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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음악을 평가하는 가치?

title: [회원구입불가]greenplaty2012.10.28 01:11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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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평가하는 가치?

 

"... 뉴에이지는 듣기는 편한데, 클라이맥스와 같은 구조가 별로 없어서... 조금..."

 

얼마 전, 내가 수강하고 있는 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이, 뉴에이지에 대한, 학생의 발표를 다 보고 나서 내뱉은 말씀이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뉴에이지'라는 장르 음악이 듣기는 괜찮지만, 음악적인 구조가 뚜렷하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는 듯한 뉘앙스는, 수강생의 자격인 나로써는 조금은 가소롭겠지만, 듣기 거북한 것이었다. 듣기에는 좋지만, 특정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그 가치가 폄하된다?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음악을 평가할 때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평가하는 기준이 우선시 되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두 번째, 음악을 평가할 때 장르와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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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음악을 평가하는 기준들과 음악성이고 예술성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음악의 뿌리를 찾아가보자. 대중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블루스는 정체성은 흑인들의 음악지만, 그 태생은 '노동가'에 있다.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강제 노역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불렀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등장한 로큰롤이라든지 소울 등의 음악 사람들에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을 주기 위해서 발전했고, 그것의 핵심은 청취의 즐거움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중음악으로 발전했던 재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는 비밥은 청자들보다는 연주자가 연주하는 즉시 연주 자체에서 쾌감을 얻기 위함이 핵심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이 또한 역시 좋은 평가를 의식한 연주가 아닌, 연주자가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음악은 애초에 사람들이 즐기고, 공감하고, 슬픔을 함께 덜어내는 등의 삶의 일부였고, 음악성과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그것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물론, 음악을 듣고 즉각적으로 '좋다'라든지 '나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평가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이런저런 기준과 대조해보며 점수 매기기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음악의 시초와 함께한 것이 아닌, 음악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후 자연스레 뒤따른 것이다. 그런데, 평가가 즐김에 선행된다면, 이건 순서가 뒤바뀌는 상황이 않은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한 보 물러나 너그럽게 보더라도, 평가가 청취의 기준이 되어 음악 감상의 즐거움이 제한받는다면 그건 음악의 취지를 상실하는 것이 된다.

 

그럼 이제 다시 '뉴에이지 사건'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의문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뉴에이지는 뉴에이지 나름대로 장르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뉴에이지는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연주로 청자를 감상과 명상에 빠지게끔 하며 자연스레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흔히 뉴에이지는 기능성 음악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여기에 클라이맥스가 적용이 된다면? 그렇게 되면 뉴에이지는 청자에게 긴장감을 유발하게 되며, 자연스레 뉴에이지라는 장르가 갖는 특수성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마치, "메시(Messi)는 드리블 기술과 주력은 좋은데, 키가 문제야. 190센티 정도만 되었으면 완벽했을 텐데..."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물론, 음악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 음악과 음반이라는 결과물이 완성되기까지 소요되는 돈, 시간과 노력에 대한 가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그 중에서, '노력'은 음악의 완성도를 어느 정도 반영하기에 더욱 그렇다. 치밀한 구성과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음반이, 오늘 아침밥 먹기 전에 쓴 16마디 가사와 미디로 5분만에 찍어낸 단순한 드럼 루프에 올려진 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모든 것을 헌신한 음악가에 대한 예우가 아닐 것이다. 또한 비평가는 어느 정도의 틀과 객관성을 갖고 음악을 평가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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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은 주관적인 개체이기에 개개인이 음악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감흥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한테 듣기 좋은 음악이 명곡이고, 그런 것들이 많이 담긴 앨범은 자신만의 명반이다. 남들이 '클래식'이라 극찬한다고 해서 내키지 않음에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억누르고 찬양할 필요도 없으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남들이 졸작이라고 한다고 해서 숨길 필요도 없다. 만약 그런다면 그건 가식이다. 음악의 청취에 자연스레 동반되는 평가가 아닌, 일정한 기준에 비교와 대조해보는 평가가 음악을 순수하게 즐기는 것에 선행되어 청취의 즐거움을 방해한다면, 음악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리는 것이 된다. 앞서 말하기도 했지만 음악은 즐기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클래식을 이해하려 시간을 할애할 바에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그리고, 곡의 음악성과 예술성을 따지기 위해 청취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음악을 듣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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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10.30 22:35
    아 정말 엘이 사랑해요..
  • 10.31 23:30
    참 좋은 글이네요. 음악 감상의 기준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잘 읽고 갑니다.
  • 11.2 23:11
    교수님을 능가하는 학생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글 잘읽다 갑니다!
  • 11.4 09:35
    이 글을 그 교수에게!!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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