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1
모호함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 관객들에게 일관된 경험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 그 경험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이것은 현대 예술의 소임이자, 빅 시프 음악의 아이덴티티였다. 2019년, 이 브루클린 밴드를 인디펜던트의 총아로 만들어 준 두 앨범 <U.F.O.F.>와 <Two Hands>에서 이런 창작 이념을 엿볼 수 있다. 그랬던 이들이 인본주의와 건조한 인디 록을 뒤로하고 러닝타임이 장장 80분에 달하는 대작으로 돌아왔다. 이 빼곡히 들어찬 20곡의 수록곡들은 빅 시프의 명운과 애드리안 렌커의 재능이 이음동의임을 시사한다. 확실히 렌커는 전성기에 들어섰다. 통념과는 달리 뮤지션의 전성기는 그 시기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볼륨'과 '지속력'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다. 수프얀 스티븐스, 칸예 웨스트, 아케이드 파이어, 빅보이와 안드레, LCD 사운드시스템의 제임스 머피 등 밀레니얼의 슈퍼스타들은 러닝타임이 영화 1편에 버금가는 음반을 제작하거나, 1장의 앨범에 20곡을 쑤셔 넣거나, 5-6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스펜스를 유지함으로써 보란 듯이 우리의 우려를 종식시켰다. 물론 8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집중력을 유지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앨범으로서 <Dragon New Warm Mountain I Believe In You>의 가치가 증명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나누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나눌 것이 정말 많아요."라고 렌커는 노래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Dragon>은 뉴욕 북부, 토팡가 캐니언, 로키산맥, 애리조나의 투손 등에서 녹음됐다. 히피 문화와 컨트리 음악의 메카에서 제작된 앨범에서는 자연스레 로드무비의 감성이 시종 넘실댄다. 밴드가 뉴욕에서 작업을 하던 스튜디오는 실제로 태풍 때문에 정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미니밴 속 4트랙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 즉석에서 녹음을 이어갔고, 심지어 맥스의 베이스 기타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고달픈 방랑객을 위한 주제가 Certainty이다. 또한 앨범을 듣다 보면 '라스트 왈츠'처럼 시대성이 강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아닌 게 아니라 빅 시프의 시그니처인 간결한 인디 포크부터, 바이올린에 기반을 둔 컨트리와 블루그래스 주법, 애니멀 콜렉티브 앨범에 어울릴법한 왜곡된 터치와 로파이 인디 팝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꼭 잠들기 전 넷플릭스로 포크의 연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빅 시프의 앨범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사는 한층 더 나아간다. <Dragon>은 "죽음,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난 문처럼."이라는 구절로 시작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살고 싶어요."라는 소절로 막을 내린다. 죽음에 관한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전자는 은유를 통해 의미를 환기시키고 확장하는 반면, 후자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안긴다. 타고난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빅 시프의 커리어에서 제일 유쾌한 앨범이 될 것이다. 앨범을 듣는 동안 마늘빵 껍질과 포테이토 크니쉬, 외계인과 꼬마 앤디, 렌커의 할머니, 아기자기한 효과음 등등 온갖 이스터에그들이 우리의 실소를 자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당신은 영원히 살 건가요? 결코 죽지 않고?" '시간'과 '죽음'은 빅 시프의 세계를 떠받치는 2개의 축이다. 세속의 인생관에서 죽음은 시간의 귀결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고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죽음은 상대성이론에 맞먹는 무게감을 갖는다. Time Escaping의 왜곡된 기타와 겹겹이 쌓인 퍼커션은 최면을 걸듯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렌커의 기분 좋은 싱커페이션을 뒷받침한다. 마치 고요한 강이 영원히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한편 많은 사람들은 No Reason에서 흘러나오는 플루트 연주가 앨범에서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말한다. 이 감동적인 아르페지오는 플루리스트이자 캐럴 킹의 협업자인 리처드 하디가 빅 시프의 데모에 맞춰 연주한 것이다. 물론 그 데모는 로키산맥의 망루에서 하디의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렌커에 의해 즉흥으로 쓰였다. 때때로 시간은 아무 '이유 없이' 필연 같은 우연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제목에서부터 장난기가 가득한 Spud Infinity도 빠뜨릴 수 없다. 맷 데이비슨의 바이올린과 렌커의 동생 노아의 죠하프 연주가 하모니를 이루는 컨트리 곡으로서, 이 대책 없는 흥겨움은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렌커의 우주 에세이와 근사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이런 유쾌함은 너무 노골적인 나머지, 나는 앨범의 몇몇 곡들이 코미디/패러디로 분류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애드리안 렌커는 촌스러운 콘셉트와 완고한 물리학 개념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그녀가 노래하는 모든 것을 농담처럼 들리게 하는 버릇이 있다. 고전 프로파간다 영화들이 그 속내가 너무 뚜렷해 비웃음을 샀던 것처럼, 렌커의 가사에는 이제 막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독파한 새내기 영문 학도의 감상문처럼 어수룩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렌커가 작사가로서 가지는 가장 큰 강점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지, 쿨한지, 비탄에 빠졌는지를 어필하는 글은 도처에 산재하지만,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사색해왔는지가 드러나는 글은 좀처럼 만나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앨범의 베스트 트랙 중 하나인 Little Things에서 잘 나타난다. 렌커의 어쿠스틱 기타와 믹의 전자 기타가 끊임없이 맞부딪치고 서로를 보완하며 환각적인 루프를 만들어낸다. 이 곡은 숨 가쁜 그녀의 호흡만큼이나 긴박하게 흘러가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를 여백과 적적미가 있다. 사랑과 상실, 그리움이 담긴 세레나데는 곡의 진행이 그러하듯 정처 없이 허공을 떠다니다 별안간 자취를 감춘다. 렌커는 이 합주를 기념하기 위해 "무한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확실히 그녀는 촌스럽고, 자연과학을 좋아하며, 탁월하다.
드러머이자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제임스는 앨범을 작업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길을 잃지 않고 수십 개의 곡들 사이를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을까?" 다수의 엔지니어들, 4곳의 스튜디오들, 서로 간 충돌하는 미학 등 충족해야 할 기준 또한 까다로웠다. 빅 시프는 우리가 '시퀀스' 혹은 '유기성'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 원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물음에 답을 구한다. "이 앨범은 하나의 바이브가 아니라 플레이리스트에요." 그러니까 이들은 반세기 전 비틀스가 <White Album>을 통해서 구현하려 했던 콘셉트를 관철함으로써 (이번에는) 비판이 아닌 찬사를 얻어낸 것이다. 빅 시프와 <Dragon>에ㅡ그리고 경험칙에ㅡ따르면, 음악팬들을 진정으로 매료시키는 것은 앨범 속 원료들을 하나로 묶는 신비한 점성이 아니라, 모든 수록곡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부추기는 보장된 품질이다. 에이펙스 트윈의 음악에도 그만의 내러티브가 있다고 믿는 쪽은 연속된 전자 신호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리처드 제임스인가, 아니면 우수한 품질에 탄복한 자기 자신인가. 섣부른 짐작이지만 <Dragon New Warm Mountain I Believe In You>는 빅 시프를 표상하는 자화상이 될 것이다. 로드무비와 포크의 역사가 넘실대는 80분간의 다큐멘터리에는 대책 없는 유쾌함, 문학 작품에 비견될만한 노랫말,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재기가 있고, 시대의 재능인 애드리안 렌커와 동료들의 기량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약간의 마법이에요."라고 렌커는 노래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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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몇 년 동안 이 앨범보다 더 뛰어나거나
사람들을 더 열광시킨 앨범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더 여운이 남는 앨범은 없었습니다.
현재의 렌커를 보다 보면
2000년대의 수프얀이나 2010년대 초반의 칸예를 보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빗맞아도 홈런이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긴 한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마조마한 거죠.
그들이 평범한 타자로 변모하는 것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ㅎㅎ
딱 서너 번만 더 이 정도의 앨범을 발매하는
빅 시프와 렌커의 미래를 상상해봅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ostrockgallery&no=536103&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big+thief&page=1
포스트락 갤러리 수도자님의 전곡 해석입니다.
꼭 가사를 보면서 들어보시길!
이거 ㅈㄴ 좋음
이 글 정독하고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독보적인 aoty라고 생각해요 현재까지
진짜 너무 잘 들은 앨범
2022년 1분기 최고의 앨범일 것 같네요
에이드리언은 우리 세대 최고의 송라이터고 제임스의 프로듀싱도 물이 올랐죠 Sparrows는 진짜 천재적
BCNR랑 이거랑 지금까지 압도적인 AOTY 후보인 것 같네요
엘이에서 저만 아는줄 알았는데 인지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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