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망디의 ‘패션 부적응자’ - ⑤패션 아닌 패션 영화 4선
망디의 ‘패션 부적응자’
‘정석’이라는 말은 나에게 항상 불편한 존재였다.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에 나온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 대학에서 시작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션에 관해서도 그렇다. 천편일률적인 것이 싫었다.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 글은 ‘패션’에 대해 삐딱하게 보는 내 시선이 담겨있다. 결코 부정적인 면이 화두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틀에 박힌 패션관을 조금은 '틀어서' 보자는 취지이다. 그게 또 재밌기도 하고. 우리는 어쩌면 비정상 안에서 정상인으로 잘 버텨내며, 오히려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얻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이런 부적응자들의 지옥에서 작은 공감을 갈구하는 소심한 끄적임이다.
*한 달에 한 번 연재될 연재물임을 알려드립니다.
기대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의외성은 되려 호감 또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정갈한 슈트 차림의 커리어 맨이 퇴근 후 그림을 그린다든지, 공부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사람에게서 누구보다 뛰어난 학문적 지식을 발견한다든지 말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되려 존재하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 그것은 남모를 희열을 가져온다.
영화는 나에게 삶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지루할 것 같았던 영화의 등장인물이 트렌디한 아이템을 걸치고 나오며, 그에 수반되는 독특한 시퀀스 구성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매혹적이다. 이렇게 드라마 혹은 영화에 내가 선호하는 ‘패션’이 등장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패션은 영화의 전체적인 무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의 말과 행동만큼 그들이 처한 상황, 자신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직접 그려낸다. 그만큼 ‘패션’은 영화의 중요한 요소다. 패션 영화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패셔너블하며 스타일리시한 잘 빠진 영화 4편을 준비했다. 패션 하우스의 역사와 전통을 그려낸 ‘패션 다큐’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이렇듯 주관적인 취향이 다분하고, 그러기에 더욱 추천하는 패션 아닌 패션 영화 4선이다.
1. 위대한 개츠비 (2013)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1925년 작 <위대한 개츠비>는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 등을 연출한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위대한 개츠비>는 바즈 루어만 다운 영화이다. 1920년대 뉴욕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제이 지(Jay Z)가 프로듀싱한 힙합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장면마다의 영상미는 화려하고 우아하다. 닉 캐러웨이 역의 토비 맥과이어(Tobey Maguire)와 개츠비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처음 대면하는 저택 파티 씬은 손에 꼽는 명장면 중의 하나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도덕이 해이해지고 불법이 난무하며 주가는 끝없이 치솟았던 1922년 뉴욕에서 역사상 가장 크고 화려한 부자들이 세상에서 펼치는 사랑의 환상과 배신, 타락해버린 꿈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그려내며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관전 포인트에 패션이 빠질 수 없다. ‘프라다(PRADA)’와 ‘미우미우(Miu Miu)’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가 의상을 맡았는데, 1920년대 복식(의생활과 관련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미에 대한 동경과 바람이 복장과 장신구에 투영되어 발전된 것을 말함)을 토대로 새롭게 창조된 의상들은 화려함을 대표한다. 이미 1996년도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바즈 루어만과 작업한 경험이 있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바즈 루어만의 아내이자 유명한 커스튬 디자이너 캐서린 마틴(Catherine Martin)과 손을 잡고 지난 20년 동안 프라다가 선보인 런웨이 룩에서 영감을 얻어 1920년대의 룩을 현대적으로 재현했다. 랄프 로렌(Ralph Lauren)이 처음 선보인, 기념비적인 의상 중 하나인 핑크색 슈트를 변용한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의 슈트, 데이지 역의 캐리 멀리건(Carey Hannah Mulligan)의 프라다 샹들리에 드레스는 영화의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더욱 북돋는다. 또한, 모엣 샹동(Moet&Chandon), 티파니(Tiffany & Co.) 등의 브랜드가 참여하기도 하였다고. 디카프리오가 입은 슈트들은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위대한 개츠비 라인으로 따로 론칭되기도 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의 아픔 그리고 순수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게 생각되는 순간, 영화의 의상들이 그러한 비극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는듯하다.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옛 여인을 그리워하는 개츠비의 눈빛이 아직도 아련하다.
2. 클루리스 (1995)
최고의 미국 하이틴 영화이자 최고의 하이틴 로맨스 코미디로 불리는 <클루리스>는 알리시아 실버스톤(Alicia Silverstone)의 미모로 많은 회자가 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 고교생들의 생기발랄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고 재미있게 묘사했다. 10대들의 자유분방하고 당찬 학창 생활, 러브 스토리, 해프닝을 정통 드라마형식으로 영상에 담았다. 할리우드 최고의 아이돌 스타로 떠올랐던 알리시아 실버스턴의 매력이 돋보인다. 귀엽고 당돌한 신세대 하이틴 역을 맛깔스럽게 표현해내는데, 극 중 이름인 세어 호로위츠가 입고 나온 의상 또한 눈에 띈다.
미국 드라마인 <가십걸(2007)>이 뉴욕 맨해튼 요조숙녀들의 프레피 룩을 보여줬다면 <클루리스>는 LA 베벌리힐스 상류층 자녀들의 프레피 룩을 보여준다. 아메리칸 영캐주얼을 함축시켜놓았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영화에서 주인공 세어 호로위츠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미리 코디네이션을 하는 등 패션에 관심이 많다. 집을 가득 채운 옷을 보면서도 옷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엄청난 수의 옷들을 착용하며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말괄량이 소녀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프레피 룩의 정석인 체크 패턴부터 시작하여 크롭 탑(Crop Top), 하이 웨이스트(High Waist), 베레모, 시스루 등 지금 현재 입고 다녀도 무방한 스타일리시한 룩들을 보여준다. 전반부는 주인공 세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돈이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깨달음을 얻게 되고 패션 또한 점차 전보다 여성스럽게 변화한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의 하이틴 영화이며 기분 좋은 느낌이 가득하다. 패션에 관심 있는 여성분들이라면 꼭 챙겨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이 영화에 나오지 않은 옷은 없다!
3. 플립 (2010)
나는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이 있다.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짓고 나의 부족했던 점을 되돌려 상기하며 자책에 빠지곤 한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애틋함을 일깨워준다. 그렇기에 따뜻하며 친근하다.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소년과 소녀의 좌충우돌 첫사랑을 그려냈다. 무뚝뚝한 브라이스 역의 캘런 맥오리피(Callan McAuliffe)는 적극적이고 생각 깊은 매들린 캐롤(Madeline Carroll)에게 점점 빠지게 되는데, 영화는 브라이스의 시선과 줄리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교차한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지점은 두 곳이다. 첫째, 영상의 색감과 분위기(독특한 앵글도 한몫한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패션. 플립의 시대적 배경은 60년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의상은 체크와 스트라이프 패턴이 주를 이루며, 셔츠와 와이드팬츠, 빈티지한 원피스와 긴 기장의 치마들 그리고 로퍼가 자주 등장한다. 브라이스의 잘생긴 외모에 포마드 머리, 그리고 귀여운 슈트 룩은 남자도 미소 짓게 한다. 명품 브랜드의 옷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편안한 무드의 룩들은 영화에 더욱 집중하게 하면서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더욱 예쁘게 부각한다. 흔히 말하는 '남친 룩', '여친 룩'의 정석이다. 영화를 감싸고 있는 자연광 무드는 마음마저 따뜻해지는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놓쳐선 안 될 영화. 잠시 옛 생각에 잠기는데, 서툴렀던 나의 모습과 닮은 브라이스를 보며 한쪽 가슴이 시린다. 서툰 첫사랑. 난 줄리 베이커가 좋았다!
4. 싱글 맨 (2009)
대학교수 조지 역의 콜린 퍼스(Colin Firth)는 오랜된 애인의 죽음에 힘들어한다. <싱글 맨>은 삶의 이유를 상실했던 한 남자가 마침내 자살하기로 결심한 하루를 그려낸 영화다. <싱글 맨>은 동성애가 주인공 조지의 '상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비단 그 상대가 여성이라도, 가족이었더라도 상실의 슬픔은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의 특성상, 동성애가 갖는 특성상 그 상실의 슬픔은 다른 무엇을 뛰어넘을 것이다. <싱글 맨>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톰 포드의 재능은 무섭다.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을 거쳐 구찌(Gucci)를 훌륭하게 지휘했던 그가 영화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싱글 맨>은 톰 포드의 감독 데뷔작이다. 사실 패션 영화로 완전하게 분리되진 않지만, 영화 <싱글 맨> 은 감독의 취향 때문인지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패셔너블하다. 패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톰 포드이기에 미적 안목과 취향, 미장센을 완성하는 힘은 본능적으로 타고난 듯하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특정 장면을 꼽는 일이 힘들 만큼 모든 장면이 패션 화보처럼 근사했다. 패션 필름을 길게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잔잔하게 흘러가는 애틋한 이야기와 배우들의 열연(조지 역을 맡은 콜린 퍼스는 놀라운 내면 연기로 2009년 제66회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까지 곁들여져 더없이 꽉 찬 느낌이었다. 영화 속 의상은 전혀 튀지 않았다. 우울함에서 생기가 감도는 색감의 변화 또한 독특했다(모노톤의 조지의 색감과 다른 장치들의 원색적 색감이 대비를 이룬다).
톰 포드가 직접 고른 톰 포드 슈트는 블랙과 화이트 색상의 조합으로 뿔테 안경, 슬림한 넥타이, 세밀한 커프스 링크, 포켓치프로 절제된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중 뿔테 안경은 그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으로 가격을 책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년 동안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콘서트 투어 의상, 화보를 담당한 아리안느 필립스(Arianne Phillips)가 참여함으로 패션에 더 힘을 싣는다. 그녀는 2005년 <앙코르>의 의상감독으로 참여하며 제78회 미국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았다, (최근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로 제43회 새턴 어워즈 최우수 의상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싱글 맨> 이후 7년 만에 돌아온 톰 포드의 <녹터멀 애니멀스(2017)>는 벌써 역작의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재능의 끝은 어디인가. 톰 포드의 입이 떡 벌어지는 ‘미장센’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극장을 꼭 찾으시길. 포스터의 글귀처럼 정말 위험하지만 매혹적이다.
전 상당히 로맨틱해요. 저 역시 거의 매일 고립감을 느껴요. 제 작품 중 가장 개인적인 거에요. 패션은 금방 사라지지만 영화는 영원해요. 관객이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 더 귀 기울여야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라고 생각을 한다면 제 영화는 의미가 있겠죠.” - 톰 포드 영화 인터뷰 중
글 l MANG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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