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드렁큰 타이거의 음악을 듣고 힙합에 입문했습니다.
공연장에 처음 간 계기도 타이거 JK의 공연이었고요.
그가 커리어를 통해 진보적이거나 완성된 형태의 음악을 선보인 엠씨는 아닐 것입니다만,
이 사실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저에겐 힙합이라는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준 존재이니까요.
저는 타이거 JK가 한국힙합이란 영토의 파이오니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언더그라운드의 상징적 파이오니어가 MC 메타라고 한다면
오버그라운드에선 타이거 JK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힙합은 이미 여러차례 소개되고 대중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쇼미더머니가 부상하기 전까지 이만큼 메인스트림은 아니었죠.
그 기간 동안 미디어에서 대중과 힙합의 접점을 만들고
유지해 온 사람들이 무브먼트 크루였고 그 수장 JK입니다.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드렁큰 타이거는 힙합의 장르적 형식과 내용을 충실히 지키면서
또한 장르음악 뮤지션의 노선을 걸으면서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엠씨일 겁니다.
00년대 초반에 나온 'good life'요.
사랑 노래 가사로 장르를 희석한 것도 아니고,
후렴구에 보컬을 앉힌 것도 아니고,
힙합이니까, 힙합이기에 다룰 수 있는 가사의 다양성과 자의식을 담고 있는 노래죠.
비트 역시 회색빛깔 하나 안 섞인 먹통 비트에요.
여러 뮤지션이 얘기한 적 있지만,
00년대 가요 차트에서 이런 음악이 성공한 건 기념비적 사건입니다.
아마 요즘도 이런 트랙이 뮤직뱅크에서 1위를 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웨거 가사 관습이 형성되지 않았고
타이거 JK의 가사엔 늘 과시 보다 비애가 묻어있습니다만,
그는 랩을 무기로 미디어에서 성취를 이룬 최초의 랩스타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일리네어 보다 훨씬 앞서서요.
그래서 그가 만년까지 겪은 기획사와의 알력과 그로 인한 불우한 사건이 더 안타깝고요.
JK는 다이나믹 듀오와 함께,
뮤지션이 레이블을 설립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한
효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글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팔로알토와 테비, 랍티미스트 같은
뮤지션을 영입했고,
이미 대선배가 된 나이에도 콰이엇 같은 후배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세상에 음악을 알릴 기회를 줬지요.
비록 그 뮤지션들이 정글에서 성과를 낸 건 아니지만요.
교포 출신 래퍼들 대부분이 언어의 한계로 한글 가사를 쓰는 데
실패했던 걸 떠올리면,
부단한 노력 끝에 스스로 가사를 쓰고 나름의 가사적 경지를 확보한 것에선
그가 자신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는 뮤지션이란 걸 알 수 있고요.
한편으로 후배 MC들과 다른 장르 뮤지션을 아울러
JK 만큼 라이브 무대에서 거대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퍼포머를 본 적이 없어요.
JK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보신 분들은 어느정도 공감하실 거에요.
MC가 군중을 움직이는 사람 (Move The Crowd)이라고 할 때,
JK 만큼 MC 다운 MC는 없을 겁니다.
쇼미더머니6 출연, 드렁큰타이거 마지막 앨범 발매와 함께
JK의 소식이 자주 들립니다.
기대감을 표하는 분들이 많지만,
다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제이케이 니가 뭔데 후배들한테 랩을 그만두라 마라 하냐"
"9집 나온다는데 별로 기대도 안 된다"
같은 이야기들요.
저는 힙합을 이루는 정체성 중 '리스펙'이란 낱말을 불러오고 싶습니다.
미국 힙합의 개척자, 혹은 선구자들 디제이 쿨허크나 아프리카 밤바타,
라킴, 프리모, 런 디엠씨 같은 사람들은 지금도 자주 거론되고
'레전드'란 칭호를 받고 있잖아요.
현역 MC들도 그들에게 종종 리스펙을 바치고 있고요.
저는 JK도 이런 '존경'을 받기 부족함이 없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힙합의 역사에서 드렁큰 타이거를 빼면 찢겨나가는 페이지가 꽤 있을 겁니다.
지금껏 많은 무대를 겪었고 많음 래퍼들을 봤고 자기가 이룬 것이 있는데,
후배들과 씬을 향해 몇 마디 충고할 자격이 충분하죠.
오히려 저는 올드 엠씨들이 더 목소리를 내고 한국 힙합 씬의 연결고리를
드러내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지금 씬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확인하고 원점을 돌아볼 수 있을테니까요.
JK 뿐만 아니라, '퇴물'이란 표현이 흥하는 걸 자주 봅니다.
"누구 누구는 퇴물이다", "누구누구 퇴물 아닌가요."
이런 표현은 오래된 것, 빛바랜 것에 대한 멸시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좀 그렇더군요.
요즘 랩 잘하는 래퍼들 정말 많고, 돈 잘 버는 래퍼도 많고,
그들이 화려해보인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JK 같은 시니어들이 맨땅을 닦아온 역사가 있으니까,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건 아닐지.
1세대 언더 뮤지션들이 그래도 언더 힙합의 성지 마스터 플랜에서
힙합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했다면,
JK 같은 1세대 오버 뮤지션은 온갖 크고 작은 행사장,
힙합에 힙자도 들어본 적 없는 아줌마 아저씨 어린 학생들까지
상대하며 활동했거든요.
현재 한국 힙합의 흥행은 쇼미더머니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만,
쇼미더머니가 대중 앞에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기 앞서,
꾸준히 힙합을 알리고 결과물을 만들어낸 래퍼들의 몫도 잊어선 안 되겠죠.
그만큼 불려놓은 게 있으니까 CJ가 눈독을 들여서 상품성을 키운 거죠.
어떻게 보면 쇼미더머니의 존재감과 그들이 만든 논란이 너무 큰 나머지,
쇼미에 열광하는 측이든 비판하는 측이든 부지불식 간에
'쇼미더머니 이전'의 역사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원썬과 비즈니즈, 피타입 같은 1세대 래퍼가 쇼미에 참가자로 나와
후배 래퍼들 앞에서 채점을 받고 불구덩이로 빠지는 게 착잡했던 이유입니다.
힙합은 장르를 넘어 문화이고 라이프스타일 아닙니까.
미국 힙합의 개척자들이 존경받는 것도 그들이 엄청난 명반을 남겼거나
아직도 스킬이 시퍼렇기 때문 만은 아니죠.
그들이 이 문화에서 일군 것들과 퍼트린 것들을 기리는 측면이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스킬과 장르적 측면으로만 예전 뮤지션들을 가늠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내가 즐기고 영향을 얻는 이 문화의 요소들을 한국에 도래시킨 사람들인데,
그만한 존중을 바탕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힙합 대부 같은 묘한 말로 '가짜 레전드'가 범람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정말로 존중해야 할 레전드가 망각되는 것도 아쉽지요.
당연히 JK 혼자 한국 힙합을 만들었단 거 아닙니다.
JK 이전에도 선구자가 있었고, 역사가 있었죠. 이현도, 김진표도 그 중 하나일테고요.
이십년 간의 역사에서 JK 한 명은 오히려 작은 존재겠죠.
그러니까 그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모여 역사를 이루었다는 뜻이죠.
요즘 잘나가는 래퍼들중에 드렁큰타이거 영향을 안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님 말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리스펙받아야 마땅한 사람인데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는 그만큼의 대우를 못받는게 너무 아쉬워요 ㅜㅜ
저도 비슷한 심정으로 쓴 글입니다. 대선배니까 존경해라, 이런 걸 떠나서 스킬적 측면을 중심에 두고 엠씨의 값어치를 평가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제이케이가 스킬이 없는 엠씨란 뜻은 아니고요.
많은 분들이 읽어봤으면 하네요.
TIGER JK는 한국 힙합의 개척자 그 자체예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면서 힙합한 사람이죠. DJ Shine, DJ Jhig 역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하고..
혹시 이 글을 그대로 제 블로그에 게재해도 될까요? 당연히 출처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도 출처남기고 다루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글이 너무 좋아서요..!
블로그 : http://LcmPark.com
유튜브 : http://YouTube.com/c/YoLcmPark
http://lcmpark.com/220973574093
아무리 JK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연차가 얼마 안된 힙합팬일지라도 씬의 레전드는 항상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함
몇 안 되는 진정한 MC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힙합에빠진건 드렁큰타이거였습니다
너무너무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한국힙합의 대명사같은 존재. 엠씨메타 다이나믹듀오 버벌진트 역시 상징성이 짙긴하나, 드렁큰타이거는 한국힙합의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댓들 다신 분들 다들 말씀 감사합니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저도 반갑고 댓글들 잘 읽었습니다.
정말 백번 공감하는 글입니다.. 한국은 힙합뿐만 아니라 음악, 스포츠 등 여러분야에서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것 같아요. 지나간 것은 그냥 지나간 것일뿐이죠. 미국 스포츠에서 레전드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8,90년대의 음악들이 매스컴에서 얼마나 자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지를 생각하면 불과 2010년정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JK를 퇴물취급하는게 얼마나 웃긴일인지 알수있죠. 최신 유행에 대한 강박이 있는건지.. 오히려 그런게 더 촌스러운 짓이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비기 투팍을 모르고 힙합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JK를 모르고 국힙을 좋아한다고 말해선 안됩니다. 쇼미덕에 힙합이 대중화된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돈마니번다고 좋아하고 겉멋 멋있다고 좋아하는 어설픈 펜들은 이 글보고 힙합을 다시 느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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