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chie – Triple Digits [112]
성장하는 아티스트의 변천사를 지켜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고찰은 없다. Chur Bum이란 과도기 전후로 Wolf Haley에서 Tyler Baudelaire로 변신한 Tyler, The Creator. <K.I.D.S.>에서 <Swimming>과 <Circles>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감정선의 변화를 보인 Mac Miller. K-dot – good kid – King Kunta – Duckworth – Mr. Morale에 이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루키가 거장의 위치까지 발돋움하고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넓은 시야로 세상의 갈래들을 관망하는 Kendrick Lamar의 지난 10년. 아티스트들의 자취를 쫓을 때 청자는 저의에 대한 설득력을 얻고 인물의 가치관에 몰입하게 된다. 서사는 캐릭터다. 서사는 정체성이다. 서사는 곧 예술가를 설명하는 인체해부학도가 된다.
애리조나의 힙합 트리오 Injury Reserve의 등장은 어땠는가.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선도 주자 중 하나인 아방가르드 실험자들이라는 이명을 달기 전, 그들의 초기 믹스테잎 <Depth Chart>과 <Cooler Colors>는 명백히 재즈 랩의 형식을 갖춘 엄연한 힙합 앨범이었다. Death Grips의 <Death Grips>와 clipping.의 <Midcity> 등 등장시기부터 갈피를 잡고 조타한 그룹이 있는가하면 Injury Reserve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들에겐 분명한 서사가 있었다. <Live from the Dentist Office>, <Floss>, <Drive It Like It’s Stolen>, <Injury Reserve>까지 점점 휘도 높은 빛깔로 칠해지는 Injury Reserve의 색깔. 커리어를 진전할수록 그들의 아이덴티티는 뚜렷해져만 갔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Stepa J. Groggs를 떠나보내기까지.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트리오가 아니게 되었다. 새로운 앨범은 한층 어두워진 아우라로 짙어진 색채를 내보였고, 이 변화는 한계에 다다른 예술성을 만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Outside”와 “Knees”의 뮤직비디오에서 Stepa를 기리는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듯, 애도의 마음으로 헌정한 <By the Time I Get to Phoenix>를 통해 Injury Reserve는 그들의 마지막 홍염을 불사르며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 역작을 끝으로 Injury Reserve의 서사는 막을 내렸다.
그 후 익히 알려진 대로 RiTchie와 Parker Corey는 더블 싱글 <Double Trio>를 공개하며 By Storm으로의 탈바꿈을 선언했다. 팀을 재결성한 그들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 약 1년 간의 기다림 끝에, By Storm의 활동에 앞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앨범 단위 작업물인 RiTchie의 솔로 프로젝트 <Triple Digits [112]>가 발매되었다.
RiTchie가 내세우는 골자는 비정형화에 기초한다. 흔히 적극적인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노이즈 사운드의 도입으로 정형화된 익스페리멘탈 힙합처럼 고착화된 실험성의 표방과 달리, 활자 그대로 앨범의 전개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허나 <Triple Digits [112]>가 단순한 싱글 모음집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게 신경기관들을 휘어잡는 중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들쑥날쑥한 분위기의 트랙들 속 몇 킬링 트랙을 배열하며 나름의 선형적 구조가 앨범을 관통하는 방식이다. 싱글컷된 트랙 “RiTchie Valens”, “Dizzy”, “Looping”은 물론 “WYTD?!?!”와 “The Thing”까지. 비록 14곡이 수록된 32분 가량의 앨범임에도 잦게 등장하는 특징적 순간들은 등뼈에 접합된 스파크처럼 산재된 자극을 발산한다.
이전까지 Injury Reserve의 커리어가 실험적인 프로덕션의 도입으로 힙합을 덜어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면, RiTchie는 랩 파트의 왜곡과 변칙성을 통해 랩을 프로덕션에 힘을 싣는 도구로 활용한다. 견고하고 단단한 랩을 선보인 과거와는 달리 글리치와 디스토션이 가득한 장치들 위에서 치즈처럼 주욱 늘어나는 끈적하고 눅진한 목소리들이 점철된다. 그간 뼈대 역할을 해준 랩의 모호한 불명확화는 앨범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명백한 단점을 내포하지만, 오히려 이 혼란은 <Triple Digits [112]>에 녹여낸 RiTchie의 앱스트랙트 미학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By the Time I Get to Phoenix>와는 다른 방식의 추상성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범을 정독한 청자라면 느낄 수 있듯, <Triple Digits [112]>를 양껏 즐기기엔 꽤 난이도가 높고 접근성이 낮은 구성을 보인다. 비유하자면 각양각색의 지점토를 물에 한가득 적셔 의류건조기에 넣고 뒤섞어 말린 듯하다. 타이다이나 레지스트 염색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예술보다는 찰흙놀이에 한참 가까워보이는 구조화다. 이를테면 인터넷 밈으로 쓰이는 중장년 층의 등산복 차림 혹은 유치원생들의 자유롭고 무자비한 색칠놀이를 연상케 하는 부조화 색 배합과도 같다. 간혹 <The Life Of Pablo>나 <The Black Album>의 비유기성을 고려할 때에도 필요 수준의 감정 등락 양식의 규율이 잘 지켜졌음을 인지하곤 했다면, RiTchie는 불문율과 다소 거리를 둔 무작위적 널뛰기를 선보인다. 분명 클리셰 이탈은 늘 작은 차이의 관점에서 언제나 기회를 준다. 때문에 누구라도 마르셀 뒤샹 혹은 앤디 워홀을 꿈꿀 수 있겠지만, RiTchie가 제시한 청사진을 이에 견주기엔 아쉬움이 많다.
“Get A Fade”에서 보인 오토튠 위 2분 간의 반복적 피치 시프트는 확실히 지루할 수 있고, “Wings [Intro]”와 “[Credits]”를 포함한 인터루드 형식 트랙들의 존재 의의에 가지는 의문 역시 당연하다. 과거 “Top Picks for You”, “Knees”에서 이룬 단순함과 단순함의 성공적 감합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다. Aminé와 Quelle Chris의 피처링에서 느낀 쾌감 역시 흥미를 돋구는 최소한의 단조로움이 필수불가결이었음을 표하는 방증이 되겠다.
<Triple Digits [112]>은 군데군데에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움이 결코 본작의 무용론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Triple Digits [112]>는 분명히 그간 Injury Reserve에서 볼 수 없던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했다. 경쾌하면서도 스산한 아우라를 뒤섞은 아방가르드 에스테틱은 부정할 수 없는 매력적 감상 포인트로, 청자들의 귀를 사로잡고 By Storm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기까지 확장된다. 다만 더 확실한 방법론의 확립이 필요해보인다. Stepa의 부재가 결코 By Storm의 쇠퇴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분명 번뜩이는 상상력으로 불꽃을 튀겨댄 성공적 기록물을 남겼으니까. 그들에겐 아직 기대할 불씨가 남았다.
찰흙놀이 ㅋㅋㅋ 비유가 적절하네요
이번건 별로였지만 다음앨범 기대하는중
이젠 바이 스톰이지만... 인리 때 폼 안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오 이걸 리뷰해주는규먼
😋😋😋
어디가셨어요 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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