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만 모두 저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며 정답이 아니니 가볍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플라워 킬링 문]과 [아이리시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해석>
작중 두 번 반복되는 것들이 많다.
주인공 이름은 Ernest인데 이는 Earnest: 성실함, Honest: 정직함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니스트는 두 기질과는 정반대이다.
잔인하게 (총, 폭발)로 죽은 사람들은 그 죽은 장면을 굳이 짧게 인서트 해서라도 모두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작품의 테마인 백인의 원죄를 인정하고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마치 고백하듯이 하나도 빼지 않고 보여준다.
몰리가 귀를 막는 장면이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초반에 어니가 몰리를 태우고 자동차 경주를 볼 때 배기음과 배경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크게 들릴 때이고 두 번째는 쇼우 형제가 애나를 부검한답시고 시체의 머리를 톱으로 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이다. 두 소리 모두 외부자인 백인이 발생시킨다는 공통점이 있고 이는 원주민의 터전에 침투해 삶을 유린하는 백인을 음향으로 표현하며, 원주민들은 귀를 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반복) 이와 대비되게 엄마 리지 Q가 죽고 나서 눈을 뜨면 몸에 칠을 한 원주민 등 조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마중을 나오는 초현실적인 씬에서 다른 인물들은 모두 배제되고 소리도 거세되어 일체의 외부적인 요소가 부재하여 평화로운 안식처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죽어서야 안식을 맞이하는 애처로움.
기독교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며 이는 원죄라는 모티프와 연결된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영화에서 한 캐릭터가 왼쪽에 있고 한 캐릭터가 오른쪽에 있으면 오른쪽의 캐릭터를 강조하거나 그 캐릭터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원칙은 본작에서도 성립한다. 혹은 높이 차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니가 헤일의 변호사한테 설득당할 때를 보면 어니가 왼쪽, 변호사가 오른쪽에 있고 어니는 앉아서 높이가 낮고, 변호사는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어 좌우로도 높이로도 변호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를테면 어니가 몰리를 운전해 줄 때, 밖에 폭풍이 와 둘이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 어니가 몰리를 따라서 교회에 갈 때, 둘의 결혼식에서, 애나의 시신을 확인하러 숲을 가면서 어니가 몰리를 부축해 줄 때처럼 초중반에는 주로 몰리가 프레임의 왼쪽, 어니가 프레임의 오른쪽에 위치한 반면, 애나가 죽자 부족민들이 회의를 열 때, 어니가 구속되고 몰리와 들판에서 재회할 때, 이후 집에서 대화할 때, 셋째 딸 애나의 장례식에서, 공판이 끝나고 면회할 때는 반대로 모두 어니가 왼쪽이고 몰리가 오른쪽이다. 그렇다면 둘의 구도가 바뀌는 시점이 중요할 테다. 헨리 론이 죽고 나서 몰리가 어니에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려달라고 하고 어니는 모르겠다고 하자 몰리가 의심하는 듯 여러 번 물으며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걸어오는 장면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가 뒤집힌다. 이미 모르겠다고 답했지만, 여러 번 물은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몰리의 의심이 커져 확신으로 옮겨가는 지점이며 이를 몰리가 프레임의 오른쪽으로 건너와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다.
미니의 장례식에서 빌 스미스가 어니한테 나가달라고 하는데 초반부터 빌은 심상치 않다. (복선)
부엉이는 리지와 몰리가 쇠약할 때 본다. (반복)
바이런과 애나가 한바탕 싸운 이후에 컷해서 시추기에서 석유가 뿜어져 나오는 게, 마치 백인의 지나친 탐욕이 분출되는 듯이 보이며 변기에서 똥물이 역류하는 듯해 [기생충]이 연상된다.
바이런이 애나를 집에 보내줄 때가 됐다고 그녀를 죽이겠다는 것을 내포한다. 스콜세이지의 전작 [아이리시맨]에서도 살인이 painting house에 비유되듯이 감독은 살인과 집을 연결 짓는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 안전해야 할 보금자리인 집을 살인에 빗댐으로써 그 비극성과 잔혹함을 증폭시킨다.
킹이 어니와 블래키의 보험 사기에 대해 알아내 어니를 견책할 때 어니가 깍지를 끼고 매를 맞는 자세가 예배 볼 때의 자세와 일치한다. 헤일은 뒤로는 살인을 청탁하고서는 앞으로는 후안무치하게 축복을 해준다든지, 곧 주의 곁으로 갈 운명이라고 합리화하는 훈육방식에서도 뒤틀린 그의 종교관이 드러난다. (기독교 모티프)
어니는 극 중 자신의 자녀 중 피부가 하얀 카우보이만 찾는다. 몰리와의 면회에서도 어니가 카우보이가 잘 있냐고 묻자 몰리는 엘리자베스도 잘 있다고 한다. 반면 장례식에서 추모하려 리지의 관짝 위를 걷거나 셋째 딸 애나의 관에 사과를 놓아두는 것은 항상 원주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엘리자베스다.
극 중에서 세 명의 빌(빌 헤일, 빌 스미스, 빌 번스), 두 명의 애나(몰리의 자매와 딸), 두 명의 미니(몰리의 자매와 애나의 태아), 두 명의 헨리(헨리 론, 헨리 그래머)가 나온다. 빌 헤일 말고는 모두 죽는다. (반복)
빌과 리타가 에이시 커비의 폭탄으로 죽는 씬을 극 중 가장 잔혹하게 묘사해 이 끔찍한 참상을 목도하는 어니도 일말의 회한을 느끼지만, 이제는 돌이키기에 너무 늦었다.
주사를 맞은 몰리가 점점 노쇠해지는 것이 마치 백인들에게 고혈을 빨아 먹히는 원주민의 이미지 같다.
워싱턴에서 온 수사관 톰 화이트를 어니가 돌려보낸 후 갑자기 축제에서 카우보이들이 종을 총으로 쏴 시끄러운 숏으로 컷한다. 이는 들킬까 봐 긴박해진 어니의 마음을 표현한다.
킹이 헨리 론의 보험금이 나오지 않자, 화를 내며 페어팩스의 일이니, 돈을 달라고 하고 보험 담당관은 다른 지부의 승인이 나와야 한다고 거부한다. 이는 킹이 페어팩스를 북한 같은 폐쇄된 사회로 만들어 쥐락펴락 원주민을 살해하려 했으나 외부의 워싱턴에서 요원들이 파견 나와 훼방 놓는 상황과 부합한다.
몰리가 애나의 악몽을 꿔서 얼굴이 없다고 슬퍼하고 다시 누울 때 얼굴이 위아래로 뒤집히게 찍어 구도가 불편해 관객이 몰리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계속 죄짓는 어니에게 악취가 난다는 듯이 어니가 몰리에게 주사를 놓을 때, 연방 요원들에게 심문받을 때 총 두 번 파리가 어니에게 달라붙는다. (반복)
킹이 화재 보험금을 노리고 목장에 불을 지르고 이를 어니가 집안에서 바라볼 때 모자이크로 보이는 강렬한 이미지. 한 일꾼의 실루엣이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같다. (기독교 모티프)
헤일은 어니한테는 킹, 대외적으로는 빌, 구속되고 나서는 윌리엄이다. 그의 위상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어니가 때려죽인 사립 탐정 빌 번스도 죽을 때는 이름이 윌리엄이라고 명함에 나온다. 또 다른 빌인 빌 스미스만 죽을 때 빌로 죽는다.
어니가 몰리와 들판에서 재회하고 집에 와서 몰리가 리타의 제안처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간 꿈 얘기를 하면서 어니에게 기회를 주지만 어니는 정신 못 차리고 고문당한 거라 한다. 이때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방 요원들에게 어니가 자신의 선택을 알리는 걸 집 안의 창문을 통해 보여주는데 색감이 아련하다. 마치 둘의 사랑이 여기가 마지막인 듯이 말이다. 실제로 어니가 마지막에 자백하고 몰리가 면회 올 때 어니가 마지막 진실을 털어놓지 못해 그들의 사랑은 위의 집에서의 순간이 마지막이다.
상술하였듯 본작은 캐릭터들이 죽은 경위를 전부 보여주지만, 유독 애나의 죽음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켈시가 증언할 때 플래시백의 형태로 보여주며 그러자 백일해를 앓던 몰리의 셋째 딸 애나도 사망한다. 본작에서의 살인 장면을 감독의 진술이라고 본다면 이 구성은 마치 마지막 진실을 실토하지 못한 어니를 복선처럼 선행하다 어니가 계속 자백을 회피하자 보다 못한 영화가 진실을 다 밝히고 어니에게 심판을 내린다. (복선)
어니가 아무리 자백을 유예하려 시간을 지연시켜도, 결국 마무리를 맞이하는 것이 모든 영화의 숙명이기에 결국 크레딧은 올라가고 어니는 실토해야 한다.
애나의 장례식에 다녀온 어니는 처음으로 헤일의 의지에 반해 증언을 하겠다고 공언한다. 이때 주도권을 쥐고 있는 어니가 살짝 위에서 헤일을 내려다본다. 헤일이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라 금방 잊힌다고 설득할 때 헤일의 얼굴에 철창의 그림자가 마치 십자가처럼 비추어 그가 심판 받아야 한다고 꾸짖는다. 히치콕의 영화 [The Lodger]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기독교 모티프)
<좋았던 장면들>
폭풍이 온다고 둘이 가만히 앉아 있는 정면 숏. 호흡이 길어지는 장면의 리듬이 좋다.
한 여인과 아이가 들판에 기도하듯 손을 들고 있는 뒷모습을 역광으로 찍은 숏이 아름답다. 후에 그 둘이 몰리와 엘리자베스라는 임을 알 수 있다.
리지가 조상님을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
빌이 어니의 신경을 긁으며 진실을 알고 있는 듯이 대화하는 장면의 숨 막히는 긴장감이 훌륭하다. 흡사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압박하는 한스 란다의 위압감이 일품인 [바스터즈]의 오프닝 같다.
킹이 목장에 불 지르고 이를 어니가 집 안에서 보는 씬의 몽환적인 이미지가 강렬하다.
어니가 재판장에서 자백하는 걸 긴 롱테이크 정면 숏으로 찍는다. 어니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그의 표정에서 서서히 죄책감과 후회, 수치심 등 복합적인 감정이 전달되는 너무 훌륭한 씬이다. 본작에는 핸드헬드보다는 스테디숏에 좋은 장면이 많다.
감동적인 엔딩 시퀀스
※ 내용이 길다고 잘려서 총평은 댓글에다 적겠습니다... ㅋㅋㅋㅋ
<영화 총평>
누군가에게는 엔터테인먼트, 누군가에게는 시계를 돌리고픈 염원.
어니가 마지막 진실을 말하지 못해 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고 이후의 프롤로그를 라디오 쇼의 형태로 전달한다. 이때 관중들과 연기자들 모두 백인이며 내용은 사뭇 진지하지만, 연기자들의 톤은 매우 가볍다. 백인들에게는 이 비극이 그저 엔터테인먼트다. 이후 스콜세이지 감독이 직접 나와서 연기자들과는 달리 진중한 톤으로 몰리의 부고 기사를 읽어준다. 진심이 묻어나는 그의 마지막 증언이다. 스콜세이지 감독은 진술을 모두 마쳐 치부를 전부 드러내고 멋있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 역시도 그저 유희거리로 즐기던 백인들 사이에 위치한다. 자신이 이렇게 고해성사하여도 원죄는 각인되어 있다는 -마치 독일인이 나치의 악행을 간직하듯이- 그의 숭고한 태도가 엿보여 감명 깊다. 이후 컷해서 마치 달의 표면처럼 얼룩진 북을 부감 클로즈업으로 꽉 차게 찍고 점점 붐업해서 익스트림 롱숏으로 바뀌며 (오세이지족에게 달은 어머니라는 뜻이고 오세이지족은 재산을 여성이 물려받는 사회이며 영화가 여성의 이야기기도 하다) 주변에는 반 시계로 돌며 노래 부르는 원주민들이 보인다. 추측하건대 현재 실제로 행해지는 의례일 것이다. 백인과는 다르게 그들에게는 삶의 일부다. 반 시계로 도는 원주민들의 움직임이 마치 시계를 돌리고픈 염원처럼 느껴져 더욱 감동적이다. 스콜세이지는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만큼은 원주민들로 채운다.
조금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인상적인 엔딩을 제외한다면 전작인 [아이리시맨]을 답습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픽하고 죽어 생명의 불이 너무도 쉽게 꺼져 무상하다거나 긴 극을 여러 캐릭터를 소개하며 몰입도 넘치게 풀어가는 리듬과 호흡이 그러하다. 또한 [아이리시맨]은 프랭크가 치열하고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남으려 어떻게든 총알은 피했지만, 시간의 비가역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아무리 시간을 지연시켜도 -영화 상영시간을 늘려도- 결국에 언젠가는 닫히고 말 문, 사그라들 생의 불꽃, 올라가 버릴 크레딧의 불가피함을 처연하게 피력하는 영화의 미학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본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니가 돈에 눈이 멀어 거듭 죄를 짓지만, 그가 아무리 자백을 유예해도 결국에 언젠가는 실토해야 함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플라워 킬링 문의 가장 아쉬운 점은 제목인 것 같아요. 원제인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 에서 가장 중요한 뜻을 빼먹고 키워드만 쏙 빼서 번역한 느낌이랄까요. 별도의 특별한 해석이 따로 필요한 영화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한마디만 보태자면 본작은 기독교적인 모티브가 아닌 가톨릭에서 영향을 받은 영화라고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 세지옹이 (독실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이기도 하고 어니스트 역시 성당에 나가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자로 나오니까용. 실제로 당시 오세이지들의 종교가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합쳐진 형태였다고도 하니 어쩔 수 없이 시대적으로 가톨릭적 상징들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저도 제목 바꾼거 진짜 시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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