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는 누구야?"
록 밴드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는 동료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에게 물었다. 그 앨범은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솔로 앨범이었다. 착각을 일으킨 건 당연했다. 앨범을 들은 많은 사람이 그 녹음을 한 명의 기타리스트의 작품이라고 믿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사실은 정규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녹음은 1937년에 이뤄졌고, 당시에는 CD는커녕 LP도 없었다. 흔히 ‘돌판’이라고 불리는 SP에 담겼다. 크기는 LP만하지만, 훨씬 무거운 SP는 한 면에 3분 남짓의 녹음만 담기는 물리적으로 비효율적인 음반이다. 그 당시는 녹음이라곤 그런 데다가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급기야 이듬해인 1938년에 사망하며 로버트 존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앨범’이라는 걸 만들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LP는 1948년에, CD는 1982년에 출시됐다). 키스 리처드가 접했던 앨범은 로버트 존슨의 죽음 뒤에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
컴필레이션임에도 앨범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연스러웠다. 27세에 요절한 로버트 존슨은 컨트리 블루스(시골 블루스)라고 불렸던 델타 블루스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소절을 반복하고 변형된 소절로 답하는 블루스 AAB 구성을 잘 따랐으며, 목소리와 기타 연주에는 블루스 필(Blues Feel)이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B.B. 킹(B.B. King),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같은 우리시대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하나같이 그런 그를 음악적 영감으로 삼곤 한다.
그가 남긴 것은 27장의 SP가 전부다. 모두 보컬리온 레코즈(Vocalion Records)에서 발매된 것들인데, 남부 시장을 겨냥하고 제작됐었다. 당시 델타 블루스 소비층은 남부 흑인이 전부였다. 이후 델타 블루스를 위시한 블루스가 미국 전역에서 소비됐지만, 이는 5, 60년대의 이야기고, 로버트 존슨의 생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눈독을 들였던 이가 존 해먼드(John Hammond)였다. 그는 1938년 카네기홀에서 열릴 ‘영가에서 스윙까지’라는 흑인음악/재즈 페스티벌에 존 해먼드를 참여시키고자 했다.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베니 굿맨(Benny Goodman) 같은 30년대 스윙 재즈의 거장들부터 블루스맨 빅 조 터너(Big Joe Turner), 스타 가스펠 그룹 골든 게이트 쿼텟(The Golden Gate Quartet)까지, 재즈와 흑인음악계에서 내로라할 연주자들이 대거 출격하는 대형 공연이었다. 그런데 로버트 존슨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참여는 무산됐다. 그의 빈자리는 그 자리에서 재생된 SP 두 장이 대신 했다.
사람들은 스타가 될 기회를 놓치고 세상을 떠난 로버트 존슨을 기억하지 못했다. EP와 LP라는 새로운 음반 규격이 등장하며 비효율적이고 잘 깨지는 SP는 사장됐다. 그 과정에서 로버트 존슨이 남긴 얼마 안 되는 SP도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래도 존 해먼드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60년대 들어 ‘포크 리바이벌’ 열풍이 불자, 존 해먼드는 슬쩍 로버트 존슨을 언급했다. 당시 그가 담당하고 있었던 포크 뮤지션 밥 딜런(Bob Dylan)도 로버트 존슨의 녹음물을 들어보곤 깜짝 놀라며 당장 출시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20년대와 30년대 블루스 음악 발굴이 진행되며 잠들어 있던 로버트 존슨의 음악도 깨어났다. 이 앨범은 [King Of Delta Blues Singers]라는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발매됐다.
로버트 존슨과 얽힌 전설은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30년대 어느 날 밤, 교차로에서 악마로 추정되는 자에게 기타를 내줘 튜닝을 받았는데, 그 이후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이는 괴테(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파우스트>에서 시작된 모티브이며, 19세기 비르투오소 열풍을 이끌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렸던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일화에도 등장한다. 그를 곁에서 지켜봤던 델타 블루스 기타리스트 선 하우스(Son House)는 "기타 연주가 형편없는 녀석이었는데, 잠적하고서 1년 뒤에 엄청난 실력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스타 연주자인 본인조차도 믿기 어려웠는지, 재즈 전문지 <다운비트>에 그가 악마와 거래했다는 증언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기행은 이어졌다. SP를 녹음할 때 벽에 대해 연주를 했다는 증언과 공연 때는 관객을 등지고 연주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이런 기행들은 그가 악마와 거래했다는 의혹에 더욱 불을 지폈다. 녹음 방식이 저음을 차단하고 중간 음역을 증폭하는 코너 로딩(Corner Loading) 기법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가 관객을 등지고 연주한 것은 자신의 주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의심스러운 건 그게 아니다. 그가 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또 하필이면 27세였느냐는 것*이다. 동료 소니 보이 윌리엄슨(Sonny Boy Williamson II)은 그가 연인의 남편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와 거래한 악마가 재능의 담보였던 생명을 앗아갔다는 주장을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아마 로버트 존슨도 그렇게 믿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King Of The Delta Blues]에 수록된 그의 자작곡 "Cross Road Blues(교차로 블루스)"와 "Me And Devil Blues(나와 악마 블루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요절한 음악가 중 27세에 사망한 음악가가 유독 많다. 브라이언 존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커트 코베인(Kurt Cobain),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을 모아 '27클럽' 멤버라고 부른다.
글 | 류희성
이미지 | 안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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