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HYPED:
‘UNHYPED’는 힙합엘이의 언더그라운드 큐레이션 시리즈로, 이 씬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자신만의 위치에서 힘껏 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기회가 없는 그들. 장르, 경력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
본 시리즈를 통해 소개될 아티스트들은 몇 년 안에 더욱 큰 주목받을 재능과 가능성을 지녔다. 그런 그들을 미리 발견하고, ‘하이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언하이프’의 상태의 그들이 만들어낸 솔직하고, 대담한 음악이 더욱 큰 울림을 줄지도 모른다.
UNHYPED: SHINDRUM
‘UNHYPED’에서 열 번째로 소개할 아티스트는 신드럼(SHINDRUM). 수많은 한국의 대중음악가들과 호흡을 맞추며 ‘특급 드럼 세션’으로 자리 잡은 그는 본인의 이름으로도 여러 장의 작품을 발표하며 연주 음악의 진가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개성 넘치는 뮤지션을 한 데 조화한 그의 작품에서는 알앤비/소울, 훵크, 힙합, 그리고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LE: 일단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S: 안녕하세요. 드러머이자 프로듀서인 신이삭(신드럼) 입니다.
LE: 신드럼 님은 사실 음악계에서는 특급 세션으로 더욱 유명한데요. 어떤 밴드나 음악가의 라이브 공연이나 앨범에 참여했는지 살짝 읊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3년도부터 (세션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김바다 님의 밴드 아트오브파티스(Art of Parties)에 있었고, 하반기에는 2AM 아시아 투어를 함께했어요. 이후 바로 군대를 다녀와서 진보 형, 수민, 죠지, 따마, 샘김, 딘 그리고 잔나비의 세션을 맡았죠. 녹음은 블락비(Block B), 월간 윤종신, 그리고 반도네온을 하시는 고상지 님의 앨범에 참여했어요.
LE: 사실 이 정도면 공연을 보는 분들은 한 번쯤 신드럼 님을 무대에서 뵈었을 거 같은데요. 신드럼님이 정말 많은 뮤지션과 라이브 공연을 하셨지만, 요즘에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공연도 못 하시고 음악 작업만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잖아요. 그런 만큼 최근 근황이 어떤지 궁금해요.
사실 저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2020년을 잘 보낸 거 같아요. 물론, 제가 프리랜서이다 보니 수입적인 부분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배달의 민족으로 배달도 하면서 (수입을 충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좋았어요. 오히려 음악도 들을 시간이 많아지고요. 연남동, 합정, 홍대를 자전거 타면서 돌아다닐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돌아다닌 게 이번 앨범의 영감이 되었던 거 같아요. 코로나 때문에 작업도 많이 하고, 연습도 많이 하고, 음악도 많이 들으면서 지냈죠.
LE: 코로나바이러스가 음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셈이네요. SNS를 보니, 본인의 스튜디오로 보이는 신드럼스튜디오를 한창 운영 중이신 것 같더라고요. 이곳은 작업실인 건가요?
네, 지인들하고 함께 쓰는 작업실 겸 연습실 용도로 만들었어요. 저희 드럼 치는 사람들은 집에서 (작업을)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작업실을 필수로 가져야 해요. 그리고 주변 뮤지션들이랑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까, 차라리 좀 더 넓은 제 소유의 작업실을 만들어서 같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LE: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결혼도 하시면서 유부남 뮤지션 대열에 합류하셨어요. 결혼 생활이 신드럼 님의 음악이나 인생에 변화를 준 부분이 있을까요?
결혼은 저에게 좀 더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거 같아요. 제 와이프도 같이 음악을 하는데, 심지어 피아노 전공이라서 화성적인 부분을 많이 알거든요. 반면에 저는 드럼 전공이다 보니, 화성적인 부분에 약한 편이에요. 그런 부족한 부분을 와이프가 채워주는 거 같고, 좋아하는 음악도 서로 비슷해요.
그리고 연애를 할 때는 감정 소모가 많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옛날에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해오면서 소모전이 너무 싫었어요. 일에도 지장이 있고… 와이프랑은 연애를 하면서 애초에 그런 게 없었고, 원래 4~5년 알던 사이로 만나다 보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연애를 시작해서 결혼도 금방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결혼하고 나서는 집에 돌아와서도 같이 음악을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보니. 결혼 생활이 제 음악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거 같아요.
LE: 힙합엘이를 확인하시는 편인가요? 본인에 대한 글이나 음악에 대한 피드백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옛날에 몇 번 본적이 있긴 해요.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다 보니, 다른 사이트와 헷갈렸어요. 그러다가 비앙(Viann) 형이랑 함께 앨범을 냈을 때, 형이 저한테 카톡으로 힙합엘이 링크를 보내줬었거든요. 이런 데 구나 싶어서 가끔 들어갔던 거 같아요. 사실 이번 앨범을 내고 나서는 따로 (제 이름을) 검색하지는 않았는데, 비앙 형이 또 링크를 보내줬어요. (전원 웃음)
LE: 그러고 보니, 드러머 분들이 따로 모이는 커뮤니티 같은 게 있을까요? 뮬이라던가, 큐오넷 같은 느낌으로요.
뮬은 기타 하시는 분들이 많고, 큐오넷은 약간 미디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반면에 드럼 커뮤니티는 많이 없어졌어요. 10년 전만 하더라도 ‘닥터드럼’이라는 다음 카페가 엄청 유명했거든요. 그러다 페이스북이 생기면서 카페 자체가 잘 운영되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제가 했던 실용음악과도 커뮤니티 자체가 잘 되어 있는 게 없고요. (그래서) 지금은 인스타그램에서의 소소한 교류 정도가 다인 것 같아요.
SHINDRUM: 현재
“막연히 꿈꿔왔던 게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죠.”
LE: 신드럼 님이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언제, 어떻게였을까요? 어떤 곡을 접했는지도 궁금했어요.
중학교 때 공부에 시간을 할애하면 할수록, 성적이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그렇다면 공부를 하지 말고, 교회에서 봉사할 겸 취미로 드럼을 배워봐라"라고 제안을 하셨어요. 그래서 열네 살 때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학원에 가서 드럼을 배웠어요.
아무래도 당시에는 헤비메탈을 하는 곳에 다니다 보니, 저 역시 린킨 파크(Linkin Park)나 뮤즈(Muse), 메탈리카(Metallica)를 접했지만 즐겨 듣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교회 형을 통해 알게 된 미국 교포 형이 있었어요. 그 형이 일렉 기타를 들고 와서 같이 한두 달을 지냈는데 저에게 진짜 짱이라면서 존 메이어(John Mayer)의 음악을 들려줬어요. 근데 진짜 짱인 거예요. 그때 존 메이어의 1, 2집을 들으면서 진짜 영향을 많이 받았죠. 1집도 많이 들었지만 [Continuum]을 들으면서 미국의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거 같아요.
https://youtu.be/vykkfDITkQs
LE: 그렇다면 본인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 혹은 주변인으로는 누가 있을까요? 또, 사운드적으로 가장 비슷한 음악을 하고 싶은 뮤지션이 있을까요?
그전에는 실용음악 입시를 준비하면서 많은 아티스트를 접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닥스킴(DOCSKIM)이라는 형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형이 저에게 제이 딜라(J Dilla)의 미공개 음반까지 모든 앨범을 주셨거든요. 그걸 다 들어보면서 그때부터 (제이 딜라에) 꽂히게 되었죠.
그게 22살 때, 김바다 님의 밴드에서 세션을 할 때쯤이었어요. 그전에도 퀘스트러브(Questlove) 같은 드러머의 존재는 알았지만 제이 딜라를 듣고 퀘스트러브, 소울쿼리언스(Soulquarians) 같은 사운드를 제대로 추구하게 된 거 같아요.
LE: 2013년부터 지금의 음악 스타일이 잡힌 거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처럼 드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가다 보니 그렇게 된 건가요?
맞아요. 제가 록 밴드 학원에서 기타도 배우고, 베이스 기타도 배웠는데요. 중3 때 어떤 친구가 드럼을 배우러 학원에 등록했는데, 반년 만에 제가 2년 동안 배웠던 걸 뛰어넘더니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작은 물에서 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로에 있는 서울재즈아카데미 기초반에 등록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17살의 첫 석 달을 학원에서 보내다 보니, 제가 추구하는 음악이 뭔지를 알겠더라고요. 드럼도 더 좋아지고, 열정도 생기고. 그래서 입시까지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입시 반을 등록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LE: 그렇게 입시를 준비하셔서 호원대 실용음악과 드럼 전공을 하게 되셨는데요. 수많은 가수를 배출한 학교이기도 한데, 대학 생활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또 대학에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친구인 거 같아요. 동료들을 많이 얻었어요. 감사하게도 대학 OT 첫날을 가면 신입생들이 이렇게 쭉 앉아 있고, 앞에 무대에 악기별로 한 명씩 올라와서 연주하거든요. 그걸 교수님들이 다 보면서 팀을 만들어 줘요. 이미 교수님들이 입시 할 때부터 어느 정도 팀을 생각하시는 거 같긴 한데, OT 자리에서 멤버도 바꿔보고 하면서 팀을 구성해주세요.
그때 만났던 팀이 저랑 잘 맞았어요. 그때 했던 팀 친구들은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서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열심히 각자 음악을 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우리 학교에 정원영, 한상원 전임 교수님이 계셨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교수님들이 말씀하시는 게 올드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제가 듣는 노래는 좀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분들은 고전적이고, 근본적인 걸 말씀하시거든요. 그때는 (그런 조언들이) 듣기 싫었는데, 지나고 나니 그분들의 말씀과 들려주셨던 음악들이 되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그분들이 없었으면 저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LE: 교수님들이 해 주신 조언 중에서 가장 꽂히는 말씀이 있었나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아닌데, 한상원 교수님은 직접 연주도 보여주셨거든요. 그런 다음 세대를 위한 열정, 그리고 "근본을 모르면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인제야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LE: 그렇다면 신드럼 님이 처음으로 프로로서 섰던 공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김바다 님 공연은 제가 프로로서 무대를 섰다고 하기에는 어렵고요. 제가 프로로서 섰던 무대는 군대를 갔다 오고, 전역한 달에 브이홀에서 진보형과 함께했던 디인터넷(The Internet) 오프닝 공연인 거 같아요.
그게 제가 메인으로 무대를 섰던 공연이었거든요. 그때 닥스킴 형을 통해 진보 형을 만나면서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진보 형 덕분에 진보 형 쪽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어요. 비앙 형, 다울(DAUL) 형을 함께 만나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처음 합주할 때부터 형은 요구하시는 게 제가 생각하는 거랑 매우 달랐어요.
진보 형 같은 경우에는 스네어 톤 같은 경우도 그렇고 좀 더 요구사항을 추상적으로 표현했어요.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고, 라이브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시니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다 보니 연주도 달라지고, 제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으로 할 수 있게 되었던 거 같아요.
LE: 디인터넷의 오프닝 공연을 섰던 해에는 신드럼과 김기타라는 이름으로 첫 EP를 발표하시게 되었어요. 김기타 님하고는 어떻게 팀을 같이 하시게 된 건가요?
김기타, 동민이하고는 군대, 해군 홍보단 시절부터 같이 하게 되었어요. 물론, 대학 시절에는 서로 존재만 알고 있었고 그 후 군대에서는 동민이가 제 맞선임이었어요. 해군 홍보단 밴드는 파트 별로 한 명씩밖에 없고, 피아노나 베이스 파트는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기타는 앰프랑 드럼이 같은 합주실 안에 있었거든요.
동민이가 연주하면 제가 연습을 못 하고, 제가 연습을 하면 동민이가 연습을 못하곤 했어요. 그래도 서로 배려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있다가 보니 여러 이야기를 나눴어요. 군대에 있다 보면 음악 씬에 뒤처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뭔가를 만들고 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앨범까지 내고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LE: 어떻게 보면 EP가 본인의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작품인데, 당시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서 본인의 이름으로 EP를 발표하게 된 건가요?
네, 홍보단에 있으면서 저희는 전국에 섬 행사를 많이 다녔거든요. 그러면서 바다에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았고, 배에서 음악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 것들이 음악에 담기게 되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는 진보 형 만나기 전부터 음악이 다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당시 EP에는 진보 형의 영향이 없을 수는 있지만, EP를 내고 나서부터는 계속 진보 형의 영향을 받게 된 거 같아요.
LE: EP를 낼 때 부담감이나 애로사항 같은 건 없으셨나요?
많았죠. 요즘에는 제 신드럼스튜디오 같은 작업실에서 녹음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홈레코딩을 할 만한 장비가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녹음실에서 녹음을 해야 했는데, 욕심이 들어가다 보니 결과물이 다 이상하더라고요.
이미 녹음을 해놓고 몇십 만원 버리면서까지 다시 녹음한 예도 많았어요. 그리고 제 시각이 너무 좁고 경험도 많이 없다 보니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어려움이었는데,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 같아요.
LE: 2017년에는 ‘월간 신드럼’이란 이름으로 여러 연주자와 함께 합주한 영상을 올리시고, 연말에는 3곡짜리 EP를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하셨던 기획인지 궁금해요.
저는 일단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고, 데드라인이 있는 걸 즐기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곡을 써서 드럼과 풀 밴드 구성이 아닌 파트별로 따로 연주하는 걸 컨셉을 잡아 영상으로 찍게 되었어요. EP는 이것의 최종 결산 느낌이었던 거죠.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제 주변에 잘하는 친구들인데도 실용음악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국에서) 입시 문화가 좀 심각한 편이거든요. 대학을 가기 위해서 자극적인 연주만 해야 하고, 입시 볼 때도 보면 1분 30초 안에 모든 걸 보여줘야 하므로 순간적으로 이목을 끌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 주변에는 그러지 않아서 (입시에는) 몇 번 실패했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음악을 잘해서 아까운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해서 영상도 찍고 그랬는데, 그 친구들이 다 잘되었어요. 감사하게도 [신드럼과 김기타] 앨범을 닥스킴 형이랑 베이스 구본암 형과 함께 활동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실용음악 하시는 분들에게 월간 신드럼 콘텐츠가 노출이 되었어요. 기타 치는 성호 같은 경우에는 대학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저보다도 일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월간 신드럼은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였고, 다음 해에는 진보 형과 함께 현대카드 공연까지 할 수 있게 되었죠.
LE: 어떻게 보면 이런 콘텐츠를 만들게 되신 것도 닥스킴, 진보 님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실용음악을 전공했고, 입시를 준비하다 보니까 많이 갇혀 있었거든요. 그런 틀을 깨 준 게 닥스킴 형이랑, 진보 형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어요. 그때까지는 드럼에만 포커스를 둬서 드럼을 잘 치려고만 했어요. 그러다가 제 파트뿐만 아니라 음악 전체를 생각하게 된 거죠.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LE: 2018년에는 진보 님과 함께 월간 신드럼 프로젝트의 곡들을 공연하시기도 했는데, 이전에 했던 공연과는 어떤 차이점을 느끼셨나요?
일단,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라는 곳에 제 이름이 메인으로 선 게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인 줄로만 생각했거든요. 막연히 꿈꿔왔던 게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죠. 또, 공연을 보러 오신 분들도 진보 형을 보러 온 분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대중한테 저희 연주 음악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어요.
이번 앨범에서 피처링을 많이 쓰게 된 이유도 대중들이 리얼한 악기 연주 음악을 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전에는 대중 탓을 많이 했어요. ‘너희가 음알못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질 높은 음악을 대중들에게 들려주지 못한 연주자들의 탓이 크지 않나 생각이 들었고, 그럴 때 대중에게 연주를 직접 들려줄 수 있게 된 거죠.
LE: 2019년에는 세 곡짜리 싱글 [THE NEXT STEP]을 발표하셨는데, 이 싱글을 작업하기 위해 직접 미국을 갔다 오신 거로 알고 있어요. 음악을 직접 해외에서 작업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나요? 또 미국에서 작업하면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Next Chapter: SHINDRUM
“저 자신에게 솔직한지가 궁금했어요.”
https://youtu.be/DTM-fS2Mowc
LE: 오늘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
Editor
INS
샘킴이 피쳐링한거 좋던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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