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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ne Lenker - Bright Future를 듣고

TomBoy2024.05.04 07:46조회 수 497추천수 7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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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2

 

 

 

 

 

요사이 인상 깊게 읽었던 책으로 에드워드 애비의 [사막의 고독]이 떠오른다. 저자인 애비는 책의 주 무대가 되는 아치스 준국립공원의 관리원, 화재 감시원, 가이드, 스쿨버스 운전자, 저널리스트, 교사 등으로 일하면서 미국 서부의 오지들을 탐험했고, 생애 마지막 10년간을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환경이라고 하면 녹음이 우거진 산림과 짙푸른 망망대해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사막과 황야의 아름다움을 호소했고 자연의 절경을 파괴하는 관광 산업의 폐해를 역설했다. 출판 직후부터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던 [사막의 고독]은 결국 생태주의 문학의 최고봉에 도달했고, 애비는 급진적 환경주의 운동의 대부가 되어 살아생전 누리지 못했던 영예를 안았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조니 미첼이나 닉 드레이크의 음악을 들으며 모아브 협곡을 거니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많고 많은 음악 중에서 왜 하필 포크였을까. 애비는 문명과 연결되지 않은 황무지 사막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독'에 대해 노래했는데, 고독에 관한 송가에 포크보다 더 적절한 짝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추천인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기억도 희미한 클립 속에서 내게 [사막의 고독]이란 책을 추천해 준 이는 바다 건너 빅 시프라는 포크 밴드에서 활동 중인 애드리안 렌커였기 때문이다.

 

수줍음 많은 천재에게 신비로운 숲속 스튜디오로 초대받은 이방인 예술가들. 싸구려 장르 소설의 띠지 위에 적혀 있을 듯한 이 문구는 사실 싱어송라이터 애드리안 렌커가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주로 매사추세츠 서부에 위치한 오두막, 이번에는 150년 된 건물에 새롭게 지어진 스튜디오 더블 인피니티에서 프로듀서 필립 와인로브를 포함한 최소한의 인원들과 함께 신보 <Bright Future>를 녹음했다. 원래 렌커는 앨범까지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기타와 8트랙 리코더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면 없던 계획도 생겨난다고 말한다. 새 앨범은 그녀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펙트와 디스토션을 배제한 채 최소한의 편곡과 드럼 키트만으로 아름답고도 내밀한 음악을 들려준다. 오프닝 Real House는 모든 것이 크게만 느껴졌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곡이다. 깊고 울림 있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렌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기억, 즉 7살 때 처음으로 봤던 영화, '진짜 집'으로의 이사, 병원에서 그녀를 달래줬던 엄마, 반려견의 죽음 등을 평온하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탈바꿈시킨다. 이 서정성 짙은 오프닝은 렌커의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곡으로서, 단순한 악상을 긴 호흡으로 확장시키는 테크닉과 가장 사적인 경험을 결합해 앨범의 포문을 연다는 점에서 Death with Dignity나 Real Death 같은 넘버들과 비견될 만하다.

 

2년 전 발표됐던 <Dragon New Warm Mountain I Believe In You>의 사운드나 앨범 커버 속 카우보이모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렌커의 최근 관심사는 '컨트리' 음악인 것 같다. 사실 지금 이 순간 대중음악을 선도하고 있는 이 장르는 반세기 전 돌리 파튼과 윌리 넬슨이 했던 음악과 본질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원래 컨트리는 미드웨스트 이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감정에 호소하는 장르였으나 최근의 컨트리 음악에서는 어딘가 쿨한 정취마저 감돈다. 아이러니하게도 렌커는 컨트리의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 도리어 컨트리를 외면받게 만든, 감정에 호소하는 성질을 자신의 앨범 속에 심어 넣는다. 아마도 그 선택이 렌커의 컨트리가 비욘세, 왁사해치, 허레이 포 더 리프 라프 등 누구의 컨트리와도 다르게 들리는 이유일 것이다. 굳이 분류해야 한다면 <Bright Future>에는 체임버 컨트리라는 라벨을 붙여주고 싶다. 앨범을 듣는 동안 마치 내가 숲속 스튜디오의 일원이 되어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신비로운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Fool에서 청자의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반투명한 기타 연주 위로 렌커가 담담하게 고백을 이어갈 때, 그 가냘픈 목소리에서 예상치도 못한 강인함이 뚝뚝 묻어 나올 때, 이 마법 같은 풍경이 꼭 내 방 한가운데서 펼쳐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지난해 렌커는 작곡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잠재력 있는 데모를 반복해서 가다듬으라는 조언을 남겼다. 작년 가을 빅 시프의 이름으로 공개된 Vampire Empire야말로 이런 공예의 산물이라 할만하다. 빅 시프의 오리지널 버전은 절규와 광기를 넘나드는 렌커의 파워풀한 보컬과 기어이 감정을 널뛰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맞물려 있다. 앨범 속에서 이 노래는 연이어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처럼 새 생명을 얻는다. 맥스의 베이스 기타는 밴조와 바이올린으로 대체됐으며 펑키하고 아기자기한 기타 연주는 원곡의 강렬한 여운을 서서히 식혀줄 것이다. <Bright Future>는 분명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뭉쳐서 제작한 빈틈없고 세련된 음반이지만, 동시에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번쩍이지 않는 모든 순간을 투자하는 다큐멘터리처럼 들린다. 이 앨범은 <Songs>와 마찬가지로 테이프를 통해 녹음됐으며 얼푸름히 들려오는 모터 소리는 로파이를 위한 특수효과가 아니다. 나는 이 앨범에 '서부 여행'이라는 가제를 붙여주고 싶다. 이 웨스턴 컨트리 사운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빛바랜 민요처럼 진지하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상을 준다.

 

렌커는 익숙한 것과 기이한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거나 흔한 경험을 흔치 않은 필법으로 담아내는 작가였다. 대체로 탁월했고 간간이 난해했으나, 깊은 사색이 담겨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달라졌다. 나는 엘리엇 스미스의 글을 되돌아보며 "조숙한 아이들이 읽어도 좋을 만한 시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앨범에서 렌커의 글은 조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읽어도 좋을 만한 시집인 것 같다. 그녀는 스티븐 킹이 심드렁하게 강조했던 2가지 원칙을 통달한 듯하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모두가 이해하고자 하는 상태를 그려냈으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작곡)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가사)을 침범하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환경주의 관점, 로맨스와 이별에 대한 오랜 숙고, 유년기와 청춘 시절을 돌아보는 서사 등 주요 테마들은 여전했지만, <Bright Future>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모두 직설 같은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은 놀랍다. "당신 없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맛있는 냄새는 맡아본 적 없어요. 어디인지, 언제인 지도 모를 때부터.", "수영하기 참 좋은 때인 것 같지 않나요? 온 세상에서 물이 전부 사라져버리기 전에." 이 단조로운 문장들이 렌커의 강점, 죽 가냘프면서 강인한 보컬, 섬세한 편곡, 그녀의 음악을 뼛속 깊이 느끼고자 하는 기대감과 조응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상상에 사로잡혔다.

 

희끄무레한 공상 속에서, Ruined를 들으며 모아브 협곡을 거닐었다. "세계의 중심", "하느님의 배꼽", "나의 땅", "붉은 황야" Free Treasure를 들으며 70년 전 애비가 추위로 얼어버린 부츠를 녹이던 아늑한 트레일러를 서성였다. Real House를 들으며 버드나무 잎을 땋아 왕관을 만들던 렌커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애비가 인디고 뱀의 짝찟기 의식을 관음증 환자처럼 지켜보던 트레일러의 문지방에 <Bright Future>를 살며시 올려놓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고독의 아름다움을 위해 노래한 두 시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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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s'와 'Dragon'의 발매를 지켜본 입장에서

이 앨범을 렌커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다만 최고의 글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헛웃음 지을 만한 소리일 테지만,

저는 항상 도스토옢스키나 카뮈보다는

나이폴이나 김승옥이 더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을) 쉽게 설명해 주세요."

이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글로서 부응하는 작자들.

말하자면 나이폴과 김승옥은 이런 류의 대가인 것이죠.

 

이번 앨범에서 렌커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작사에 방점을 찍은 듯합니다.

거기에 기타 연주며 보컬까지

딱히 나무랄 데가 없네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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