‘뭔 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일탈의 앨범은 가사가 쉽거든요. 저는 텍스트적으로 그런 가사들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래퍼 개인이 화자가 아닌 화법이 청자 입장에서는 익숙하지 않다 보니까 불편하게 들리는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런 불편함이 있으니 ‘왜 이런 내용을 랩으로 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겠죠. 제 입장에서는 그런 게 불평과 투정이라고 생각되는데, 본인들이 지니고 있던 익숙함에 반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피드백은 이상하지도 않고, 늘 예측하는 부분이에요. 그게 싫었다면 제가 진작에 변했을 거예요. 쉽고 재밌는 가사를 써서 불평이 안 나오게 했을 텐데, 저는 오히려 더욱더 그런 류의 가사를 썼어요. [Gaia]를 내면서도, ‘1집보다 듣기가 더 어려울 텐데.’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었어요. 1집에는 중세 판타지적인 요소나 악마, 전쟁 등 나름의 재미 요소가 있었고, 일정 부분 동일한 화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Gaia]는 곡마다 화자가 다 다르고, 몇몇은 화자가 전혀 없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여러분, 이 텍스트 자체에 몰입하고 집중하면, 가사가 전혀 안 들리지는 않습니다. (전원 웃음) 이번 앨범에서는 표면적인 스토리 진행이나 장면 묘사는 머리에 들어올 수 있게 썼거든요. 그러니 반감을 품지 마시고, 이런 류의 가사를 쓰는 뮤지션들도 존중하겠다는 넓은 마음으로 들어보시면, 다른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그리고 요즘 팬들에게 가끔 메시지를 받기도 하는데, ‘형, 중학생 때부터 팬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형 노래를 다시 들으니 가사의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와요.’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아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한 번씩 더 유심히 들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웃음)
LE: 실제로 가사에 관하여서는 최근까지도 단어 이것저것을 대략 조합하면 이그니토 씨의 가사가 된다는 게시물이 올라왔을 정도로 피드백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요. 가끔은 굉장히 모욕적이라고 느끼실 때도 있을 거 같아요. 아마 가사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문어체적이고 딱딱한 단어들과 표현들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이런 가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아니에요. 굉장히 힘들게 짜내서 나오는 거죠. (웃음) 일단 저는 함축어를 많이 써요. 이미지어나 시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니까, 당연히 겹치는 단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함축과 이미지를 동시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연물이 필요해요. 예를 들면, 옛날 서정시들을 살펴보면, 산, 바다, 풀, 구름, 꽃 이런 것들이 맨날 나오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 자연물을 통해 함축시켜 이야기하기 위해서죠. 여러 자연물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압축 파일처럼 담는 거예요. 받아들이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 압축 파일이 풀리는 순간, 한 문장이지만 긴 의미가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한 문장도 허투루 쓰려고 하지 않아요. 한 문장이라도 의미를 꾹꾹 눌러 담으려고 하죠. 중, 고등학생들은 언어 영역에 도움이 될 테니, 저의 가사나 텍스트를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웃음) 활자와 가사 속으로 몸을 담가보시길.
LE: 거시적인 구성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키워드로만 놓고 보면 기원에서 시작해 불모지대와 금속의 상승을 지나 태양과 달, 꽃, 그리고 마리아를 거쳐 악마의 행진과 비로 이어지는데요. 개략적으로 각 곡을 짚어주시면서 어떤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고 싶으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일단 앨범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는 데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아요. 대놓고 시간 의 흐름은 피하고 싶었고, 시간이 살짝 뒤섞이는 게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런데 결과물은 대체로 시간순이에요. (전원 웃음) 대놓고 1번 트랙이 “GENESIS”고, 마지막 곡도 그렇죠. 그래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첫 트랙 제목이 ‘GENESIS’지만, 멸망의 과정을 담고 있어요. 일단 망하고 시작하는 거죠. (웃음) 탄생을 통해 장엄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망하고 시작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인트로부터 멸망을 다 보여주고, 2번 트랙은 폐허가 된 곳의 슬픔을 담고 있고, 다시 3번 트랙에서는 망하게 된 과정을 풀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LE: 이미 시작부터 망하는 과정을 보여줬다고 하셨는데, 그럼 작품의 결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결과는 그저 ‘쫑’이죠. (웃음) 제가 [Gaia]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멸 그 자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진리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거죠. 우리는 존재의 생성 과정을 알지 못하고, 왜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잖아요. 하나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소멸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만 앨범 안에 담는 게 다소 밋밋하니까, 소멸에 대한 과오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 안에 개인이 느끼는 무력함이나, 사회, 문화, 인류사적인 이야기들도 내포시키고자 했어요.
LE: 그런 메시지적인 측면을 포함해 두 장의 정규 앨범만 놓고 보면, 확실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가득한데요.
완전히 동의해요. 우스갯소리지만 모두 망하고 다 사라지고 이런 거 너무 좋아해요. (전원 웃음) 제가 아무래도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서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당시에는 멸망을 다루는 작품이 굉장히 많았어요. 지구 멸망이나 자연재해, 기계 전쟁 이런 내용들. (웃음) 음악을 비롯해 대중적인 작품에도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했죠. 서태지나 여러 아이돌 가수들조차도 노래를 통해 지구 멸망을 경고했었거든요. 그런 세기말 감성 아래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서인지, 모든 문화를 그런 감성으로 접했어요. 물론, 일반적인 우리의 이웃들은 같은 시기를 지나면서도 정상적이고 희망찬 감성으로 자라났을 텐데… (전원 웃음) 저는 특별히 그런 어두운 쪽에 감수성이 많이 맞닿았던 것 같아요.
LE: 요즘도 ‘다 망해라.’ 모드로 삶과 세상을 인지하시나요? (웃음)
지금은 아니구요. (웃음) 다 망하면 안 되잖아요. 절망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기는 한데, 당연히 희망도 있죠. 다만, 작품을 만드는 데는 그런 부정적인 부분들을 조금 더 극대화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거죠.
LE: [Demolish]는 앨범 속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으로 현재의 세상을 거시적으로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렇게 그 세계 자체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다면, 반면에 [Gaia]에서는 그 세계에 대한 의견이나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요.
일단 [Demolish]는 이 세상과 인간을 은유하는 메타포가 맞아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를 비유적으로 다 담고 싶은 게 제 욕심인데요. 완전히 나누기는 힘들겠지만, [Demolish]는 과거의 이야기고, [Gaia]는 미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 테마는 [Demolish] 발매 이후부터 대략적으로 구상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낼 음반에는 멸망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막연한 생각이었죠.
LE: 실제 의도가 그랬다면, [Gaia]에 관한 이런 해석도 있네요. 한 평론가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일말의 희망을 여성성에서 찾으려는 태도’가 보인다고.
근데 희망을 찾으려고 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성성에서 안정감과 평안을 찾으려고 한 건 맞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게, 작가인 제가 남성이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는 표현보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는 표현이 우리가 생각하는 따스함이나 근원을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봤어요. 제목도 가이아니까요. 근데 사실은 “Maria” 같은 곡을 만들면서 약간 불안했던 게, 여성 청자 입장에서는 공감이 안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절대적으로 남성의 입장에서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와 같은 편안함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다시 찾으려고 하고. 그럼에도 지금처럼 나오게 된 건 제 개인적 욕망들이 표현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LE: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적인 부분인 거 같기도 하네요. 직접적으로 구원해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주인공인 사라 코너(Sarah Connor)가 열쇠 같은 존재로 나오니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제가 남성이기 때문에 제 위주로 풀어낼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따스함을 느끼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부터 출발해서 제가 갈구하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또 다른 사랑의 대상에 관해 쓰는 게 자연스러웠던 거겠죠. 이성애자인 제가 갑자기 남성을 찾고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웃음) 농담이구요. 전 그렇게까지 봐주신다는 점에서 그 해석이 오히려 감사했어요.
LE: 키워드 적으로 보면 순환이나 반복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나오는데요. 하지만 가사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 그렇게 세상은 이어진다.’라기보다는 ‘그 순환과 반복으로 지금의 끔찍하고 악몽 같은 세상이 계속 이어진다.’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일단 기본적으로 저 자체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원 회귀 사상에서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우주가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수많은 영겁의 세월을 지나서 우주가 소멸하고, 무한대의 평행 우주 중에 똑같은 확률로 원자 요소들이 결합해서, 지금과 같은 똑같은 상황과 환경이 무한한 가능성 중에 연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요. 그렇지만 거기까지는 제가 알 수 없는 이야기고, 상상과 공상에 가깝죠. 그래서 저는 이번 [Gaia]에서 실제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소멸까지의 이야기만 담았어요. 영원히 반복되고 순환된다는 이야기는 제가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담으려고 하지는 않았죠.
[Gaia]를 만들던 와중에 몇몇 피처링 곡에서도 이 부분에 관해 이야기했었는데요. 예를 들어, 마일드비츠(Mild Beats) 형의 “회귀, 반복”에서는 순환에 대한 희망을 담았었어요. 또 다른 곡으로는 반대로 순환을 부정하는 잠비나이(Jambinai)의 “Abyss(무저갱)”이 있죠. ‘순환은 우리가 이론의 빈칸 위로 덧내놓은 그림일 뿐이고, 우리의 상상으로 만든 억지 희망일 뿐이다.’라는 식이죠. 순환이 아닌 오히려 무한한 하강이라고 하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하강하면서 암울해지는 저 나름의 형이상학을 담았었죠. 이런 피처링 곡들과 [Gaia]를 다 섞어서 들어보시면, 아마 저의 정신적인 흐름을 조금 더 아실 수 있을 거예요.
LE: 피처링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보면, 그간 피처링하신 곡들을 살펴봤을 때, 평소 개인 작업물에서 가사를 풀고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과는 결이 많이 달라지시는 거 같아요. 또, 이그니토 씨가 ‘이 씬을 지키는 수호자’ 같은 캐릭터로 활용되는 감도 있는데요. 가끔은 그런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게 부담스러울 거 같기도 한데요.
피처링을 할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가사를 조금 더 일상어로 쓰려고 해요. 저만의 작사 방식이나 분위기는 제 작품에서만 드러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죠. 수호자 캐릭터 관련해서 첨언하자면, 그 정도는 다행인 편이에요. 평소에는 ‘악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 ‘다 죽여버리는,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 이런 식의 피처링 제의가 너무 많거든요. (전원 웃음) 그런 부탁은 진짜 저의 이미지를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는 거라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죠. 오히려 씬에 대한 이야기나 비판적인 내용은 저도 재미있고 편해서 가끔씩 하고 있어요. 그리고 간혹 저에게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붙이시곤 하는데, 저는 대의를 앞에 내세우는 거를 안 좋아해요. ‘언더그라운드의 수호자’라는 타이틀도 저랑은 맞지 않아요. 저는 평소에 ‘씬을 위해서’, ‘씬의 가치를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되도록 안 해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도 위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대로 저는 씬을 위협하는 외부 요소가 아니라 씬 내부를 공격하는 걸 좋아하죠. ‘너네가 언더그라운드처럼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왜 리스펙을 바라냐?’, ‘이 씬이 미디어에 잠식된 게 다 우리가 자초한 것 아니냐?’, ‘물론, 나 또한 공범이다.’ 정도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그동안 뮤지션들이 스스로 우습게 행동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회의감 섞인 이야기를 하려 할 뿐이죠.
LE: 이번 앨범의 수록곡 “METAL RISING”에 ‘허나 기밀의 방벽을 뚫어버린 관성은 내부 증식을 통해 발견한 자아의 각성’이라는 가사가 있는데요. 이 부분도 일종의 내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은 그런 의미로 쓴 가사는 아니에요. “METAL RISING”은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역전이 일어나는 전쟁이거든요. 내부에서 자라난 노예들이 지배자를 공격해서 주인이 바뀌는 형태죠. 저는 이런 내용을 ‘금속이 일어난다’는 비유를 통해 표현했어요. 앞서 말씀해주신 <터미네이터> 같은 로봇 전쟁을 상상하고 쓴 가사죠. 다만, 그런 요소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는 게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은유적으로 숨긴 거죠. 그래도 나름 ‘은빛의 살갗’이나 ‘검은 혈액’ 이런 단어로 비유했는데, 아쉽게도 알아채시는 분들이 없네요. (웃음) 어쨌든 우리가 필요로 길러낸 도구들에게 역전되고 잠식당하는 과정을 조금 재미있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결과, 영화적으로 풀어내게 된 거죠. 이런 식으로 살펴보시면 곡의 후렴구도 이해가 잘 될 거예요.
LE: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 말고, 기계나 자본처럼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탄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앨범 안에 존재하는데요. 전체적으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욕망의 굴레나 부정적인 정신 등을 의인화해서 표현해주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렇게 봐주시면 너무 감사해요. 기본적인 것은 다르지 않아요. 저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면을 굉장히 인정하고 있어서 (웃음) 그 부정적인 면들을 언제나 가사에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느껴주셨으면 아주 좋은 해석이죠.
LE: 개별 곡 가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보태보면요. “SUN” 가사를 보면, “찬란했던 여름 장밋빛 전쟁의 거물”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씬을 타겟팅하는 굉장히 명확한 구절이 아닌가 싶었어요. (웃음)
전혀 아니에요. 제 음악에서 씬에 대한 비유를 찾고, 실제로 그런 음악이라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힙합 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힙합이 장르적으로 특이하게도 이상하게 늘 음악 씬, 음악하는 사람에 관한 내용을 많이 쓰는 거 같아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 음악하는 너희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힙합 씬. 아티스트 개인으로서는 (이 씬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이니까 굉장히 중요하고 큰 공간이겠죠. 우리도 모두 이곳에 몸담고 있는 거구요. 근데 사실 멀리서 봤을 때는 없어도 큰 문제는 없는 공간이잖아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음악 안에서 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건 정치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이야기에 고정되는 걸 벗어나서 좀 다른 이야기들, 바깥세상이나 인간 역사 전체를 랩으로 담아내는데, 그걸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누구나 이런 어렵고 거대한주제를 선택할 수는 있어요. 다만, 그걸 실제로 구현해내려는 순간, 웬만해서는 어려울 거예요. 그걸 하려는 순간, 자신의 바닥이 드러나고 처절하게 마주하게 될 거예요.
저는 그런 부분에서 나 아니면 랩으로 이런 주제를 이 정도로 풀어내기 어려울 거라는 자부심이 있죠. 할 수 있는 건 다 표현해보고 싶었고, 힙합과 랩을 더 넓은 부분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씬은 어때야 하고, 래퍼는 이래야 한다는 얘기가 저한테는 무의미하게 다가올 때가 많아요. 물론, 사소한 것의 가치를 마냥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좀 더 거창한 얘기를 다루는 데에서 재미를 찾고 싶었어요. 청자 분들도 (제 음악을) 씬에 대한 비유로만 해석한다는 게 참 슬픈 게, 그런 것들만 들었기 때문이거든요. 학습이 되어 있는 거예요. 으레 ‘래퍼들은 이런 얘기를 하겠지.’ 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참, 모두 다 왜 삶에서 그런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나 싶어서 슬프기도 해요. 그리고 항상 가사 안에서는 멋진 걸 해야 한다고들 외치는데, 그럼 그 멋진 게 뭔지 실제로 보여줘야죠. ‘멋진 걸 해야 해.’라는 말 자체로는 멋지지 않아요. 청자 분들도 마찬가지로, 맨날 생각 없는 스웩 가사, ‘나 짱 너 병신’ 하는 거 지겹다고 하잖아요. 그런 게 지겹다면서 이런 다른 차원의 텍스트를 갖고 오면, 익숙하지 않으니까 응원해주시기보다는 배척하고 구분을 지으시려 하죠. 이런 움직임들이 많아져야 랩의 가치가 확장될 수 있다고 봐요. 랩은 무조건 자아실현, 자기의 자신감과 존재를 확인, 이런 걸 표현하는 데에만 국한되기에는 훨씬 더 큰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LE: 사실 랩이나 힙합이라는 게, 자의식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 대다수이긴 하죠. 자의식이 있고, 그걸 표출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내가 랩을 잘하고 있다.’ 혹은 ‘나는 음악을 잘하는 아티스트다.’라는 자의식 그 자체로만 음악이 차 있는 경우가 꽤 있는 거 같아요. 그 사실 자체에 취해 있다고나 할까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메시지가 아닌 그 상태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버릴 때가 있는 거 같아요.
그걸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그게 힙합의 가장 근본적인 원천이고, 힙합이 대중적으로 성공하고 힘을 갖게 된 가장 큰 동력이라고 인정해요. 그런 부분들도 계속 유지되고, 강화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이제는 다른 걸 하면서 더 확장하려는 사람들도 있어 줘야죠. 이런 문제의식은 예전에 바이탈리티를 계획하면서 했던 얘기였어요. 래퍼들이 다 자기 전문적인 분야를 관두고, 머릿속에 랩밖에 안 차 있어서 랩밖에 모른다는 거.
LE: 랩을 위한 랩, 힙합을 위한 힙합 이런 느낌이겠죠.
그렇죠. 사실 ‘내가 음악을 잘하고 있어.’에는 어떤 것을 그 음악 안에 풀어내고 있느냐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아니고 그냥 자의식 그 자체를 진정성으로 받아들이니까 그 안에만 가둬지는 거죠. 물론, 이상적인 얘기지만,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성에 기반을 둔 지식을 바탕으로 음악을 하고, 세상을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거기까진 너무 간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래퍼들이 좀 더 다양하고 넓게,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면 좋을 텐데 싶어요. 게다가 청자 분들조차도 너무 씬과 동화되어서 힙합 씬의 가치라고 하면 숭고한 것으로 인식하고, 힙합 씬의 올바른 방향, 기준을 세우자는 것에 다 같이 도취해 있는 거 같기도 해요. 근데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걸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가사가 품어낼 수 있는 범위와 깊이를 더 넓고 깊게 가져가면 지금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LE: 이런 말씀을 듣다 보니까 작업자가 사라지면 대가 그대로 끝나버리는 어떤 장인 같은 느낌이 있기도 한 거 같아요.
제가 저를 장인이라고 하는 순간, 인간문화재 혹은 무형 문화재 같은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게 되어버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이 스타일을 지켜져야 하는 거라고 해버리면, 그 순간 오만해지고 대의를 말하는 게 되어버린단 말이에요. 씬의 다양성을 위한 대의를 위해 내가 존재해야 한다고. 그런 허울 같은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저는 저 자체로 존중받을 역량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가사를 다 차치하고도 랩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고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LE: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이그니토 씨가 인하대 철학과를 나오시고 대학원도 진학하셨었잖아요. [Gaia]에 대한 아이디어를 비롯해 이런 전반적인 가치관도 당연히 그런 환경에서 영향받으신 거겠죠?
당연히 영향을 받았죠. 물론, ‘난 철학과니까 철학적인 가사를 써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현학적인 말을 넣거나 하지는 않아요. 제 텍스트 자체는 어려운 편이 아니에요.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게다가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철학 사상을 가사에 직접 녹여서 쓰는 건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 드러나야 한다거나 영향을 받은 티를 내는 그런 느낌이 너무 싫고, 실제로 그런 적도 없어요. 지식을 파편으로 이용해서 가사 안에 집어넣는 것을 확실히 피하려고 해요.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제 식대로 다시 게워내서 저만의 가사를 쓰는 거죠. 철학 자체가 일상과 괴리되는 학문은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생각의 영역을 넓히는 데 주요하긴 했구요.
저는 제 가사를 ‘시적이다’ 혹은 ‘문학적이다’라고 표현해주시는 걸 더 좋아해요. 제가 철학을 공부했지만, 일개 학도였을 뿐이고, 학문적인 성취를 이뤄내고자 목표했던 것도 아니었거든요. 철학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그 생각, 가치관을 얼마나 작품화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작품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얼마나 장르적으로 멋있게 풀어내느냐, 얼마나 완성도 있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안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결과물이 달라진다고 보지는 않죠. 게다가 우리가 투영할 수 있는 철학적 메시지는 큰 관점에서는 다 비슷하거든요. 아예 새로운 철학을 가져오려면 논문을 써야겠죠. (웃음) 제가 하는 이야기가 철학적인 새로운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이그니토라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이라고 봐주셨으면 더 좋겠어요.
LE: 대학원은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랩과 공부를 병행하려고 했는데, 막상 학기를 다니는 도중에는 음악을 전혀 못 하게 되더라구요. 결국은 ‘내가 조금 더 잘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 과 분위기상 2년의 과정을 마치고도 논문 준비를 위해 1년 이상의 시간을 써야 해요. 근데 석사 논문인데도 심사에서 계속 떨어지면서 몇 년을 허비하다가 그만두는 친구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 학문 자체의 권위와 엄밀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웃풋이 열악한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학위를 쉽게 안 주려고 하구요. 저는 당장 제 앨범도 맞물려있는 상황에서, 논문을 위해 1, 2년의 시간을 더 쓴다는 게 큰 모험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자퇴를 알아봤더니 언제든지 재입학할 수 있고, 현재는 수료 상태라 논문만 쓰면 석사가 되더라구요. 말은 자퇴인데, 무기한 휴학인 셈이죠. 언젠가는 학위에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요.
LE: [Demolish]는 이그니토 씨가 학부에 재학하던 초반에 나온 앨범이잖아요. [Gaia]는 대학원에 다니고 나서 나온 앨범이구요. 스스로도 그사이에 생각이 더 깊어지고 성숙했다고 보시나요? [Demolish]가 부끄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을 거 같구요.
당연하죠. 지금의 문장이나 가사적인 면만 봐도 확실히 성숙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가끔 [Demolish]를 들어보면 ‘내가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가사를 썼지?’ 하면서 기특할 때도 있어요. (웃음) 문장에 패기나 공격성이 많은데, 그때만 나올 수 있었던 느낌인 거 같아요. 지금의 가사에서는 공격성도 많이 죽었고, 어떻게 보면 표현이 순해지면서 애환도 많이 담기는 느낌이 있죠. (웃음) 부끄러운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의 패기라고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어요.
LE: 앞서 말한 것처럼 인하대는 이그니토 씨의 대표적인 키워드 중 하나에요. 지역적으로도 인천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사실 서울 사람이어서 서울 부심이… (웃음) 농담이고, 일단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죠. 그런데 인천을 대표하는 래퍼분들하고 교류를 크게 한 적은 없어요. 대표적으로 리듬파워(Rhythm Power) 분들은 한 번도 못 뵈었다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인사했어요. 저는 인하대 앞에만 살아서, 인천을 대표하진 못해요. (웃음) 그저 인하대에 힙합을 심었다는 자부심 정도만 있달까. (웃음)
LE: 인하대에 힙합을 심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인하대 힙합 동아리인 개로가 다른 학교와 달리 특색이 유독 강한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런 특색을 만드는 데 이그니토 씨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아무대로 그렇죠. 제가 개로 1기에요. 그러다 보니 후배들도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단적인 예로, 어떤 공연에서 다른 학교 동아리들과 공연을 함께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가 2000년대 중반이라 한국에서도 사우스 스타일이 유행할 때였는데, 우리 후배들만 다크한 음악을 하더라구요. (웃음) 마침 그 공연을 보고 다른 동아리 후배가 ‘이그니토 형이 다섯 명 있는 줄 알았어.’라고 했었죠. 그때 그 공연의 사회자가 동아리 멤버들에게 ‘힙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다른 학교 친구들은 다 긍정적이고 희망찬 대답을 했는데, 우리 동아리 애들만 ‘힙합은 언더그라운드요.’ 막 이러고. (전원 웃음) 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되게 뿌듯해하고 혼자 엄지 들면서 ‘역시’라고 생각하고 있고. (웃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어요. 후배들이 대학 생활을 행복하고 긍정적으로 해야 하는데…
LE: 혹시 이그니토 씨가 암묵적으로 본인의 음악적 스타일을 강요하신 건 아니겠죠?
전혀요. 저는 이런 음악을 하면 삶이 어두워진다는 거를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웃음) 애들이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동아리 선배다 보니까 제게 영향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분위기가 또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후배들이 새롭게 잘 지내는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이 동아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대학 생활과 음악을 즐겁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LE: 어쩌다 인천, 인하대, 동아리 얘기까지 하게 됐네요. (웃음) [Gaia]의 몇몇 트랙을 살펴보면, 굉장히 열어놓은 채로 가사를 쓰신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작사에 있어 열린 구성을 의도하신 건가요?
그렇게 많이 열려있나? (전원 웃음) 농담이고, 당연히 저는 작품이라면 열려있는 부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훈계하기 위해, 주입식 교육을 하기 위해 음악을 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즐겨 보는 훌륭한 영화들도 개인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요. 그런데 감독이 고려한 의도 역시 분명히 있죠. 이런 것처럼 저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곡을 쓰지만, 그런 내용을 시시콜콜하게 말하는 순간 작품이 멋을 잃는다고 생각해요. 해석의 여지와 빈칸들은 항상 남겨놔야 해요. 그 빈칸을 채우는 게 청자의 개입이고, 그 빈칸을 청자가 직접 채우는 게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쾌감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본인만의 해석을 해주시는 리스너분들에게 늘 감사해요. 그런 해석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LE: 어떻게 보면 청자분들이 그 빈칸을 채우게끔 작품으로 문제를 제시한다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그니토 씨를 매 사에 질문을 던지고, 고뇌하고, 심오한 생각만 하고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웃음) 일상 속의 이그니토 씨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데요.
분명히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실제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걸 좋아해요. 그러니 가사를 그렇게 쓸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래도 요즘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일상에서는 놓고 지내려고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 1집을 냈을 때는 제 음악의 분위기에 갇혀 있어서, 일상이 너무 괴로웠어요. 행복하게 지내야 했던 삶을 스스로 가두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30대가 되면서 많이 놓고 바보처럼 살려고 해요. 사람들을 대할 때도 너무 진지한 말들은 조금 피하는 거 같기도 해요. 되레 너무 실없는 소리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작품에 임할 때를 제외하고는 복잡한 생각은 많이 안 하면서 지내려고 한지는 꽤 됐어요.
LE: 어쨌든 작품에 한해서는 질문을 계속 던지려고, 의문을 제기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겉핥기이기는 하나,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같은 철학자는 문명이 계속 발전하는 걸 두고 과연 이게 진정한 발전인지를 고민했던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얘기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그 부분에서 루소가 됐든, 다른 철학자가 됐든 그들처럼 문명의 발전에 대해 의문이 있으신 건가 싶기도 한데요.
그게 잘 드러난 트랙이 “EVIL MARCH”죠. 이성 중심적이거나 개발 중심적인 사고를 악의 행진이라고 극대화해서 표현했는데, 완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러기도 힘들다고 봐요. 평소에 가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다가도 겨울이 되면 그 생각이 쏙 들어가요. (전원 웃음) 이렇게 추운데 자연에서 어떻게 살아.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편의와 안정이 보장됐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인간이 이렇게 어느 정도의 안정과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긴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근대가 되면서 목숨의 위협이 줄어든 문명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배부른 고민들을 할 수 있게 된 여건이 마련된 지 얼마 안 됐다고 생각해요. (작품에서는) 그 비판적인 측면을 극대화해서 가사로 표현하는 거구요. 그게 작품화죠. 그러니 인류의 문명을 다 되돌리고 물리자는 건 아니고 살짝씩 우리 태도의 보완이나 수정,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으냐 정도죠. 그저 작품에서 이야기해야 하니 뉘앙스를 거창하고 세게 가져가는 거구요.
LE: [Gaia] 속 이야기를 그렇게 범위를 넓게 봐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좁게 보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이 세계 전체로 봐도, 한국 사회로 봐도, 힙합 씬으로 봐도 앨범 속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지 않나 싶었어요. 이를테면, 앞선 이야기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발전했으니까 이만큼 살고 생각하는 거지, 옛날같이 거지 같이 살면 그런 생각이나 했겠느냐고 하면서 한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병폐 같은 것들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는 거 같은데요. 반대로 한국은 기본적으로 발전을 너무 빨리한 게 문제라고 여전히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그런 부분에서 [Gaia]를 통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계시다고 볼 수 있는지 싶은데요.
당연하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죠. 문제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물론, 지금 이렇게 살게 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인정은 해야 한다고 봐요. 요즘은 그것조차도 아예 무시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인정은 하긴 하되,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이렇게 살 수 있게 됐으니 그걸 고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든 의문점을 품을 수 있는 계기들이 우리한테 조금씩의 개선 가능성이라도 마련해주는 거니까요. 그래서 의문점을 인식한 순간부터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변화를 가져오겠죠. 급진적인 전복 같은 건 이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저 우리가 이제는 깨달았다는 거, 고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건 좋은 거 같아요.
LE: [Gaia]도 어떻게 보면 그 의문을 품을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문화, 예술, 그 속의 작품이라는 게 그런 역할을 하는 거죠. 모든 걸 가르치고, 개조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씨앗을 심어주는 정도, 그게 작품의 역할이라고 봐요.
LE: [Gaia]를 듣다 보면, 첫 트랙 “GENESIS”부터 “MOON”까지는 거대, 절대 권력에 대한 경계 같은 류의 묵직한 테마가 눈에 띄다가 “Flower”부터 “Dear Jane Letter”까지, 이 세 트랙에 걸쳐서는 입장이나 시선, 뉘앙스가 굉장히 많이 달라지는 거 같아요. 그전 트랙들인 “SUN”과 “MOON”에서 양지에 나와 있는 절대 권력과 음지에 있는 광인을 대비해서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흐름적으로 충분히 쉽게 이해가 되는데, “Flower”로 넘어가면서 그 과정에 있어서 어떤 괴리가 있는 거 같기도 한데요. 심지어 맨 마지막에 배치된 “EVIL MARCH”나 “Rain”도 그 전반적인 결로 이해가 된다고 보구요.
다시 짚어보자면, “SUN”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실재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에요. 언제나 최상위 권력자들은 존재해왔고, 이렇게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항상 대표자에게 지배되길 원하죠. 지배당하고 있으면서 대표자를 뽑고서 우리가 저 사람을 뽑았다고 만족하고. (웃음) 물론, 누가 뽑히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그 자리, 위치 자체는 언제나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고 있다는 거죠. “MOON”은 그에 대비되는, 드러나지 않는 광인에 관한 이야기에요. 돌연변이 같은 광인, 이를테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나 프리드리히 니체같이 역사에 남았던 위대한 사람들이죠. 한때는 광인 취급 받았던 천재들이 지니는 그 위대함이 이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거죠.
그러다가 “Flower”로 넘어가는데, 어떻게 보면 그 광인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음지에서 피어나는 꽃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무한한 창조성과 힘을 가진 예술가를 나타낸 거죠. 우리는 일반적이지 않고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위대함을 지니고 있는 광인들을 대단하게 바라보지만,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느끼는 고독감이나 고민이나 고통을 집중적으로 담으려 했어요. 거기에 저를 대입했구요. 그다음에 “Maria”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누군가가 태어나고, 고립되는 과정에서의 개인의 외로움 그 자체를 이야기하려 했어요. 분리되어 나오면서 생겨난 외로움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찾으려 하고, 그러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정을 이루는 과정이 담겨 있죠. 그리고 “Dear Jane Letter”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잃어버리며 또다시 외로워지는 이야기를 담은 곡이구요. 그리고 좀 더 크게 보면, 인류가 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말하고 싶었어요.
LE: 그렇게 인류가 신으로부터 분리되고 나서 악마의 행진이 시작되는 거군요.
그렇죠. 이성에 집착하면서 개발과 전진,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닿을 수 있는 진리를 상정한 후 그 진리를 찾으려는 모습이 담겨 있죠. 아무튼, 위의 세 트랙은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에 대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전 항상 외로움을 담은 곡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1집에서도 “Life”나 “Dreamin’” 같은 곡에서 그랬고, 레버넌스 때도 “A Novelette”이 있었구요. 계속 외로움, 괴리, 분리, 각 존재간의 무한한 간극에 대해서 집착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 앨범에서는 그 부분을 좀 더 크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어요.
LE: 많은 분들이 “Maria” 가사 중에 “가슴에 담아진 꿀을 탐하지 / 골짜기 밑에 깊게 밀어 넣은 뿌리로” 같은 라인을 보고서 섹스를 묘사한 것처럼 여기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이그니토가 처음으로 개인적인 가사를 쓴 거라고들 하던데, 사실 언급해주신 과거의 트랙들이 이미 그런 편이었잖아요.
그 전까지는 화자인 제가 드러나지는 않았죠. 저라는 인간 개인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그래도 제 모습을 조금 담아낸 게 “Flower”죠. 창작자의 입장이 담겨 있으니까요. 근데 그조차도 창작하는 자, 예술가의 고독이라고 바라본다면 저 개인은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는 트랙이에요. 아무튼, “Maria”에 관해 부연하자면, 상징적인 표현들이 있어요. 1절부터 구릉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게 가슴을 뜻해요.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가슴 집착남처럼 보일 거 같은데… (전원 웃음) 그런 건 아니고 가장 평온함을 느끼던 상징으로 가슴을 표현하려 했어요. 또, 다르게 보면 언덕, 구릉이 말 그대로 그냥 언덕, 구릉일 수도 있구요. 압축적인 의미를 담아낸 자연물을 활용한 거죠. 말씀하신 그런 섹슈얼한 부분은 므흣한 느낌을 주려 한 게 아니라, [Gaia]가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웃음) 땅이고 대지인 가이아에 바위, 나무가 뿌리를 박고 뚫고 들어가서 삽입되는 생체적인 행위로 어머니는 대지고, 우리는 그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걸 좀 더 이미지화하려고 했어요. 그걸 개개인의 섹슈얼한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는 거구요.
LE: 서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마지막 트랙 “Rain”에는 “이제 나는 포기하려고 하네 / 잊혀지네 지워지네 / 이제 나는 사라져가고 있네 / 잊혀지네 지워지네” 같은 가사가 나오는데요. 그 내용을 미루어봐서는 이번 앨범이 문명, 인류, 체계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악마의 행진을 맞이한 채로 각자의 고독감을 영영 해결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는 건지 싶은데요.
그건 너무 당연한 거죠. (전원 웃음) 고독감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라는 존재가 지니는 아주 너무 당연한 특성이죠. 그걸 극복하려고 사랑은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안 믿구요. (웃음) 정말 애달픈 과정인 거 같아요. 그 괴리,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 발악하지만, 그저 발악만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고 발악을 안 할 수도 없구요. 모든 걸 놓고 초탈해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 수도자, 승려 같은 분들을 보고 해탈했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그 정도의 그릇은 아닌 거 같아요.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저는 언제나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애달프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언제나 이 고독 시리즈에 집착하고 있구요. 앞으로도 계속 낼 겁니다.
LE: 되게 사적인 이야기라 민감하실 수도 있겠으나,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을 거 같아서요. 본인의 연애 과정에서 관계적으로 일어났던 일화 같은 걸 얘기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물론, 동료, 가족들을 비롯한 타인들에게서도 고독감을 느낄 수 있겠으나, 사실 그 감정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연인 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이렇다 할 건 없어요. 전 평범하다고 생각해요. 굳이 말하자면, 공감 능력이 살짝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싸이코패스 정도는 아니고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을 잘 못 맞춰주는? 모르겠어요. 제가 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순 없을 거 같은데, 어쨌든 저는 제가 평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을 정도로 크게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근데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지내려고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은 일방향적이라고 봐요. 소통한다고 느껴도 피상적인 거고, 그것도 서로 대화와 이해의 폭이 겹치는 선에서만 가능하고 완벽하게 이뤄질 수 없잖아요. 그걸 나타내는 게 “Flower”의 브릿지에 나오는 “작품 속에 모든 걸 말할 순 없어 / 너와 난 이로써 완전한 작별을 이뤘어 / 그 간극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 나는 무한한 가능성 그 앞에 마주서”라는 가사죠. 존재 간의 간극은 그렇게 항상 있는 거고,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최대한 서로 이해하고, 사랑과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겠죠.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각 개체는 무한한 거리가 있고 그걸 좁히기 위해서 언어, 몸짓, 각종 대화 수단을 이용하는 건데, 저는 사실 이해라는 것도 기술이라고 보거든요. 이해와 공감도 일종의 경험을 습득함으로써 가능한… 그렇게 습득과 경험과 노련함으로만 그 기술이 가능해지는 거라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겠어요. (웃음)
LE: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Gaia]를 비교적 더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그니토 씨가 세상을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당연히 없진 않죠. 저는 존재 자체를 슬픈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는 내내 슬퍼할 거 같아요. 근데 그건 그거고, 일상 자체를 슬프게 살려고 하지는 않아요. 평소에는 그런 생각들을 잊고 세상에 녹아들어서 인간 민재기로서 즐겁게 살고 싶고,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요.
LE: 결국, 인간이 절대적인 존재를 잃어버리고, 그 후에 그 절대적인 걸 찾으려고 이성을 동원하기 시작한 게 이 세계에 재앙이 시작된 계기라고 보시는 건가요?
그게 사실 굉장히 많이들 쓰는 클리셰죠. 개발, 개발 하다가 모두 망한다 같은 내용이 예전부터 경고되었던 거잖아요. 핵전쟁이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한다든가, 기술이 개발될수록 우리는 점점 소외된다든가 말이죠. 기술 개발의 최첨단이 곧 무기 개발이잖아요.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대량 학살을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기술이 개발되어 온 측면이 많기 때문에 기술적인 개발이란 게 육체적인 편리를 가져다줄 순 있어도 결코 인간에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죠. 그러나 이 인간의 호기심과 여러 가지 권력이나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기술의 개발을 멈출 수는 없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더 가속화되겠죠.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인 이상 항상 다들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LE: 태도적으로 보았을 때, 극도로 합리적인 이성 중심주의적 사고관에 대한 비판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가사 면면을 보면 사실 신에 대한 믿음도 딱히 있으신 거 같지가 않더라구요. 혹 종교가 어떻게 되시는 지가 궁금했고, 절대적인 신이 없다는 이야기에서 무신론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계신 건가 싶더라구요.
지금 종교는 딱히 없구요. 근데 가사에 보면 기독교적인 표현들이 들어가잖아요. 어쩔 수 없는 게, 어릴 때 교회를 꽤나 다녔었어요. (웃음) 유치원 중에 교회랑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유치원을 다녔었다 보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내용들을 접했어요. 부모님도 교회에 다니시구요. 지금은 당연히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건 또 잘 모르겠어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 신이란 게 꼭 특정 종교에서 말하듯이 유일신으로서 인간적인 형태를 띠고 인간적인 사고를 하는, 예를 들면 인간이 잘못하면 우리 아들들이 잘못했다고 화내고, 자기를 받들어주면 좋아하고, 이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전원 웃음)
LE: 그거야말로 절대 권력이네요.
그건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이잖아요. 신은 얼마든지 어떤 형태로든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그 신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 세계에) 개입할 거라는 생각은 또 절대 안 해요. 개입해서 상벌을 주고, 우리가 사망한 이후의 세계를 마련해주고, 이러진 않을 거 같아요. 이 세상의 룰을 프로그래밍할 수는 있겠죠. 해놓고 그냥 지켜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그 룰 자체가 신일 수도 있다고 보구요. 어떤 의인화된 인격이 이러쿵저러쿵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많이들 얘기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가상 시스템 공간 안일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어떤 주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LE: 이번에는 얘기를 더 좁혀볼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Gaia]라는 앨범을 전체 체계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한국 사회로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그 범위를 완전히 좁혀서 씬 얘기를 해볼까 해요. 우선,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이그니토가 악마의 음악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요. 이 부분에 관해서 저희 <7INTERVIEW>에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나보다 가사에 악을 담아내는 사람은 더 많은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 부분에서 씬에 관한 생각이 함축적으로 담긴 것 같은데, 좀 더 풀어서 얘기해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요.
사실 제 가사에 악한 건 없잖아요. 제가 악을 조장하고 ‘여러분 우리 못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탄을 믿읍시다.’ 이렇게 말한 게 아닌데… 악은 작품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거죠. 1집에서는 핍박과 고통에 관한 저항으로 ‘그러면 내가 악마가 되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죠. 제가 자세히 말 안 해도 어떤 말을 하는 건지 다 아실 거예요. 우리나라 특유의 경쟁 중심의 성공지상주의에 힙합의 정서가 굉장히 잘 녹아들었잖아요. 흔히 학교에서 배우는 천민자본주의에 정말 멋지게 녹아들었죠. 과정과 노력과 땀을 강조하는 건 좋아요. 근데 그 결과 자체가 미덕은 아니잖아요. 부자들이 하는 말이 있죠. ‘너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이 말의 숨은 뜻은 뭐냐면 ‘나의 부의 근거는 나의 합당한 노력과 재능이다.’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가 꼭 그렇게 형성되지 않고 굉장히 이상하게 형성된 부분들도 많잖아요. 야비한 권모술수나 부동산, 친일의 재산, 상속 등으로 말이죠. 기업들의 행태도 양심적이지 않죠. 그런데도 ‘이런 게으르고 나약한 것들.’이라고 말하는 건 ‘나는 부지런하게 노력했고, 이 부를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어.’라고 말하면서 합리화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이게 랩에서도 고스란히 옮겨지는 게, 성공한 자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들을 랩에서 비웃기 시작했어요. 굉장히 악하지 않나요? 그렇게 악하고 나쁜 사람들이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넨 못하고.’, ‘너네는 게으르고 나약해.’라는 게 아까 말했듯이 자신은 그 반대라는 거잖아요. 근데 결과가 꼭 항상 과정과 그 가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글을 봤는데, ‘자본주의 시대에는 고귀하고 훌륭한 재능임에도 자본화가 안 되는 경우가 있으면서도, 천박하고 악덕에 가까운 재능이더라도 수익성이 뛰어난 경우가 있다.’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전적으로 동의해요. 자본적인 성공이 모든 가치를 증명해주는 미덕이 절대 아닌데, 다 그 얘기만 하고 있는 게 아쉬웠어요. 여기서 앞서 말한 악의 정의를 다시 하자면 타인에 관한 무배려, 무관용 같은 거죠. 힙합이 과거에 악한 뉘앙스를 풍겼고, 사람들이 그 악함에 매력을 느껴서 그게 힙합이 자본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아요. 어쨌든 악한 음악으로서의 매력 포인트를 먹고 자란 장르는 맞으니까요. 그런데도 저보고 악하다고 하는 건 억울하다 이거에요. (전원 웃음) 악을 상징적으로, 문학적으로, 철학적인 소재로 사용한 거지, 제가 이 악한 정서를 포장하고 퍼트리고 권유한 적은 없잖아요. 물론, 거기에 영향받으면서 중2병으로 빠져서 흑화한 어린 소년 소녀들도 있겠지만, 그건 일시적인 과정일 뿐이지 그게 세상에 악을 초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전원 웃음)
LE: 많이 거론되는 그런 류의 가장 대표적인 이그니토 씨의 가사 중에는 “희망은 공평하지, 모든 이들을 속여” 같은 게 있긴 한데요. (웃음)
그건 악이라기보다는 회의감, 슬픔, 비관이죠. 비관적인 게 악한 거 아니냐, 사회의 성장 동력을 떨어트리는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모두를 침울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요. (웃음) 작품은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도 카타스시스를 주면서 정서적인 환기를 줄 수 있다 생각하거든요. 영화만 봐도 그래요. 한국 영화 얼마나 부정적이에요. (웃음) 저는 요새 한국 영화를 보면 다 죽고 그러는 게 너무 지나치게 부정적이어서 힘들어요. (웃음) 근데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하잖아요. 영화가 심각하고 부정적이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요. 근데 음악이 부정적이고 심각하면 손가락질을 하더라구요. 음악은 밝고 즐거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참 웃기다고 생각해요. 전 오히려 영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밝고 즐거운 것들 위주로 보려 하고 있어요.
LE: 원론적으로 보았을 때, 자본이 태어난 게, 봉건 시대에서 근대 시대로 넘어오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면서 그걸 교환하기 위한 용도로 화폐가 생겨나면서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그니토 씨의 생각을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이 자본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선하게 활용할지를 고민하자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제가 경제학자는 아니라서 깊은 이야기까지 들어가기는 좀 힘들구요. (웃음) 그저 그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주의하자는 것까지가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이죠. 그 이상의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제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겠죠.
LE: 씬 얘기를 좀 더 해보면, 지금까지 이그니토 씨의 발자취를 보면, 언더그라운드에 오래 계셨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런데 2000년대 중, 후반부터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이 일종의 작은 가요계처럼 되어가면서 언더그라운드 정신이 희석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이그니토 씨는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의 의의라든가, 그 안에서 가져야 할 정신, 가치로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더그라운드를 포괄하는 큰 한 마디는 비타협성이라고 생각해요. 전 언더그라운드가 비타협의 장이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왔고, 이 비타협성이라는 워딩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언더그라운드 씬은 붕괴했잖아요. 실제로 언더그라운드처럼 활동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자본이 커지고 규모가 커지니까 다들 거길 바라보게 됐죠. 비타협성을 가진 사람들이 타협을 어느 정도로 하느냐에 따라 위치가 바뀌었죠. 얼마든지 타협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요. 비타협성은 이런 시대에 [Gaia] 같은 앨범을 낼 수 있는 걸 말하는 거죠. (전원 웃음)
LE: 그 초점이 기준으로서 명확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말씀이겠죠?
작가의 비타협성이 얼마나 드러나는가가 척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음악적인 부분에서 비타협적인 음악을 대중 다수에게 알릴 수 있다면 그건 좋은 거죠.
LE: 비타협성에 관련해서 되감기 해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 보죠. 과거 몸담았던 빅딜 레코드(Big Deal Records)라는 집단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동부 스타일의 먹먹한 톤의 하드코어 힙합을 지향하는 편이었잖아요. 미국에서는 특정 시기에 성행했던 스타일이기도 한데, 그 당시 빅딜 레코드의 움직임이나 본인이 몸담으며 했던 음악들은 비타협적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근데 말씀하신 그 시기에도 그 스타일이 (씬에서) 메인스트림은 아니었고 언더그라운드였어요.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Jedi Mind Tricks)가 언더그라운드에서 빵 뜨긴 했지만, 영영 언더그라운드이듯이 그 음악 자체가 미국에서 대중화되지는 않았죠. (웃음) 아무튼, 저는 그때도 비타협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고, [Demolish] 같은 경우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음악이었죠. 요즘은 ‘엄마, 저 랩으로 성공해서 돈 벌어 올게요.’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진짜 불효막심한 놈이 된 심정을 가지고 랩을 했거든요. ‘엄마, 죄송한데 제가 가정에 보탬이 안 되겠네요.’라는 마음으로요. ‘나는 유명세 혹은 경제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을 하고, 이게 돈벌이가 안 될 거라는 걸 알고도 내가 좋아서 선택했으니 당연히 다른 직업을 병행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바이탈리티를 조직했던 건데, 실패했죠. 다른 직업이랑 병행할 수가 없더라구요. 음악적으로는 타협을 절대 안 하니까 다른 직업을 가지고 돈은 다른 걸로 벌자고 생각했는데, 멤버들이 취업을 하니까 음악 활동을 못하더라구요. 데즈뎁스(Dezdepth)같은 경우는 정말 너무 불쌍했어요. 밤 11시에 전화하면 ‘회사야’, 주말에 전화하면 ‘중국 출장 와있어’. 밤 11시까지 매일 일을 시킨 다음에 주말에 중국 출장을 보내요. 월요일 돌아오면 다시 회사 가구요. 말이 안 되더라구요. 어떻게 음악을 하겠어요. 거기다 멤버들이 다 결혼까지 하니까 끝나버렸죠.
LE: 그런 현실적인 개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이그니토 씨 개인적으로 본인이 크루를 이끌 만한 성향은 아니라고 판단이 드셨는지 싶기도 한데요.
성격적인 문제는 아니었던 같아요. 아, 제가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군요? (웃음) 그들은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요. 와해된 과정이 명료하면 모르겠는데, 환경적으로 유지가 안 될 수밖에 없었다 보니 저를 리더로서 검증하는 시간은 못 가졌던 거 같아요. 저도 부족한 점이 당연히 있었을 테고, 제가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그 과정을 극복했을 수도 있겠죠.
LE: 그런 내, 외부적인 문제까지 포함해 어떤 측면에서 보면, 과거와 달리 오리지널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악가가 많이 줄어든 것 같은데요. 특히나 이그니토 씨 계열이라고 하면 헝거노마(Hunger Noma) 씨 같은 분이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이겠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헝거노마 씨 외에도 이 계열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을 특별히 더 소중하게 생각하실 거 같기도 해요.
한때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프로듀서분들의 연락도 많았고요. 안타까운 건 역량이었죠. 성향을 자기가 결정한다고 해서 꼭 아름다운 건 아니잖아요.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고 실력과 완성도가 따라줘야 하는데 정말 괜찮다 싶은 사람은 소수였죠. 그리고 과거에 하드코어 스타일을 지향했던 프로듀서분들도 결국에는 생존을 위해서 다 바뀌더라구요. 그 와중에 레이딕스(Radix) 씨라고, 하드코어한 샘플링 비트를 만드는, 이 장르에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과는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될 것 같고요. 가막새라는 친구와 블랙나인(Black Nine)이라는 친구도 이쪽 계열에 애착을 갖고 있는 기대하는 래퍼 동생들이에요. 블랙나인은 다른 스타일도 겸하는 친구인데 좋은 음악을 보여줄 거예요. 헝거노마는 당연히 응원하고요.
사람들이 간혹 헝거노마를 보고 이그니토 아류라고 비난하는데 전혀 달라요. (전원 웃음) 어느 하나를 깊게 알면 차이가 보이는데 잘 모르고 대강만 알면 차이가 안 보이잖아요. 스타일만 같으면 하나로 보이잖아요. 지금 씬에서 랩 똑같이 하는 사람들 넘쳐나는데 어떻게 저랑 헝거노마랑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건 진짜 억울한 거고, 사람들이 야속하죠. 헝거노마는 저와 가사도 완전 다른 방향으로 너무 잘 쓰고, 랩도 잘하기 때문에 분명히 뭔가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해요. 가끔은 저랑 묶여서 평가당한다는 게 미안하기도 해요. 이쪽 계열 래퍼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같은데, 많지 않으니까요.
LE: 많지 않을수록 연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그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니 지금은 본인 음악에 많이 집중하시는 거겠죠. 이번에 13 스텝스(13 STEPS)의 도쿄13(DOKYO13) 씨와 한 트랙 함께하실 것처럼 앞으로도 장르적으로 다를 수는 있어도 정서적으로 맞는 음악가들과 협업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저는 항상 하고 싶죠. 근데 힙합 씬에서조차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면서 사는데, 타 장르까지 손을 뻗치기는 더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웃음) 센 정서의 음악을 하는 것도 좋지만, 전 굉장히 우울한 정서를 지닌 음악가들과도 함께 해보고 싶어요. 그보다 우선 힙합 씬에서라도 교류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LE: 많은 힙합 뮤지션들이 속해 있는 벅와일즈(Buckwilds)라는 크루에 소속되어 계시는데, 그쪽에서 교류하실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실 벅와일즈라고 하기도 부끄러워요. 벅와일즈가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 잡고, 훌륭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나서 나중에야 합류했거든요. 합류도 멤버들에게 다 공지된 상태에서 한 것도 아니고, 제이통(J-Tong)의 권유에 따라 한 거구요. 벅와일즈 자체가 단체로 활동하기보다는 개개인의 활동에 더 집중하고, 또 음악적인 개성도 다르다 보니 편하게 함께하게 된 것뿐이죠. 그렇지만 합류 후에 좋은 친구들도 많이 알게 되고, 활동 반경이 훨씬 더 넓어졌으니 도움받은 것도 너무 많고요. 저는 그들이 멋지게 꾸려놓은 크루에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벅와일즈 크루라는 걸 드러내는 것도 민망해요. 제가 많이 못 다가가다 보니까 아직까지 친해지지 못한 멤버들도 있고요. 앞으로 어떤 교류가 있을지는 제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이지 않나 싶네요.
LE: 그래도 [Gaia]에는 꽤 많은 벅와일즈 멤버들이 참여했어요. 일단, 수장 제이통(J-Tong) 씨가 있는데요. 제이통 씨는 가장 최근에 본인의 사이트를 통해서만 자신의 음악을 판매하는 굉장히 독특한 행보를 보여주셨잖아요. 물론, “MOON”에서 제이통 씨를 섭외한 게 당연히 음악적인 이유에서였겠지만, 그런 어떤 행보에서 비춰봤을 때의 성향이나 가치관에서도 서로 맞지 않았을까 싶더라구요. 물론, 겉에서 보았을 때 혹자는 ‘이그니토랑 제이통? 서로 맞겠어?’ 이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요.
말씀하셨듯이 꼭 그래서 섭외한 건 아니구요. (웃음) 곡 테마 자체가 광인의 탄생이고, 광인하면 또 제이통이기 때문에… (전원 웃음) 근데 되게 진중하게 해줬더라구요. 그런 것과 별개로 제이통이 기존의 유통 방식에 대한 반기를 들고, 스스로 험난한 길로 가는 게 참 대단한 거 같아요. 솔직히 제이통 정도면 원래 시스템에 맞춰서 움직이면 얼마든지 이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현재 없구요. 존경스러운 부분인 거 같아요. 저라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할 만한 기반도 없구요. 제가 하면 바로 사장됩니다. (웃음)
LE: 화나 씨 얘기도 좀 해봐야 할 거 같은데요. “EVIL MARCH”라는 트랙만 보면, 화나 씨랑 잘 맞는 구석이 있는 거 같아요. 화나 씨가 과거에 [Fanatic]에서의 광기를 보여준 순간도 있었고, 캐릭터 자체가 독특하다 보니까 매칭이 잘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그런 측면 말고도 역시나 지난 몇 년간 화나 씨가 보여준 행보가 비교적 일반적이지 않았고, 또 물론 서로 다른 집단에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서로 공감대 아닌 공감대가 예전부터 있었을 거 같기도 해요.
화나랑도 개인적으로 생각을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근데 화나도 딥하고 진중한 무드의 가사와 곡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그럼에도 막상 같이 작업한 건 “작두” 리믹스 전까지는 거의 없었거든요. 딥플로우(Deepflow) 앨범에서 “불가항력”으로 같이 한 적이 있긴 한데, 2007년이니까 엄청 옛날이죠.
LE: 근데 그런 시선도 참 흥미로운 게, 예전에는 빅딜 레코드, 소울 컴퍼니(Soul Company)가 씬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렸을 때는 사실 두 분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많이는 없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 가치관적인 측면에서 서로 맞을 수도 있겠다 생각 들었던 게, 화나 씨의 “맹종”이라든가, “Red Sun”이라든가, 이런 트랙들을 들어보면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 굉장히 맹렬하잖아요.
그렇게 묶이면 저야 좋죠. 왜냐하면, 화나의 인지도가 저보다 높기 때문에, (웃음) 화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은 것 같아요. 어쩌면 삼단이라는 크루도 같이 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말씀해주신 그런 트랙들에서 착안해서 “EVIL MARCH”에서 화나랑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화나도 또 잘 소화해준 거 같구요.
LE: 하지만 음악적인 부분 그 이상의 인간적인 특별한 관계로 이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군요.
저도 그렇고, 화나도 그렇고, 인간적인 특별한 관계를 크게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라… (전원 웃음) 서로 필요할 때 연락하고… 그래도 가까운 사이니까 앞으로 더 많은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LE: 제이통 씨와 화나 씨는 한 트랙씩 피처링으로 참여하셨다면, 싸이코반(Psycoban) 씨는 앨범 전반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거로 알고 있어요.
컨트릭스가 그렇게 되고 나서 한동안 고민하다 컨트릭스 어머님께 연락을 드려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어머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컨트릭스의 곡이 세상에 나오는 게 좋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작업 파일들을 어떻게 가져와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어요. 일단은 컨트릭스 집에 저 혼자 갔었어요. 컴퓨터를 켰는데, 제가 프로듀서가 아니다 보니 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더라구요. 컨트릭스가 에이블톤(Ableton)을 사용했는데, 에이블톤을 잘 다루는 프로듀서가 있나 수소문하다 싸이코반이 사용한다고 해서 조심스럽게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었죠. 싸이코반은 컨트릭스와 일면식도 없었으니 도와달라는 게 실례였는데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해서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저랑 같이 인천의 컨트릭스 집에 다시 가서 어머님을 뵙고 컴퓨터를 켰는데, 컴알못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작업 파일을 뽑기까지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더라구요. 드라이브도 꼬여 있었고, 프로그램을 열었더니 샘플들의 경로도 다 어긋나 있더라구요. 싸이코반이 그걸 다 일일이 경로지정 해주고, 베이스는 가상악기가 유실되었는데, 그 유실된 걸 다시 만들어서 보내주고 하면서 곡을 추출하고 유실된 부분을 복원하는 데에 많이 도와줬어요. 저는 그때 싸이코반을 정말 슈퍼히어로 보듯이 보면서 감탄했어요. 항상 은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벅와일즈를 나갔지만, 나간 후에도 계속 연락하고, 제가 처음 벅와일즈에 들어갔을 때 저를 반갑게 맞이해준 친구예요.
LE: 싸이코반 씨를 은인이라고 표현해주셨는데, 컨트릭스 씨 같은 경우에는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감정이 많이 드실 거 같아요.
너무 아쉬웠던 게, 컨트릭스랑 인간적인 교류를 많이 못 했어요. 실제로 만났을 때도 잠깐씩만 보고, 몇 년 동안 존댓말을 하면서 온라인 위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했어요. 저도 그렇지만, 컨트릭스도 외향적이진 않았거든요. 바이탈리티 크루 모임에도 와서 다 같이 만나면 어떨까 했는데, 잘 안 나오고 공연장 오는 것도 안 좋아했어요. 그러다 컨트릭스도 인간적인 교류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는지, 한 번은 ‘제가 언젠가는 이그니토 님께 말씀을 낮추라고 하고, 형님으로 모셔야 할 텐데.’라며 얼핏 의사를 비쳤었어요. 그러다 나중이 되어서야 말을 놓게 됐는데, 얼마 안 되어서 컨트릭스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 인간적인 측면에서 일단 아쉽고, 작업적으로는 그 친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던 게 미안하죠. 녹음을 굉장히 늦게서야 시작해서 랩 녹음을 한 번도 들려주지 못했거든요. 이 친구는 신인인데 저보다 두 살밖에 안 어릴 정도로 나이가 좀 있었어요. [Gaia] 이전에 컨트립스(Contrips)라는 이름으로 잠깐 활동을 했지만, 이름을 바꾸고 첫 공식 결과물을 제 앨범으로 선보이길 원했을 거예요. 나이가 있다 보니 집안의 압박도 당연히 있었을 테고요. 나중에 어머님께 들었는데, 부모님이라든지, 주변에서 다른 음악 하는 분들을 소개시켜준다고도 했는데, 하드코어 힙합에 애착이 있어서인지 저희랑 같이하고 싶은 걸 좀 더 해봐야겠다면서 그런 제안을 거부했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친구가 저희 바이탈리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몰랐어요. 처음에 [Gaia] 작업에 착수할 때는 컨트릭스가 바이탈리티가 아닌 채로 그냥 제 2집 프로듀서로서 함께 했어요. 그러다 제 앨범이 딜레이가 될 거 같으니까 개인 EP를 발표하겠다면서 이렇게 제안하더라구요. 무료 EP를 낼 건데, 기왕이면 바이탈리티 이름으로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때는 이미 바이탈리티가 해체한 상태였지만, 크루 이름을 거는 건 도와주겠다고 했죠. 그래서 바이탈리티를 별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었어요. 근데 나중에 그 친구 집에 가보니까 예전에 줬던 바이탈리티 스티커 몇 장이 방문이랑 컴퓨터에 붙어 있어서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별생각 없이 붙였던 걸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내가 이 친구를 어느 정도 책임졌어야 하는 상황이었구나. 이 친구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싶었어요. 그 죄책감은 평생 안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 그 친구가 그렇게 되었을 때, 죄책감이 저를 너무 감싸와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 했었어요. 마음이 정리된 뒤에도 그 곡들에 가사를 쓰고 녹음을 하고 공연할 자신이 없었어요.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더 정리가 되고, 앨범을 내는 게 이 친구를 위한 길인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재개했고요. 오늘이 6월 16일인데, 컨트릭스 기일이 내일이네요. 2주기가 되는데, 찾아가려구요.
LE: 컨트릭스 씨가 랩이 얹어진 트랙을 듣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앨범이 나왔으니 후련함이라 말할 순 없어도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는 덜었다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게 얘기하면 정말 이기적인 거죠. 그런 마음이 당연히 없지는 않은 게,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간 놀아도 노는 게 아니고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거든요. 앨범을 내고 나서는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했다는 정도의 생각은 드는 것 같아요. ‘할 만큼 했어. 털어냈어.’ 이런 건 절대 아니죠. 냈으니까 이게 묻히지 않게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당연히 있구요.
LE: 음악적으로 살펴보면 [Demolish] 때는 한 명의 프로듀서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일드비츠, 랍티미스트(Loptimist) 씨와 많이 하셨고, 레버넌스도 데즈뎁스 씨와 1MC 1프로듀서 팀이었잖아요. [Gaia], [Black]도 비슷한 형식으로 적은 프로듀서진과 함께 만들었구요. 음악적으로만 놓고 봤을 때 작업에 있어 수월해서 그러신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은데요.
일단 제가 원하는 성향의 곡을 만드는 분들이 많이 없죠. 이 장르를 잘 이해하고 이 감성과 분위기를 완전히 이해하는 프로듀서를 찾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한 명이랑 하는 게 통일성과 수월함에서 유리하죠. 앨범 주제를 전달한다든지, 의견 교환할 때 훨씬 수월하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러고 싶어요.
LE: 그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그간의 음악들을 사운드적으로 보면 하드코어 힙합이라고 하면 제다이 마인드 트릭스나 AOTP(Army Of The Pharaohs)부터 네크로(Necro), 일 빌(Ill Bill)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운드적으로든 가사적으로든 분위기적으로든, 그런 식으로 인식하는 것에 동의하시는지 싶어요. 그러면서도 그런 선대라고 할만한 사람들을 완전히 참조한다는 느낌은 아닌 거 같은데요.
물론이죠. 저는 당연히 그 계통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들과 동료라고 생각해요. 저는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가지죠. 그러면서도 말씀하신 대로 카피하는 느낌은 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 정서는 간직하되, 저의 가사적인 특성이나 특유의 것들을 많이 녹여내려고 하죠
LE: 앞서 나열한 그 각각의 앨범에서 프로덕션적으로 변화라고 하면 어떤 게 있을까요?
[Black]은 의도적으로 차이를 두고 만든 앨범이구요. [Gaia]도 의도적인 차이가 조금은 있었죠. [Demolish]보다는 덜 투박하게 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컨트릭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점에서 저는 원래 뭉치는 스네어를 좋아하는데, 컨트릭스가 퍼지는 스네어를 쓰자고 주장했었죠. 그런 부분이나 록적인 사운드를 샘플로 가미한다든지, 그런 부분에서 차별성을 두려고 했죠.
LE: 랩적인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여쭤보고 싶은데요. [Black]을 들어보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톤에서 벗어나 가볍게 날리는 느낌이 있는데, 그때는 스타일에 변화를 주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Gaia]는 또 안 그렇더라구요.
[Black] 때는 모든 면에서 힘을 뺐어요. 가사, 목소리, 비트 모든 면에서 힘을 빼고, 라이밍도 일부러 설렁설렁했어요. 그게 의도였는데, ‘뭐야 1집이랑 다르네, 싫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아시겠지만, 저는 랩에 굉장히 힘을 줘서 하는 스타일이에요. [Black] 때는 반대로 힘을 많이 뺐고, 이번엔 다시 돌아온 거죠. 기존의 기조를 다시 유지하는 건데, 디테일 면에서는 많이 달라져서 1집 때보다 유연함 같은 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해요.
LE: 랩 방법론이라고 할까요? 방식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부분은 1집과 2집이 비슷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이그니토 씨의 기초적인 랩 방법론만 두고 보면 언제쯤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1집 때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구요.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보완한 것 같아요. 지금은 만족스럽습니다. 전 제 랩적인 부분에서도 자부심이 있는데, 사람들이 제 랩적인 부분을 많이 안 파고들어 봐주시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리듬, 라이밍, 플로우, 구성 이런 디테일한 것들에서 많이 신경 쓰는데, 너무 캐릭터와 목소리로만 기억되는 것 같아요. 그런 측면이 없었으면 전 제가 베이직한 힙합 음악에서도 하드웨어적으로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고, 뛰어남을 증명할 수 있는 래퍼라고 생각해요.
LE: 라이밍 구조를 보면, 많은 한국 래퍼들이 그렇지만, 세 글자, 두 글자짜리 라임을 정확하게 때려 박는 느낌이 있는데요. 가사를 쓸 때 라이밍 할 때의 어감이라든지, 플로우 디자인 같은 것까지도 디테일하게 고려하시나요?
당연히 감안하죠. 근데 타격감 있게 때리는 부분도 있는 반면에, 부드럽게 넘어가는 부분도 많아요. 그리고 당연히 발음을 신경 쓰죠. 저처럼 가사에 신경 쓰는 사람도 발음과 의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오면 래퍼니까 당연히 발음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어요.
LE: 랩 레슨을 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가르치실 때는 어떻게 조언하시는 편인가요?
지금은 잠시 쉬는 타이밍이긴 한데요. 요즘 어린 친구들은 레슨받으러 오면 체계 자체를 아예 모르고 오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다들 이렇게 하고 있다고 알려준 뒤에 그거대로 한 번 다른 래퍼들을 검증해보라고 하면, 그제야 알게 된다고 하더라구요. 드러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래퍼들은 어느 정도 그 기본적인 규칙이나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듣는 분들이 랩을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쾌감과 경외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즐기는 경우가 꽤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자극적인 가사가 중심이 되는 거 같아요. 랩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라이밍이 리듬적으로, 또 의미적으로 동시에 폭발할 때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부분을 많이 조언하죠. 영화를 볼 때, 스토리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법이나 감독의 의도 같은 부분들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런 거죠.
LE: 가사적인 부분에서는 어떤지 궁금해요. 의미적으로, 음향적으로 딱 떨어져서 하이라이트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랩을 처음 하는 사람들에게 가사에 관해서는 어떻게 조언해주시는 편인가요?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옛날부터 말했던 게, 가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라이밍을 허투루 쓰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단지 소리를 맞추기 위해 의미 없는 단어, 허투루 넘어갈 말들로 라임을 맞추기보다는, 필요한 부분에 문장의 핵심 단어나 무게감 있는 언어들로 라임을 구성하면 랩이 가지는 폭발력을 훨씬 증대시킬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LE: 레슨도 레슨이지만, 이그니토 씨 본인도 아티스트, 작사가로서 수사법이나 문체가 뚜렷하시잖아요.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웃음) 간혹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분들은 ‘지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쓸 거야.’, ‘아무 말이나 하면 저런 가사 나오는 거 아냐?’ 같은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에요. 그런 말에 영향을 받는 리스너들도 있는 게 통탄스럽죠. 저의 수사법과 문체는 제가 쌓아 올린 의미 있는 성과라고 생각해요. 물론, 반대로 요즘은 오히려 가사에서 내용을 버릴수록 더 쿨하고 예술적인 느낌을 주잖아요. 정답이란 건 없는데, 단지 자기가 추구하는 방식에서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LE: 확실히 글로만 봐도 가사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혹시 책 같은 형태로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바를 담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금은 없어요. (웃음) 힘들 것 같아요. 그렇게 하려면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꽤 높은 수준을 내야 만족스러울 것 같아서, 아직은 감히 도전할 생각은 없습니다. 쓰기야 쓸 수 있겠지만, 책으로서 높은 수준을 이루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LE: 이제 막바지입니다. 많은 래퍼들이 욕망 혹은 돈, 스웩, 랩을 위한 랩 등 여러 가지를 하는데, 그럼 과연 이그니토 씨에게 한 명의 음악가, 그리고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랩을 하고, 가사를 쓰고, 예술을 하는 목적이나 의의가 무엇인지, 또 그게 개인적인 측면에서 어느 부분에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나요?
제 욕망은 그거죠. 하고 싶은 것을 멋있게 해서, 훌륭하게 해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다.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그랬으면 이런 음악을 못하고 안 하고 다른 걸 했겠죠.
LE: 뭔가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이그니토 씨의 캐릭터로 돌아오신 거 같은데요? (웃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철학하는 사람들은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걸 몇 번씩 짚고 넘어가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듯하구요.
그렇죠. 철학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하죠. 따지기 시작하거든요. 저는 안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실생활에서는 바보인 것처럼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LE: 대의에 대한 경계라든가, 이런 게 많이 보여서 앞으로의 비전이라든가, 음악가로서의 자의식 같은 걸 이야기하기가 다소 무의미할 수도 있겠어요. 어쨌든 그래도 오랜만에 앨범이 나왔고 했으니까 음악가로서의 앞으로의 비전,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계획이 없어요. 진짜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되는 대로 하자는 식이었거든요. 정말 되는대로 했고, 제가 당장 하고 싶은 것들을 했어요. 제가 계획이 있고, 일가를 이루고, 경제력을 얻고, 힘을 얻어서 무엇을 하겠다고 했으면 좀 더 계산적으로 행동하고, 계산적으로 기한 맞춰서 작품 내고 했겠죠. 그런 부분에서 부족한 거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일단 2집을 냈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 조금은 머리를 비우고 있는 상황인 거 같아요. 또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아마 다음 것을 하겠죠.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는 게 좀 부족한 거 같긴 해요. 현대의 예술가가 요즘처럼 예술과 작품과 작가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함이 필수가 되어버렸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도 조금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부지런함이 자기 개인을 성숙하게 단련하는 부지런함이 아니라 표면적인 부지런함, 기계적으로 계속 뭐 내고, 뭐 하고… 그런 방식이랑 저랑은 크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
LE: 아무래도 [Gaia]에서 세계를 통틀어서 크게 크게 다루고, 그 안에 정말 거대한 정신과 가치관이 담겨 있고, 그러면서 정말 인간 근원의 것을 건드리다 보니까 그게 곧 앨범에서 다루는 메시지가 하나이자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이 얘기 그 이상으로 이그니토라는 뮤지션이 앞으로 이 세계나 인간에 대해서 또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시겠죠?
근데 제가 얘기했다고 해서 절대 다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고작 해봐야 열 곡의 트랙인데, 제가 놓치고 있고 얘기 못 한 부분들도 엄청 많을 거예요. 근데 1집이나 2집에서는 거대한 외부의 이야기, 개인 외부를 둘러싼 어떤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였다면, 앞으로는 좀 더 내면 안으로 파고들어 가고 싶어요. 안으로 안으로 더 파고들어 가다 보면 더 끝없는 심연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부분에 집중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막연히 구상하고 있는 3집에서는 더 개인의 내부, 또 그 내부로 들어가서 관찰하고 풀어내 보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LE: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Melo, bluc
사진 ㅣ ATO
악마가 "ㅋ 새끼들" 하는 것 같다
가지고 계신 생각이 제 생각과 굉장히 비슷하네요.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탄성이 나오는 속시원한 부분도 있었어요. 곡과 가사 내용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본인이 가진 철학을 얘기하시는데 진짜 좋은 생각을 가지신분 같아요. 이그니토라는 래퍼를 중학교때 동전한닢 Remix에서의 그 잊을수 없는 래핑으로 처음 알게됐는데 1집 이후 긴시간이 흘렀지만 2집도 정말 잘들었습니다. 하시는 음악이 너무 좋습니다. 특히 이번 이번앨범에서 RAIN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이 부분에서 탄성이 나왔습니다. 진짜 너무 제 생각하고 똑같네요.
진짜 너무 제 생각하고 똑같네요.2222
난 내공이 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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