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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재즈x힙합 ⑦ Digable Planets - Reachin' (A New Refutation Of Time And Space)

title: [회원구입불가]greenplaty2017.05.07 20:34추천수 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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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재즈x힙합 ⑦ Digable Planets - Reachin' (A New Refutation Of Time And Space)


* '재즈x힙합'은 재즈 매거진 <월간 재즈피플>과 <힙합엘이>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기획 연재입니다. 본 기사는 <월간 재즈피플> 2017년 5월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1993년은 재즈와 힙합의 결합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재즈를 비중 있게 샘플링한 힙합 그룹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이하 ATCQ)와 힙합과 랩을 재즈와 조화시킨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90년대 초에 뿌린 가능성의 씨앗이 1993년에 들어 발아한 것이었다. 그 결과물의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선배 음악가들이 연 가능성을 구심점에 두고 재즈 뮤지션들과 힙합 뮤지션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1993년에 디거블 플래니츠(Digable Planets)가 발표한 데뷔 앨범은 새롭지 않았다. 프로덕션으로 보면 ATCQ와 데 라 소울(De La Soul)이 추구한 재즈 샘플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ATCQ 멤버 큐팁의 정교한 랩보단 섬세함이 떨어졌다. 하지만 디거블 플래니츠는 ATCQ가 가지지 않았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풋풋하고 신선한 감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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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녹아 든 재즈

 

이스마엘 버틀러(Ismael Butler)는 재즈와 함께 자랐다. 재즈 마니아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수집한 앨범을 자유롭게 듣게 해주기도, 색소폰 레슨 선생님을 붙여주기도 했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아스마엘 버틀러가 재능을 보인 것은 야구였다.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야구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그의 마음은 이미 음악에 가 있었다.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보내야 하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는 결국 중퇴를 하고 음악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힙합 레이블 슬리핑 배드 레코즈(Sleeping Bad Records)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80년대 말, 이스마엘 버틀러는 할머니를 뵈러 필라델피아를 찾았다. 돈이 떨어져서 할머니 댁에 얹혀 지낼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뉴욕을 기반으로 한 힙합 그룹 드레드 포에츠 소사이어티(Dread Poets Society)의 멤버 크렉 어빙(Craig Irving)을 발견했다. 하워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인재였던 그는 교내 라디오 방송 DJ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스마엘 버틀러는 필라델피아의 어느 공연장에서 그런 크렉 어빙을 만났는데, 관심사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뒤, 크렉 어빙은 당시 교제하고 있던 메리 앤 비에라(Mary-Ann Viera)를 아스마엘 버틀러에게 소개했다. 브라질 출생의 그녀는 시도 쓰고 춤도 추며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으며, 랩도 제법 했다. 그녀는 이스마엘 버틀러와도 빠르게 친해졌다.  세 명은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고, 결국디거블 플래니츠라는 팀을 결성했다. 뉴저지에서 함께 지내다가, 힙합의 발원지 뉴욕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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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블 플래니츠

 

뉴욕에 갔다고 해서 힙합 씬에 한 자리가 배정되는 건 아니었다. 90년대 초 뉴욕에는 스타를 꿈꾸는 래퍼들로 가득했다. 타지 출신인 디거블 플래니츠는 아웃사이더였다. 일거리를 구하는 것도 힘겨웠다. 매리 앤 비에라는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그러던 1992, 어느 한 음반사에서 연락이 왔다. 펜듈럼 레코즈(Pendulum Records)라는 작은 음반사였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뉴욕은 힙합의 발원지지만, 90년대 초 힙합의 중심지는 거칠고 통쾌한 가사로 채워진 갱스터 랩을 앞세운 서부로 옮겨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데뷔를 할 수 있을지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이들은 계약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소규모 레이블의 이점도 있었다. 덜 체계적이고 역할 분담이 세분되지 않은 회사 사정은 오히려 이들에게 음악적 자유를 제공했다. 이스마엘 버틀러는 샘플링할 음반을 추렸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의 대부분이 아버지가 듣던 재즈 LP였다. 재즈 음반을 잔뜩 챙겨온 이스마엘 버틀러를 본 크렉 어빙은 반색했다. 크렉 어빙의 어머니도 재즈 애호가였다. 그의 이모는 그에게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와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같은 재즈, 블루스 싱어들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재즈 음악을 샘플링해 힙합 트랙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건 이들에게 짜릿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멤버들은 닉네임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스마엘 버틀러는 버터플라이(Butterfly/ 나비), 크렉 어빙은 두들버그(Doodlebug/ 개미귀신), 메리 앤 비에라는 레이디버그(Ladybug/ 무당벌레)로 새 이름을 지었다. 영어 이름으로 보나 그 의미를 보나 촌스럽기 짝이 없다. 아마 당시에도 그렇게 느껴졌을 거라고 본다. 그럼에도 디거블 플래니츠 멤버들이 이런 이름을 지은 데는 나름의 의도가 있다. 곤충들이 협력하며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존재이고, 흑인 사회도 이러한 지향과 견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터플라이의 양부모는 급진적인 흑인 무장단체인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출신이었다. 그는 부모의 정치관을 이어받았다. 두들버그도 이슬람 국가(Nation of Islam)과 블랙파워(Black Power) 같은 흑인 인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흑인 인권 투쟁을 위해 과격한 음악을 했던 건 아니었다. 미국 서부 힙합 씬에선 거칠고 폭력적인 갱스터 랩을 앞세워 흑인들의 불평등한 삶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디거블 플래니츠는 이런 정신을 공유했지만, 음악에 담진 않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인류애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팀 이름을 디거블 플래니츠로 지은 이유는 인간 하나하나가 빛나는 행성(Planet)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들버그는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이지만, 평화로운 조화에 무지하다고 말하며 혐오와 차별이 가득한 사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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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데뷔

 

디거블 플래니츠는 싱글 "Rebirth Of Slick (Cool Like That)"로 데뷔했다. 여러 샘플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곡이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 재즈 드러머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의 밴드 재즈 메신저스(The Jazz Messengers)가 연주한 "Stretching"이다. 베이시스트 데니스 어윈(Dennis Irwin)이 연주하는 베이스 독주를 이 곡의 도입부에도 사용해서 재즈의 질감을 드러낸다. 다른 점이라면, 베이스 연주 마디의 끝이 뚝뚝 잘리게 샘플링한 뒤 반복하는 식(루핑)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둔탁하고 마감되지 않은 듯한 프레이징 덕분에 이 곡이 샘플링을 거친 힙합 트랙이란 점을 단번에 눈치채게 한다. 이 베이스 연주는 곧 등장하는 다른 악기 소리와 포개지며 곡 전반에 흐른다. 이어서 등장하는 혼 섹션 역시 "Stretching"에서 샘플링했다다만, 재즈를 비중 있게 샘플링한 데에 비해 재즈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나자신들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가사는 거의 없다. "마일스 같이 다양한 스타일의 거물"이란 가사로 자신들이 힙합계의 마일스 데이비스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내거나 "우린 그렇게 재즈를 하지"란 가사 정도가 전부였다.

 


♬ Digable Planets - Rebirth Of Slick (Cool Like That)



디거블 플래니츠의 등장은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다. "Rebirth Of Slick (Cool Like That)"은 서부의 갱스터 랩이 힙합 시장을 휩쓸고 있던 시절에 등장한 재즈 샘플링 기반의 트랙이었다. ATCQ와 데 라 소울 같은 그룹이 그들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디거블 플래니츠는 멤버 구성에서부터달랐다. 힙합 그룹이라면 대개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들로만 이루어졌던 90년대 초에 디거블 플래니츠는 여성 멤버도 포함한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이 곡의 인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랩 차트 1위와 알앤비 차트 6위를 기록했다. 더 나아가 팝 차트에서도 15위에 오를 정도로 대형 히트를 기록했다이 곡이 수록된 앨범 [Reachin' (A New Refutation Of Time And Space)]의 다른 수록곡들도 재즈 샘플링을 기반으로 했다. 허비 행콕(Herbie Hancock/ 건반), 그랜트 그린(Grant Green/ 기타), 로니 리스턴 스미스(Lonnie Liston Smith/ 오르간),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색소폰), 라산 롤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색소폰), 허비 맨(Herbie Mann/ 플루트) 등 수많은 재즈 명인들의 명곡이 힙합 트랙의 재료로 사용됐다. 그중에서 "Escapism (Gettin Free)"에는 허비 행콕이 훵크 시대의 개막을 알린 앨범 [Head Hunters]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이 샘플링됐다.

 


♬ Digable Planets - "Where I'm From"


재즈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알앤비도 샘플링했었다. 본 앨범의 또 다른 수록곡으로 힙합 차트에서 7위라는 높은 순위를 기록한 "Where I’m From"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훵크 밴드 케이시 앤 더 선샤인 밴드(KC & The Sunshine Band)"Ain't Nothin' Wrong"을 메인 샘플로 쓴 곡이다. 국내 힙합을 유심히 들어온 힙합 마니아라면 에픽하이의 "Lady (High Society)""Open M.I.C."에 사용된 샘플과 같은 곡이란 점을 알아챌 것이다. 물론, 디거블 플래니츠는 자신들을 '재즈 그룹'으로 소개할 만큼 재즈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Last Of The Spiddyocks"에선 자신들이 샘플링을 통해 재즈에 새 생명을 선사했음과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색소폰)와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베이스) 같은 선배 재즈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도 한다.

 

나는 재즈를 음반에서 꺼내 다시 살아나게 했어 /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만큼 힙한 건 우리뿐인지도 몰라 / 내 정맥에 주사를 놨을 땐 버드 파커가 된 듯했지 / 세상이 잃어버린 밍거스의 곡 위에 난 랩을 올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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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방향

 

좀처럼 성공을 예측할 수 없었던 [Reachin' (A New Refutation Of Time And Space)]은 대성공으로 마무리됐다. "Rebirth of Slick (Cool Like Dat)"의 대성공과 나머지 두 싱글도 호성적을 냈다. 앨범은 50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에선 최우수 듀오/그룹 랩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인기 그룹이 된 디거블 플래니츠는 투어를 시작했다. 여러 지역을 돌며 새로운 음반을 구입했다. 다양한 음악에 대한 안목이 생기자, 데뷔 앨범에 대한 아쉬움이 생겨났다. 특히, 버터플라이는 동시대에 등장한 힙합 앨범을 의식했다. 1992년에 캘리포니아 출신의 래퍼이자 프로듀서인 닥터 드레(Dr. Dre)가 발표한 지훵크 앨범 [The Chronic]이 자신들의 데뷔 앨범보다 더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993년은 뉴욕 출신의 힙합 그룹 우탱 클랜(Wu-Tang Clan) [Enter The Wu-Tang (36 Chambers)]을 발표한 해다. 이 앨범을 들은 디거블 플래니츠는 정체성이 흔들렸다. 전작이 ATCQ 풍의 재즈 샘플링 기반에 가벼운 느낌을 지향했다면, 새로운 앨범은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같은 동부 힙합 느낌의 하드코어 힙합이 되길 원했다.

 

멤버들의 이름도 다 바뀌었다. 버터블라이는 이쉬(Ish), 두들버그는 씨노(C-Know), 레이디버그는 메카(Mecca)로 개명했다. 그랜트 그린, 헤드헌터스(The Headhunters/ 밴드), 밥 제임스(Bob James/ 건반), 로이 에이어스(Roy Ayers/ 비브라폰), 에디 해리스(Eddie Harris/ 색소폰) 등의 재즈 뮤지션의 곡을 샘플링했지만, 전작에 비하면 그 비중이 크게 준다. 그렇게 발표한 [Blowout Comb]는 재즈 샘플링의 곡과 둔탁한 하드코어 힙합 사운드가 조화를 잘 이루는 수작이다. 하지만 하드코어 힙합 프로덕션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인스트루멘탈이 이들의 음성을 짓눌러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디거블 플래니츠 멤버들은 새로운 사운드에 나름 잘 적응했지만, 이들의 음성은 우탱 클랜 멤버들과는 달리 저돌적이지 못했다. 앨범은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Rebirth Of Slick (Cool Like Dat)"이나 "Where I'm From" 같이 직관적으로 귀에 꽂히는 곡이 부재했던 까닭이다.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탄탄하게 확립되지 못했던 음악적 정체성이 요동쳤다. 결국 1995년에 디거블 플래니츠는 해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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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행보

 

2005년, 디거블 플래니츠는 재결합을 선언하며 [Beyond The Spectrum: The Creamy Spy Chronicles]을 발표했다. 재결합하며 으레 내놓는 정규 앨범이 아니었다. 베스트 앨범이었다. 90년대 초, 중반에 발표한 정규 앨범 두 장에 불과하고, 베스트 앨범을 꾸릴 만큼 히트곡을 배출하지 못했음에도 감행했다. 그 빈 공간을 리믹스 트랙과 미공개 트랙으로 채워야 했다. 의미는 없었다. 음악 마니아들의 시선을 모은 것은 이 앨범이 블루노트 레코즈(Blue Note Records)를 통해 발매됐단 사실 정도였다.

 

하지만 50년대와 60년대 수많은 명반을 쏟아내며 재즈를 규정했던 독립 레이블 블루노트 레코즈의 철학은 산화된 지 오래였다. 메이저 레이블의 산하 레이블로 자리했고, 사실상 블루노트 레코즈의 로고에는 상징성만 남았을 뿐 전통의 연속성은 사라졌었다. 결정적으로 디거블 플래니츠가 블루노트 레코즈에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던 건 당시에 블루노트 레코즈가 펜듈럼 레코즈와 마찬가지로 EMI의 산하 레이블이었기 때문이다. 디거블 플래니츠가 블루노트 레코즈를 통해서 발표한 베스트 앨범 [Beyond The Spectrum: The Creamy Spy Chronicles]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다.

 

디거블 플래니츠는 두 장의 정규 앨범 이후 그룹 활동과 멤버들의 개인 활동 모두에서 실패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음악세계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가지 않았던 결과다. 이런 아쉬움은 그들의 데뷔 앨범의 롤모델이었던 ATCQ의 최근 행보를 보면 더욱 커진다. ATCQ 2016년에 재결성해서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재즈 샘플링을 기반으로 한 90년대 힙합 스타일을 다시 선보였다. 대중과 평단은 90년대 황금기로의 회귀라며 극찬했다. 그간 먼지 쌓인 옛 작품을 대중들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왕년의 스타였음을 주장하는 디거블 플래니츠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글 | 류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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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5.8 10:25
    이 분이 힙합엘이에서 리뷰를 가장 참하게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연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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